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 전집
지하련 지음, 서정자 엮음 / 푸른사상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때부터 왠지 내가 인생에서 제일 경계했던 것이 '허위의식'과 '허영심'이었다.
세상에는 하고많은 악덕들이 있을 텐데 하필이면 왜 그런 걸 골라들었는지.
덕분에 나는 남 눈치뿐만 아니라 자신의 스쳐지나가는 마음까지 감시하느라
인생을 아주 건전하고 재미없이 살았다.

사소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2년 정도 꽤 마음을 붙이고 글을 올렸던 모 인터넷 신문 때문에
기자시사회에 참석해 달라는 초대장도 메일로 엄청나게 받았지만
맨 처음 딱 한 번('질투는 나의 힘') 가보고는 그만이었다.
잔뜩 부푼 그 시사회장의 분위기가 어색했고, 도무지 영화에 몰입할 수가 없었다.
개봉된 화제작을 두고 경쟁적으로 빨리 기사를 올리는 그곳 시민기자들의 분위기도
영 마뜩찮았다.
어쩌면 이 또한  또다른 종류의 허위의식과 허영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얼핏했다.
하지만 '내 입맛대로'를 고수하는 것까지 구박하고 의심한다면
도대체 어떤 얼굴로 살아야 할까.

십몇 년 전 회사 서고에서 지하련의 어떤 글을 자료정리 중에 읽고 마음을 빼앗겼다.
 허위의식에 직격탄을 날리는 구절이라고 생각했다.

--정예는 제 말대로 흉악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거지는 아니다.
허다한 여자가 한껏 비굴함으로 겨우 흉악한 것을 면하는 거라면
여자란 영원히 아름답지 말란 법일까?(<지하련 전집> '가을' 중 62쪽)

정예라는 여자는 아내의 제일 친한 친구로 소설 속 주인공에게 추파를 던져오는 여인이다.
아내는 그녀와 달리 너무 현숙해서 이혼을 하고 연애 소문이 많은 친구임에도
자신의 남편을 소개하고 둘이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왔다는 말을 듣고도 친구를 믿어준다.

그의 소설에서 내가 빨려들었던 건 그렇고 저런 스토리의 전개가 아니라
멋을 부리지 않고 불쑥 던지는데 무엇인가를 관통하는 표현이었다.

사람 사는 일이 얼마나 지랄맞은지 나름대로 온갖 자구책을 강구하고 폼을 잡고 살아도
스스로를 "거지같다"고 여기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가.
"비굴함"으로 간신히 자신이 두려워하는 "흉악"을 면하는 정도의 삶을 산다는 기분.

다음과 같은 아무렇지 않은 구절도 왠지 나를 소스라치게 했다.

--안해(아내)란 훨씬 늙고 파렴치한 겁니다.('산길' 102쪽)

지하련의  단편소설은 소설로서의 형식적인 완성도를 떠나서
인간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비틀고 통렬하게 자조한다는 점에서
일찌기 보지 못했던 아주 독자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지하련이라는 자신의 필명보다는 '임화의 부인 이현욱'으로 원고를 청탁받고
수필이니 편지니 쪼가리 글을 발표하다가, 여섯 편의 단편을 <도정>이라는 창작집에 묶고,
임화의 뒤를 따라 1년 뒤 월북하여 자신의 문학세계를 펼치기는커녕
남편의 몰락과 죽음을 겪어야 했던 그의 신산한 삶.

절친한 친구로  알려졌던 최정희의 소설 <인맥>은 지하련이 등단하지 않았을 때
찾아와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이야기를 듣고 밤새 써내려간 것이라고 한다.
<인맥>으로 지하련과 최정희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고, 전혀 다른 시점에서 전개되는
세 편의 단편 '가을' '결별'  그리고  '산길'을 완성한다.
오래 전 <인맥>을 읽고 뭔가 편치 않은 기분을 느꼈는데, 이렇게 해서 의문이  풀어지고...

총명하고 예민한데 어딘지 불안정해 세상 살아가기가 영 어색한 지하련 소설의 주인공들이
자조하듯 내뱉는 말이나 일촉즉발의 날이 선 대화는 이상하게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 주었다.

첫 작품 '도정道程'에는 사상범으로 6년을 살고 나와 헤매이는 중 친구들의 종용으로
마지못해 공산당 사무실을 찾았다가 '동무'라는 호칭에 멀미를 느끼면서도
마지못해 입당 수속을 밟는 청년이 나온다.
"계급"란에 자신을 비웃듯 "소뿌르조아"라고 쓰고 도망치듯 나오는데......

인간의 허위와 기만을,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까발렸던  이 예민한 작가에게,
사랑과 사상은 과연  일생을 통해 어떤 의미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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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6-20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는 허영심과 허위의식이 넘쳐나는데.....
내입맛대로 사는 것은 결코 위의 것들과는 상관이 없을 듯 한데요.? ^^

로드무비 2006-06-20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스토님,
그래봤자 교만한 구석도 있고 시건방지고.
어디 가겠습니까?
아무튼 어릴 때 생각이었다는 거죠.^^

국경을넘어 2006-06-20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임화의 부인이군요. 한번 읽어봐야 겠군요.

sandcat 2006-06-2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지금의 제 상태야말로 늙고 파렴치한 허영덩어리에요.


건우와 연우 2006-06-20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누구의 무엇이라는 것은 때로 예민하고 영민한 사람들에겐 족쇄처럼 느껴졌을지도...

waits 2006-06-20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제가 읽는다고 로드무비님처럼 잘 알아듣지 못하겠죠?
어, 어, 어, 하며 읽었어요. 결국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의 인간일 뿐이야...
갑자기 남의 면죄부를 내 품에 안은 느낌이예요. 좋은 글에 감사..^^

2006-06-21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6-2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퍼를 쓰다 마신 게 아닌지 님, 으윽.
이 리뷰 쓰기 무지 힘들었어요.
임화의 아내로서의 삶을 써야 이야기가 풍성해지는데
왠지 제가 그 삶이 편치 않게 느껴져 피해갔고,
사상 문제도 마찬가지거든요.
이 작가 또한 저런 식으로 암시만 하고 소설 속에서 그 문제와
정면대결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처음 만났던 인상적인 한 구절을 붙들고
옹색한 리뷰를 쓰게 된 것인데.
그러려니 하세요.
명쾌하게 대답해 드릴 부분이 없네요.
궁금하시면 책을 한 번 읽어보시든가.ㅎㅎ
(그리고 님과는 정반대 상황이네요. 뭐.)

나어릴때님, 알아듣고 말고는 오로지 관심이 닿았느냐 아니냐
하는 부분에 의해서.
그게 뭔지는 자기자신만이 알겠지요.
좋은 글이라고 해주셔서 감사.^^

건우와 연우님, 지하련이란 작가를 더 알고 싶어졌어요.

샌드캣님, '늙고 파렴치한'만 할래요. 저는!=3=3=3
(님도 하나는 빼세요.ㅎㅎ)

폐인촌님, 모르긴 몰라도 그로서는 임화의 아내라는 소리가 지겨울 거예요.
이상하게 끌리는 소설가.^^

buru 2019-08-04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리뷰 감사합니다 여쭤볼 것이 있어 댓글 남겨요
최정희가 지하련과의 대화를 토대로 인맥을 썼다는 이야기나 그 후 관계가 틀어졌다는 등등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디서 더 자세히 읽을 수 있을까요?

로드무비 2019-08-04 23:3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뒷이야기에 저도 관심이 꽤 많았는데 지하련과 최정희의 모든 글을
읽은 것도 아니고...저도 아는 게 없어요.
소문은 듣고 있다가 지하련의 저 책에서 알게 된 것 같은데...
(지하련을 읽고 최정희의 <인맥>은 다시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