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엄마의 8순 생신에 부모님과 함께 <변호인>을 보러 갔다.
초등학생인 조카가 방학을 하면 부산에서 상경하여
한두 달 지내다 가시는데 남동생의 이사와 엄마의 생신과
아이의 방학이 겹쳤다.
요 몇 년, 두 분이 방학 때 북한산 기슭의 남동생 집에 머무시는 동안
나는 가끔 그곳으로 출동하여 극장에 모시고 갔다.
가볍게 볼 수 있는 코믹 영화 위주로 골랐는데 두 분은 한 번도 재미있다고 하신 적이 없다.
어떤 영화를 보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날, 극장을 빠져나오며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을 들었다.
"오랜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보았다! 로드무비야 고맙다."
엄마의 반응은 따로 물어볼 것도 없었다.
영화를 보며 엄마가 한 번도 졸지 않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극장에서 나와 근처의 예약해둔 참치집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언젠가 맛있게 드시던 모습을 기억하고 정한 집인데
이런 고급식당은 처음 와본다는 말씀에 깜짝 놀랐다.
밥을 먹기 전 엄마가 아버지에게 감사기도를 부탁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미루셨고, 나는 생전 처음 가족 앞에서 대표기도를 해야 했다.
허둥지둥 두 분의 건강과 온 가족의 화목을 비는 짧은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끝나고 엄마를 흘낏 봤더니 딸의 짧은 기도가 미진했던 듯
한참 동안 손을 모으고 눈을 감고 계셨다.
5년 전인가, 결혼 50주년을 맞아 두 분이 중국여행을 가시기로 했는데
갑작스러운 엄마의 암 발병으로 무산되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엄마의 소원대로 교회에 나가고 계신다.
젊은 날 멋장이 해군이었던 아버지는 영화를 보고 나서
주인공과 함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색연필로 그리고 그 밑에 짧게 감상을 적어놓으셨다.
주로 헐리우드 영화였는데 16절지 묶음이 꽤 두터웠던 기억이 난다.
밥을 먹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아버지, 나중에 그 영화수첩 저 주세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는 그동안 혼자만 영화 보러 다니는 게 죄송해서 두 분을 극장에 모셨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두 분의 의견을 여쭤본 적이 없다.
내 맘대로 시시껄렁한 영화들을 고르고, 모시고 가서 보게 하고,
식당에서 밥 한 그릇 사먹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그 영화들이 아버지의 성에 조금도 차지 않았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나 혼자 산다>에서 데프콘이 MBC 연말 시상식에서 예능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머리를 쥐어뜯는 모습을 보니
엄마 생신상 앞에서 너무 형식적이고 짧았던 나의 기도가 생각났다.
좀더 간절하고 감동적인 기도를 했으면 좋았을걸, 하는 미련이 남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한창 날리실 때의 기록인 그 영화수첩을 하루빨리 보고 싶다.
앞으로 몇 편의 멋진 영화가 그 수첩에 추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