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이사 준비를 할까 하여 싱크대 서랍을 정리하니,
결혼할 때 친구가 챙겨준 행주가 눈에 띈다.
도대체 몇 년 전이냐?
30대 중반에 아르바이트로 약간의 용돈을 벌며 해가 지면 술집으로 노래방으로
친구들과 몰려다닐 때 그 허랑방탕한 세월 속에서 남편을 만났다.
(한 1년 그러면서 놀았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평소 얌전한 샌님처럼 보이던 남자가 어느 날 노래방에서 한 친구에게 무례하다고 화를 내는데
내 딴에는 싸움을 만류한답시고 몸치인 주제에 블루스를 추자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날부터 블루스 커플로 정해지고, 그게 결정적인 인연이 되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 내가 눈을 빛내며 나의 무엇이 그렇게 좋았냐고 물어보았더니
유흥의 마지막에 다른 사람 배려 안하고 먼저 택시를 잡아 타고 사라지는
쿨한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혹시 술 더 마시고 퍼질까봐 내뺀 것에 불과한데......
왜 하필 자기였냐고 물어보길래, 샌님같은 남자가 한 덩치 하는 xx에게 따끔하게
야단 치는 모습이 멋졌다고 거짓말을 했더니, 일생 딱 한 번 내본 화라고 한다.
그리고 살아보니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걸핏하면 내게 화를 내지만.
아무튼 우리는 서로에 대한 잘못된 오해로 맺어졌다.
운명적인 만남이 별거더냐?
오해로 연결되어 안 싸우고 그럭저럭 사는 것도 운명이지.
(행주 이야기 하다가 옆길로 샜다.)
결혼 선물로 이것저것 다양한 것을 받았지만,
먼저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고 있던 한 친구는 내가 보기에 참 이상한 선물을 해왔다.
'타파웨어' 밀폐용기 세트랑 칼, 도마, 주방가위, 행주 등.
자취를 오래 하고 있었다곤 하나 나는 그런 용품들에 관심이 없었다.
살림을 따로 장만하지 않고 쓰던 세탁기와 텔레비전을 그대로 가져가겠다 하니
옹색한 살림에 뭐라도 보태주고 싶었나 보다.
나는 친구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여기저기 챙겨 넣는 것을 보며
'진짜 선물은 뭘까?'하고 마음속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타파웨어가 얼마나 비싼 브랜드인지 꿈에도 모르고,
밀폐용기는 선물로 치지도 않던 낭만적인(?) 시절이었다.
행주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고!
그리고 몇 년 후에야, 그 보따리가 엄마 같은 마음으로 그녀가 꼼꼼하게 준비한
선물이었음을 깨달았다.(깨달음은 항상 너무 늦게 온다.)
결혼식과 관련되어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것.
사진 찍기에 꽤 조예가 있어 결혼식 스냅사진도 그녀에게 일임했는데
결혼식이 끝나고 며칠 뒤 그녀의 집에 강도가 들어 필름까지 모두 분실했다.
그래서 결혼 기념사진 몇 장 외엔, 친구나 하객과 찍은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어제는 싱크대 서랍을 정리했다.
맨 아래 맨 구석에 숨어 있던 면 행주가 한 장 나왔다.
결혼할 때 친구가 챙겨준 바로 그 행주 중 하나.
가슴이 뭉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