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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 -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ㅣ 대담 시리즈 1
도정일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느 날 '생명이란 무엇인가' 정의를 내리기 위해 사전 등을 수십 권 뒤졌지만
마음에 드는 답을 못 찾아 쩔쩔 매던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아이들이 보는
주니어 옥스포드 사전에서 해답을 얻는다.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기간, 그것이 생명이다.'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말들은 이렇듯 간명하다.
'대한민국 지성사 최초의 프로젝트'라는 문안과 함께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라는
부제가 붙은 책 <대담>은 우리나라 대표 인문학자 도정일 교수와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의
지난 4년 동안의 대담과 인터뷰를 열세 꼭지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주니어 옥스포드 사전의 '생명'에 대한 정의처럼 그들의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어 술술 읽힌다.
"인문학적 소양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능력"이라며 두터운 세계, 즉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열린 세계를 말하는 도정일 교수나, 생물학 중에서도 "진화론의 핵심은 생명의 다양성"이며, "올바른
진화생물학자는 생물의 우열을 가리는 기만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최재천 교수의 견해는
많은 부분 지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기분좋게 만나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소설인가 과학인가' 하는 주제의 대담에서는 "프로이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구라를 푼 사람"이라는 최재천 교수의 의견과, 일정 부분은 최 교수의 말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자기 이해방식에 도움을 준 건 틀림없다"고 프로이트를 옹호하는
도정일 교수의 입장이 약간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DNA는 영혼을 복제할 수 있는가' 하는 꼭지의 대담이었다.
영혼도 DNA의 산물이며 그것조차 유전자와 환경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는 최재천 교수는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없다고 생각하느냐?"는 자신의 질문에 도정일 교수가
명확한 대답을 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자 끈질기게 묻는다.
"영혼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 겁니까?"하고.
그리하여, "...혹독한 소리 같지만, 죽음이라는 현실 원칙 앞에서 인간이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고안해낸 일종의 자기기만이 영혼이라는 얘기가 되죠. 이 위대한 기만이 우리를 다독이고 위로합니다."
라는 대답을 이끌어낸다.
"유일성, 단독성, 독자성으로서의 마음 혹은 영혼은 복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언뜻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도정일 교수의 화려한 언변에 눌리는 것 같지만 최재천 교수도
기죽는 법 없이 할 말은 다 하고 있다.
"유전자 결정론으로 오해를 받은 것은 사회생물학이 자기를 소개할 때 실수한 거죠."
라는 도정일 교수의 따끔한 일침에 대해,
"꼭 실수만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설명이 무척 섹시했기 때문에,
그리고 굉장히 좋은 도구였기 때문에 휘두르다가 그것에 말려든 경향이 있어요."
하는 식으로 경쾌하게 넘어간다.
단일민족, 우리나라의 순수혈통신화에 대한 막연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들의 대담을 듣고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 보면 아무 의심 없이 어릴 때부터 습득하여 고수하고 있는 것들이 꽤 있다.)
과학과 인문학, 나아가 예술과 인생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두 사람의 대담을 통해 나의 생각을
중얼중얼 혼자 정리해 볼 수 있었던 것도 드문 독서 경험이었고.
마지막 장에서 두 사람은 '세계화의 그늘에서 말라죽는 대표적인 문화의 꽃이 언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데, 도정일 교수는 다음과 같은 말로 내 가슴을 철렁하게 했다.
--북미 인디언의 경우에는 사용자가 이제 단 한 사람만 남은 언어도 있습니다.
그 영감이 죽으면 그 언어는 영원히 사라지는 거죠.
그게 무어든 이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건 슬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