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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Nez입니다
김태형 지음 / 난다 / 2020년 7월
평점 :
요즘 주현영 보는 게 즐겁다. 올리브영 신입 매장직원 연기 보다가 빵빵 터졌다. 핸드크림 사러온 여성에게 니치향 어쩌고 저쩌고 막 과하게 설명하다 니치향이 뭐냐는 손님의 질문에 말이 막혀 횡설수설하는 장면. 니치는 프랑스어 Niche(니슈).
저자 김태형은 이 책의 후반 절반을 차지하는 A~Z에서 향수와 관련한 전문 용어와 장인들을 사전부록이 아니라 자신의 글로 설명하고 소개한다. 향을 배우러 그라스에서 베르사유, 이집카에 들어가 몸으로 느끼고 익힌 흔적들이다. 전반 절반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고 절제된 스토리로 쓴 에세이 문장도 좋았지만 후반부 절반은 전문 사전처럼 간략하면서 유용하다. 여기 N장에서 Niche를 설명하는데, 어렴풋이 알고만 있었던 용어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니슈는 조각상이 놓이도록 움푹 들어간 벽면의 부분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지만 마케팅적으로 사용될 때는 틈새시장을 의미한다. Parfum de Niche, 즉 영어의 니치 퍼퓸은 보통 매스 퍼퓸과 상반되는 개념으로 쓰인다. 매스 퍼퓸이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판매를 극대화시키고 최대한 많은 대중을 타겟으로 삼는 반면, 니치 퍼퓸은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바탕으로 그것에 끌리는 특정 계층의 사람들을 겨냥한다. 많은 이가 니치 향수를 개인이 운영하는 브랜드의 향수나 값비싼 향수라고 생각한다. 특이한 컨셉을 실현하기 위해 소규모로 하거나 희귀한 자연 원료를 사용하여 가격이 높아지는 경우가 빈번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브랜드가 니치 퍼퓸에 속하느냐는 '향수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예술성과 상업성 중 어느 쪽을 더 대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252쪽)
"조향사가 좋은 향을 만들기 위해서는 본인의 색을 향에 입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과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잘 이해하고 반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늘 조향사의 위치를 고민해온 흔적도 여럿 보인다. 저자는 이 점이 딜레마이기도 하다면서 지보당Givaudan의 조향사 필립 뒤랑의 문장을 떠올린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조향사는 아티스트Artiste, 예술가보다 아르티장Artisan, 장인에 더 가깝게 보인다."(71쪽)
저자 김태형의 외국 이름은 가브리엘이다. 부드러운 그 느낌이 좋아 정했다고 하면서 조향계의 여러 가브리엘 중에 자신도 기억에 남길 바란다. 가장 유명한 가브리엘이라면 우리가 다 알다시피 1909년 양장점 문을 열고 다양한 제품군을 가진 프랑스 기업의 모체를 키운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160쪽에서 적절히 소개하고 있다. 샤넬 향수회사가 세워진 건 샤넬이 조향사 에르네스트 보와 함께 탄생시킨 넘버5(1921)와 넘버22(1922)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후다. 샤넬이 우아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흑과 백을 사용했듯 이 책은 흑과 백 두 가지 색상으로 디자인되었다. 초반에 그라스Grasse 이야기가 나와 사진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좀 지나 글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한꺼번에 몰아서 배치해두었다. 그라스역사 위 동그란 시계 사진부터 많지는 않고 몇 장 두어서 기분 전환 겸 분위기가 좋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에 섬세하고 사려깊은 결이 엿보이는 젊은 조향사 김태형은 태생으로 주어진 문학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고 한다. 하지만 그 유전자가 어디 가겠냐 싶을 정도로 문학이거나 아무튼 예술의 길로 접어들 것 같은 예감을 숙명적으로 하며 자랐다. 글에도 여러 면으로 드러난다. 요절한 작가 김소진과 작품활동에 매진하는 함정임 작가의 외아들. 두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닮고 분위기도 비슷한, 맑은 이미지다. 누구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지 않는 자기삶이란 없다. 조향사 김태형은 후천적 환경에 의해 아노스미Anosmie가 되어 후각을 잃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자신이 조향사가 되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생각했던 때를 지나 이제는 "후각을 잃은 아버지의 안타까운 운명을 풀어낼 사명적 흐름"이라고 여긴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 조향계의 베토벤이라 불리는 장 까를Jean Carles을 소개하는 대목이 인상깊다. 장 까를은 최초로 조향사 양성기관을 설립하고 향료 교육방식을 정립한 교육자이다. 그의 컬렉션 중 가장 유명한 마 그리프와 미스 디오르(한때 나도 썼던 향수라 반갑다)가 아노스미 상태에서 동료 조향사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조향사들은 원료의 특색을 기억해내고 그들의 조합 효과를 어느 정도 예상해야 한단다. 그래서 조향을 공부하는 학생은 원료 학습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반복적이고 꾸준한 노력을 쏟는다고. 역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 듯.

마리보 탄생 300주년 기념우표
어머니의 문학도들과 같이 섬진강 문학기행에 가서 조향사가 되기까지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고백을 공개적으로 하고 매년 11월 셋째 목요일이면 출시하는 보졸레누보를 어머니를 위해 사는 아들이 에트르라 대표 조향사 김태형이다. (나도 보졸레누보 엄청 좋아한다. 올해도 꼭 사도록!) 저자는 와인의 맛도 향으로 표현하고 섬진강 풍경도 향으로 그려내고 문학적 문체도 향으로 읽는다. 문학이 독자와 만나 작품이 되듯 향수도 시향자의 감각과 만나 작품이 된다. 향수가 출시되기까지 여러 중요한 과정을 거치는데 이름을 정하는 작업은 조향만큼이나 신중하게 진행된다고 한다. 저자가 지은 이름 중 마리보다주Marivaudage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사랑과 우연의 유희>, <이중의 변심>, <노예들의 섬>, <순진한 배우들> 등을 쓴 18세기 프랑스 극작가 피에르 드 마리보의 문체를 칭하는 마리보다주.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사랑이 시작되어 표출되는 상호간의 심리를 세밀하고 미묘하게 담아내는" 마리보의 대사(말투)를 이르는 말이다. (마리보의 저서 구매)
나는 향수와 꽃, 두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마리보다주를 발견했다. 꽃은 두 생물이 사랑을 나누게 해주는 매개체이자 무언의 흐름이 오가는 통로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섬세한 그들의 이야기를 인간들이 사용하는 사랑의 매개체인 향수로 풀어내고 싶었다. 불행히도 나를 자극했던 마리보다주는 향수의 최종 이름으로 선택되지 못하였다. 과거에 '마리보'의 문체는 경박스럽다는 비판을 자주 받았는데 그러한 이미지가 향수에 덧붙여질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이 항상 우아한 것은 아니다. 가끔은 경박하고 가끔은 촌스럽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이 이름에 무척이나 애착이 간다.(81쪽)
젊은 조향사는 사랑이 가끔 경박하고 촌스럽다고 했지만, 사랑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 게 사랑의 실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 사랑의 한가운데에 있을 땐 보이지 않는다 그 실체가. 이런 나의 생각은 경박하고 촌스러운 게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진짜 사랑은 그런 것에 더 가깝다. 맛있는 케이크를 앞에 두고 안 먹고 배길 수 있다면 진짜 그 달달한 케이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다. 입가에 생크림을 묻혀가며 안 먹고는 못 배긴다, 진짜 좋아하면. 그런데 중요한 것은 늙어지면 그럴 수가 있다는 것, 그게 된다는 것이다. 당뇨라, 체면상, 살찔까봐, 등등 우아하게 참을 수 있는 이유가 많아진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 가운데 빨간 모자 쓴 아이가 세 살 적 벤(샘)
영화 <사랑이 지나간 자리The Deep End of the Ocean>에는 세살 때 가족을 잃어버렸다가 열두 살이 되어 우연히 기적적으로 가족을 다시 만난 소년이 나온다. 샘(원래는 벤)은 석 달간 가족의 집에서 지내며 적응해보려고 애쓰지만 9년이라는 간극이 쉽사리 좁혀지지 않는다. 기억의 공백을 채워줄 어떤 것도 없는 상태에서 샘은 친아들처럼 키워주신 아버지에게 돌아가고 싶어한다. 평범할 법한 이야기이지만 풀어가는 방식이 의외로 좋았다. 어느 날 밤 샘이 다시 집을 찾아온다. 형과 농구를 하며 엉킨 실타래를 아무렇지 않게 풀고 진심으로 가족이 되는 마지막 장면이 따뜻하다.
샘의 이야기를 형은 눈을 반짝이며 듣는다. 샘이 와 있는 동안 하루는 엄마(미셸 파이퍼)가 - 물론 아줌마라고 부르지만- 향나무로 짠 상자에서 샘과 형이 어렸을 적에 입었던 조그마한 옷가지를 꺼내어 보여주었는데, 샘은 무슨 냄새가 난다며 이 냄새를 어디서 맡았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집에 돌아온 그날밤은 바로 그 냄새를 기억해낸 밤이었다. 어딘가에 숨어 있기를 좋아했던 샘(어릴 적 이름은 벤)은 세 살 때 그 향나무로 짠 커다란 상자에 숨어 있었고 걸쇠가 밖에서 잠겨 나오지 못하자 형이 열어주어 나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때때로 동생을 돌보는 게 귀찮아 꽉 잡은 손을 놓고 싶어했고 사건이 일어난 그날은 진짜 손을 놓아버렸지만 항상 자기를 데리고 놀아주고 돌봐주었던 형을 생각해낸 것이다. 냄새로 기억하고 냄새로 떠올리는 시공간, 어떤 연결성과 소속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사랑. 샘은 자기 손을 놓아버린 어릴 적 형도 '그게 뭐 어때서'라며 아무렇지 않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향나무 냄새가 불러준 기억으로 다시 얻는다.
조향사 김태형은 후각에 대해 이렇게 쓴다.
후각은 매우 중요하지만 은연중 우리가 당연시하여 잊고 있는 공기와 같은 감각이다. 후각은 우리의 기억이나 추억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뇌를 컴퓨터라고 하고 수많은 기억을 암호가 걸린 파일들이라고 할 때, 후각은 비밀번호가 빼곡히 적힌 암호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후각 세포는 5가지 감각 중에 가장 종류가 많아 제일 복합적이고 다양하게 자극을 받아들일 수 있다. (43쪽)
어쩔 수 없이 싫어하는 향기와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향기를 써둔 장이 재미있다. 자신을 시크하게 드러내보이는 방식이랄까. 한번 해보면 자기정체성을 좀 들여다볼 수 있을 듯. 좋아하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 무언가가 정체성을 더 잘 보여준다고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살내음을 좋아하는 저자는 씨벳 향을 싫어하네. Civette은 에티오피아가 본 서식지인 사향고양이의 사향샘에서 얻어낸 아니말 계열 원료로 동물이 죽어야만 얻을 수 있기에 인위적으로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 뒤에 설명해두었다. 원료 자체는 무겁고 강한 냄새가 나지만 소량 사용하면 향수에 따스함과 관능적인 매력을 불어넣는다. 오리엔탈 향수와 잘 어울리며 겔랑의 향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원료라고 한다. 나도 겔랑 향수가 좀 부담스러웠던 이유를 알겠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향기는 뭘까. 얼른 떠오르는 게 생선 굽고 난 후 집안에 배는 비린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향만 써볼까. - 밥 짓는 냄새, 커피향 퍼지는 냄새, 빵 굽는 냄새, 버터 녹는 냄새, 고양이 털 냄새, 튜베로즈와 일랑일랑 향, 포구 비린내, 여름장맛비 냄새, 아기똥 냄새, 프리지아 향, 라벤더 향, 건조기에서 꺼낸 빨래 냄새, 피톤치드 향, 베이비파우더 향, 연필 깎을 때 나는 향, 외할머니가 보글보글 끓여주셨던 된장찌개 냄새, 사랑하는 사람의 땀냄새 그리고 중고책 냄새와 새 책 냄새.
그라스Grasse는 오래전 읽은 소설 <향수> 이후 알게 된 곳이지만 가보진 못했다. 그라스의 3대 향수박물관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찾았다는 일화로 유명한 몰리나르Molinard, 270년의 역사를 간직한 갈리마르Galimard 그리고 프라고나르Fragonard. 프라고나르는 전통적 방법을 고수해 생산하는 향제품뿐 아니라 패션 분야로 라인을 확장해가며 사랑 받고 있는 브랜드. 시간 맞춰 가면 무료로 공장 견학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라스 출신의 화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이름에서 따왔다. 찾아보니 18세기 프랑스 풍속화가로 유명한 분이네. 상당한 암시를 군데군데 그림에 숨겨두고 세태를 풍자했다. 향수 좋아하는 나, 향수 뿌리길 한동안 잊고 있었네. 저자가 시향을 권하는대로 프라고나르 향수 하나 바로 주문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젊은 시절 자화상

프라고나르 작 1766경, 그네타기
Nez는 코를 의미하는 프랑스어이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로 조향사를 가리킨다.
그렇다고 우리는 음악가를 귀에 비유하거나 축구선수를 다리에 비유하지 않는다. 나는 조향사에게만 허락된 이 재미있는 표현이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조향사를 꿈꾸는 독자가 있다면 '그랑 네Grand Nez', 즉 '왕코'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자.(252쪽)
역시 뒷부분 N장에서 적어두었다. Nez라고 부르는 데는 왠지 더 전문적인 느낌이 배어 있어 장인다운 별칭이다. 굳이 붙여보자면 화가는 '손', 아니면 '눈' 작가는 '심장'이어야 할까. 왕손, 왕눈, 왕심장. 괜한 생각이... 만듦새도 저자의 기운처럼 맑은 이 책을 서곡 님의 페이퍼로 알게 되어 기쁘다. 김소진, 함정임 작가의 책도 함께 주문.

고 김소진 작가

김태형 조향사, 사진 샘터 기사에서 가져옴
조향사는 하나의 향을 그려낼 때 무언가를 공들여 담아낸다. 향수가 가진 진정한 가치는 그 무언가에 감동하고, 이어서 또다른 감동을 창출해내는 것에서 나온다. 내가 느낀 것은 바로 이러한 소통의 부재, 그리고 존중의 결여였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향수를 통해 더 아름다운 것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었다. - P19
나의 집은 10번지였다. 10번지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곳이었는데, 건물 가운데에 뚫려 있는 작은 정원 같은 공간 속 별채였다. 그렇기에 건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후 다시 정원으로 통하는 문으로 나가야지만 비로소 내 집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과정은 나에게 여전히 오묘한 감정으로 남아 있다. 나는 항상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한번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다른 문으로 나가야만 했으니 말이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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