브론테 1남 5녀 중 막내 앤 브론테의 유일한 소설 [아그네스 그레이].
2009년 9월에 낭독녹음 시작해 두어달 걸려 녹음 완성한 작품이다.
하루종일 집에서 8시간에 걸쳐, 녹음해뒀던 씨디를 들었다. 그땐 1차 편집을 녹음봉사자가 하지 않고
편집봉사자가 하던 때라 내가 특별히(외부 배포는 저작권법 위반) 씨디에 따로 담아주기를 부탁했었다.
자체 모니터링 차원에서.
오늘 이걸 듣고 싶었던 건, 수수하고 솔직하고 고결한 감정을 지닌 아그네스의 이야기가 다시 듣고 싶었던 거다.
당시, (기독교 신자) 어느 회원의 신청도서로 녹음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 부끄럽게도 앤 브론테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언니, 샬롯과 에밀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앤의 작품은 "작가가 울지 않으면 독자도 울지 않는다"라는
명구절을 남긴 당시 대단한 작가 조지 무어의 호평(1924년)에 힘입어 사후 70년 정도의 오랜 세월이 지나 입소문을 타게 된다.
전혀 수사나 은유나 문학적 장치 같은 것 없이, "모슬린 드레스 처럼 수수하고 깨끗한" 이 소설은
(새삼 다시 들어보니) 내 목소리와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대사도 많은데, 남자 목소리 부분은 좀 덜 굵었지만
20대 초반 가늘고 수줍은 듯한 젊은 여자 목소리는 그런대로 좋았고 전체적으로 나긋나긋 속도도 적절한 것 같다.
물론 마이크 앞에서 가다듬어 1인칭 화자(아그네스)가 이끄는 소설의 분위기에 맞게 설정한 목소리이긴 하다.ㅎㅎ
역자후기와 앤 브론테 연보까지 8시간 동안 단숨에 들으며 (중간에 잠시 졸기도 했지만)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어제 하루종일 나를 볶아댄 모종의 폭풍이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어떠한 내면의 역경이나 격정 - 그것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 이란 것도 해를 가리고 있는 먹구름,
당장 시원한 빗줄기 퍼부을 것 같은 먹구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문장은 "모든 참된 역사에는 교훈이 담겨 있다." 로 시작해서 웨스턴 목사의 진중한 청혼에 화답하는
아그네스의 간결한 말로 맺는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십니까? " - "네."
성경 구절을 자주 인용하고 기독교적 사랑의 실천을 내면화하려는 이 자전적 소설 속 후반에서
3년간 두 번의 가정교사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아그네스는 외로움과 고난이 찾아올 때면 시를 찾는다고 말한다.
훌륭한 시를 읽는 것도 좋지만 시를 직접 쓰는 것으로. 그러면서 짧은 시를 한 편 쓰기도 한다.
실제로 앤 브론테는 언니들과 함께 필명으로 시집 [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냈는데
단 2부밖에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앤의 시는 찾아볼 수 없던데 에밀리 브론테의 시는 알려진 것들이 있다.
저 시집에도 에밀리는 21편의 시를 실었고 [폭풍의 언덕]은 그녀의 유일한 소설이다.
[아그네스 그레이]는 <제인 에어>처럼 가정교사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세 부류의 여성 계급을 보여준다.
당시 가정교사는 중류에 해당하는 정도. 담담하면서도 재치있게 세태를 드러내며 위선적인 사람들과 위선적인
결혼에 대해 낮게 성토한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이름이 붙은 장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대하는 교구목사의
냉소와 위선을 꼬집기도 한다.
서른살에 폐결핵으로 죽은 앤보다 앞서 에밀리는 한 번도 밖을 나가보지 않은 집의 소파에서 죽어가는데
언니 샬롯은 그녀 곁에 언덕에 핀 보라색 헤더꽃을 꺾어다 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지금은 좋은 약도 있고 예방주사도 있지만 옛날에는 폐결핵으로 죽은 경우가 많으니(특히 작가들),
이 병에 걸렸었던 나는 또 잠시 애상에 젖는다. 아직도 그림처럼 생생한 기억이지만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실제로 샬롯은 셋째, 에밀리는 넷째 자녀다. 그 위로 언니 둘은 일찍 죽었고 유일한 아들은 앤이 죽기 전 해인가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앤이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남은 남매들의 가난한 삶과 영혼이 어떠했을까.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은 여러 차례 영화화 되었는데 <아그네스 그레이>도 영화로 나온다면 괜찮을 것 같다.
작년에 본 영화 '제인에어'와 얼마 전 본 '폭풍의언덕'처럼 신선한 배우가 맡으면 좋을 듯.
아그네스의 말로는 자신이 예쁘지도 않고 남들이 보기엔 무뚝뚝하고 차갑고 여성스럽지 못하고, 뭐 그렇다고 하지만
허영과 욕심에 찬 다른 여성들과는 다른 아그네스에게 마음을 사로잡힌 웨스턴 목사는 그녀에게 말한다.
좋은 배필을 고르는 건 쉽지 않고, 자신은 배필을 고를 때 무척 까다롭다고...
웨스턴도 외모로는 별로로 묘사되는데 아그네스는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 로잘리에게
"저렇게 생긴 타입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도 나온다.
천생연분인 거지. 내면의 진가를 보는 것이다, 두 사람.
화가, 앤의 오빠가 그린 초상. 자신의 모습은 그렸다가 지웠다고 한다.
이승의 삶을 스스로 지운 것처럼, 화폭 안, 지워진 자리가 선연하다.
왼쪽부터 앤, 에밀리, 샬롯. 입매가 꽤 고집스러워 보인다.
대상의 영혼을 담아내는 초상, 그 안에는 대상을 그리는 이의 연민과 고뇌가 함께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