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빗자루, 금붕어 되다 - A Broom Becomes A Goldfish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알라딘에 들어오니 오늘의 반값도서가 눈에 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19000원!)
나 개인의 독서 취향을 떠나 한번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들이 있는데
대개는 망설이다가 포기하게 된다.
얼마 전의 반값 도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그랬다.
'네가 꼭 읽고 싶은 책만 사서 읽어라. 반값 따위에 현혹되지 말고!'
그런데... 치사하게도 반값에 목을 매게 된다.
지난주 영화를 보러 가는 날, 출근길 남편의 차를 얻어 탔다.
책장수님은 지난해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두고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의욕 만땅이었는데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더 작은 사무실로 옮기고
딱 한 명의 직원이었던 영업자도 지난달 그만두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건 내가 싸주는 도시락을 쓸쓸하게 혼자 먹는다는 사실.
영화가 열한 시 시작이라 9시 30분에 출판단지의 한구석 남편의 사무실에 도착한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예쁜 여직원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는둥 흰소리를 해가며 청소를 마친 나는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남편을 만류하고 20여 분 극장까지 걷기로 했다.
몇푼 되지 않는 돈을 몇 개월째 계속 "한달만, 한달만!" 미루고 있는 출판사를 지나며
(영화 상영시간이 임박한 나머지 사무실에 들이닥쳐 담당자의 머리채를
확 잡지 못한 게 유감이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매일아침 백팔 배를 올리며 거룩하게 하루를 연다는
그 출판사 발행인의 얼굴과, 그의 이름으로 보낸 문자로 하루아침에 해고를 당했던
한 후배의 얼굴이 떠올랐다.
(종교나 철학과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의 방식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는 백팔 배를 하고 나서 냉정한 얼굴로 해고를 문자(전화)로 통보할 것을
직원에게 지시했을 것이다.)
<빗자루, 금붕어 되다>.
영화는 신림동 산꼭대기 '다붙어 고시원'의 1.5평(아마도) 쪽방에 세들어 사는
군상의 이야기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골목 담벼락에 찌라시 붙이는 일을 생계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반백의 중늙은이는
그 알량한 방 안에 작은 불상과 십자가와 금붕어 두 마리가 든 어항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다.
그 방안에서 알루미늄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으며 주전자에 오줌을 싸며
복권 번호를 맞추어보는 것이다.
불상은 요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중요한 사조의 한 트렌드, 혹은 인테리어의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소품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뉴욕의 한식당이나, 엊그제 한글날 특집 프로그램에서 본
디자이너 이상봉의 작업실에 떠억하니 자리잡은 불상은 나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고시원 원장을 구워삶아 총무 자리를 따내고 장필의 재산 중 절반인 6만 원을 빌리고
시치미 떼는 놈팽이가 입고 있는 티셔츠에는 존 레논의 캐리커쳐에다가
'EMAGINE'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요즘 내 처지가 처지이다 보니(몇푼 갖고 끌탕을 하고...)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는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고 속이고 있다가
부모에게 보여주기 위해 급하게 방을 빌리는 청년들에게 빌려주고 받아내는 몇 푼의 돈이
로또 당첨과 진배없어 보인다.
탁자 위의 불상과 십자가와 어항 속의 금붕어는
라면을 먹거나 수음을 하는 이 사내의 모습을 무심하게 지켜보고 있다.
우중충한 독립영화는 이제 가급적 보지 않으리라 결심했던 나는
'마치 CCTV를 설치해 놓은 것 같은, 불상이나 어항 속의 금붕어를 단 한 번도
클로즈업하지 않는 극도의 미니멀리즘'이라는 한 영화잡지의 소개에 심하게 마음을 빼앗겨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김동주 감독은 <염쟁이 유씨>라는 연극을 1천 회 이상 묵묵히 혼자 이끌어 가는
배우(유순웅)에 반해 그를 주인공 장필 역에 캐스팅했다고 한다.
관람하는 중에도 느꼈지만 이 영화는 재중 동포 감독 장률의 극사실주의 화면과 많이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