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대기업 비서실에 소속되어 5, 6년간 근무했던 적이 있다.
문학과 관련하여 큐레이터 비슷한 일들을 하는 문화재단으로 알았는데,
알고봤더니 재벌 총수 어머니의 문화활동을 위한 사조직에 불과했다.
60대 중반이던 사모님은 시조 창작에 열을 올리셨는데
당대의 유명 소설가, 무용가, 대학교수, 시인 들을 한 명씩 자신의 방에 불러들여
단독으로 강의를 들었다.
강의 후에는 상기된 얼굴로 사모님께 하사받은 넥타이니 스카프 선물을 들고
호텔 식당에 예약된 점심을 먹으러 따라 가는 그 유명인들이
내 눈에는 참 한심해 보였다.
한심해 보였다, 고 썼지만 월급을 받고 있는 입장이다 보니 나는 더욱 한심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아침부터 출근하여 행운의 편지를 몇 통씩 썼던 날.
대문 우편함에 꽂혀 있는 행운의 편지를 어느 고지식한 이가 읽고
사모님께 전해준 모양이었다.
손자 앞으로 왔으니 몰랐으면 모를까 찜찜해서 안 되겠다며
우리들에게 몇 통씩 할당하여 베껴 쓰게 한 것.
그때 나는 알았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 직원들이 가정부나 운전기사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걸.
(하나마나한 일을 했던 우리에 비하면 그들이 사실은 더 전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 지금에야 말이지만......)
한번은 유명한 원로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차량까지 보내어 모셔왔다.
시조잡지를 만들자는 둥 고문으로 모시겠다는 둥 흰소리를 하며 극진히 모시다가
몇 번 만나지 않아 시들해진건지 그분을 따돌리기 시작했다.
사모님의 변심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존경하는 시인의 전화를 받는 건
행운의 편지를 쓰는 것보다 더 고역이었다.
하루는 분기탱천하여 택시를 직접 잡아타고 사무실에 온 노시인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부들부들 떠셨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모욕은 처음이라고......
왜 아니겠는가.
누구보다 청렴했고, 시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서 가리지 않고
받아들인 관계였을 텐데 그 사모님은 가장 악랄하게 시인을 모욕했던 것이다.
다음해 그 시인이 돌아가셨을 때 사모님은 화환을 보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손에 쥐가 나도록 쓴 그 행운의 편지가 오래되어 효험이 떨어졌던 것일까,
그 사모님은 얼마 전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일생의 치욕을 맛보게 되었다.
돈이 좀 많다는 이유로 예술과 사람을 가지고 놀았던 그 여인.
그 꼴을 옆에서 구경만 했던 우리들.
참, 나로선 작은 반항을 꾀한 적이 있다.
회사에서 신문을 인수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직원들에게
구독하는 신문을 바꾸는 건 물론 구독자를 모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어느 날, 숙제검사를 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한 사람씩 불러세우더니
몇 부를 확장했는지 묻는 게 아닌가.
10년째 읽고 있는 ㅎ신문을 바꿀 생각도 없었던 나.
" 한 부도 못했는데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그 말을 발설하던 순간의 쾌감을 잊을 수 없다.
그래봤자, 그 사모님은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