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거의 섹스리스 부부'로 알고 있는 지인의 집에 놀러갔다가
안방 침대를 장악하고 있는 프릴까지 요란하게 달린 퀸 사이즈 진분홍색 이불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막연하게 승려나 수녀의 그것 같은 간소한 침구를 기대했는데
도대체 어디서 그렇게 요란하고 수상쩍게 생긴 이불을 찾았는지, 의문이었다.
(참고로 그때 나는 미혼.)
그런데 그 의문이 조금 전에 스르르 풀렸다.
어떤 경로로 굴러들어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지인에게 이불 따위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진분홍색이든 프릴이 요란하게 달렸든......
이렇게 말하고 나니 또 다른 의문이 하나 새끼를 치는데.
그만, 여기까지!
왜 갑자기 이불 이야기냐?
오늘 아침 세탁하려고 호청을 뜯으며 가만 생각해 보니
두툼한 이불이 하나 더 필요하겠다 싶어 잘 가는 인터넷 쇼핑몰을 찾았다.
요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극세사 이불을 검색하다 보니
하나같이 분홍에 바이올렛 색상에 똑같이 생겨먹었는데, 한 상품이 눈에 확 들어왔다.
빨간색에 알록달록 요란한 무늬.
예전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색상이요 무늰데
내가 원하는 건 바로 저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찜을 해놓고 나서 아이들 이불을 살펴보니 역시나, 또 요란한 무늬의 상품이 눈에 들어오는 거다.
일단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은 후 페이퍼를 하나 쓰러 알라딘에 들어왔다.
'이불' 하면 일본 사소설의 선구로 불리는 다야마 가타이의 대표작을 빠트릴 수 없다.
1907년에 발표된 이 중편소설은 어린 여제자를 상대로 애욕에 몸부림친 자신의 경험을
그대로 옮겼다 하여 또 화제가 되었다.
여제자에게 애인이 생기자 질투심에 눈이 먼 주인공이 여제자의 아버지에게 알려
고향으로 데려가게 한 후, 그녀의 이불에 코를 박고 머릿기름 냄새 등의 체취를 맡는 모습.
과연, '자연주의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권태와 애욕은 이어달리기처럼 바통을 주고받는 걸까?
<이불>이 그렇게 읽고 싶었는데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숨이 턱에 닿도록 책방으로 달려가던 어느 날이 생각난다.
그나저나 빨간색에 이리 마음을 빼앗기는 걸 보니 나도 늙나보다.
아니면 권태냐, 애욕이냐,
어떻게 저런 이불이 눈에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