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이래저래 정신없이 페이퍼가 밀렸다. 일단 미뤄두고 간단히라도 한 가지만 기록하자. 설날을 맞이하야 내일은 음식준비를 하고 뭐 마음이 또 분주해진다.
방전된 느낌이랄까, 뭔가 기가 빨리는 느낌이 들어 연료를 채울 필요성이 느껴졌다. 훌쩍 2박 3일의 제주 여행을 하고 돌아왔더니 일상은 그대로 나를 반겨주었다. 물론 우리집 고양군 모꾸 일명 꾸돌이도 아무렇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슬쩍 내 바지에 부비적거렸다. 잘 다녀왔냐옹. 제주에서 길냥이들을 볼 때마다 요 녀석 생각이 나서 말도 걸고 그랬는데 간식을 들고 가지 않아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 특히 성격 좋던 하북포구의 뚱냥이 녀석, 미안하다. 뭐 좀 내놓고 가라고 그렇게나 애옹거리며 다가왔는데 ㅜㅜ
이번엔 조천 쪽에 숙소를 두고 다닐 생각이었다. 제주에 내린 첫날은 보슬비가 내렸다. 공항에서 우산을 사고 렌터카 찾으러 가는 버스에 올랐다. 금방 빗방울은 잦아들었고 함덕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만춘서점에 들렀다. 1호점과 2호점이 나란히 조금 간격을 두고 있는데 2호점에서는 구매한 책을 창가 테이블에 앉아 읽을 수 있다. 나처럼 혼자 온 아짐이 열심히 책 읽고 있었다. 무슨 책인지는 모름.
김승옥의 <차나 한 잔>
한 권만 골랐다. 민음사 쏜살문고. 부피가 작아 가볍게 여행에서 읽기에 좋다.
단편 4개가 실려 있다. 서울의 달빛, 야행, 차나 한 잔, 서울 1964년 겨울.
숙소에서 자기 전에 읽었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성감수성이 어떻고 할 대목들이 많지만 60년대 중반이란 걸 감안하고 흥미로운 단편들. 현대 지식인의 허약한 민낯을 심연에서 건져올려 까발리는 느낌이다.
비단 이런 부류에게만 국한된 것일까나. 뭔지 모를 힘에 떠밀려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느끼는 섬 뜩한 두려움... 젊음이란 게, 여생이란 게 어두운 미로를 더듬어 나아가야 하는 일이지. 두려움은 삶의 종결지점까지도 가시지 않을걸.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 다. 슬픈 추억일 때는 고즈넉이 의기양양해지고 기쁜 추억일 때는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진다. - 서울 1964년 겨울, 중
서점을 나와 바다쪽으로 걸어가는데 비를 맞아 털옷이 축축한 고양이 한 마리가 음침한 눈으로 소나무 아래 앉아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내가 서서 바라보니, 나를 잠시 쳐다보다 이내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일을 한다. 추워 보이고 어딘가 몸이 불편해 보였다. 울집 냥이와 달리 길냥이들에게서 느끼는 공통점은 눈빛이 흐리고 눈을 바로 뜨지 못한다는 사실. 몸이 좋지 못하면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는다. 불쌍한 녀석들.
전이수 카페갤러리 '걸어가는 늑대들'에서 이수와 동생 우태의 글과 그림에 놀랐다. 2008년생 물고기자리 이수는 동화작가로 이미 알려져 있다. 현재 15살인데 미래가 기대되는 공감능력 천재다. 사람의 마음 곁에 이토록 따듯하게 다가가서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능력이 부럽다. 결국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런 것이어야 하리. 이수는 글을 항상 먼저 쓰고 그 글을 그림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우태는 이수보다 좀더 활달하고 느긋하고 당당하다. 이수는 4남매의 맏이답게 진지하고 의젓하고 섬세하다. 배우 김고은과 류준열을 섞어 닮은 얼굴에 눈웃음이 밝고 귀엽다. 머리는 소아암 환자를 위해 기른다고 한다. 홈스쿨링을 하는 부모의 교육관도 범상치 않은데 어른에게도 존대어를 강요하지 않고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두지 않는다. 우리는 무슨 말이든 생각이든 표현하지 않고 삼가는 게 몸에 배었는데 참 괜찮은 방식이다. 그림이 하나같이 밝고 따뜻해서 마음을 토닥여준다. 어른들이 미처 하지 못한 생각을 온기있고 진지하게 표현할 줄 안다. 그림 옆에 놓인 글은 더욱 그렇다. 사전 예약하고 인원수대로 입장.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거문오름은 한 달 전에 예약을 하고 와야했다.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온세상이 음소거된 듯 조용한 아침을 맞이한 다음날 산굼부리에 올랐다. 억새가 바람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제법 나긋한 풍경을 연출했다. 몸도 마음도 시원했다. 점심을 먹고 1100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길에 서서 바라본 한라산과 고지에서 본 맑은 하늘, 잔설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올라가면서 좌측으로 눈여겨 봐두었던 카페, 내려오면서 '고도500'에 들러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측 옆에는 신비의 도로다. 좌측 옆 신축 타운빌리지가 꽤 괜찮아 보였다. 훗날 이런 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날이 따스해 테라스로 나와 앉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냉장고 언제 오냐고. 오래된 냉장고 탓인지도 모르고 식혜가 자꾸 상한다고 하셨던 엄마다. 어제 숙소에서 주문을 하고 며칠 후 배송받기로 했는데 기다려지는지 또 확인을... 전화기 단절이 안 된다. 검색도 하고 전화도 받고 카톡도 받고 북플도 보고...
1100고지에서( 2022. 1. 26.아이폰12)
납읍초등학교 바로 앞의 원시림에 혹해서 세 번 갔던 납읍 난대림. 그보다 규모면에선 훨씬 큰 활엽수림 동백동산을 가려고 예정했다. 동백군락이었던 시절이 있어 이름이 동백동산이지만 전체적으로 동백보다 화산암 위에 활엽수림이 형성된 선흘리 곶자왈 지역이다. 이곳도 제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된 곳. 곶자왈은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곶은 숲, 자왈은 바위. 그러니 제주에 곶자왈이 여러 곳이었던 것. 마스크를 벗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올랐다.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누워 있었다. 뿌리 쪽에 박인 돌덩이들이 곶자왈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래 사진) 동백동산 입구에서 먼물깍 쪽으로 올라서 한 바퀴 걷는 데 100분 정도 걸렸다. 사람손이 닿지 않은 숲이고 사람도 없어 살짝 무서웠지만 올라가다 보니 그런 기분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먼물깍을 지나고 부터 가끔 한두 명이 맞은 편에서 내려왔다. 곳곳에 뱀조심이라는 표지판이 있었지만 뱀은 겨울이라 그런지 한 마리도 안 보여 다행이었지.
동백동산, 쓰러진 나무 (2022.1.27.아이폰12)
동백동산에는 도틀굴이라는 지하 굴 입구가 있다. 4.3사태 때 양민이 숨어 있었던 곳 중의 하나이다. 숲을 빠져나와 낙선동 4.3성과 너븐숭이 4.3기념관, 북촌포구, 화북포구를 둘러 곤을동 환해장성과 4.3유적지로 갔다. 조천은 특히나 당시 엄청난 핍박과 희생이 따랐던 곳이고 그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당시 쫓겨났다가 허락을 받고 들어오면서 직접 돌을 날라 쌓은 낙선동 4.3성에는 붉은 눈물처럼 동백이 처연하게 떨어져 있었다. 너븐숭이 기념관에서는 제주4.3평화공원에서와는 좀 다른 전시가 되어 있었다. 강요배의 그림 '젖먹이'가 입구에 걸려 있고 현기영의 <순이삼촌>이 초판본과 번역본까지 전시되어 있다. 특히 북촌마을에서 사태의 기점이 되었던 구체적 연월일 시간과 사건이 적혀 있다. 음력 1948년 12월 19일. 이후에도 침묵을 강요당하고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 국제법상에도 어떤 이유에서든 제노사이드는 금지되어 있다. 기념관 맞은편에 애기무덤들 그리고 추모비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무거워진 마음을 덜어주려는지 북촌포구로 이어지는 바다가 무심하게 찰랑거리고 하늘이 유난히 파랗고 흰 구름이 시시각각 변주하며 하늘에 붓칠을 해대었다.
애기무덤을 지키는 수선화(2022.1.27. 아이폰12)
너븐숭이로 간다니 그전날 귤을 한 그릇 갖다준 펜션 주인장이 친절하게도 인근 카페를 추천해 주셨다. 아라파파 a la papa. 프랑스어로 천천히, 한가로이라는 뜻. 바다가 바로 눈앞. 카페에 가면 비치해둔 책을 보는 편인데 여긴 과월호 채널예스가 여러 권 있었다. 주인장의 취향을 알 수 있는 대목. 정유정 소설가 인터뷰가 마음에 들어왔다. 인간심리에 관심이 많고 <완전한 행복>은 욕망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고. 2년 후 나올 두 번째는 미래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한다. 계획대로 될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강단이랄까 배짱이 느껴졌다. 세상의 비위를 맞출 생각은 없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이 좋아해주길 바라지 세상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쫓아다니며 쓸 생각은 없다는 작가다. 불안해도 어쩔 수 없다고 한다. 다 써 놓고 아름다운 문장은 지워버린다는 인터뷰를 본 적도 있다. 이거 저거 좀 보면서 바다멍도 하고 화북마을 곤을동으로 달렸다. 화북포구에 잠시 차를 대자마자 붙임성 좋은 치즈냥이가 애옹대며 다가왔지만 줄 게 없었다. 그걸 눈치채고는 저만치 가서 야속하다는 듯 쳐다보네. 에고 맨날 깜박하지 말고 간식 넣어다녀라 좀!!
아라파파 앞마당(2022.1.27 오후 1시경)
곤을동4.3유적지에서 나와 화장실 갈 겸 근처 카페에 갔는데 뜻밖의 이런 책.
우지현 작가가 명화와 함께 나란히 짧은 글을 실어 놓았다.
우지현 님은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 표지를 그린 분이네.
<풍덩!> 책장을 넘겨보다가 골라놓은 그림들에 마음 끌렸다.
특히 모네의 스승이자 인상주의 시초, 외젠 부댕의 에트르타 바다가 6년전 추억을 불러 주었다. 모네는 5살 때 부댕을 만났다.
모네의 일출과 부댕의 일몰을 대조해 보는 것도 재미나다. 평생 어딘가에 빠진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의 바다에 빠져 평생 그 바다 풍경을 그린 부댕은 말년에 자신이 태어났던 항구마을 옹플레흐에 머물며 항구와 바다를 그렸다. 부댕의 그림에는 격정적이거나 평화로운 하늘과 바다와 구름이 살아 있다. 한시도 같은 풍경이지 않다. 항구가 그림 같던, 항구를 그리는 화가들이 캔버스를 놓고 서서 열심이던 옹플레흐에는 에릭 사티 박물관이 있다. 항구에서 목조 까트린성당을 지나 조금 오르막 골목으로 걸어 한 바퀴 돌아내려와 에릭 사티 생가가 있는 골목으로 내려왔다.
에트르타에 닿았을 때는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며 항구마을의 분위기를 흠뻑 적셔 주었다.
외젠 부댕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던 르 아브르의 앙드레 말로 미술관 MuMa는 오르셰미술관 다음으로 인상주의 그림을 많이 보유한다. 그 때 보았던 외젠의 그림 속 바다와 항구, 폭풍과 구름 그리고 풍경 속의 고독하거나 강인한 사람들의 평범한 인상이 강렬하다. 지금은 다소 흐릿해진 추억을 한 장의 그림이 소환해 주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지. 미술관에서 눈여겨 보였던 건 부댕의 그림만이 아니었다. 노인분들이 유독 눈에 띄었고 모두 진지하게 감상하고 있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에트르타의 이 코끼리바위를 배경으로 그림을 자주 그렸다고 하는데 우지현의 <풍덩!>에서 발견한 이 그림은 그때 미술관에서는 본 기억이 없는 그림이다.
2016. 7월초 앙드레말로미술관 외젠 부댕 특별전(윗층에서 아래로, 아이폰 촬영)
르 아브르 항구의 일몰/외젠 부댕/1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