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전복》
- 전복(全鰒)으로 무더위도 전복(顚覆)해 볼까
휴가철 도심은 태풍의 눈이 된다. 더위를 피해 인파로 들끓는 산과 바다를 비웃듯 조용한 휴처를 내어주는 곳이 휴가철 도심이다. 도심 바캉스를 즐기는 방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좋은 음식으로 재충전하기.
전국이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는 날, 서울에서도 어린 시절의 헙수룩한 골목 인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동네를 찾아갔다. 장충동이 그곳이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 내려 추억의 빵집‘태극당’을 지나 조금 더 가서 왼편으로 골목을 찾아들어가도 되지만 퇴계로로 들어선 택시는 웬 좁다란 골목이 보이는 입구에 부산사람을 내려주었다. “저기 저 위에 흰 간판 보이네요.”
정감 가는 낡은 골목 중간쯤, 흰색 바탕에 검정 파랑 캘리그래프로 《장충전복》이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將充 : 장을 충전하다> 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을미사변 때 구국 군인들의 충성심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진 제단, 장충(將忠)단에서 동음이의를 이용해 중의적으로 쓴 이 문구는 영리한 주인장의 아이디어겠지, 짐작하며 문을 열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난 때라 손님은 나 하나. 태풍의 눈 중의 눈이다. 20석 정도 좌석이 깨끗하게 배치되어 있고 주방도 오픈되어 있는 아담한 공간에서 주인장이자 주방장이 어제 만난 듯 인사를 한다. 곧바로 내어온 주요리 전복삼계탕은 한눈에 봐도 구미가 확 당긴다. 개업한 지 몇 달밖에 안 되었지만 주변 직장인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 점심시간이면 전복삼계탕을 찾는 식도락가들로 좌석이 꽉 찬다고.
다양한 종류의 전복요리 전문점 《장충전복》, 이곳 전복삼계탕은 특별하다. 전복내장을 갈아 넣어 진한 녹두색을 띄는 국물을 보고 녹두삼계탕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만 먹어보면 전혀 맛이 다르다. 윤기 나는 국물이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다. 이것저것 부재료를 많이 넣지 않고 전복 하나와 마르지 않은 알밤 반 톨이 담긴 모양새가 주인내외의 성품을 닮아 자랑을 삼가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우선 국물부터 담백하고 고소하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한 전복내장의 깊은 맛이 잘 우러나 아끼지 않고 재료를 풍성하게 넣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닭고기의 육질 또한 부드럽기 이를 데 없다. 전혀 잡내가 나지 않고 어린아이 살을 만지는 듯 연하다. 밑반찬으로 나온 김치가 맛있다고 하니 친정어머니가 좋은 배추로 직접 담근 것이라며 은근히 자랑한다. ‘국내산 배추’라고 써 붙여 놓으라고 하니 의아해하며 안 써놓으면 당연히 국내산이고 중국산이면 써놓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전복은 매일 새벽 노량진수산시장에서 공수해 오고 싱싱한 것으로 하루에 다 요리하고 남는 것은 아무래도 부부가 먹다보니 건강도 더 좋아진 것 같다고. 하루를 같이 시작하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또 각자의 시간도 틈틈이 가지는 이들의 등을 다시 돌아보았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길어져 인생 이모작, 삼모작을 준비해야 한다고들 한다. 오십대 고개를 넘는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과욕 부리지 않고 여유와 건강을 누리며 소박하고 조촐한 품위를 잃지 않기란 쉽지 않다.
이열치열로 전복삼계탕 그릇이 다 비어갈 즈음, 전복회 세트가 나온다. 먹기도 좋게 보기도 좋게 칼질한 전복살과 내장이 통째로 혀와 코를 감치고 돌아 남도의 푸른 바다를 불러준다. 세상에서 제일 맛난 건 살맛이라더니 일상에 지칠 때 한 끼 정갈한 음식으로 살맛나는 게 이런 기분일까. 조만간 또 찾게 될 걸 예감하고 서둘러 식당을 나왔다. 동공이 타들어갈 정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데 속은 든든하고 머리는 시원하다.
다른 곳에서 점심을 먹고 간 탓에 다 못 먹고 남긴 전복내장이 눈에 아른거린다. 전복 앞에서는 못 말리는 식탐이다. 서울로 도심바캉스를 가실 분들은 꼭 들러보시길. 방전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복도 지나고 말복으로 가면서 기승을 부릴 무더위도 이제 꼬리를 감출 일만 남았다. 우리 생의 무더위도 생각을 전복(顚覆)하면 제법 즐길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
사진은 장충동이 아니라 현재 시각 부산입니다.
무더위에도 건강히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