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군인은...의 저자 사샤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책은 완전히 압도하고 뒤집어엎을 수 있어야 합니다. 평상시의 감정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웃을 수 있고, 펑펑 울 수 있고, 우리의 모든 감각을 그 정서로 휘두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다른곳에서도 읽은 적이 있고 한편으로 이해도 간다
그리고 사샤와 같은 기준에서 본다면 이 소설 빌러비드는 훌륭한 책이다
나의 감정을 온통 점령하고 뒤흔들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으니까.
아직은,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내가 믿어 의심치 않을 이야기의 힘과 매력이 가득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좋은 소설이지만 당분간은 다시 읽을 엄두가 안나는 책이다.
꽤 많은 밑줄 긋기 중 몇 개를 여기에 적는다
골라 놓은 것 중에 이야기를 직접 전해 주지 않는 부분만 모으다 보니
절절한 사랑이야기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p
물론 할리가 그중에서 가장 다정했다. 베이비 셔스의 여덟번째 막내 아들, 그는 주 전역을 돌면서
제 몸을 팔아 어머니를 그곳에서 빼내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은, 그저 남자에 불과했다.
"남자는 어쨌든 남자일 뿐이야." 베이비 셔스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아들? 글쎄 그건 대단한 거지."
그 말이 두루두루 일리가 있었던 것이, 시이드는 물론이고 베이비의 평생을 둘러봐도 남자와
여자들은 체스판의 말들처럼 제 뜻과 상관없이 이리저리 옮겨져 다녔기 때문이다. 베이비 셔스가
사랑했던 남자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알던 남자들 중에서, 달아나거나 목이 매달리거나 임대되거나
다른데서 빌려가거나 팔려가거나 다시 끌려오거나 저장되거나 장기 할부로 넘겨지거나 상으로 주어지거나
절도를 당하거나 포획당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베이비의 여덟아이들은 아버지가
여섯이었다. 베이비가 인생이 더럽다고 말한 건, 바로 자기 자식들도 말들에 포함된다는 이유로 느닷없이
체스 놀이가 중단되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의 충격 탓이었다
-46쪽
위험천만이군, 폴 디는 생각했다. 위험하기 짝이없어. 한때 노예였던 여자로서는, 저렇게까지 뭔가를
사랑한다는게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특히 사랑이 정착한 대상이 자기 자식들일 경우에는 위험이 배가되었다.
그가 알기로, 최선의 길은 그냥 약간만 사랑하는 거였다. 뭐든지 사랑하되, 그냥 약간씩만, 그래서
그들 손에 허리가 부러져도, 아니면 시체 포대에 처넣어져도, 글쎄, 그래도 다음 사람을 위해 약간의
사랑은 남겨 놓을 수 있도록
-83쪽
"시이드, 내가 여기 덴버와 함께 있으면, 가고 싶은 데는 어디든 가도 좋아. 뛰어내려도 좋아. 내가 붙잡아
줄 테니까. 추락하기 전에 내가 잡아줄게. 필요하면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좋아. 내가 네 발목을 붙들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줄게. 잘 곳이 없어서 이런 소리를 하는게 하냐.
잠자리 따위는 마음만 먹으면 구할 수 있어. 말했잖아, 나는 걸어다니는 방랑자라고. 나는 이쪽 방향으로
7년이나 걸어왔어. 이 근처에 안 가본 데가 없어. 북부, 남부, 동부, 서부. 이름없는 땅에도 발을 디뎠고
절대 한군데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어. 하지만 여기 와서 저기 현관 앞에 앉아,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내가 찾아 헤맨 건 이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 당신을 향해 왔던 거야. 우리는 함께 삶을 꾸릴 수 있어.
삶을 꾸릴 수 있다고."
"난 모르겠어. 모르겠어."
"내게 맡겨두고 어떻게 되는지 구경이나해. 약속같은거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어떻게 되나 좀
지켜봐줘. 알겠어?"
-84~85쪽
이건 나무야, 루. 벚나무야. 봐, 여기 줄기가 있는데 붉은색이고 쩍 갈라져 있어. 수액이 가득차 있네.
그리고 여기 가지들이 사방으로 갈라지고 있지. 네 나무에는 가지들이 말도 못하게 많아.
잎사귀들도 많고......이런, 그러니까 이제 꽃잎들이 아니면 잎새겠지. 아주 작은 벚꽃들 말이야.
여전히 하얗고. 네등에 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어. 활짝 꽃이 핀 채로 말이야. 하나님이 무슨 생각을
하실까, 도대체. 나도 채찍질을 좀 당해봤지만, 이런건 듣도 보도 못했네.
-140쪽
그 누구보다도 그들은 자신들을 기만한 요녀, 즉 소위 삶이라 불리는 그 헤픈 여자를 잡아죽였다.
다음날 해가 뜨는 것도 다 그럴 가치가 있어서라고 믿게 만든 죄로. 시간이 한번 더 쓸고 지나가면
마침내 끝장을 볼 수 있을거라 믿게 만든 죄로. 삶이 완전히 절명한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으리라. 그런 대로 성공한 사람들- 삶의 사지를 절단하고, 불구로 만들고, 어쩌면 심지어
완전히 생매장 시킬 정도로 오랜 시간 수용소 생활을 한 사람들- 은 거시기가 간질거릴 정도로 포옹하고
유혹하면서도 절대 허락하지 않는 요녀인 삶의 유희에 놀아나, 아직도 걱정하고 기대하고 기억하고
회상하는 다른 사람들을 끊임없이 감시했다.
-192쪽
그러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얼굴을 돌려 그와, 가증스러운 바람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다른 여자라면, 바람이 그렇게 매섭게 후려치면 곁눈질이라도 하거나 최소한 눈물이 맺혔을 텐데.
다른 여자였다면, 그를 향해 두려움과 애원과 심지어 분노의 표정을 던졌을텐데. 그가 꺼낸 말머리는
누가 들어도 작별의 전주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나 이제 손뗀다, 라는.
시이드는 차분하게 동요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곤경에 빠지거나 뭔가 부족한 남자를 받아들이든가,
좋아주든가, 아니면 용서해 줄 채비를 벌써 마친 눈빛이었다. 어떤 남자도- 길게 보면- 자기 기준에
맞을 수는 없다고 믿었기에, 벌써 미리부터, 일찌감치, 괜찮다고 동의하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이유가
무엇이든 좋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누구의 잘못도.
-223쪽
그는 말해 버렸고, 바로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까마득한 숲이 들어섰다. 길도 없고 적막한 숲이.
- 중략 -
그 사이에 숲은 두 사람 사이의 머나먼 거리에 자물쇠를 잠그고, 매만지고 다듬었다.
폴 디는 당장 모자를 쓰지는 않았다. 떠남이 어떠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비상구가 아니라 출구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결정하면서, 처음에는 모자를 만지작 거렸을 뿐이다. 그리고 쳐다보지 않고
떠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문가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느릿느릿 움직이며,
문간에 도착하자, 오늘은 좀 늦을것 같으니까 저녁식사를 좀 남겨 놓으라는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제서야 그는 모자를 썼다. 자정하기도 해라, 시이드는 생각했다. 그이는 자기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내가 못 견딜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털어 놓은 내게 짐승이라고 말해놓고
'안녕'이라고 하면 내가 슬픔에 무너져버릴 줄 아나보지. 거 참 다정하기도 하여라. "안녕"
그녀는 숲은 수 많은 나무들 저끝에서 중얼거렸다.
-282~283쪽
매일매일의 삶을 사는 것도 온몸의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미래는 일몰이고, 과거는 뒤에 남겨두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과거가 뒤에 얌전히 남아 있지 않는다 해도, 발로 짓밟아 말을 듣게 해야만 하는
법이다. 노예의 삶, 자유인의 삶, 양자를 막론하고 매일매일은 시험이고 시련이었다.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믿거나 의지해서는 안된다. 해결책은 동시에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마태복음 6:34)고 하셨다. 아무도 그보다 오래 시달려서는 안된다.
-426쪽
이 여자에 대해서는 느껴야 할 감정이 너무 많아. 머리가 아프다. 느닷없이 30마일의 여인에 대해
어떤 감정인지 식소가 설명하려 애쓰던 생각이 난다.
"그 여자는 내 마음의 친구야. 조각난 나를 한데 모아주지. 나라는 조각을 모아서, 제 자리를 찾아
내게 돌려준다고. 아주 좋은 기분이야. 마음의 친구가 되는 여인을 갖게 된다는 건 말이지."
-452쪽
시이드는 목을 채운 쇠고랑에 대해 한번 언급도 하지 않고 심지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짐승처럼 족쇄에 채워져 있다는 비참한 수치를 느끼지 않아도 되었다.
오직 이 여자 시이드만이, 그렇게 그가 남성다움을 지킬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사연을 그녀의 사연 옆에 나란히 놓고 싶었다.
"시이드 당신과 나, 우리한테는 누구보다 어제가 많아. 이제 어떤 식으로든 내일이 필요해."
|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들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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