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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지 않을 자유 - 결혼과 비혼에 관한 새로운 태도
이선배 지음 / 허밍버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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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오빠와 토론을 위해 함께 읽은 책. 비혼주의에 대한 주장이나 비혼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많이 나올 줄 알고 골랐는데, 제목이 ‘선택하지 않을 자유!’ 임에도... 의외로 ‘결혼하는 것도 추천’하는 (게다가 저자는 결혼했다. 반전) 내용도 담고 있다.

확실히 세상이 변했다. “결혼 언제하냐?”는 질문 보다 “결혼 그걸 대체 왜하려고 하니?”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듣고 있으니까.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가지고 있던 질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얄팍한 수준이나마 함께 ‘고민하고 읽고 나누려 한다’는 사실에 안심했을 뿐이지.

읽고 나서 둘이 하나는 확실하게 합의했다. 결혼과 출산은 별개의 사건! 이라는 것. 확실히 취직-결혼-출산-육아 등등 결이 다른 많은 것을 하나로 도식화 시켜 그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수행하며 살아가기엔 사회가 너무 살기 어려워진 것 같다. 일단 취직부터 걸리는 걸 뭐.

결혼제도 또한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 시류에 휩쓸리듯 비혼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는 것, 저자가 개인들에게 그것이 결혼이든 비혼이든 자신을 위해 선택할 수/하지 않을 수 있음에 대해 더욱더 진지한 고민을 하길 제안하는 동시에 “(결혼/출산)선택할 수 있는 자유” 또한 보장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대책을 촉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읽고난 뒤 나의 고민은 두 가지 정도로 압축되었다. 소위 “며느리, 엄마, 아내”로 이름 붙여진 당위적 역할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크다는 것과, 그것을 제외 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살아가는 것을 내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두가지가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결혼이 어려울 것 같다는 결론. 오빠는 책을 읽다가 불편했다고 했다. 결혼하자는 입장이 큰 만큼 기본적으로 ‘비혼주의’에 대해서 곱게 보고 있지는 못하는 듯.


p.136
안 낳을 선택권과 마찬가지로 원한다면 낳을 수 있는 선택권도 중요하게 여겨져야 한다.

p.133
결혼과 출산은 별개의 사건이다.

p.180 결혼과 가족은 다시 정의된다.
결혼은 영속적 개념이 아니다. 시대의 흐름과 그 시대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확대-축소되며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결혼을 ‘여성들의 교환을 통한 남성집단의 통합‘으로 본 레비 스트로스의 고전적 정의가 과연 현대 사회에서 통할 지 의문이다.

p.231
“전 그냥 그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요. 결혼이란 형식을 빌리든 아니든 상관은 없어요. 그런데 전형적인 한국식 며느리, 아내, 엄마 노릇은 하고 싶지 않아요. 만약 그 사람과 날 닮은 아이가 낳고 싶어지면 낳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설령 우리 중 하나가 돈을 벌지 못하거나 뜻이 맞지 않아 헤어진다 해도 큰 걱정 없이 키울 수 있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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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처는 해석이다.”

오랫동안 나는 마음의 상처에 천착했다. 그 상처의 본질은 무엇일까에 대해 사색했었다. 내게 가장 아픈 상처를 준 사람들. 그들은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친밀하게 느끼고 있던 (혹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관계들이었다. 덧붙여, 그들은 나쁜 사람들도 아니었다. 의심할 바 없이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어쩌면 정말로 치명적인 상처는 그 모순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이 하나같이 착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들이 나를 위해 했던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다. 그 진심과 선함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의지가 선하다고 하여 내가 아프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나의 아픔은 그 아픔 나름대로 존중받아야 한다.

“(p.90)상처는 해석이지 그 자체로 폭력은 아니다. 어떤 행위이든 상처의 가능성이 있고, 동시에 어떤 행위이든 상처받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상처는 절대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이 날카로운 문장이 눈에 박혀서 한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책에서 설득하는 어떤 주의·주장과 상관없이. 텍스트가 박혀있는 문단의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내가 받은 상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에 대한 물음표가 하루 내내 떠다녔다.
그것은 어쩌면, 더는 이 상처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다는.
‘이제 그 모든 과정들을 상처로 남겨두지 말자‘라는 무의식의 반영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착한/ 사람들.

상처는 해석된 것이기에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사실 이미 악의가 없는. 그들의 의도를 따져 묻는 것 또한 무의미하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엄연히 ‘내가 해석하는 방식’이, ‘나를 상처 입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더는 아프고 싶지 않기에, 다른 방식의 해석을 - 그러니까, 이 다음의 삶을 도모해야 한다. 부디, 그러고 싶어졌다.

어쩌면, 이 문장을 읽기 위해 이 책을 만났던 것일까..
가끔은 (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무관하게 내 멋대로 해석해버린-) 어떤 한 줄의 글이 나를 살리는 것도 같다. 실은, 그 한 줄을 핑계 삼아서라도 살아가고 싶은 것일 테지만. 



2. 


책에 대한 평.

어느 순간부터 자주 등장하는 낯선 단어 ‘폴리아모리 Polyamory’가 궁금해서 읽었다. 폴리아모리적인 욕망이 향하는 것은 ‘여러 명’이라는 숫자가 아닌 어떤 ‘자유로움’에 가깝다는 것. ‘다자 간’연애보다는 ‘비독점’에 포인트를 맞추고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다자 연애’에만 집중하지 ‘비독점성’과는 상관없는 문어발식 사랑(ex. 나는 바람피워도 너는 절대 피지마~♬)은 폴리아모리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 (여러 사람을 소유하려는 모노아모리monoamory일 뿐)등을 배웠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것에 대해 놀랄 뿐이다. 처음의 설렘보다는 관계가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안정감이 내가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가깝기에- 일상을 계속해서 ‘변용’ 해야 하는 너무도 부지런한 그들의 ‘사랑’ 방식을 무리해서 납득하려 하거나,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을 갖기는 어려울 듯하다. 게으른 자에게 ‘폴리(여럿)‘는 물론 ‘아모리(사랑)‘도 피곤한 것. (더더군다나 난 사회성이 좋은 편도 아니라서 ‘하나 이상‘은 너무 힘들 것 같다ㅠ_ㅠ) 다만, 이러한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니 ‘아, 그렇게도 존재할 수 있구나’ 하기로.

한편으로는 이미 ‘신자유주의화’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다양한 가족(혹은 관계 맺기) 형태에 대한 실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요즈음의 한국은 ‘가족’혹은 ‘가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한 것 같다. 전통적인 ‘가족‘ 또한 ‘안전한 관계‘가 아니라면, 또 다른 관계를 찾아 나서야지.
요컨대, 필요한 것은 상상력. 그리고 용기. 실제 책에도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p.104) 즉 우리는 폴리아모리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모노아모리만이 의식적인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모노아모리란, 우리가 한 사람만 사랑하기로 ‘선택‘한 그런 폴리아모리이다. 무한한 공동체의 배치를 상상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배치 속에서 가장 행복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상상하고 실천하고 구성하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서 지인 몇몇에게 ‘폴리아모리‘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지만, 입도 떼기 전에 제지 당했다. 생계도 피곤하다며... 사실, 그게 현실 인것 같다. 우린 N포 세대..ㅜ.ㅜ

책을 덮고 잠시 모두가 폴리아모리스트인 세상을 생각해보았다. 역시나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빈약한 상상력 ㅠ.ㅠ) 모르긴 몰라도 사회주의(이건 그래도 상상이라도 간다..)하고는 비교도 안될만큼 상당히 급진적인 모습일 것 같다.





(p.162)
실제로 대중의 욕망이 변화한 것이라면, 그 변화의 기제는 무엇일까. 사실 폴리아모리가 소개되는 시점부터 한국 사회는 가족과 공동체, 성과 사랑에 대해서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이해를 구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p.227)
우리 각자는 하나의 우주와 같다. 그러므로 가족이 된다는 것은, 둘 이상의 우주가 장기적으로 교차한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혼자서는 어느 정도 인력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더라도, 교차하는 순간 그 인력들은 복잡해지고, 별들은 충돌하고, 어떤 공간은 소멸하고, 결국 여러 심급의 카오스로 뻗어나간다. 카오스에 대해 우리는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해체된 카오스 속에서도 오히려 그 카오스 자체에 대해 일관된 긍정을 찾을 수 이는 것, 이것이 바로 폴리 아모리의 가족형태인 폴리피델리티가 꿈꾸는 상태일것이다.

(p.242)
폴리아모리는 윤리적인사랑이아니다. 횡단하는 사랑이며 그 자체로 자연의 사랑이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하고 있고 사랑하게 되어있다. 올바른 사랑을 찾으러 형이상학을 맴도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마주한 강렬함을 그 자체로 기쁘게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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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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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나의 애인님은 무려(!)장발의 헤비메탈 뮤지션이었다고 한다. 진지한 글, 단정한 옷 매무새, 라식을 하고도 뿔테 안경을 고수하는 지금의 모습을 생각하면 유추하기도 어렵지만, 그 것은 진실인 것 같다. 이를테면 rage against the machine의 killing in the Name을 들려주며 눈을 반짝일 때.

나는 묻는다. “이 익숙한 음은?!! H.O.T 노래 아냐?”
그는 손사래 치며 열변을 토한다. 90년대에 제일 좋아하는 그룹이었는 데 의외로 빡센 사회주의자들라며. 어디다 에쵸티를 갖다 대느냐며...
“사회주의?!? 우리 에쵸티 오빠들 노래가 얼마나 애국적이었는지 알아?!? 장우혁이 랩으로 애국가도 불렀다고!! 난 오빠들이 없었으면 사회주의는 커녕 사회문제에도 눈뜰 수 없었어~ 아이야 몰라??”
목소리를 높였지만, 신선했다. 90년대 처럼 자본주의가 기세등등하던 때에도 사회주의 뮤지션들이 있었다고? 게다가 쵸티오빠들이 그들의 노래를 샘플링하였단 말이지... 후덜덜.. 비틀즈의 반전운동 같은 거야 귓등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너무 생소했던 거다.

애인님은 뮤지션들이 얼마나 급진적이었는지에 대해서 즐거워하며 수다를 시작했다. 

이야기중 가장 놀랬던 것은 역시 첨바왐바의 텁썸핑. 
이 노래가.. 그런 노래였다니... 퍼..펑크... 민중가요.....?!

흥미로웠다. 기사 같은 것들을 검색하다 첨바왐바, 존레논 등등을 다루고 있는 책을 발견했다. 제목이 멋있었다.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미국의 엠마 골드만이 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미 절판되었으므로, 알라딘 중고 결제.

사회 문화 구석구석에 숨겨져있는 좌파적 상상력을 알려보겠다는 취지의 책인데, 솔직하고 거칠게 내 평을 이야기 하면 “혁명 오덕이 쓴 책” 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저자 지금 뭐하실지 궁금함)

SF소설과 게임, 펑크뮤직, 해커 분야에서부터 인물로는 체게바라, 쇼스타코비치, 미야자키하야오, 마르코스까지..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진보진영통신모임 바.통.모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하며 구석구석에 숨겨(?)진 ‘혁명’의 키워드들을 찾아내고 있다. 놀라울 따름..

뭐, 알고는 있었지만 생각이상으로 자본주의는 치밀했고, 또 생각보다 더 세상은 빨갱빨갱했다. SF 소설의 대가인 H.G 웰즈가 사실은 사회주의자 였고. 그가 남긴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은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타임머신...)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자본주의’를 비판 한 거고, <우주전쟁>은 (스필버그의 그 우주전쟁 원작 맞다) 화성인의 지구침공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빗댄 소설이라는 것.. 등등. 구석구석 감춰진 사회주의 창작자들이 놀라워서 반갑고 재밌더라.

"(p.145) 피카소
피카소는 당내에서 계속되는 비판에도 자신의 미술관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발언이나 행동이 당에 해를 줄까봐 늘 조심했습니다. 그것은 ˝뭐라해도, 미술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혁명이 잘못되는 것보다는 미술이 잘못되는 게 낫다˝는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혁명에 대한 그의 신념은 매우 깊었습니다. "

이를 테면 피카소가 이정도의 공산당이었던 것도 나는 몰랐던 거지.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 같지만 혁명은 겨우 지난 세기의 이야기이고, 우리세대가 혁명에 대해 냉소하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익히 아는 옛날 사람들이 혁명을 꿈꾸지 않았으리란 법은 없는 거다.

"(p.171) 첨바왐바
첨바왐바는 1985년 첫 음반 <革,Revolution>의 표지에 ‘우리의 음악이 단지 즐거움만을 주고, 행동을 고무시키지 못한다면 우리의 음악은 실패한 것이다‘라고 새겨놓았는 데, 지금도 자신들의 역할이 ‘진실을 폭로하고, 투쟁을 선전·선동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첨바왐바는 당시 <革>의 속지를 통해 ‘분열을 중단하고, 함께 투쟁하자‘라고 호소하며 ‘자본가들이 심어놓은 환상을깨고 지금이 바로 투쟁을 위해 일어설 때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메시지는 변함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회적인 사건이 생길 때마다 사건에 대한 입장을 담은 노래를 만들며 노동계급과 민중의 투쟁을 선동하고, 자본주의와 우경화한 노동당에 대한 풍자를 노래 가사에 녹여냅니다."


"(p.177) 첨바왐바
1998년 ABC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음반을 훔치는 것에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사람들이 우리 음반을 품치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첨바왐바는 공식 홈페이지에 ˝만일 우리 음반을 훔치려거든 Virgin, HMV, Our Price,Tower, Andy‘s Records, Woolworth, Boots, WH smith 와 같은 대형 체인점을 추천한다. 동네 작은 레코드 가게 보다 큰 체인점에서 훔칠 때 도덕적인 딜레마를 조금 적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대기업들을 전혀 동정하지 않는다˝고 올려놓아서 대형음반판매 업체들이 첨바왐바의음반들을 카운터 쪽으로 급하게 옮기기도 했습니다."

*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체게바라, 멕시코 등의 남미의 혁명전통 이야기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 데, 이 책이 출간되던 2000년대 중반 무렵은 멕시코의 사파티스타-마르코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등등 남미에서 일어나는 혁명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시절이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많은 세계 민중들에대한 연대 감수성 같은 게 있었던거 같기도 하고. (왜 이렇게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지는 모르겠당)

"(P.190) 라쿠카라차
‘라쿠카라차‘라는 단어의 뜻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바퀴벌레입니다. 하지만 바퀴벌레라고 모두 같은 바퀴벌레는 아닙니다. 혁명가요의 제목이 ‘바퀴벌레‘로 된 것은 당시 혁명군인 농민군의 비참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고도 하고, 농민군을 돕기 위해 여인네들이 음식바구니를 메고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바퀴벌레들이 줄줄이 걸어가는 것 같아서 라고도합니다. 그런데 넓은 차양의 멕시코 전통모자인 솜브레로를 쓴 혁명군들의 사진을 보니 아마 죽이고 죽여도 다시 나타나는 바퀴벌레떼 같아서 지은 이름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라쿠카라차>는 당시 판초 비야와 농민군의 혁명을 찬양하는 노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19세기 말 동학혁명을 노래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꽃에 앉지 마라‘같은 거죠."

*

책의 마지막 장은 2002년의 반미 촛불 집회를 활동가로서 지켜보며 느낀 소회와 토론해야할 쟁점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특히 ‘대중운동’과 ‘인터넷’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인상적이었다. 그 무렵 진보주의 활동가들이 그 주제를 어느 수준으로 토론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자본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것 같지는 않다.

"(p.318-19) 인터넷이 평등하다는 편견을 버려
하지만 인터넷 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현재의 인터넷 소통 구조는 이 방식으로 결코 극복될 수 없습니다. 경제적 불평등과 정보의 빈부 격차를 바탕으로 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취하는 현재 구조를 방치한 채 그들의 시혜를 요구하는 운동은 단기적으로는 유효하지만, 대안적인 전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커뮤니케이션 구조에서 자본주의적 소유제도 그 자체를 뒤집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계급문제는 계급적 관점에서 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본이 사유화한 인터넷을 사회화하고, 그 운영방식을 민주화하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두고, 그 안에 다양한 전술적인 활동을 배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과 함께 시작된 촛불은 15년 뒤 박근혜 탄핵이라는 나름의 정치적 성과로 이어졌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혁명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지는 것이 아니라, 나날이 계속되는 일상이라서_ 여전히 오늘의 논쟁, 투쟁, 소란에 속이 시끄럽기는 하지만.

*

"(p.9)
그리고 이제 기나긴 혁명은 우리에게 예전보다 많이 ‘자유롭고 불순한 상상력’을 요구합니다. 그 ‘자유롭고, 불순한 상상력’으로 감추어진 것들을 꿰뚫어보고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즐거운 상상력’으로 바닥부터 전복해 나갈 것을 요구합니다. 일상에 대한 전복의 상상력이 또다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팔려나가거나 ‘개인적인 반항’에서 머물지 않으려면, 언제나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모순과 거시적인 변혁의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버릴 수 없는, “혁명”에 대한 바람. 그리고 그 혁명을 만들어가는 순간이 ‘춤 출 수 있을 만큼’ 즐거워야 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

당연하지만 구현은 어렵기도 한 내용이라서, 책속의 사례들이 참 좋았다.

자본은 미디어를 장악하고, 미디어는 모든 문화를 다 장악해 버린 것 같지만_ 다른 세상을 향한 우리의 상상력을, 우리의 혁명을, 우리의 춤을 가져갈 수는 없을 것 같다. If I can‘t dance, it‘s not my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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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긴긴 연휴에는 끝장낼 수 있지 않을까?하여 도전한 크리스하먼의 민중의세계사
(학부생 시절부터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였으나 언제나 중세에서 멈췄던 그 두꺼운 책)
나 자신을 과대평가 했나봄.. 추석내내 열심히 읽었는 데도 292페이지 ㅠㅠ 그래도 어떻게 저떻게 산업자본주의까지 왔당!! 맥주를 마시며 산업혁명까지는 달려보련다(불끈_!) 러시아 혁명 백주년을 기념하며 시월 안에는 요 책의 끝을 보자는 다짐.

참고로 책은 두꺼워서 그렇지 무척 재밌다. 우리가 아는 정치적 변화들 뒤에 흐르는 생산력-관계의 맥락들이, 선사시대부터 쭈욱 일관되게 정리되어 있다. 지긋지긋한 왕조나 영웅들 이름을 안보니까 좀 더 쉽고, 콜롬버스 같은 인간들 잘근잘근 씹아주시니 공감되서 좋고... 지배계급과 제국들의 몰락 역사를 보니 현대의 제국도 얼마 안남았다 싶기도 하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는 한줄로 정리되는 모든 격변이 당시를 살았을 이들에겐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하는 것 같지 않는 날들이었다는 것을 알기에.

미분된 지금의 시간과 미미한 존재일 뿐인 나자신의 느리디 느린 변화 또한 멀리서 보면 격변 이겠거니.

"(p. 244) 수백 년 이상 계속된 서유럽 사회의 변화들은 느리긴 했지만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그것은 흔히 당시 사람들은 거의 느낄 수 없었던 그런 변화들이었다. ... 느리고 간헐적이긴 했지만 계속해서 생산 기술이 발전했다. 그래서 16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12세기는 물론 14세기에도 보지 못했던 장비들이 넘쳐났다. 주요 도시마다 있었던 기계식 시계, 물레방아와 풍차, 무쇠를 만들 수 있는 용광로, 배를 건조하고 의장하는 새로운 방식과 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장비들, 전쟁용 대포와 머스킷 총, 전에는 소수의 도서관에 신주처럼 보관된 필사본으로만 접할 수 있었던 원본을 대량으로 복사할 수 있는 인쇄기가 바로 그런 것 들이었다. "

*

르네상스도 루터의 사상도, 인쇄기가 없었다면 거대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스마트 폰이 없었다면 2016년의 촛불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문자, 안경이나 인쇄기, 종이와 전구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여전히 제자리 걸음일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면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이론을 얻고, 그게 움직임이 되고. 칼과 총이 발달하고, 물리적인 힘으로 외화되고, 어떤 정치적 변혁을 이뤄내는 과정.

지금의 우리는, 내가 만지고 있는 이 아이폰은, 어느 페이지 쯤에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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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헌정 - 5ㆍ18을 생각함 인문정신의 탐구 18
김상봉 지음 / 길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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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11)

그렇다면 무슨 내력이 있어, 아직도 5·18을 모욕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까닭은 오직 하나, 아무리 죽이고 또 죽여도 5·18을 죽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빛앞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진리를 모욕하고 다시 그 심장에 못을 박음으로써 진리를 매장하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대검으로 찌르고, 총알로 뚫어도 진리는 죽지 않는다.

 

… 악몽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역사, 제주에서도 남쪽 끝 모슬포 섯알오름에서 고양의 금정굴까지 전 국토가 학살터인 나라에서, 한맺힌 역사가 어디 5·18 하나뿐이겠는가! 국민을 지키라고 있는 군대가 국민을 학살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초현실 주의적인 현실에서 누가 어떻게그 많은 죽음을 모두 애틋하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왜 아직 5·18인가? 게다가 하필이면 왜 모욕당하는 방식으로 기억되어야 하는가? 간단히 그 까닭을 말하자면, 그것은 5·18이야 말로 악령으로부터 선량한 사람들을 지키는 방패이고 대문의 빗장이기 때문이다.

 

… 1948년 제주에서 1980년 광주까지 이 나라의 권력자들은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공격하고 학살하는 일을 말 그대로 밥먹듯이 해온 자들이다. 그런데 그 미쳐 날뛰는 군대 마귀들을 이 땅에서 몰아낸 것이 5·18이었다. 5·18은 이 땅의 민중들을 군대지옥에서 구원하고 해방한 사건이다. 또한 그것은 지금도 자기의 부모 형제자매를 향해 총을 쏠 준비가 되어있는 이 패륜적인 군대 마귀들을 향해 이 선을 넘지 말라고 박아놓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인 것이다.

 

… 그런데 광주가 있다. 1980년 광주의 역사가, 5·18이 있다. 총을 든 군인들 앞에서도 겁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경찰의 차벽으로도 막지 못할 정도로 민심이 흉흉해지면 결국에는 군대마귀를 동원해야하는데, 5·18광주항쟁이라는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버티고 서있는 것이다. 그 기둥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군대마귀를 동원할 수 없다. 그 빗장을 풀지 않고서는 이 땅을 군대지옥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데 이미 일어난 역사를 없앨 수는 없으니 할 수 잇는 일이란 오직 왜곡하고 모욕하는 것 밖에 없다. 5·18은 북한군이 벌인 소행이라거나, 홍어택배 어쩌고 하는 소리들은 모두, 다시 군대를 동원하고 싶은 은밀한 소망을 버리지 못한 무리들이 그들을 가로막고선 헤라클레스의 기둥 앞에서 이를 가는 소리요, 피에 굶주려 으르렁거리는 신음인 것이다.

 

*

 

몇 년 사이, 심하다 싶을 정도로 5·18이 왜곡되고 있다. 왜 그렇게 하는 걸까. 답답하던 차에 김상봉 교수님의 책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철학의 헌정> 한문장 한문장 읽는데 2006년 (혹은 07년) 학부시절 철학과 강의실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에게는 세계가 확장되던 수업시간이 교수님께는 오랫동안 다듬어온 나름의 철학을 강의로 푸는 시간이었던가보다. 반가웠고 기뻤고, 잊었던 퍼즐들이 다시 끼워 맞춰졌다.

 

그래 그랬지, 총을 들었지. 5·18 이후 더 이상 통치자들은 총을 들지 못했지. 총을 들어도 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모욕하는 거구나. 예전 같았으면 무력으로 밀어버렸을 텐데, 명분 만들고 이야기 만들고 법도 만들어야 하고…그러다보니 스트레스 심했나보네.

 

‘그놈의 5·18만 없었다면! 총들면 다 입 닥칠텐데! 저 징글징글한 시끄러운 국민들이 알아서 길 텐데.!!’

 

그들의 명맥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오늘 날 처럼 활개쳐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80년 광주를 모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구나. 잊지 않는 것을 넘어 싸우는 것이 여전히 몫으로 남아있구나.

 

*

(p. 31)

그러므로 5·18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것의 고통을 기억하고 따라 체험하는 데서 시작되어야합니다. 직접적인 고통과 그 고통이 주는 좌절과 절망 그리고 미칠 것 같은 분노를 따라체험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5·18과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자기 것으로 따라 체험한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 하지만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나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나를 내가 선 자리에서 들어 올려 타자의 자리에 옮겨놓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그것이 생각이 제자리에 머물러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남의 자리에 나를 두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그리하여 게으른 정신에게 남의 고통이란 제 편한 대로 해석된 관념적인 기호로 남기 십상입니다. 5·18을 생각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체험하기에는 너무도 큰 고통이요 수난이었습니다.


*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는 나를 뛰어넘지 않으면 안됩니다.”


*


살아남은 자들의 거대한 슬픔이 번지는 것을 목도한 적이 있다.

 

대학교 1학년, 추적추적하게 비가 내리던 금남로의 5·18 전야제. 기념하러 갔고 구경삼아 간 그 곳엔 엉엉 억막힌 울음을 울고 있는 광주시민들이 있었다. 아직 한 세대가 다 가지 않은 25주기였다. 그 날, 홀로 슬프지 않았던 나는 몰라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해서 미안했다.

 

2학년 부터였던 것 같다. 5·18때마다 망월묘역 한구석에서 까만 얼굴을 시커멓게 태워가며, 외운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내 언어 같기도 한 열사의 이야기를 목메어가며 가이드 했었다. 적게 잡아 100명 많게 잡으면 1000명도 될 것 이다. 대부분이 기껏해야 한 두 살, 많으면 다섯 살 후배들이었고, 때로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있었다. 부러 시간내 찾아오는 이들에게 기꺼이 발품을 팔아주는 젊은이들에게 광주를 이야기했다. 나름의 미안함을 덜고 싶었던 것 같다. 광주의 고통에 연대하고 싶었다. 전대 캠퍼스 곳곳, 어떨 때는 금남로, 특별히 망월묘역. 윤상원 열사의 마지막 말을 읽어주기도 하고, 김남주의 시를 읽히기도 하면서.. 도청의 마지막 새벽을 잊지말아달라, 같은 말을 수 번 하면서도 매번 진심이었다.

 

그 때의 나는 내 말의 무게를 알았던 걸까.

몰랐었지만 지금에 와서야 알 것 같은 것은.

 

듣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오월을 간직했을 거라는 것.

 

자살은 있어도 열사는 없던 시대. 스펙이나 경쟁의 삶이 아닌 열사의 죽음을 먼저 배운 조금은 특이한 나의 대학생활. 우리 지역의 우리 학교의 시간은 다른 대학의 그것과는 다르게 참 느리게 흘렀었지. 그 느림에 빚진 것처럼 나도 참 열정적으로 느리게도 살아 왔구나.

 

그 때 나는 오월과 한 몸 같았는데, 요즘의 나는 어색하다. 내 안에 무언가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고통 앞에서 겸손해 진 것일까. 그래도 그때 말을 많이 해놓아서 다행이다. 내 말이 내 발목을 잡을 테니. 언제고 선택의 순간에, 기꺼이 발목이 잡히기를.

 

*


(p.94-5)

.. 하지만 시민군은 거절하는 그에게 한사코 수류탄을 떠안기고 떠났다는 것이다. 마치 김밥을 먹으면서 같이 먹으라고 친절하게 사과라도 건네는 듯이.

 

생각하면, 피와 김밥 옆에 수류탄이 같이 있는 탁자는 얼마나 초현실주의적 정물인가. 하지만 그 정물 앞에서 우리가 겸허한 마음으로 조금만 더 머물러 깊이 생각하면, 이 그림 속에는 얼마나 심오한 통찰이 담겨있는 가. 사랑은 피를 나누는 것이며, 밥을 같이 먹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 사이의 참된 사랑과 연대를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사랑은 마지막에는 같이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시민이 똑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는 없다. 수류탄을 건넸던 시민군이 헌혈을 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울 것을 요구했다면 수류탄이 아니라 총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들은 총을 들고 싸우던 시민군이 헌혈차에는 총이 아니라 수류탄을 주고 갔다는 것은 그들이 헌혈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싸우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 없다면서 받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굳이 수류탄을 강요하듯이 떠안기고 갔다는 것은 똑같은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시민이 같이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요청이었을 것이다.

 

만남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같이 기쁨을 나누는 것에만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쁨은 언제나 만남의 마지막 결과이다. 사랑의 기쁨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같이 나누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지 않으면 안된다. 고통은 수동성이다. 하지만 내가 타인과 고통을 나눌 때 나는 자발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이요, 그런 한에서 고통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서 능동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고통 속에 하릴없이 같이 머무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고통은 본질적으로 그것의 부정을 지향한다. 고통의 주체로 하여금 고통을 부정하게 만들지 않는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닌 것이다. 그런 한에서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고통을 다시 부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같이 행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원인이 외부의 적대적 타자인 한에서 고통을 극복하기위해 같이 행위한다는 것은 같이 싸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한에서 사랑은 같이 아파하는 것 뿐만아니라 같이 싸우는 것.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같이 위험에 맞서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피와 밥 곁에 수류탄이 놓일 때, 사랑의 성찬은 완성되는 것이다.


*

 

타인의 고통에 기꺼이 참여함으로써 함께 싸우는 것.

 

5·18에 위대함을 가져다 붙일 수 있는 이유는

놀랍게도 그 항쟁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싸우는 것도 모자라죽음까지 무릅 쓴 용기를 내며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려 했다는 것.

그러한 항쟁 공동체는 본적도 들은 적도 없기에 철학자 김상봉은 5·18을 '씨알 공동체'이자 '서로주체성의 현실태'로서 계시된 '우리 모두의 나라'라고 썼다.

 

고통의 연대와 응답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철학'하는 것 - 여러가지 묵직한 질문들과 마주하며, 5월의 마지막 날, 마지막 장을 덮는다.


(20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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혬혬 2017-07-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사준 책?!ㅋㅋㅋ

공쟝쟝 2017-07-28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랫나? 역시상봉샘

혬혬 2017-07-28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좋나보네^^

공쟝쟝 2017-07-28 23:09   좋아요 0 | URL
믿고 읽는 김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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