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만의 책장 -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
데버라 펠더 지음, 박희원 옮김 / 신사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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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읽은 책을 나에게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라는 진부한 말이 통할지는 모르겠다. 단언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어느 부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책은 사람이 만들지만 사람은 책이 만든다는 말도 그런 의미와 닿는다. 책을 고르는 주체는 나이고 책을 읽는 행위는 그런 자신에게로 한걸음 더 들어가 달라진 자신을 자재로 하나의 책장을 구축하는 일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책장은 자신이 건설한 세계의 축소판이다. 한 권 읽었다고 바로 달라지긴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니, 달라지기에는 많은 책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과녁의 한복판을 화살로 맞았다면 말이다.

과녁의 주변을 맞아도 그 진통의 울림을 무시하지 못한다. 서로 단단히 연결되면서 바람이 통하며 이야기 나눌, 유연한 틈이 노리는 책들로 나의 책장을 쌓아가자. 크기와 모양이 서로 다른 돌멩이들이 어깨를 곁고 선 담이 더 튼튼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 나오는 도서관은 내게 이런 이미지를 주었다. 분류법에 따라 줄 세워진 책장들, 세상에 존재하는 이어지거나 분리된 수많은 책장들. 그것은 벽이기도 하지만 허물 준비가 되어 있는, 위에 올라서서 한순간 다른 도시로 뛰어내릴 수도 있는 담이다. 낙하! 비시간의 공간에서라면 가능할 상승! 마치 밀도가 높아진 물이 위로 솟듯이. 강하고 경쾌하게.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그 모든 건 우리 스스로 가담한 일이다.

“여성의 삶을 바꾼 책 50”을 부제로 하는 ”여자만의 책장“은 엄밀히 말해 우리가 스스로 고르고 쌓아올린 책장이다. 여자의 전유물은 아니다. 물론 남성 작가의 작품도 다룬다. 우리가 한 권의 책이고 책장이라면 세상에 다양한 성격의 책장들 중 하나로서 이 책은 여성 삶을 다룬 문학의 역사에 획을 그은 작품을 연도순으로 소개한다. 여성 삶이 주체적 역사로 변천하고 발전해온 과정을 들여다보게 한다. 여전히 나아가는 중이고, 돌아보아야 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다시 보아야 한다.

‘세상에 맞서 싸울 의무를 져온’ 여성들의 역사적 문화적 경험에 관해 소중한 통찰을 제시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로 엄선했다고, 저자는 머리말에 밝혔다. 그에 앞서,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자 작가, 철학자로 “여성의 권리 옹호”를 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문장으로 이 책장을 연다.

- 확신하건대 세상과 맞서 싸울 의무보다
우리의 능력을 더 잘 끌어내는 것은 없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딸들의 교육에 관한 성찰,
1787.



1002년 “겐지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이 책은 무엇보다 읽기에 자발적으로 나서게 한다. 소개된 작가의 책을 모두 읽고 싶게 손을 이끈다.

- 세계 문학사 최초의 대하소설 겐지 이야기는 일본 소설 최고의 명작이자 지금껏 쓰인 허구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성과를 이룬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성 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 독창적인 소설의 작가는 11세기 일본의 궁녀다.
무라사키 시키부에 관해 알려진 사실은 별로 없다. 아버지는 중급 귀족이고 지방관을 지냈다. 시키부는 의뢰를 관장하던 기관 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한때 맡았던 관직을 가리키며 무라사키는 보라색을 의미하고 겐지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의 별명에서 따온 듯하다. (19쪽)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외연을 확장해 적극적으로 읽을 작품들이 줄을 잇는다. 읽고 싶어지는 도서 목록이 늘어나는 즐거움이 따라온다. 목차에 오른 연도순 도서를 차곡차곡 읽어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곳간에 양식 늘어나듯이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 이 책에 언급된 주요도서 50권과 저자가 소개하는 작가의 다른 책들을 확장해 읽으며 우리의 책장 중 또 하나를 쌓아가는 것도 좋겠다. A Bookshelf of Our Own. 무한대 책장이다.

원서 표지와 함께, 국내에서 번역된 책은 편집자가 가장 추천하고픈 출판사 도서로 각 장에서 표지와 함께 소개한다(예외 몇 - 도로시 L. 세이어스, 대학제의 밤Gaudy Night 외). 유용한 편집이다. 여러 면에서 고심하며 성실하게 작업한 흔적이 보이는 반듯한 번역도 돋보인다. 원서가 2005년 발간되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2002년 도서로 캐시 하나워 작, “그래, 난 못된 여자다”가 소개된다. 이후의 책들은 독자가 골라 책장을 메꿔나가면 더욱 의미 있겠다.

———


1976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에이드리언 리치
(밑줄긋기 440쪽)

1989 숄. 신시아 오직(밑줄긋기 501쪽)

모성을 "인간의 모든 관계가 얽혀 있고 사랑과 권력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가 숨어 있는 거대한 그물망"이라 칭하며 세 아이의 어머니인 자기 경험을 시작으로 개인적 관점과 인류학적·역사적·정치적 관점에서 주제를 탐구해나간다. 리치는 당시에 쓴 일기를 들춰보며 임신 기간과 자녀의 주양육자로 지내는 동안 느낀 양가감정을 강렬하고 진솔하게 기록한다. "사랑과 증오, 아이의 유년기를 향한 질투심, 성숙기로 넘어가리라는 희망과 두려움, 한 존재에 온몸이 매인 채 책임감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갈망의 파도에 휩쓸린다." 리치는 자신이 주부와 어머니로 부적합하다고 느끼고 지성인과 예술가로서 살아야 할 삶을 너무 희생했다고 억울해하는 등 죄책감과 불안을 느끼는 것은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지루한 가사노동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제 역할에 만족하는 온전한 어머니라는 신화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리치는 자각했다. "나는 모성의 실재가 아니라 모성의 제도 때문에 진정한 육체와 진정한 정신에서 실질적으로 소외된 것이다. - P440

현대 세계의 유대인이 마주하는 어려움이라는 주제에 집중해 작품 대부분을 집필한 신시아 오직은, 이 주제를 넘을 수 없을 듯한 장애물을 앞에 두고서 영혼과 믿음을 지키려고 분투하는 심오하고도 보편적인 탐구 과정으로 변형해왔다. 평론가 다이앤 콜은 "현대 작가 중에 오직만큼 폭넓은 작품 세계와 지식, 열정을 보여주는 작가는 거의 없다."라고 강조했으며, 연구자 일레인 M. 코바는 오직을 꼼꼼한 문장의 대가이자 예술적인 도덕감각의 대변자"라고 불렀다. 『신뢰』 (1966), 『식인 은하계』(1983), 스톡홀름의 메시아』(1987), 『퍼터메서의 논집」(1997)등 장편소설 네 편을 발표한 작가지만 오직이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것은 『이단 랍비』(1971), 유혈극』(1976) 공중 부양(1982) 등의 단편집들 덕분이었다. 평론가 캐럴 혼은 "오직의 이야기는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신비롭고 불온하다. 총명함이 아른대고, 언어에 환희하고,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오직의 작품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참혹한 이야기를 담은 「숄과 그 이야기를 이어가는 중편소설 「로사」로, 두 작품은 한 권에 모여 「숄이라는 제목으로 1989년 출간되었다.
홀로코스트의 충격을 그린 작품으로도, 신시아 오직이라는 주요 작가를 만날 입문서로도 이보다 더 훌륭하고 매력적인 책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 P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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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1-26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겐지 이야기가 가장 첫번째에 나오다니... 이런 데서 말하는 책에서 제가 읽은 건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첫번째 건 읽었군요 읽기만 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 보니 읽은 건 겨우 몇 권이네요 그것도 거의 잊어버리고 제대로 못 봤군요


희선

프레이야 2024-01-26 11:58   좋아요 1 | URL
역시 희선님은
겐지 이야기 읽으셨군요. 전 그 책부터 읽어야겠어요 차례대로. ^^ 읽은 책은 살짝 넘어가면서 새로 알게 된 작가들에도 관심이 갑니다. 깊고 넓게 읽기에 좋은 안내서 같아요.
 

https://www.aladin.co.kr/m/bookfund/view.aspx?pid=1922

https://www.aladin.co.kr/m/bookfund/view.aspx?pid=1922

님들 모두 안녕하신가요~
우리 모두 건너기 쉽지 않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전당에서 시네마낭독극장 2차시 수업에 참여한 후,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압도적인 영화 “Beau is Afraid”를 보고 늦게 집에 왔어요. 179분짜리 영화입니다.
오늘 이곳은 비가 잦아들었지만 수해 피해를 입은 분들과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로 마음이 더욱 답답한 와중에 큰딸이 번역한 세번째 도서 <무법의 바다>가 다음달 말에 출간 예정이라는 소식을 전하네요. 환경 인권 노동을 다룬 생생한 해양 로포르타쥬입니다. 알라딘에서는 8월 17일까지 북펀딩을 하고 8월 29일 출간 예정입니다.
젊은 번역가 박희원의 바이닐, 에이스,에 이어 “무법의 바다”에 많은 관심 보내주시길 바랍니다 ^^



@ 책 속에서(알라딘 북펀딩에서 가져옴)

공간 낭비와 다른 값비싼 어획물이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지느러미를 절단하고 남은 상어 몸통을 도로 물속에 던진다. 몸통 고기보다 지느러미가 백 배는 더 비싸게 팔리기 때문이다. 죽음은 느리게 진행된다. 살아는 있으나 지느러미가 없어 헤엄을 칠 수 없는 상어는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굶거나 질식해서, 또는 다른 물고기에게 뜯어 먹혀 죽는다. 과학계는 해마다 지느러미 때문에 학살당하는 상어가 9,000만 마리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2장 외로운 파수꾼

불 보듯 뻔했던 결과를 이제는 피할 수 없었다. 오양70호는 침몰할 것이었다. 배 전체가 혼돈에 빠졌다. 신씨는 선교에서 초단파 무전으로 구조 요청을 보냈다. 선원들은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구명조끼는 한국인 사관들만 입고 있었다. 오양70호의 구명정이 물에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배 역시 진즉 파도에 전복된 상황이었다.
그날 아침 동트기 전의 수온은 약 섭씨 6.6도였다. 배에는 한기를 차단하도록 제작된 구명 슈트가 68벌 있었다. 승선자는 51명이었으니 수량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슈트를 입은 선원은 아무도 없었다. 입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있기나 했을지 의문이다.
오양70호를 침몰시킨 것은 물이 아니라 탐욕이었다. 배가 물고기를 과하게 집어삼키려 하자 바다가 역으로 배를 집어삼킨 것이다.
—4장 상습 범죄 선단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1년에 2,000만 명 이상의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임신중지 시술을 받고 그 결과 해마다 약 4만 7,000명이 사망한다고 한다. (중략) 홈퍼르츠는 정박지와 멀지 않은 호텔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파도위의여성들이 전날 임신중지 시술을 위해 여성들을 공해로 데려갔으며 다음 날에도 같은 일을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건 사회 정의의 문제입니다.” 홈퍼르츠는 그 자리에 모인 50명쯤 되는 기자와 여성운동가에게 말했다.
—5장 애들레이드의 항해

루이의 술집에서 파는 맥주 가격은 1달러 정도였고 ‘인기 있는’ 여자아이와 하는 성관계는 12달러였다. 며칠만 지나도 이런 계산서가 차곡차곡 쌓여 가난한 미얀마인과 캄보디아인 남자들에게는 위압적인 액수가 되었다. 이들 다수는 일자리를 찾으러 무일푼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온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공짜로 제공되는 줄 알았던 식사와 마약, 숙소가 나중에 미납 요금이 되어 나타났다. 돈을 갚아야 하는 이주민은 그렇게 바다로 팔려갔다.
—10장 해상 노예

20세기에 접어들고도 한참이 지나서까지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오염은 희석으로 녹여 해결한다”는 주문이 통했다. 그 결과 독성이 강한 폐기물일수록 바다에서 최후를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과 영국, 소비에트연방을 포함한 10여 개 이상의 국가가 일부에 방사성 연료가 여전히 들어 있으나 쓸모가 없어진 원자로와 핵 슬러지를 북극해와 북대서양, 태평양에 버렸다. 이런 행위는 1993년에야 금지되었고, 그 시점까지 남아 있던 업자는 지하 세계로 자리를 옮겨 지중해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연안에서 활동하는 세계 폐기물 거래업자가 되었다.
—11장 쓰레기를 흘려보내다

나는 한 발 더 나가고 싶다. 바다가 무법 상태인 것은 바다의 본질이 선하거나 악해서가 아니라, 소리에 반해 침묵이 그렇고 활동에 반해 권태가 그렇듯 이곳이 공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세기에 걸쳐 바다에서 솟아나는 생명을 수용하고 상찬해오면서도 타락을 숨겨주는 이곳의 역할에는 대체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수세기 동안 그랬듯 무법의 바다는 실재한다. 이 사실을 마주 대하기 전에는 이 프런티어를 길들이거나 보호하는 일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에필로그: 공백

갖은 색이 섞였기에 간단히 말하면 회색이라는 단어가 나오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회색을 이루는 여러 색을 알알이 뜯어보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야 탁해 보이기만 하는 세상에 막막해 하다가도 어떤 색을 더하고 지키고 덜어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으니까.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사람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장막 아래 색색의 바다를 부디 많은 분이 보게 되면 좋겠다.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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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7-18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이랑 따님 덕에 에이스 잘 읽었습니다~~! 새책이 또 나왔네요! 열일하시는 번역가님!! 😆

프레이야 2023-07-18 10:58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은오님^^

2023-07-25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7-25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 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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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그는 잡지에서 자기에 관한 기사들을 읽어 보았다. 그 기사들에 묘사된 제 모습을 살펴보아도 자신의 정체성과는 도저히 연결시킬수 없었다. 그는 살고, 전율하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느긋한 동시에 생명의 나약함에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뱃머리에 서서 낯선 섬들을 돌아다녔으며, 싸움박질하던 시절에는 제 패거리를 이끈 사람이었다. 그는 도서관에 가득 찬 수천 권의 책을 처음 보고 기절초풍했고, 그 후로 제 방식을 찾아내어 그 책들을 섭렵한 사람이었다.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잠을 쫓아가면서 제 자신의 책들을 써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 모든 군중이 식사 대접을 하려 드는 엄청난 식욕의 소유자는 그가 아니었다. - P219

그는 자신의 특등실로 도망쳐, 증기선이 갑문을 확실히 빠져나갈때까지 거기 숨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그는 제 자리가 귀빈석, 선장의 오른쪽 옆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자신이 선상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선상의 위대한 인물로서 그보다 부적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오후내내 갑판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졸다 깨다 했고,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틀이 지나 뱃멀미가 가라앉자 승객 전원의 명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명단을 보면 볼수록 그는 승객들이 싫어졌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그들을 온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들임을 그는 가까스로 인정했으나, 인정하는 순간에 단서를 달았다. 그들이 그 계급의 왜곡된 심리와 하찮은 지성을 가진 모든 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선량하고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알량한 정신은 겉만 그럴듯하고 속이 텅 비어 있어 함께 대화하기가 지루했다. 한편으로 젊은이들의 떠들썩한 패기와 과도한 활동력은 그를 놀래켰다. - P245

저게 뭐지? 등대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뇌 속에 있었다. 밝게 깜박이는, 하얀 빛이었다. 그것은 점점 더 빠르게 깜박거렸다. 덜걱대는 소리가 길게 났는데, 자신이 넓고도 끝없이 긴 계단을 굴러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계단 밑 어딘가에 다다라 그는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거기까지만 알았다. 그는 암흑 속에 빠져 있었다. 그걸 아는 순간, 그는 알기를 멈추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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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어야 하는데...

1권 읽다 말았네요.
영화 리뷰를 보고 나니 독서
욕이 급격하게 상실되더라구요 ㅠㅠ

프레이야 2022-10-10 11:28   좋아요 0 | URL
영화 보고 나면 책을 더 읽고 싶어지는 작품이 있고 그걸로 됐다 싶은 작품이 있더군요. 마틴 에덴도 영화가 좀 더 활발한 느낌이긴 합니다. 잭 런던의 다른 글보다 문장이 아름다운 느낌이에요.^^
 

6장_ 자기만의 방(1929-1935)

이 평전은 많은 부분 보부아르의 회고록과 일기를 참고해서 쓰고 있다. 회고록에 기술하지 않았거나 완곡하게 쓴 부분은 일기장에서 자세히 언급된 경우가 많았다. 안에서 보는 나와 밖에서 보는 나, 둘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했던 게 오히려 인간적으로 보인다. 일기장도 백 퍼센트 순수한 나이기는 어렵지 않을까. 세간의 추측과 오해가 오히려 당연할 듯.

#
어리석은 사람들을 봐주지 않기로 평생 정평이 나 있었던 보부아르가 교사로 일하며 이 시기에 쓴 원고는 아무것도 출간되지 않았지만 어떤 글을 쓰든 “타자의 신기루” 그리고 정직 자유 사랑의 관계라는 늘 똑같은 주제로 돌아왔다. 그들은 열렬히 대화했고 눈물과 결핍, 오해와 이해로 점철했으며 감정에서든 글에서든 서로 날카로운 조언과 비평을 반겼다. 사르트르가 편지에 썼듯 “일심동체”적 믿음이 있었다.

2년의 계약을 깨고, 헤어져 있는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사르트르가 결혼을 제의하기도 했지만 보부아르는 당혹스러웠고 거절했다. 이건 보부아르를 위해서였는데 영리한 그녀는 계산을 했다. 부르조아 제도에 대한 생각을 바꾼 유일한 이유는 출신문제. 아이를 남는 것은 “아무 목적도 없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세계 인구의 증식으로 보였다.” 계약 기간을 늘리고 자주 만나는 걸로 했다. 이 시기, 서로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두 사람이 받아들이는 생의 의미는 좀 달랐다. 마르세유에서의 이 때를 보부아르는 괜찮아 하면서도 가장 불행해 했다. 사르트르는 우울이 찾아왔다.

보부아르는 이미 알고 있던, 후설의 현상학에 감명받은 사르트르는 철학을 일상으로 돌려놓고 경험을 쓰는 데에 뿌리가 되게 하고 싶었다. 이는 “생생한 현실”을 쓰고 싶었던 보부아르의 생각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사르트르는 경험을 살아 내는 대신 글로 쓰려 했고 그 점이 Beauvoir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에 대한, 지금 여기의 현실에 대한” 충실성에 거슬렸다. 사르트르는 세계를 관찰과 반응을 너머 언어로 정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보부아르는 그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런던을 고작 12일 여행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게 보부아르 생각이었다.

보부아르는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고 버지니아 울프의 “모든 작품”을 읽었다. 사르트르가 우연성에 대한 철학적 집필로 고심할 때 소설로 써보길 권했고 탐정소설을 좋아한 사르트르는 자신을 앙투안 로캉탱에 투영하여, 르아브르를 배경으로, 철학적 질문을 담은 소설을 쓸 수 있었다.


#

“ 보부아르의 비판은 상세하고 깐깐했지만 그게 바로 사르트르가 ‘변함 없이’ 그녀의 조언을 수용하는 이유였다. “(172)


시간 나는 대로 여행을 함께 다닌 두 사람. 11월의 르아브르 해변 카페에 이십 대 두 사람이 앉았다. 그 자리에서 절대자를 향한 오래된 갈망과 지적 욕망과 삶의 노력이 속상해 “한바탕 눈물 쏟는” 보부아르를 상상해본다. (아마도 바다는 흐렸을 것이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잠시 가닿았던 르아브르 해변은 7월이었어도 흐렸다)
다음날에도 보부아르는 심란해 사르트르와 논쟁을 벌이고… 격론하고 상대에게 자기주장을 직설하면서도 금이 가지 않는 관계 그런 타자와의 관계라면 말년에 최고의 관계였다고 회고하고도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사르트르는 모르겠지만 보부아르는 그가 자기 생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사르트르 사후 보부아르는 ‘작별의 의식’을 쓰고 사르트르 삶의 증인이 된 셈이다. (이 책 표지 참 깔끔하다. 전에 읽다가 접어두었는데 이번에 다시 읽어야겠다)

감정적 결핍에는 서로 같은 거리로 더 깊이 다가가지 못한 면도 있지만 완벽하지 않아서 완벽한! (아직은 이십 대) 상대의 기호에 자신을 맞출 필요도 예쁘게 보일 필요성도 느낄 이유 따위 없이, 자기 기만에 빠지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 되기.

#
1927년 보부아르의 일기에 벌써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그녀는 자신에게 명령한다. “보부아르 양이 되지 마. 내가 되자. 외부에서 부과하는 목표, 충족해야 하는 사회적 틀에 연연하지마. 나에게 작용할 것이 작용하면 그걸로 다 된거야. “ -140쪽


르아브르 해변에서의 논쟁에 “사르트르는 술과 눈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는 없다면서 그녀가 형이상학이 아니라 술 때문에 우울해지는 것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술이 장막을 걷어 진실의 추악한 민낯을 드러낸다고 생각했다. (172)”

1935년 2월 사르트르가 환각증과 우울증을 인정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철학대로라면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니까 광기도 본인이 미쳤다고 믿는 것밖에 더 되겠느냐고 냉담하게 지적했다. (173)”

막상막하 천생연분.


- 맨아래 사진은 2016년 칠월 초 흐린 르아브르 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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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04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에서의 사르트르는 왠지 철학가가 아닌 진짜 한 남자인 남편으로 비춰지는군요?
일기라서 더 친근하게 읽혀서일까요?^^

프레이야 2022-10-04 22:05   좋아요 2 | URL
여러 가지로 조명하는 것 같은데 재미난 일화가 많네요. 한 사람의 구석구석을 알기란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겠죠. 모순되고 격렬하고 지적이면서 열망도 많은 두 사람. 똑똑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시몬이 일기장에다가 키작은 그남자라고 ㅎㅎ

2022-10-04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4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10-05 0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 해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같은 느낌이 듭니다 쉰한해라니... 언젠나 자신이 되려고 했다니 멋지네요


희선

프레이야 2022-10-05 11:38   좋아요 2 | URL
그죠 ^^ 평생을 기약하는 결혼식 올리고 헤어지는 커플에 비하면 평생 서로의 생에 증인이 되어준 관계이니 이러쿵저러쿵 말들은 많아도 결국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순 없는 사람은 없으니.

기억의집 2022-10-05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브아루 찾아보니 1908년 생이네요. 시대를 비교해도 엄청 진보적이었네요. 울프와 교류가 있었을까요? 울프의 작품을 다 읽었다면… 울프와 보브아르의 서로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궁금해집니다…

부산에서 프님 만나 편안한 여행 되서 즐거웠어요. 조만간 부산 페이퍼 올려야지 생각하고 있어요. 여행끝나고 갑작스레 알바 제의가 들어와 금토일 풀 알바 했는데 나이 들어 일하니 너무 힘들어 북플에 들어와 글읽을 수조차 없더라고요. ㅎㅎ 어제부터 피곤이 좀 가시긴 하는데.. 개피곤합니다. 하하. 프님덕에 즐거운 여행 돼서 고마움 한가득입니다. 조만간 트리조명 오면 보낼께요. 아직도 작가님이 발송 안 해 주셨어요 ㅠ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05 10:02   좋아요 1 | URL
울프와 교류하진 않았나 봅니다. 그런 말은 아직 나오지 않네요. 모든 작품을 읽었다고 하니 좋아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보이죠^^

2022-10-05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05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