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금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락이 잘 닿지 않는 친구가 하나 있다.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실패를 겪고 지금은 전문직에 종사하며 프리랜서로 돈 잘 벌고 살고 있다. 2년 전인가, 마지막 통화를 할 때, 나이는 먹어가고 아이는 없고 홀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아주 약간의 두려움 같은 걸 내비치긴 했다. 그치만 친구도 알고 있었듯이 본질적으로 그 친구는 결혼제도에 잘 맞지 않는 성향을 띄고 있었다. 친구도 두 번의 실패를 겪고 보니 스스로 그런 점을 인정하고 다시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 걸려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사귀는 연하의 남성은 있었는데 결혼 제안을 할 때마다 핑계를 대며 물리고 있다고 했다.

 그 친구의 첫남편은 동갑 과커플이었는데 순정파 그 남자의 성은 모氏였다. 졸업을 할 무렵 본격적으로 결혼 말이 오고가고 하던 어느 날, 순진한 내 친구가 진지한 얼굴로 하던 말이 생각난다. 나는 속으로 깜짝이야~ 했다. 서방! 나도 친구도 그런 낱말을 가까이서 듣기로는 처음이었던지라.

 하루는 친구가 그 남자를 집에 초대하여 식구들 모두 인사를 했나본데 그 자리에서 친구 어머니가 ‘某 서방’이라고 부르며 대우했고 나머지 식구들에게도 이제부터 모 서방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언질을 놓으셨나 보다. 그러면서 친구는 “우리 엄마가 ‘모 서방’ 그러니까 되게 듣기 좋더라. 글쎄 우리 모 서방이 ~ 어쩌구저쩌구~ ”

 “야, 너는 모 서방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이~.”

 “아니, 울엄마가 다들 그렇게 불러야 된다던데...”


2.

 남편의 남동생에게 부르는 말은 두 가지다. 그 남동생이 미혼이면 도련님(되련님, 되렴), 결혼을 하고나서부터는 ‘서방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서방님’ 알러지가 있는 터라 그렇게 부르질 못한다. 남편의 두 남동생은 모두 결혼하여 아이들도 있지만 난 서방님이라고 못 부르고 아이들이 부르는 식으로 ‘삼촌’을 빌린다. 예법에 맞지 않다는 건 알지만 ‘서방님’은 어째 간질간질하다. 심하게 윤색된 사극 탓인지, 드라마 속 ‘서방질한다’는 말 때문인지.. 아무튼 무슨 부작용인 것만은 확실한데, 입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3.

 친정부모님에게는 박 서방이 둘이다. 큰사위, 작은사위 모두 박氏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는 큰 박 서방, 작은 박 서방, 이렇게 부른다.

 

 명절이면 그동안 일에 바빠 처가 나들이를 자주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박 서방들’이 심히 힘든 때이기도 하다. 여자들만 명절증후군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박 서방들(김 서방, 이 서방, 정 서방, 마 서방 모두모두 포함)도 못지않게 마음 쓰이는 구석이 많다. 먼 거리에 꽉 막히는 거리를 뚫고 안전운행 해서 가야지, 물질적으로도 섭섭치 않게 써야지, 동서들끼리 모여앉아 있으면 이래저래 감정싸움도 안 보이게 하면서 가오도 세워야지. 더군다나 처가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놀아줘야지.

 여기서 옆지기 자랑 살짝 하자면, 친정부모님께는 큰 박 서방인데 진심으로 앞서서 마음 써주고 챙겨드리고 하니까 살갑지 못한 맏딸로서 참 고맙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면서 제일 원하는 건 당신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인데 무엇보다 '큰 박 서방'은 그걸 잘 한다. 살아오시면서 아무에게도 말 못한 사연들, 남에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개인적이라 공감을 얻지도 못할 것 같은 이야기, 생각할수록 회한밖에 안 드는 슬픈 이야기들을 어디다 내뱉고는 싶었을텐데..

 “이런 이야기를 그저 들어만 줘도 좋아. 밖에 나가면 누가 뭐 내 얘길 구구절절 듣고 있으려고 하나?  난 이렇게 말만 할 수 있어도 한이 풀어지는 것 같다구.”

 큰 박 서방은 오래 듣고 앉아 있었다. 아빠는 다음에 또 할 요량으로 아쉬운 듯 북쪽 고향이야기를 남겨두시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씨암탉도 한 번 못 잡아준 처가지만 그저 "박서방 고맙네", 그렇게 속으로 말씀하시는 것 다 알 거라 믿는다.

 

 사위를 두고 백년손님이라고 하는 건 그만큼 귀히 대접하는 말이고, 동시에 그만큼 딸을 잘 대해달라는 바람이기도 하였을 터, ‘서방’이라는 호칭을 다시 찾아보았다.

‘서방’은 순 우리말이다.

 

우리의 모든 '박 서방들' 다 수고하셨습니다! (찔리는 사람도 있으려나)



4. '우리 말글 바로 쓰기'에서 찾아 옮겨봅니다.



옛날에 “서방맞다·서방하다(시집가다)·서방맞히다(시집보내다)”라고 했다.
지금도 함경도에서는 “서방재(신랑)·서방가다(장가가다)·서방보내다(장가들이다)”라고 한다.
여기에 쓰인 ‘서방’이란 말은 순우리말이다. 그런데도 우리네 국어사전들은 기어이 ‘서방’에다가 ‘書房’이라는 한자말을 달아놓았다. “남편은 일은 안 하고 책방에서 글이나 읽는 사람이어서”란다.


사위를 부를 때 ‘김 서방, 박 서방!’이라고 한다. 호사가들은 그 ‘서방’에다가 ‘西房’이라는 한자를 붙이기도 한다. “사위를 서쪽 방에 묵게 했기 때문”이란다.
남편이 ‘농사꾼’이면 ‘농방’(農房)이라 하고, 사위를 동쪽 방에 묵게 했으면 ‘동방’(東房)이라고 할 셈이었던가?


무엇이든지 중국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말밑이라고 우기는 판이니까. 중국에 ‘書房’이란 말이 있으니까, 뜻이야 맞건 틀리건 소리라도 같으니까, 우리말 ‘서방’이 바로 그 ‘書房’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書房’은 소리는 같아도 뜻은 ‘서재, 서실, 서점’이지 ‘남편’이 아니다.


‘서방’의 ‘서’는 “사벌·사불(상주), 서라벌·서벌(경주), 소부리(부여), 솔부리(송악·개성), 쇠벌·새벌(철원)” 들의 ‘사·소·솔·쇠·새’처럼 ‘ㅅ’ 계통 말이다. “새롭다, 크다”라는 뜻도 있다.
‘서방’의 ‘방’은 “건설방(오입판 건달), 만무방(염치 없는 사람), 심방(만능 무당), 짐방(싸전 짐꾼), 창방(농악의 양반 광대)” 들의 ‘방’이다. ‘房’이 아니고, ‘사람’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서방’은 ‘書房’이 아니고 “새 사람, 큰 사람”이란 뜻이다.
저런 우리 국어사전들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7-09-27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7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수맘 2007-09-2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임서방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어요. 일단 옆지기 입장에선 처가가 너무 가까이에 있는데다 남자가 없다보니 자질구레하게 힘쓸 일들이 생길때마다 시시때때로 가서 챙겨야 하는데도 군소리없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까지 너무 당연시하게 생각해 오진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임서방~.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 2007-09-27 18:38   좋아요 0 | URL
어? 홍수맘님, 댁도 박서방 아니었나요?ㅎㅎ
임서방이었군요.^^ 남자들도 여자들도 다 힘들지요, 수고하셨구요^^

순오기 2007-09-2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우리 '선서방'은 명절에 처가에 한번도 간적 없습니다. 1988년 이후로 지금까지...
그래선 전, 절대 '고맙습니다'라고 죽었다 깨어나도 못합니다~~~~~흑흑
'서방'이란 말이 이렇게 좋은 우리말이라고 알려주셔서 추천!

프레이야 2007-09-27 23:15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우째 그런일이? 선 서방은 무신 이유로 그러신대요. 흑흑..
서방,이란 말 좋은 우리말이더라구요^^

Mephistopheles 2007-09-27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씨가 아닌게 이리도 서러울 줄이야....흑흑흑...

프레이야 2007-09-27 23:16   좋아요 0 | URL
메 서방 고맙네, 라고 속으로들 생각하실 걸요.ㅎㅎ

nada 2007-09-28 01:17   좋아요 0 | URL
메 서방이래, 메 서방이래. 키킥 -.-

애교 많으실 것 같은 혜경 님이신데, 은근 '서방'에는 약하시군요.^^

프레이야 2007-09-28 08:46   좋아요 0 | URL
꽃양배추님, 메 서방~ 히힛
'서방'은 우째 거시기허네요^^

바람돌이 2007-09-2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로 시비걸때 "어이 서방!!"
애교 떨때 "서방님~~~" 근데 남들앞에서는 그 말 안나오던데요. ㅎㅎ (참고로 우리집도 박서방은 아닙니다.) ㅎㅎ

프레이야 2007-09-28 00:40   좋아요 0 | URL
전에 본 기억이 얼핏 나는데 박서방 아니고 ?서방 맞습니다^^
님은 그래도 애교 떨 때 '서방니~임~' 이렇게 하시나봐요 ㅋㅋ
전 그렇게도 안 한답니다. 이 나무토막을 우째야 쓰까나..

시비돌이 2007-09-28 0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방은 서방 세계에 쓰는거 아닌가요, 라고 했다가 맞을 수도 있겠죠? ㅜ..ㅠ

프레이야 2007-09-28 08:50   좋아요 0 | URL
동방, 서방, 이 아니라 순우리말이라구요, 지 서방~~(이렇게 불리죠?^^)
요새 영화, 감독을 말하다, 참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시비돌이 2007-09-28 09:47   좋아요 0 | URL
서평은 이번에도 안쓰실거죠? ㅠ..ㅜ

프레이야 2007-09-28 09:51   좋아요 0 | URL
이번엔 좀 써보려고 하는데 잘 되려나 모르겠어요 ㅜ..ㅜ
조심스럽기도 하구요. ^^ 이게 뭔 말이래요?
아무튼 좋은아침이에요~~~

전호인 2007-09-28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를 칭찬하는 것으로 듣겠습니다. ㅎㅎ, 박서방! 듣기 좋은 말이지요. 이종사촌 형수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시동생뻘이니까 저에 대한 호칭은 "서방님"으로 하시면 됩니다 했더니 남편외에는 그 말을 쓰고 싶지않다나 모라나, 뻘쯤한 적이 있었습니다. 잘 지내고 계셨지요?

프레이야 2007-09-28 09:53   좋아요 0 | URL
어머, 그동안 어디 갔다 오셨어요? 전호인님은 정말 처가에도 참 잘 하실 것
같아요. 전서방은 아닐 것 같고 아무튼 우리의 박서방들에 포함되시는 거죠?
ㅎㅎ 결혼한 시동생에게 서방님이라고 부르는 게 좀 걸끄러운 사람들이 꽤 있나봐요. 저만 그런가 했네요.^^ 여전히 바쁘고 건강하게 지내시지요? ^^

아영엄마 2007-09-28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울 남편에게는 이제 최서방~ 하고 불러줄 장인 장모가 안 계시네요.. ㅡㅜ 근데 저도 시동생에게 서방님~ 이라는 표현이 잘 안 써져요. (-.-)> - 울 남편에게 가끔 서방님~ 하고 부르다 보니..

프레이야 2007-09-28 11:03   좋아요 0 | URL
에고 그러시구나.. 그렇게 불러줄 사람이 있는 것도 복이네요.
아영엄마님이 옆지기님께 서방님~하고 부르시다니, 이건 배신이에욧.ㅎㅎ
전 죽어도 몬 하는기라요..

소나무집 2007-09-2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 주말에 친정에 갑니다.
우리도 "강서방, 고맙네!" 소리를 듣고 오도록 미리 교육 좀 시켜야겠어요.
'서방'의 진짜 뜻을 저도 처음 알았어요.
새 사람, 큰 사람이라 앞으로는 그 의미를 새기면서 남편을 불러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07-09-28 16:42   좋아요 0 | URL
네, 소나무집님 잘 다녀오세요^^
친정어머님 병환은 어떠신지요.. 다정한 이야기 잘 나누고 오세요^^

실비 2007-09-28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는 뜻도 여러가지 쓰이네요.
어찌보면 쓸때 부끄러워지기도 할것 같아요.ㅎㅎ
서방님들 대단합니다!

프레이야 2007-09-28 16:43   좋아요 0 | URL
서방, 많이 여러 경우에 쓰는 말이죠.
약간 간지럽지만 원래 뜻은 좋은 뜻이니 좋은 말이에요, 실비님^^
 

2024.02.13.
73쪽에서 120쪽. 5,6,7파일 완료
한낮에는 제법 봄기운이 돌았다.

지금 사회의 중심에는 분명 섹슈얼리티가 있다. 오늘날 서구에서 섹슈얼리티는 정체성의 필수 요소로 생각된다.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하는지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의 일부이자 내 진실의 일부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Foucault가 『성의 역사History of Sexuality』에서 주장하듯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강조되는 건 역사적·정치적 힘이 작동한 결과다. 나는 늘 이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성애 운동은 여러 면에서 섹슈얼리티가 정체성과 존재의 주춧돌이라는 생각에 반기를 들며 자라났다. 비록 무성애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적 정체성이 되었기는 하지만, 이건 그저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신경 쓰기를 거부하는 삶의 양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지향: 무성애 입문The Invisible Orientation: An Introduction to Asexuality』의 저자 줄리손드라 데커 Julie Sondra Decker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동력’만 없을 뿐 온전한 사람입니다. - P85

성격 결함이라는 중대한 요인을 두고 내 결정의 책임을 페미니즘에 묻는 건 솔직하지 않다. 동시에 내 선택이 성긍정 페미니즘의 특정 계통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순진하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첫 성관계를 한 걸 후회하지않는다. 나한테 해가 되지 않았고 거의 생각도 안 나니까. 내가 치른 진짜 대가는 이 만남에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 내가 무성애라는 주제를 그렇게 어색하게 느꼈다는 사실, 다수가 무성애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 연장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아는 탓에 나 자신의 방어적 태도를 쉬지 않고 관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성규범성에 따르는 위험은 젊은 여자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랑 첫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게 아니라(난 여기에는 신경 안 쓴다) 여자에게 들이미는 존재 방식의 규칙이 적어지기는커녕 더 많아진다는것이다. 내게 영향을 미친 건 하룻밤 잠자리가 아니라 애당초 하룻밤 잠자리로 나를 이끈 그 가정들이었다. - P116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얄라알라 2024-02-1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쪽 낭독.....와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들었을까요? 프레이야님 음성 진짜 듣고 싶어요^ ^

프레이야 2024-02-16 09:48   좋아요 1 | URL
얄라님 안녕하세요. 들으시면 ^^
소설 문장이 아니고 처음 만나는 용어랑 주석도 있어 발음 정확히 하려고 신경 썼네요. 한 파일에 한 시간 걸려요 ^^ 봄입니다.

2024-03-16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6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6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7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2.2 시작 이 달 안에 마치려고 계획 중
72쪽 4파일까지 완료.
앞으로 13시간 정도 더 소요될 듯.

≫ 끌림의 세 가지 주된 유형에 더해 무성애자는 접촉 끌림이나 관능적 끌림, 정서적이고 지적인 끌림 등도 논의한다. 끌림을 더 작고 작은 요소로 분리할수록 욕망의 구성 요소를 더 고찰하라는 과제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언어의 구체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것을 더 면밀히들여다보도록 우리의 등을 떠민다. - P58

‘무성애자’ 이름표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단지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데 그쳐야 한다. 그러나 ‘무성애자’는 조롱거리이자 부정적인 속성을 의미한다. 정열이 없다, 뻣뻣하다, 지루하다, 로봇같다, 차갑다, 내숭 떤다, 불감증이다, 결핍이 있다, 망가졌다 같은 속성. 이런 속성들, 특히 ‘망가졌다‘는 남들이 우리를 보는 인식과 우리 스스로 품게 되는 느낌을 설명할 때 무성애자들이 몇 번이고 사용하는 단어다.
무성애에서 이런 관념들을 연상하게 된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는 성 상품화로 이어진다. 성은 잘팔리고, 다른 걸 잘 팔리게 한다. - P72

나는 계속해서 폴란드 철학자 알프레드 코르집스키 AlfredKorzybski의 격언으로 돌아간다. "지도는 땅이 아니다." 긴장과 가능성을 모두 품은 말이다. 지도는 실재하는 세상을 단순화해 재현한 것이며, 실제 땅은 언제나 화면에 표시된 것들보다 풍성하다. 그러나 지도와 단순화는 여전히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모형은 틀리지만 그래도 일부는 유용하지 않은가. 모든 재현에는 한계가 있으나 비교적 훌륭한 재현이라면 시선의 폭을 넓혀준다. 지금은 새롭고 더 상세한지도가 필요한 때다. 이 한층 엄밀한 지도를 무성애가 제공하지만, 지도는 그래도 지도일 뿐임을, "무성애 세계에 어서오시죠."라는 구절은 부정확한 표현임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단일한 무성애 세계는 없다. 적절한 표현은 "무성애의 여러 세계에 어서 오시죠."다. 이해로 향하는 수많은입구의 하나에. - P64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4-02-12 0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한국말로 옮긴 책 녹음하시는군요 멋지네요 따님도 좋아하시겠습니다 이달에 이 책 녹음 잘 끝내시기 바랍니다 프레이야 님 남은 연휴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4-02-12 08:49   좋아요 2 | URL
고마워요 희선님. 옮긴이 박희원 이라고 읽는데 왠지 찡하더군요. 목소리 흔들여 다시 읽었어요 그 부분. 연휴 마지막 날 편안히 보내세요.

자목련 2024-02-15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뜻깊고 의미있는 특별한 낭독이네요^^

프레이야 2024-02-15 16:1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자목련 님. ^^
제법 봄 기운 완연하다고 말하기엔 서귀포엔 제법 바람이 불어요. 그래도 햇살 좋은 날입니다.
 

가장 좋은 용도로 사용된 최고의 사진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우스꽝스럽고 황당하고 놀라운 민낯을 드러내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악의 경우 사진은 순전히 악을 위해 이용될 수도있어요. 사진의 가장 진부한 용도는 무언가를 팔아먹기 위한 거예요. 저는 셀카가 이상적으로 위조된 자기 모습을 자신에게 팔아먹으려는‘ 시도라고 생각해요. 정말 슬픈 일이죠.

위대한 작가 대부분은 시를 포함해 훌륭한 문학 작품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사진은 어떨까? 데이비드 베일리에게 먼저 물었다.

데이비드 베일리1960년에 시작된 끔찍한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킨 건 다름 아닌 사진 한장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이팜탄의 폭격에 옷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뛰쳐나오는 한 소녀의 사진이었죠. 사실 그 사진은 보도용이었습니다. 참혹한 현실을 고스란히 포착한 것이지 예술 작품은 아니에요. 사진을 찍는(taking) 것과 사진을 제작하는(making) 것은 별개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때와 장소를 적절히 선택해 찍은 사진은 중요한 의미가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사진을 예술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500명의 사진작가가 당신 옆에 나란히 서 있다면,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사진을 찍을 겁니다. 그걸 예술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 P115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24-02-10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음력으로도 새해가 왔네요 2024년 몸뿐 아니라 마음도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4-02-10 18:26   좋아요 1 | URL
희선님도 올해 좋은 생각 많이 하고 몸도 마음도 건강하길 바랍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맙습니다. ^^

서니데이 2024-02-10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올해도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새해복많이받으세요.^^

프레이야 2024-02-10 18:27   좋아요 0 | URL
서니데이님 고맙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시고 하는 일마다 기쁨 가득하길 바랍니다. ^^
 

A Bookshelf of Our Own
바른 번역, 박희원의 네 번째 번역서.
목차가 쟁쟁합니다.

목차

2005 머리말
1002~3 겐지 이야기 무라사키 시키부
1405 여성들의 도시 크리스틴 드피상
1678 클레브 공작부인 라파예트 부인
1792 여권의 옹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1816 에마 제인 오스틴
1847 제인 에어 샬럿 브론테
1850 주홍 글자 너새니얼 호손
1857 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
1868,9 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컷
1871~2 미들마치 조지 엘리엇
1877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1879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1891 테스 토머스 하디
1892 누런 벽지 샬럿 퍼킨스 길먼
1899 각성 케이트 쇼팽
1905 기쁨의 집 이디스 워턴
1918 나의 안토니아 윌라 캐더
1920 셰리 시도니가브리엘 콜레트
1929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1936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
1935 대학제의 밤 도러시 L. 세이어스
1937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조라 닐 허스턴
1947 안네의 일기 안네 프랑크
1949 제2의 성 시몬 드 보부아르
1959 투쟁의 세기 엘리너 플렉스너
1959 인간의 작은 근심 그레이스 페일리
1962 금색 공책 도리스 레싱
1963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
1963 벨 자 실비아 플라스
1966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진 리스
1970 성 정치학 케이트 밀릿
1970 자매애는 강하다 로빈 모건
1970 여성, 거세당하다 저메인 그리어
1972 하얀 미국의 검은 여성 거다 러너
1973 숭배에서 강간까지 몰리 해스컬
1973 비행공포 에리카 종
1975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수전 브라운밀러
1975 미스터 굿바를 찾아서 주디스 로스너
1976 여전사 맥신 홍 킹스턴
1976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1977 여자의 방 메릴린 프렌치
1978 침묵 틸리 올슨
1981 여성, 인종, 계급 앤절라 데이비스
1982 영혼의 집 이사벨 아옌데
1987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1989 숄 신시아 오직
1991 백래시 수전 팔루디
1991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나오미 울프
1996 브리짓 존스의 일기 헬렌 필딩
2002 그래, 난 못된 여자다 캐시 하나워
2023 해제 이라영
더 읽어볼 만한 작품
참고 문헌



『여자만의 책장』은 그래서 50권의 책으로 쓴 여성의 역사이자 여성이 글쓰기로 무엇을 이루어왔는지에 대한 평전이다. 여성(의 역사)을 하나의 책이라고 한다면, 그 책 안에 무수히 많은 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힘을 북돋고, (여성이라는) 책 안의 책장을 한 권 한 권 채워가는 과정을 몇백 년 동안 반복해서, 마침내 책장을 꽉 채우는 데까지 나아간 결과물이 바로 『여자만의 책장』이다. - 알라딘 책소개 글 중에서



🎈한파주의보 속 따끈한 신간 소식 전합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


박희원이 번역한 다른 책 3권.
- 바이닐. 에이스. 무법의 바다

신사책방에서 나온 다른 책 2권
- 페미니즘. 웃어넘기지 않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1-23 1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엔 아직 목차가 뜨지 않네요.
하지만 안 봐도 알 것 같습니다.ㅎ
나중에 꼭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따님 책 나올 때마다 뿌듯하시겠어요.^^

프레이야 2024-01-23 14:15   좋아요 2 | URL
책 이미지에서 옆으로 넘겨 보면 머리말이랑 나오네요. 읽은 책도 있지만 목차순으로 50권의 책 모두 읽어야 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스텔라 님 ^^

희선 2024-01-24 0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한국말로 옮긴 책 네번째군요 벌써 그렇게 되다니... 지금까지 한국말로 옮긴 책 다 좋아 보이네요 보라색이 눈에 띕니다 이번 책도 많은 사람이 좋아할 듯합니다 축하합니다

프레이야 님 감기 조심하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4-01-24 13:55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희선 님. ^^
날이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