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3.
73쪽에서 120쪽. 5,6,7파일 완료
한낮에는 제법 봄기운이 돌았다.

지금 사회의 중심에는 분명 섹슈얼리티가 있다. 오늘날 서구에서 섹슈얼리티는 정체성의 필수 요소로 생각된다. 섹슈얼리티는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하는지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의 일부이자 내 진실의 일부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Foucault가 『성의 역사History of Sexuality』에서 주장하듯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강조되는 건 역사적·정치적 힘이 작동한 결과다. 나는 늘 이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성애 운동은 여러 면에서 섹슈얼리티가 정체성과 존재의 주춧돌이라는 생각에 반기를 들며 자라났다. 비록 무성애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적 정체성이 되었기는 하지만, 이건 그저 개인의 섹슈얼리티에 신경 쓰기를 거부하는 삶의 양식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지향: 무성애 입문The Invisible Orientation: An Introduction to Asexuality』의 저자 줄리손드라 데커 Julie Sondra Decker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동력’만 없을 뿐 온전한 사람입니다. - P85

성격 결함이라는 중대한 요인을 두고 내 결정의 책임을 페미니즘에 묻는 건 솔직하지 않다. 동시에 내 선택이 성긍정 페미니즘의 특정 계통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순진하다. 내가 그런 방식으로 첫 성관계를 한 걸 후회하지않는다. 나한테 해가 되지 않았고 거의 생각도 안 나니까. 내가 치른 진짜 대가는 이 만남에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 내가 무성애라는 주제를 그렇게 어색하게 느꼈다는 사실, 다수가 무성애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 연장으로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아는 탓에 나 자신의 방어적 태도를 쉬지 않고 관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성규범성에 따르는 위험은 젊은 여자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랑 첫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는 게 아니라(난 여기에는 신경 안 쓴다) 여자에게 들이미는 존재 방식의 규칙이 적어지기는커녕 더 많아진다는것이다. 내게 영향을 미친 건 하룻밤 잠자리가 아니라 애당초 하룻밤 잠자리로 나를 이끈 그 가정들이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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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2-15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쪽 낭독.....와 얼마나 시간이 많이 들었을까요? 프레이야님 음성 진짜 듣고 싶어요^ ^

프레이야 2024-02-16 09:48   좋아요 1 | URL
얄라님 안녕하세요. 들으시면 ^^
소설 문장이 아니고 처음 만나는 용어랑 주석도 있어 발음 정확히 하려고 신경 썼네요. 한 파일에 한 시간 걸려요 ^^ 봄입니다.

2024-03-16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6 15: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6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17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2.2 시작 이 달 안에 마치려고 계획 중
72쪽 4파일까지 완료.
앞으로 13시간 정도 더 소요될 듯.

≫ 끌림의 세 가지 주된 유형에 더해 무성애자는 접촉 끌림이나 관능적 끌림, 정서적이고 지적인 끌림 등도 논의한다. 끌림을 더 작고 작은 요소로 분리할수록 욕망의 구성 요소를 더 고찰하라는 과제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언어의 구체성은 우리가 원하는 것과 관심이 생기지 않는 것을 더 면밀히들여다보도록 우리의 등을 떠민다. - P58

‘무성애자’ 이름표는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 단지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데 그쳐야 한다. 그러나 ‘무성애자’는 조롱거리이자 부정적인 속성을 의미한다. 정열이 없다, 뻣뻣하다, 지루하다, 로봇같다, 차갑다, 내숭 떤다, 불감증이다, 결핍이 있다, 망가졌다 같은 속성. 이런 속성들, 특히 ‘망가졌다‘는 남들이 우리를 보는 인식과 우리 스스로 품게 되는 느낌을 설명할 때 무성애자들이 몇 번이고 사용하는 단어다.
무성애에서 이런 관념들을 연상하게 된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는 성 상품화로 이어진다. 성은 잘팔리고, 다른 걸 잘 팔리게 한다. - P72

나는 계속해서 폴란드 철학자 알프레드 코르집스키 AlfredKorzybski의 격언으로 돌아간다. "지도는 땅이 아니다." 긴장과 가능성을 모두 품은 말이다. 지도는 실재하는 세상을 단순화해 재현한 것이며, 실제 땅은 언제나 화면에 표시된 것들보다 풍성하다. 그러나 지도와 단순화는 여전히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모든 모형은 틀리지만 그래도 일부는 유용하지 않은가. 모든 재현에는 한계가 있으나 비교적 훌륭한 재현이라면 시선의 폭을 넓혀준다. 지금은 새롭고 더 상세한지도가 필요한 때다. 이 한층 엄밀한 지도를 무성애가 제공하지만, 지도는 그래도 지도일 뿐임을, "무성애 세계에 어서오시죠."라는 구절은 부정확한 표현임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단일한 무성애 세계는 없다. 적절한 표현은 "무성애의 여러 세계에 어서 오시죠."다. 이해로 향하는 수많은입구의 하나에.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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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2-12 0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한국말로 옮긴 책 녹음하시는군요 멋지네요 따님도 좋아하시겠습니다 이달에 이 책 녹음 잘 끝내시기 바랍니다 프레이야 님 남은 연휴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4-02-12 08:49   좋아요 2 | URL
고마워요 희선님. 옮긴이 박희원 이라고 읽는데 왠지 찡하더군요. 목소리 흔들여 다시 읽었어요 그 부분. 연휴 마지막 날 편안히 보내세요.

자목련 2024-02-15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뜻깊고 의미있는 특별한 낭독이네요^^

프레이야 2024-02-15 16:1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자목련 님. ^^
제법 봄 기운 완연하다고 말하기엔 서귀포엔 제법 바람이 불어요. 그래도 햇살 좋은 날입니다.
 

2023.6.29 녹음완료 총14파일

신형철 님은 윤상 덕후^^
그를 닮고자 하는 자신이 “내가 가장 덜 싫어하는 나”라고 쓴다.
가치 있는 인식, 정확한 문장, 공학적 배치.

다음 도서는
하루 한 장 고전 수업 / 조윤제 지음
녹음시작 2023.6.29
1,2,3번 파일(59쪽)

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머리말에서 글쓰기의 단계별 준칙을 이렇게 정리해본 적이 있다. (물론 내가 쓴 글들은 내가 설정한기준에 언제나 미달한다.) 첫째,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좋은글이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은 취향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뜻한 바를 백 퍼센트 담아낼 수 있는 문장이 써질 때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공학적으로 배치할 것.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이도록 만들어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가지 요건은 내가 윤상의 음악에서 경탄하며 발견하곤 하는 것들이다.
첫째, 글에서의 인식은 음악에서의 주제theme와 같다. 존재할 가치가 있는 독창적인 주제 라인을 거의 모든 음악에서 생산해내는 작곡가는 흔하지 않다. 이례적인 코드 워크를 구사할 때조차도멜로디의 대중적 설득력을 잃지 않는 것이 대중음악가 윤상의 자의식이다.
둘째, 정확한 문장에 대응되는 것은 정확한 사운드다.
윤상덕후들은 사운드에 대한 그의 집착이 거의 괴담 수준의 것임을 잘 안다. 《인센서블》 3부작에서 각 트랙에 프로그래밍된 드럼비트는 너무도 적절해서 다른 버전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배반>에서부터 <소심한 물고기들>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사운드 소스는 마치 처음부터 이 음악에 쓰이기 위해 기다려왔다는 듯이 그곳에 있다. 셋째, 구조적 완결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자. 모든것이 정확히 선택돼서 최상의 방식으로 조합돼 있을 때 그것에 변경을 가하는 일은 불필요하고 불가능하다. - P253

지금껏 윤상의 음악을 재편곡해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은 사람은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바로 윤상 자신이다.

나는 그를 닮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나‘는 내가 가장 덜 싫어하는 ‘나‘들 중 하나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우리가 자신의전부를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워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의 내가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보들레르의 시나 모리 오가이의 소설을 읽을 때의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이 자기라는 존재를 긍정하는 입구였다고 고백한다. "사랑이란 상대의 존재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게 해주는 것이다."(『나란 무엇인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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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시작 2023.5.24.
총326쪽 중 오늘 13번 파일까지 녹음 완료 311쪽
14번 파일 중간 정도로 이 책은 마칠 것 같다.


각 꼭지를 이끄는 시가 한 편 있고 저자는 그 시를 겪어낸 자신과 자신이 통과한 세상을 시를 통해 풀어낸다. 아는 시도 있고 새로이 읽히는 시도 있고 처음 본 시도 있다. 레이먼드 카버와 무라키미 하루키의 우정도 시로 연결된다. 녹음하다보면 보통 산문은 20쪽 정도가 한 파일에 담기던데 이 책은 시가 있어서인지 25쪽 정도가 한 파일이 된다. 하나의 파일은 문단이 바뀌는 지점에서 30분 분량 전후로 담는다.



시를 정의하는 문장은 다양하겠지만 시는 결국 살아가는 일, 인생이라는 역사의 주체이자 객체로 살아내는 일에 대한 자문자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기 위해 시를 쓰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덜 외로울 수 있는 길을 슬며시 또는 격하게 일러주는 듯도 하다.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각성도 인생을 좀 산 사람의 나이가 되면 동감된다. 이제는 그런 지점에 온 것도 같으나 아직도 길은 멀다. 타자로 사는 일에 더 친숙해져야 하겠다.
“여하튼 작취미성의 시간만큼 우리가 삶의 진실과 가까워지는 때도 드물 것이다. (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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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6-15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녹음?! 읽으면서 녹음을 하시는 건지요? 무슨 녹음인가요?! (궁금)
그나저나 이 책 리커버 나온 거 이 글 보고 알았는데 이전 커버가 훨씬 예쁜 것 같아요. 나 아직 안샀는데 왜.....😭

프레이야 2023-06-15 12:03   좋아요 2 | URL
리커버가 더 이쁘네요 ㅎㅎ
점자도서관에서 만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도서에요. 네. 제 목소리로 바로 녹음됩니다.

페크pek0501 2023-06-15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의 역사, 오늘 저도 이 책 수십 쪽을 읽었어요. 깊은 울림이 있는 글이 많아요. 그래서 천천히 읽게 되지요.
프레이야 님은 스토너 읽으셨죠? 녹음하신다고 하니 스토너를 해 보시면 참 좋겠단 생각이 드네요.
오디오북으로 잠깐 듣다가 반해 버려서 종이책을 사기로 했어요. 한참 스토너의 리뷰들이 많이 올라오던 때가 있었는데
제가 많이 늦답니다.^^

프레이야 2023-06-15 22:45   좋아요 0 | URL
스토너는 아마 이미 음성도서로 나와 있을 것 같아요. 물어보고 안 나와 있다면 도전해 봐야겠네요. 도서관 측에서 회의 거쳐 녹음도서로 선정되어야 진행되어요. 저는 일단 권해봐야겠어요.
인생의역사, 참 좋더군요. ^^
 
탐닉
아니 에르노 지음, 조용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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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닉 / 아니 에르노 / 문학동네
낭독녹음 시작 2023. 4.12.
완료. 2023.5.17. 총358쪽



녹음하며 가장 많이 발음한 단어는 “전화”다. 먼저 연락할 길 없이 35세 러시아 남자에게서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48세 여자의 일기 대부분은 전화가 왔다 혹은 전화가 오지 않는다,로 시작한다.

페이퍼 제목으로 쓴 문장은 원제가 “Se Perdre”인 이 책의 125쪽 마지막 문장이다. 번역 제목이 좀 더 유혹적이긴 하지만 원제 그대로 “길을 잃다”로 번역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아무튼 에르노가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일기를 공개한 이유가 숨어 있을 듯.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좀 더 내밀한 감정들, 우리 중 누군가에게도 원초적으로 비슷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기에. 1988.9.27. 시작해 1990.4.9. 월요일의 일기로 맺는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이 나오고 10년이 흘러 잊고 있던 일기장에서 나온 <탐닉>은 같은 남자와 같은 화자(에르노 자신)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실제 겪은 것만 쓰겠다고 공표한 에르노가 밝혔듯 자신의 실제 이야기이고 지독하게 솔직하게 보이는 방식을 취한다. 자신의 욕망과 욕망에서 오는 고통과 열정에, 그리고 미테랑 대통령이 말했다는, 자기 앞에 둔 시간 즉 젊음을 붙들고자 하는 열망에 솔직하게 보이는 방식이다. 예리한 칼로 저며내듯 고도의 전략이고 따라가기 어려운 특허품. 아, 아니 에르노, 바로 느껴지는 문체. 이 모든 욕구는 결국 글쓰기를 위한 욕망이고 또한 글쓰기가 욕망을 유지하게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 현재를 살아내는 일.

345쪽 이 책의 결미 마지막 문장은 프라하성의 지하묘지로 들어가는, 영화 <카프카>의 카프카, 그 심연을 소환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 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 문
같은. ”

언제쯤이나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사물을 관찰할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내가 지금 쓰고 있는 것들을 더는 쓰지 못할 것이다. 그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열정, 욕망, 질투가 빚어내는, 너무나 미세한 인간적인 움직임에 유의할 수 없을 것이다.
오후 끔찍한 기다림. 욕망과 공허. 비육체적인 욕망을 내 몸에서도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젖어 있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으로 텅 비고, 울고 싶을 정도로 나 자신과 분리되어 있다. - P182

질투의 심연과 강렬한 비애. 열여섯 살 때 적어놓았던 프루스트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비애란 끊임없이 저항할수록 점점 더 그 마수에 빠져들어, 지하 통로를 통해 당신을 진실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말없는 하인 같은 존재다. 죽음을 만나기 전에 진실을 만난 사람들은 행복하다." 혐오와 슬픔 속에서 서너 번 자위행위를 한다. 그래도 슬픔은 남고, 그로 인한 피로감 때문에S가 평범한 바람둥이인지 아니면 ‘유혹할 만한‘ 남자인지에 대한 불확실성 사이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소문대로 쿠바 여자들이 저돌적이라면 두 가지 불확실성 사이에서 고민할 필요도없다. - P185

원인이 꼭 S인 것은 아니다. 우리 관계에 관한 성찰이 조금은 가능해진 현재로서, 글을 써야 한다는 절대적필요성과 4월 말부터 생긴 삶의 고통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죽음, 창작, 섹스가 뒤섞여 있는 구덩이 속에 빠져서, 그 상황을 빤히 보면서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체험을 엮어서 책으로 내야지. - P194

우리가 매번 만날 때 일어나는 일들의 세부사항과 생각들을 적어놓을 걸 그랬다. 1) 내가 입었던 옷, 2) 내가 준비했던 음식.
3) 그가 도착했을 때 내가 있었던 장소. 삶을 낭만적인 문학의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아름다운 연출, 아직도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
3시 10분, 아직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 P220

이렇게 해서 오늘, 스물여섯 해 동안 기록해온 내 일기의 녹음이 현재의 시점과 만났다. 이것은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다만 자기중심적인 고통을 펼쳐놓은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것을 통해 인류의 나머지, 다른 사람들과 교감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P243

나는 이 열정을 1년 동안 살았다. 다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여름을, 7월 중순부터 온 여름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해 이 열정에 바쳤다. 또 한번 전율하며 자문한다. "현재란 무엇인가?" 현재는이곳에 존재한다. 그것은 버거운 미래와 두려움이다. 그를 볼 것이라는 행복감과 서너 시간의 만남이 흐른 후에 그를 더이상 볼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감. 멍청한 노래 한 곡이 머릿속을 맴돈다. - P253

찬란한 가을 햇볕 아래 반짝이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끝없이 작년을 생각한다. 이 열정으로 내 인생의 걸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것이 걸작품이길 바랐기 때문에 이 관계가열정이 된 것이다(미셸 푸코:"최고의 선은 자신의 인생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 P256

또한 내게 글쓰는 작업은 도덕적 기능을 지닌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글쓰기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랑의 모험을 원치 않았다. 오랫동안-아직도 그렇지만글을 써왔기 때문에 쾌락적인 삶은 내게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내 남편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그가 글을 쓰지 않기 때문에 용서했다. 글을 쓰지 않는 인생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걸 빼고는. - P267

내가 머물 곳은 어디인가, 사랑은 오직 죽음을 대가로 존재한다ㅡ크리스타 볼프(『어디에도, 그 어디에도 없는 곳)
그녀는 또 이렇게 이야기 한다 때때로 나를 보완하기 위해서 나는 나머지 인류를 필요로 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모자라는 부분 때문이다 - P274

S가 떠난 후로 거의 냉동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리움과 추억과 사라진 애정으로 눈물 흘리다. 한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한꺼번에 몇 해를 늙는다는 것, 그가 있었을 때는 흐르지 않았던 그 모든 시간을 한꺼번에 늙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상상 속의 시간들을 한꺼번에 늙는 것이다. 이 욕망은 내가 어쩌면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동화 같은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되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 P315

10~11월 일기장을 다시 읽는다. 벌써 이렇게 많은 것을 잊었다니. 보르헤스의 너무도 아름다운 이 문장, "수십, 수천 세기의 시간이 흘러가지만,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현재뿐이다. 공기 중에, 땅에, 바다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바로 나한테 일어난 일뿐이다." 나는 그 뜻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현재, ‘현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올여름 내내 자문했다.
오로지 나 자신…… 너무나 확실하다. - P318

아버지는 계급에 대한 의식이다. 출신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열두 살의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사건은(아니지, 나는 그걸 알고 있었어. 설명 가능한 일이었어) 그 나름의 동기를 가지고있었다. 내 어머니의 공격성, 그녀의 신분상승 욕망,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 - P337

지난 11월 6일 (내가 S를 마지막으로 본 날) 이래 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럼에도 이 행복이 아무 동기가 없다는 사실이 약간은 나를 슬프게 한다. 어쨌든 쓸 것을 어떤 한 가지로든 정해야겠다. 이제 그만 망설여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위험한 어떤 것을 쓰고자 하는 욕구. 마치무슨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꼭 들어가야만 하는 지하실의 열린문 같은.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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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5-18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글을 본 적 없지만 자기 일을 솔직하게 쓴다니 쉽지 않은 거네요 처음부터 그런 글만 쓰겠다 생각하다니... 아무도 따라하기 어렵겠습니다 아주 없지는 않겠네요 전화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힘들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3-05-18 19:59   좋아요 2 | URL
애착과 욕구가 있으니 기다림이 있겠지요. 기다릴 일이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도요.
희선님 이곳엔 하루종일 부슬비가 내려요.
에르노는 읽을수록 늪입니다.

페크pek0501 2023-05-18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어 보지 않았는데 호기심은 생깁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솔직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거든요. 장바구니에 담겠습니다.^^

프레이야 2023-05-18 20:03   좋아요 0 | URL
솔직을 연필 삼아 쓰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간혹 구체적 묘사에 확 놀랍기도 합니다. 그보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게 매력이랄까요. 자신의 이야기를 써도 자기검열에 먼저 걸리기 마련인데 말이죠. 이 책부터 읽으면 별로일 수도 있어요 페크님.

그레이스 2023-05-18 23: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탐닉, 집착, 단순한 열정 중 단순한열정만 읽기로 했는데... ^^*

프레이야 2023-05-19 12:11   좋아요 1 | URL
단순한 열정, 예전에 읽고 올해 초 영화도 봤어요 그레이스 님 ^^

얄라알라 2023-06-0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의 음성으로 접하는 아니 에르노는?^^ 바쁘실 텐데, 신경쓰실 일도 많으실 텐데
나눔의 열린 마음으로 사시는 모습에서 자극받습니다 ~~

프레이야 2023-06-05 17:18   좋아요 1 | URL
얄라님 안녕하세요 ~ 깊고 넓은
독서생활에 늘 박수 보냅니다. 여름인가 싶을 정도로 한낮 기온이 높네요. ^^

2023-06-05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