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설날이 지나고, 서귀포로 훌쩍 날아갔다. 3월부터 조금 다른, 그렇다고 아주 다르다거나 아주 새로운 건 아닌, 길로 가기 위한 잠시의 숨고르기와 수혈 같은 것이었다. 그날 제주공항에선 빗방울이 좀 떨어지더니 금방 그쳤고, 운전해서 남쪽으로 달려오는 한 시간 동안 그곳에 빨리 닿고 싶은 마음을 속도 조절을 하며 달랬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도 목적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다정이라는 말에 이끌렸다.
여름이었던가, 그해는 지금 생각해 보니 제법 오래전이었다. 서귀본향당으로 들어가는 좁다란 골목 안 중간쯤, 왼쪽으로 다정여인숙이라는 작은 팻말이 보였다. 그 골목쟁이로 들어가고 싶었는데 발길을 놓쳐 버렸다. 동행자가 이미 앞서가고 있었고 나만 옆으로 새기가 좀 그랬던 거 같다. 서귀본향당도 좋았지만 그 이후로 계속 놓치고 온 다정여인숙이 마음에 걸렸다.
이중섭거리는 그동안 많이 바뀌어 있다. 꽤 다른 풍경이다. 서귀포관광극장이라는 게 서 있고 그 옆으로 이중섭미술관 입구와 생가가 있다. 여러번 갔던 곳이라 이번에는 그곳은 가지 않기로 한다. 다정여인숙만 보고 싶다. 나는 돌담집을 끼고 좁다랗고 가파른 샛길로 내려왔는데 양쪽으로는 이중섭 그림이 벽에 그려져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빠져 나오니 이중섭거리에 닿았다. 곧바로 다정여인숙을 찾아왔다. 나무 팻말에 빨간색 글자로 적힌 다정여인숙 이라는 표식은 없어졌고 녹슨 파란 색 대문에 주소가 이정표로 적혀 있다. 전에는 없던 대문이다. 우편함에 서귀포마을신문이 철 지나도 한참 지나 주인도 찾지 못하고 끼어 있다.
반쯤 열려 있는 그 대문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낮은 집이 다정여인숙이다. 길찾기 내비게이션이 그렇게 가르쳐 준다. 주변을 아무리 왔다갔다해 봐도 여기가 맞다. 여인숙은 언제 문을 닫았을까. 삐거덕 문을 여는 순간, 아 그때 와 봤어야 하는데…
방 두 개에 왼쪽으로 욕실이다. 방은 작지 않고 기름하다. 허름한 뒷마당이랄 것도 없는 풍경이 보이는 창문이 마음에 들어온다. 하지만 너무 놀라서 사진도 못 찍었다. 장판은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벽지도 여기저기 뜯겼고 창문 틀에는 먼지가 자욱하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알지 못할 서늘함을 그대로 두고 돌아서서 문을 닫았다. 맞은편 하얀 벽 앞에 대파와 동백나무가 서 있다. 하루키 소설 속 고야스 씨가 사라진 아내의 침대에서 발견한 대파, 그 맥거핀을 본 듯 피식 웃음이 난다. 잔물결 타고 띄엄띄엄 등장하는 유머! 다정하긴 참!
하얀 벽 안은 공동 화장실과 샤워실이었다.
서서히 어둑발 내리는 길을 걷다 제주약수터에서 마신 먹구름과 화수분. 먹구름은 다크비어의 묵직함이, 화수분은 상큼하고 맑은 가벼움이 좋았던 호젓한 저녁.
마지막 사진은 서귀포시 어느 골목에 앉은 에이햅 선장. ^^
춤추는 빛. 대양 위의 잔물결. 한 겹 두 겹 겹치고 흐려지고 떠오르는 무엇과 그 너머에 있는 모두이자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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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간소개합니다.
<사물의 표면 아래>
성실한 번역가 박희원의 다섯번째 번역서.
눈부신 유월 같은 표지부터 마음에 들어온다.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 저자의 말을 보니 최근 생각에 깊이 빠지게 된, 중도에 대한 영적 통찰도 있어 더욱 관심이 간다. 역자후기도 반듯하다.
역자후기
인류학이 “이해와 관용과 공감의 백신”이 될 수 있다는 말은 특히 든든했다. 저자가 다룬 사안뿐 아니라 삶의 모든 면을 대할 때 늘 기억하고 싶은 말이다. 눈앞의 좁은 현실에 파묻혀 불이 하나둘 꺼져만 간다고 느낄 때,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 때 이런 관점 하나가 생각의 키를 다시 잡아줄 것이다. 한쪽으로 판단을 내리고 고민을 멈출 때의 아늑함은 익숙하다. 하지만 그렇게 한 갈래 길만 남기면 그 길이 절망으로 향할 때 달리 택할 길이 없다는 사실도, 외면할지언정 마음 깊은 곳에선 모르지 않는다. 여러 갈래 길을 볼 수 있을 때 희망이 생기고 그 희망은 다시 여러 갈래 길로 나타난다는 것을 저자의 글과 만나며 되새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