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들은 남의 행운이 거저 오는 것처럼 여기고 싶어 한다. 그런가 하면 남의 불운은 자초한 것 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에 행운이야 말로 끌어당기는 쪽으로 끌려오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인력이 더 강한 쪽으로. 당신에게 뜻하지 않은 행운이 생겼다면, 그건 당신이 그것에 다가갔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도 행운 같은 사건들은 몇 번 있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도 분명 처음엔 행운이었다. 행운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떤 우연의 연쇄 작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촉발한 계기는 내가 만들었더라. 이를테면 생각지 못한 비싼 계약 건이 들어왔을 때, 그건 돈과 상관없이 일단은 성실히 일했던 과거의 내가 불러온 복. (하지만 비싸다고 더 열심히 할 생각도 없는 게 나는 좀 문제 😩 이렇게 평등한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고 불운은 랜덤이다. 무조건.*
그런데 불운은 내게 뭘 가져다 주냐면… 배움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불운이 닥쳤을 때는 과도하게 서사를 부여해 억울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그러기가 쉽지가 않다. 불운을 자초한 것 처럼 여기게 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내가 너무 주인공이라서.
“오! 신이시여! 어쩌다 내게 이딴 개 같은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신의 영역이므로 내가 알 수가 없다. 순간닥친 똥 같은 기분을 강렬하게 느껴내고, 이 불운이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 곰곰 생각해 본다. (인생의 코어와 관련된 반복 강박의 경우 무의식까지 파고 내려가야 하는 난이도 최상의 숙제지만 간단한 불운의 경우는 잠깐 머물러 통찰하는 것만으로도 큰 배움을 준다. 어쩌면 이건 사업가의 마인드 일지도.)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였지?
이 상황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를테면 이번 겨울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아르바이트생의 실수로 나에게 끼얹어졌을 때.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커피 프랜차이즈에 매뉴얼이 없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뭐 여차저차 쏼라쏼라 친구에게 물어보고 하는 과정에서… 세탁비와 병원비도 받고, 약간의 화상에 대한 실비 보험을 탈수 있다는 걸 배웠다!!! 수년 동안 돈을 내고도 좀 처럼 탈 생각을 (귀찮아서) 한 적이 없던 내 실비… (응?) 친구가 당장 신청하라고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 운 똥망~ 운명을 탓했겠지.
또 있다. A와 ‘헤어질 결심’을 하지 않았더라면 다 알지 못했던 A의 새로운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며, 코로나 후유증 관리를 잘못해서(자초한 불운) 허리가 작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걷기가 내 몸에 얼마나 도움 되는 지를 10년 후 쯤에야 알았겠으며, 에… 또…
…
내 인생에 없었으면 좋았을 그 …
2.
를 쓰는 이유는 바로 ‘억울함’ 때문이다.
뭐지? 나 왜 하나도 안 억울하지?
나는 억울하지 않다. 내면에 억울함이 없다.
응? 왜죠? 😀
한때 나를 휘감고 있던 그 감정이 일상에서 사라진지 꽤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낯설었다.
아. 편하다. 내가 편한 것은. 억울함이 사라졌기 때문이구나.
오늘 오전엔 이걸 써봐야지.
3.
아침엔 낯설고도 익숙한 손길을 받으면서 일어났다.
- 이렇게 이쁜데 ...
.
.
라며 엄. 마. 가. 내 이마를 쓸어서 깨웠다.
… 뒤에 생략했으면 좋았을 말. 이렇게 예쁘게 낳아놨는 데 왜 아무 놈도 안 데려가냐고 궁시렁. 까지 다 들어버렸네. 들으라고 한 소리겠지만. 음음.
오전에 병원 가려고 어제 늦은 저녁에 비행기 타고 오신 울 엄마.
분명 어젯 밤엔 딸들이 면세점에서 사다 준 가방을 받고 즐거워 보였는 데.
오늘 아침에는 본인 입으로 “이렇게 예쁜 딸 얼굴”을 보니 우울증이 난다고 하신다. (이유: 시집을 안 가서) 아빠가 은퇴하고 요즘 계속 골골대는 이유도.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지겨운 레파토리이지만 나는 하나도 억울하거나 감정이 상하지 않았다. 우하하하!!! 내가 계속 히죽거리면서 맞장구를 치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는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고 (조금만 더 참고 가만히 들으면 윤석열이 나온다. 대통령 때문에 자식들이 시집을 못감) 이 바닷 마을의 부부는 자식들이 자식을 낳지 않아 생긴 우울증으로 불운한 삶을 마칠 예정이라는 훈훈한 경고를 들으며 난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가 예쁜 것과 내가 아이를 낳지 않는 것과 엄마의 급격한 우울감(증이라곤 절대 생각 안 함. 엄마가 리모델링한 시골 집에서 얼마나 신나고 즐겁게 사는 지는 내가 봐.서. 알고 있다!!!).
오늘의 나는 엄마의 거대한 논리적 공백을 채우지 않기로 해.
대신 수치에 의거한 팩폭을 날려주지.
- 여성이 가사노동에서 해방되는 나이가 평균 84세래. 가사 노동 해방 만세!
이럼시롱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는 데.
- 그건 죽을 때 까지 해야지!
하신다.
- 엄만, 안 억울해?
- 네 아빠가 더 억울하지. 평생을 일했는 데. 아빠가 없으면 엄마는 밥 먹기도 싫을 거 같아. 아빠가 있으니까 뭐 맛있는 거 해먹을까? 이러면서 맛있는 거 하지.
- 우와, 신혼이네 신혼. 즐겨.

<딸들은 밤 11시에 모여 엄마가 가져온 고구마대 김치랑 생 배추 김치 먹음>
4.
엄마 나도 그랬어. 내가 혼자가 돼보니까 가장 어려운 일이 매번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밥 챙겨 먹는 거더라고. 그제서야 알았지. 나는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구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맛있는 걸* 먹는 걸 좋아하는 구나. 맛이 없더라고. 혼자 먹으면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맛 없어.
하지만 곁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오로지 나의 생존 만을 위해서 제 때 먹어야 내 삶이 유지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나.
지금은?
여전히 오늘은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귀찮지만, 이제 나는 나만을 위해서 먹어. 내가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먹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그냥 매번 대충 맛없게 먹어.
하지만 나는 동네 카페에서 까다로운 책을 읽으며 골똘할 때 행복해. 엄마가 가사 노동 다 끝내놓고 컴퓨터로 고스톱 30분 치면서 행복해 하는 것 처럼. 세상에는 곁에 구체적인 사람이 꼭 없어도 되는 종류의 행복도 있다고.

<이를 테면 *감시와 처벌* 이라던가 7월까지 절반 읽었습니다, 좀처럼 다시 펴지 못하는 중 ㅠ,,ㅠ..>
내가 억울하지 않은 것에는. 밥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를 끈덕지게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다.
예전의 엄마는 아빠 밥을 하는 건 억울하지 않지만, 시부모님의 밥을 하는 건 때때로 억울하다고 했었다. 오늘의 엄마는 아빠 밥을 생각 하는 것이 엄마가 맛있는 것을 챙겨 먹게 되는 이유라고 했다.
엄마와 나 사이의 공백.
억울할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라는 생각이 든 건 내가 자초한 깊은 불운에서 배우게 된 것일 거다. 나에겐 이상한 억울함이 있었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그리고 언제부턴가는 억울하지 않다. 나의 억울함을 해체하기 위해 내 불운에서 배우기 위해서 그토록 읽고 썼던 걸까 싶을 정도.
내가 여자라서 밥을 해야 하는 거라면 분명 억울했을 것이다. 엄마 몫까지 껴안은 채로 이상한 억울함을 느꼈을 것이다. 엄마의 경우 아빠는 무조건, 그리고 시부모님들은 불평없이 맛있게 잡수면 된다고 했는데, 나는 어디까지는 되고 어디까지는 안되는 지를 잘 모르겠더라고. 누구까지는 되고 누구까지는 안되는 지도. 동생들한테 맛있는 걸 해줄 때는 좋은 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기분이 팍 나빠질 때. 안하는 게 좋지. 안하는 게 좋아. 이제는 하지 않지만. 어떤 기대와 근거에 대한 생각을 좀 많이 했어야 했어.
어디까지는 내가 원하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파고들기 위해서는 통증과 내 상태에 무감각하지 않은 몸을 가져야 했고 느낌과 느낌 사이의 공백 안을 채워 넣을 엄밀한 논리가 있어야 했다. 나에겐.
자본주의 가부장제, 성 역할 고정관념,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 돌봄 혹은 재생산 노동, 신자유주의, 관습적 이성애, 권력의 미시 물리학, 감정과 무의식, 정체성의 정치, 개념의 탈구축, 담론이라는 통치성, 타자와 악의 평범성, 기억의 우울증의 괴롭힘의 뇌과학 …
5.
새 학기에도 연장된 아르바이트에 대해 엄마가 자기는 운이 좋은 것 같다면서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 갑자기 (서울에서 시집 안 가고 있는)
- 너희들만 생각하면 우울하다!!
나는 엄마의 우울. 나는 엄마의 우울.
예전이라면 그 말을 들으면서 어딘가 미안했을 텐데, 오늘은 계속 웃겼다.
자식들만 ‘없으면’ 바로 행복해지는 엄마를 나는 사랑한다.
내 사랑의 최고 실천은 엄마와 떨어져서 지내는 것.
엄마 눈에 내가 보이면 우울해 지실 테니까.
푸하하하.
엄마의 뇌를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비행기로 1시간 정도의 물리적 거리.
엄마의 시냅스에는 나라는 존재가 자신과 분리되지 않을만큼 무척 가까이 있고, 엄마의 안녕과 행복은 아빠라는 존재인데 그것이 없는 나는 불행해 보일 테고, 엄마는 내가 불행하(할거라고 여기)니까 우울하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우울하게 하는 내가 우울하고.
서로가 서로를 탓하면서 유지해야 하는 제도.
가족 제도.
혹은 제도로서의 가족.
6.
모든 지식은 필요에 의해 생산되고, 모든 제도 역시 필요와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필요 없던 지식과 거추장스럽기만 한 제도와 규범은 없다.
낡아가는 것들은 있을 수 있겠지만 거기엔 만들어진 이유가 있다.
가족이야 말로. 우리의 분리되기 어려운 연약한 시냅스야 말로.
인간의 친밀함이야 말로. 돌봄이라는 사랑의 노동이야 말로.
엊그제는 유기체적 인간의 동물성에 대해서 적어 놓고,
오늘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사회성에 대해서 생각한다.
인간이 원하는 친밀함의 농도, 생존 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와 언어.
사랑의 필요, 필요로서의 사랑.
인간이기에 느끼는 행복감. 고독감. 안전함.
그리고
가족들과 밥을 먹어야*만*,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나를 생각하면서.
또 내가 기억하기에 단 한번도 엄마의 밥은 맛이 없었던 적이 없다는 걸 떠올렸다. 울 엄마는 진짜 진짜 훌륭한 요리사. (그의 피를 이어 받은 나도… 응?)
새 가방을 메고서 엄마는 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껴안으면서 구호를 한번 더 복창했다.
- 84세 가사노동 해방! 울 엄마는 120살에 해방! 사랑해요!
당신과 나 사이의 어떤 공백을 기백권의 책을 읽어 논리로 채우고 나니, 나는 이상할 정도로 억울하지 않고, 공백을 포함한 채로도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엄마는 알까.
아마도 엄마는 모를 거야.
하지만 나는 안다.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아마 나는 재생산을 포기했으므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하는, 할 사람은 엄마 뿐이라는 걸. 엄마.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책을 읽었어요.
7.
(72)
경상도 농가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서울 사람이 될 만큼 부드러웠고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자 결심할 만큼 이지적이었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쌍방이 대등한 관계일 때에만 성립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아이를 스무 해 이상의 제작 기간을 요구하는 수공예품처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공예품이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소통은 허위와 폭력의 게임이어야만 했다. 진의를 다정함으로 감싸고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밀어 가는 것이, 그러다가도 격렬한 거부 반응 앞에서는 압도적인 차이를 드러내 기세를 꺾고 복종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이었다. *진정성과 정직의 힘을 동경하는 이들*은 그 역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악질 적이었다.
(159)
돈을 벌어야 해. 텅 빈 배속에 주문처럼 메아리치는 한 문장. 돈을 벌어야 해.
“나쁜 일이라도 있어?”
엄마의 목소리가 오후 나절의 햇살처럼 내 위에 내려와 얹혔다. 나는 뻐근하고 불편한 낮잠으로부터 깨어나듯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아니, 왜?"
“표정이 안 좋아 보여서”
고개를 돌려 엄마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무드 등의 주홍색 불빛이 마른 어깨를 덮고 있어서, 엄마의 머리도 무드 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꽃받침처럼 보였다. 나는 갑자기 트램펄린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서 물었다.
“엄마.”
“응.”
“내가 만약 잘 안되면 어쩔 거야?”
(234)
나는 선물이 아니라 주식이나 부동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각각은 선물과 다른 시장인 만큼 다른 나쁨이 있었다. 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노동자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주가를 먼저 살피는 나쁨. 사람의 총체적인 가치가 소유한 아파트의 가격으로 환산될 수 있다고 믿는 나쁨. 모든 시장은 어떤 이유로든 다르게 나빴고 어떤 이유로든 똑같이 나빴다.
그리고 나는 아주 뒤늦게 시장의 참여자들이 심판을 기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려 냈다. 잘못 처신한 사람은 계좌에 손해를 입었으며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기에서는 방역당국의 노고를 들먹이며 확진자들을 꾸짖을 필요도, 메뚜기 떼가 하나님의 진노라고 믿을 필요도 없다. 인간의 도리를 따질 것도 없다. 현학이나 영성을 명분 삼아 남 위에 올라서려는 이가 없다. 오직 수익률과 잔고뿐이다.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이고 시장이란 어떤 공간인가. 세속적인 원칙도 하늘의 공의도 그 어떤 인과도 빌리지 않고 욕망을 욕망으로서 돕는 것은. 그래서 몹시도 사나워지고 잔인해지고 무규칙해지는 것은. 그럼에도 이 견고한 세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것은. 그 사이의 접점과 간극은...
한 달간 삭였던 기억이, 그동안 시장을 바라보며 느꼈던 껄끄러움이,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따끔거리는 심장이 서로 맞물리며 실패한 인의와 욕망의 총체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오래도록 똑바로 바라보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소설 <인버스> 23살 여주인공은 엄마와 함께 살 아파트를 위해 선물거래에 뛰어든다.
부모 세대와 나의 세대의 공백과 단절에 대해 생각했다. 손에 땀을 쥐고 아주 재밌게 읽었다.
덧. 제 독서의 원흉(?)이었던 엄마와의 화해도 결론처럼 알려드릴겸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어 생존 신고를 합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책을 예전 처럼 많이 읽지는 않지만 일기는 더 자주 쓰고 있습니다. 새로 둥지 튼 블로그 주소 걸어놓고 갈게요~ https://blog.naver.com/jyanggrim 슬슬 독서의 계절 가을도 다가오는 데 ~ 서재 식구들~ 평안한 독서를 이어가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