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 - 우리시대의 지성 5-011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1
주경철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선물 받았다.
누구에게?
<로맨틱 홀리데이>를 보고 "교환은 생산이다." 라고 말한 남자.
Eric Clapton 콘서트 때, "Wonderful tonight"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인 남자.
"책 한권 줄까요?"
그는 술 마시다 갑자기 생각이 난 것처럼 말했다.
그러더니 점퍼 주머니에서 이 책을 꺼냈다. 불쑥.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는 포켓북 사이즈다.)
그가 읽던 책이라 군데군데 그가 친 밑줄이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알았다.
책을 읽으며 먼저 읽은 사람의 흔적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을!
서점에 갈 때 마다 뜬금 없이 전화를 해서
"야, 뭐 읽을만한 책 없냐?" 묻는 친구가 있다.
얼마 전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을 때 이 책을 추천했다.
피렌의 「중세 유럽의 도시」, 포스탄의 「중세의 경제와 사회」,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맥네일의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합하우스의 「역사를 바꾼 씨앗 5가지」, 크로스비의 「녹색 세계사」, 토드의 「유럽의 발견-인류학적 유럽사」등
12권의 중요 역사서들(한국어 미번역서 포함)을 요약한 이 책은
크게 세가지를 선물한다.
- 관심 영역의 확장
- 12권을 모두 읽은 것 같은 착각 또는 대리 만족
- 소개된 책들을 정독하고 싶은 강한 열망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학부 수업용 프린트물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썼다고 한다.
※ 수업 한번 알차다! 요즘 대학 등록금 정말...살인적으로 비싸다.
값을 하려면 모든 강의가 이렇게 알토란 같아야 한다.
요즘 대학에는 제발.....열정도 사전학습도 없이 중얼중얼 하다 시간 채우고 나가는
늙은 꼰대들이 없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낄낄 거리며 웃기도 했고,
분노에 떨기도 했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가장 인상에 남는 chapter는
<흰 설탕, 검은 비극 - 노예 무역의 잔혹사>.
노예무역이 잔혹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지는 몰랐다.
책에 실려 있는 노예들의 "중간 항해" 그림을 보고 경악했다.
아프리카에서 구입한 노예를 배에 싣고 대서양을 건너는
소위 '중간 항해 middle passage'는 처참한 비극이었다.
90톤급 배가 390명, 또는 100톤급 배가 414명을 실어나른 기록이 있다. 이 경우 각 노예들에게 할당된 공간은 대략 167cm*40cm여서 흑인들은 '책꽂이의 책들처럼' 실려갔다.
이들은 두 사람씩 서로 쇠사슬에 묶여 항해를 해야 했다.
한 사람의 오른쪽 다리, 오른쪽 팔이 다른 사람의 왼쪽 다리, 왼쪽 팔과 묶여 있어서 관 속에 누운 것보다도 더 비좁은 공간만 허락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특히 배가 적도 무풍대에 들어서면 한 달 이상 배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는 수도 있었다.
자살 방지를 위해서 노예들을 쇠사슬로 묶어두었기 때문에 자신의 분뇨 속에서 몇 달 간 공포의 여행을 해야 했다. (p204)
노예 상인들에게 흑인 노예들은 "상품"이었고,
농장 주인들에게 흑인 노예들은 "자산"이었다.
그 누구도 흑인 노예들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783년 종Zong호 사건이 이를 입증해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선상에 물이 부족하자 이 배의 선장은 132명의 노예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선장은 살인 혐의로 구속되는 대신, 보험 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자신의 행동은 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상품"을 바다에 투기함으로써 배와 선원을 구하는
"해상 위험"의 경우에 해당한다는 사유로.
더 놀라운 것은....보험 회사는 이 경우가
'바다에 말(馬)을 던진 것과 똑같다.'고 보고
흑인 1인당 30파운드씩 계산해서 손해 보상금을 지불했다.
세상에.......이런 일이 있었다.
불과.....224년 전에!
이 책을 읽고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6권을 완독할 계획을 세웠다.
번역자가 주경철 교수라 번역에도 신뢰가 간다.
이런 좋은 책을 선물해준 그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