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서재의 어느 분과 공통으로 아는 이가 있어,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더니만 어제, 오늘, 계속해서 그의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는 신촌의 한 카페 주인이다.
3년 전 겨울, 유명을 달리했다.
내가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다섯 계절이 지난 뒤의 일이다.
그 카페에서 종종 만나던 후배로부터 그의 부음을 전해듣고, 솔직히,
내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충격을 받았다.
나와 특별한 사이도 아니고, 그저 주인과 손님으로 만나 낯을 익힌 정도의 관계에 불과한데,
그는 나에게 알수없는 영향을 끼쳤다.
맨 처음 친구들과 어울려 그 카페에 갔을 때가 1990년.
어쩌다 보니 카페의 주인장과 어울려 술을 마시게 되었고
문 닫을 시간이라는 말에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살면서 내가 이때까지 잡아본 바짓가랑이는 딱 두 개.
교복 치마 외에는 치마를 입은 적이 한 번도 없었을 것 같은
여성들의 그것이었다.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으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그 카페에서 계속 마시면 안 되느냐고 자꾸 묻는 친구의 입을 나는 틀어막았다.
자신의 가게에서 손님과 밤새워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옆의 허름한 주점인지 식당인지로 자리를 옮겼다.
생선구이와 찌개를 안주로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로 그의 살아온 이야기였다.
자신의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인상이었는데
의외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슬며시 어느 순간, 모르는 이 앞에서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 심사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리고 다시 그곳을 찾은 건 후배와 함께 2년쯤 뒤.
술김이지만 '일생의 친구가 되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에 비하면
너무 늦은 발걸음이었지만, 내 하는 짓이 그렇지 뭐.
이후, 그 후배와 신촌에서 만날 땐 언제나 그곳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마음대로 맥주를 꺼내 마시고, 아무 이야기나 지껄였다.
홍대앞의 주점으로도 진출해 봤는데 그곳만큼 마음 편한 곳이 없었다.
어느 날, 퇴근하다가 버스 안에서 문득 생각이 나 약속도 없는데 내렸다.
맥주 두 병을 혼자 마셨으며, 그날은 카페에 손님도 없었지만
별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래도 내 집 내 방인 듯 편해서 세상에 이렇게 잠시 기어들 곳이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몇 년 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보러 갔다가
내려오는 계단에서 그와 마주쳤다.
고개만 끄덕하고 지나치려는 그를 문득 불러세워 술 한잔 하자고 했다.
(그때 나에겐 구체적으로 심란한 일이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눈치더니 점심이나 먹자고 응해주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언젠가 페이퍼로도 쓴 적 있다.)
우리는 심상한 표정으로 그 무렵 본 책과 영화,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얼마 전엔 읽은 책을 가게에 쌓아놨더니 손님들이 좋아하며 가져가더라고 했다.
다음 책 처분 때는 나에게 먼저 슬며시 소식을 넣어달라고 말했더니
낄낄 웃었다.
허무를 깔았지만 아주 귀여운 데가 있는 웃음이었다.
(사람들이 모르는 그 웃음을 아는 이를 이곳에서 만나다니!)
이상하게 그의 앞에선 웬만한 엄살이나 허튼 소리는 절로 쑥 들어갔다.
그에겐 그런 힘이 있었다.
백반을 시켜 반주를 몇 잔 마셨다.
대낮에 두 여성이 터억하니 두꺼비를 한 마리 시키니 주인 눈이 화등잔만해지고.
마음 같아서는 어린이집에 전화를 걸어 부탁하고 그를 따라가고 싶었다.
카페 문을 함께 열고 청소를 간단히 한 후 맥주를 한잔 시원하게 마시는......
그러나 시장도 좀 봐야 한다 해서 아쉽게 돌아섰다.
그리고 그 얼마 후 동생 부부가 그 카페에서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 한잔하고 왔다며
쿠킹호일로 싼 무언가를 내밀었다.
극장에서 우연히 만나 그와 점심 먹은 걸 그날 저녁 자랑했더니,
근방의 학교에 다닐 때 연극부 활동을 하며 나름대로 그곳의 단골이었다는 우리 올케가
기억을 했다가 아는 체한 것이다.
우리가 올케 시누이 사이인 걸 너무너무 신기해 하더란다.
그리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마침 그 날 안주로 마련해둔 수제햄 좋은 것이 있다며
푸짐하게 한 접시 썰어서 보낸 것이다. 형님 갖다주라고.
받아드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얼굴빛이 너무 나빠서 걱정이라는 동생과 올케의 말에 철렁 내려앉는 가슴.
그 햄 한 접시!
맥주 안주로 아구아구 잘 먹었다.
어쩌면 생각만큼 그의 건강이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애써 자위하며.
서울을 뜨기 전 꼭 한 번 들러 햄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나중을 기약하다 영원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꼭 한 번쯤 쓰고 싶었던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