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차의 맛
오늘 오전 조조로 보려던 영화 <녹차의 맛> 예매를 부랴부랴 취소했다.
내 딴에는 이 동네에 살며 마지막으로 본다고 엄선한 영화였다.
그런데 한손으로 딸아이 밥을 먹이며 머리를 질끈 묶어주는데
아이쿠, 등짝에 찌르르 담이 왔다.
무거운 옷상자며 잡동사니 박스를 번쩍번쩍 들어도 암시랑토 않더니
한 움큼도 안 되는 딸아이 머리 꽁댕이 하나에 지랄이다.
모레 이산데 다행히 증세가 미미해 한나절 쉬어 주면 괜찮을 듯.
녹차 대신 커피를 곱배기로 타서 벌컥벌컥 마셨다.
전망 값
관리사무소 아저씨들이 요즘들어 아침마다 우리 집에 출근도장을 찍는다.
4년 동안 살면서 두 번인가 본 얼굴인데.
무슨 일이냐고? 안방 확장공사 한 것 때문에.
뉴욕 마천루가 부럽지 않다고 자랑질을 한 페이퍼도 있었지만
본의 아니게 확장공사를 하여 중간 문이 없는 바람에
안방 침대 위에서 창 밖, 직통으로 보는 전망이 꽤 괜찮았다.
사정이 있어 거의 맨손으로 서울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주제에
전망을 위해 쓸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사를 앞두고 어느 날 들렀더니 어떤 아저씨가 안방 창쪽으로 난 벽을
허물고 있는 게 아닌가.(순전히 실수로, 호수를 혼동하는 바람에......)
얼굴이 사색이 된 아저씨, 기본 재료값만 받을 테니
거의 허문 벽, 그냥 확장공사를 하게 해달라고 사정하여 우리 부부 그러라고 했다.
그 재료비도 만만한 액수는 아니었다.
거의 공짜로 확장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창가에 붙어 서서
비 오는 날은 비 온다고, 눈 오는 날은 저 눈 보라며 좋다고 웃었더니.
복구를 해야 한단다.
오죽잖은 전세금에서 일단 그 돈을 제하고 내줄 거라나!
오오래 전 읽은 고우영의 만화 <수호지>가 생각난다.
나쁜 짓만 일삼던 성게가 모처럼 착한 일을 한 번 했다.
그런데 그 착한 짓으로 인하여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이렇다카이, 이렇다카이, 목숨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 한다꼬,
내가 왜 안하던 짓을 했을꼬!"(대강 이런 뜻의 대사로 기억.)
더 기가 막힌 건 안방 확장공사 사실을 고지식하게 주공에 보고하지 않고 넘어갔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다는 아저씨의 말이다.
자신들이 보기에도 이 정도는 괜찮은데,
일단 신고를 했으니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니!
그 사실을 전하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화를 막 냈더니
책장수님 이런다.
4년 동안 좋은 경치 감상하며 잘 살았으니 됐다고.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화를 내면 무엇하나.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사실 다시 한 번 확인.
그것이 설령 창 밖에 펼쳐진 풍경이라도......
이 창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