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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악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송예슬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책 카프카의 <꿈>을 만났다. 어제 잠들기 전에 만났으니, 아직 헤어지지 못하였다. 세계를 너무 많이 알아버린 자에 대한 연민이 밀려왔다. 그가 꿈에 대해서 쓴 일기들, 연인에게 보낸 편지들. 역자 배수아는 카프카가 적은 꿈이 너무 아름다워 잊히지 않아 인용한 단편을 쓴 적이 있다 했다. 아름다운 꿈. 잊히지 않는 꿈.
자기 꿈을 나누어주는 사람들을 사랑하곤 했다. 밤사이 일어난 인상적인 꿈을 몸을 써서 이야기해주려고도 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꿈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로또 맞는 길몽은 사고 싶어 할 테지만. 엄마는 항상 예지몽을 꿨다. 엄마의 꿈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신기하다. 큰일을 앞두고 엄마에게 좋은 꿈을 꾸도록 당부한다.
엄마 딸인 나는 예지몽을 꾸지 못한다. 일이 바쁠 때는 꿈에서도 일을 한다. 대부분은 낮 동안 알아차리지 못한 내 마음을 대신 읽어주는 꿈을 꾼다. 그래서 나는 내 꿈이 좋다. 꿈을 이용하는 편이다. 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내게 보내는 신호로. 나 라도 나를 편하게 대해야한 한다는 합리화로, 해석으로. 카프카가 꿈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퍽 마음에 든다. 좋아하는 작가와의 공통점. 어떤 꿈들은 나에게 숙제처럼 반복되고, 그것들의 명령을 받아서 삶을 풀어 나가고 있다. 잘 풀리면 꿈은 안도한다. 안 풀리면 계속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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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연필을 깎아서 영어 문장을 쓰다가 문득 *공부는 평생 해야 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는 다르게 읽히고 들렸다. 그래. 그게 맞고. 그건 맞지. 다짐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부를 하기 위해서 살아야겠다.
<이젠 나도 어엿한 블랙 윙 있는 여자다!?>
나는 그런 몽당연필을 처음 봤다. 샤프보다는 펜을 사용하고 연필은 거의 쓰지 않는 종족이었으니까. 그래서 그게 너무 멋졌다. 어떻게 연필을 끝까지 쓸 수가 있어요? (= 어떻게 공부가 생활일 수 있어요?)
친구들은 매일 공부를 한다. 거기에는 이유와 목적이 없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처음 봤다. 있었는데 못 봤을 수도. 나는 이유가 있었다. 언제나 있었고. 지금도 사실은 있다. 물론 목적이 바뀌었다(내 목적에 대해서 설명해 보는 일기가 될 예정이다. 다짐만큼 큰 의미부여로 끝날테니 읽어달라).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나는 내게 닥치는 것들을 *그냥* 견디고 싶지는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정말 어떤 부분이 변해버려서. 그냥. 도 견뎌지게 되는 것이다.
그냥이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알지만. 어느 날 늘상처럼 일기를 쓰다가 문득 끈끈한 언어들이 타닥타닥 엉겨 붙기 시작했을 때 (즉, 사후 해석이다) 마치 반복되는 꿈처럼. 반복되는 현실의 쟁점들. 나는 알아버렸다. 반복되는 그걸 다르게 이해해 보기 위해서. 다르게 해석해 보기 위해서. 나는 읽고 쓰기라는 가성비 좋은 행동을 하기로 했구나. 또 나는 왜가 있었네. 그냥은 없었네.
사는 게 좀 재밌어졌다. 삶은 통제할 수 없지만 해석은 온전히 내 것이다. 언어를 무한정의 언어를 다 흡입하고 싶어. 작년 요맘때부터는 얼마나 또 큰 가르침 주시려고.라는 문장을 입에 달고 산다. 얼마나 또 크게 배우려고. 이러다 대천재를 넘어서는 대현자 되겠어요. 그런데 매번 똑같은 부분에서 울고 있는 건 비밀이다. 비밀 아니다. 눈물을 감출 수는 없으니까.
다시 돌아가서. 연필 한 자루가 다 닳아지는 게 일상인, 아무런 목적도 없는 읽고 쓰기를 하는 친구들. 그냥 잘난 척이야라고 웃으면서 스르르 넘어가지만. 그건 내게 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잘난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그게 일종의 아비투스라는 것을 나는 알게 된다. 출판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는 어떤 학자의 말에서, 눈을 뜨니 집에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는 저자의 문장에서, 나의 독서량에 기함을 하는 이제는 가끔 만나게 되는 친구들에게서. 공통점과 차이점. 배울 점과 다른 점. 이미 체득이 된 사람들 앞에서 한 번 씩 묻게되는 나의 당연하지 않은 조건.
집 안에서 공부를 해본 기억이 없다. 나의 부모님은 내 공부에 관심도 없었지만 (어련히 알아서 잘해라) 내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도 없으시다. 얼마 전에 동생과도 대화 나눴다. 우리 넷을 단 한 줄의 글도 참고하지 않고 키워내셨다는 게.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들어. 육아에는 일관성이 중요하다며. 어쩌면 그게 일관성이었겠구나. 노동이라는 일관성.
읽고 쓰는 가족을 가진 적이 없으니, 읽고 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 이벤트였다. (그래서 읽고 쓰고 나면 이리도 뿌듯한가) 내게 공부는 도구였지 공부가 그 자체로 그냥 하는 것이 된다는 게 신기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필요하지 않은 도구는 버린다. 그 뿐. 그러다 나는 어쩌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게 목적 그 자체. 생활 그 자체. 일상 그 자체. 인 사람들을.
매일같이 아침밥을 차려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도서관에 놀.러. 나.오.는 (그녀들에게 집은 휴식이 아니라 노동의 공간이다) 사람들을 내.가. 한.가.해.져.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그냥 취미로 하는 공부란 것도 가능. 하구나!
(독서 시장에 다수를 차지하는 참고서와 자기 계발서에 대한 생각을 슬몃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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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적 없는 뒤죽박죽 독서에 차라리 대학원을 가는 게 좋지 않겠느냐던 친구가 있었다. 그 애는 따지고 보면 공부하는 게 제일 가성비란 종류의 말을 하며 생활비를 버는 시간 외에는 대체로 수험 공부 중이었는데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계급을 일정 부분 탈출했다.) 그 말이 나를 위한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난 할 말이 없었고 점점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왜 그 말이 그렇게까지 안 받았을까.
어떤 경험들. 투자라는 개념이 삶에 아예 없는 그저 비용. 공부라는 것이 가성비로 기능한다는 정도의 상식조차도 부모님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굴 탓해. 나 역시 학생도 아니고 성인이 되어서 ‘돈을 내고서 까지 학위 공부를 한다’라는 것이 어쩐지 꺼려진다는 (물론 대학원 갈 돈이 없기도 하다!) 애매한 흐림. 그러나 가장 1차적인 걸림돌은 자신 없었던 거다. 당선, 합격, 계급으로 계량, 평가, 수치화되는 자격증 혹은 시험 공부라는 것에. 난 솔직히 재능이 없다.
그래서 친구에게 한번 만 더 그 소리 하면 너랑 안논다 으름장을 놓았지.
나에게 읽고 쓰는 건 정말인지 너무 중요한 취미인데. 그게 일이 되고 업이 된다면..... 그걸로 돈을 벌어야 하게 된다면..... 내가 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삶의 어떤 영역이 사라져 버리는 느낌. 하지만 역시 내게 원하는 삶의 방식이 있다면. 내가 읽고 싶은 책이나 실컷 읽는 것이기도 해서 (기본소득이여!) 지금은 최대의 사치를 이랑의 신곡대로 어떻게든 읽고 쓰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삼고 있으며. 그러니 나의 현실은 카프카다. (감히 카프카 자꾸 비벼서 미안하지만ㅋㅋ 그는 책 읽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노동자들의 희망ㅋㅋㅋ 아니겠나요?ㅋㅋㅋ 다만 나는 오래오래 살겁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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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요지는 이것이다. 어떤 주장.
공부를 해서 그걸로 지식을 쌓고. 그걸로 능숙해져 돈을 벌고. 유용하게 쓰고. 자격증을 획득하고. 자격증을 따는 법을 가르쳐서 돈을 벌고. 사회적 승인. 사회적 인정. 그리고 개인들이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만* 공부를 해야 한다면.
그러니까 공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공부를 통한 다른 것이 목적이 된다면. 이제 그런 삶은 역으로 가성비가 떨어질 것이라는 소리. 현시점의 인류는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는 사회구성체를 이룬 탓에 훌륭하게도 AI를 만들어 버렸으니까. 딥 러닝. 마치 산업혁명 시대의 노동자들처럼. 가성비를 찾기 위해 공부를 하던 사람들은 이제 가장 가성비 좋은 기계로 대체될 것이다.
그러나 내 유희인 일상적 공부는 기계로 대체될 리가 없다. 그게 재밌으니까. 이게 자체로 목적이니까. 내게는 노는 것.
이게 내가 내놓은 어떤 대답인 것 같다.
삶의 방식을 읽고 쓰면서 살아가기로 바꾼 뒤에 내게 끈덕지게 따라붙던 질문.
그걸 왜 해? 그걸 왜 읽어? 좀 써먹을 수 있는 걸 도모해야 하지 않나? 나 스스로에게도 주눅이 들곤 하던.
(그리고 요즘에는 생각이 좀 바뀐 부분도 있는 데,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ㅋㅋㅋㅋㅋ)
나는 이제 되려 되묻고 싶어졌다.
이걸 왜 해? 왜-가 있는 공부.에 대해서. 왜 그것만 공부야?
목적이 있는 공부‘만’해야 한다면. 결국 공부란 건 신자유주의(자기착취)의 가장 기만적이고 강력한 통치술에 현실을 갈아 넣는 셈이 된다. 아마도 그 끝은 이길 수 없는 대상(ai)들과 분투하는 일이며. 어쩌면 ‘경쟁’이 원리인 현실의 한 부분이 ‘과도한 경쟁’의 결괏값으로 탈락되는 순간(지적 노동의 자동화)을 우린 목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나. 으아아. 정말로 현실은 언제나 오류를 배태하고 있나 보다. 슬픈 것은. 가장 절박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는 것.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여? ㅋㅋㅋㅋ 나는 제안해 보고 싶은 듯 하다.
왜? (기능으로서의)가 아닌. 앎의 통증이자 쾌락(정희진 샘ㅋㅋㅋ)으로의 공부에 대해.
나와 세계를 읽고 쓰고 배우는 것을 자격증 취득을 위함이 아닌 삶에 습관이자 목적으로 삼는다면 (물론 그것은 쾌락과 욕망의 구조를 바꾸는 지난한 일이다)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것으로 바뀐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적어도 나를 다독일 수 있는 언어는 쌓인다. 내게 그건 삶이 살만해지는 것으로 변화하는 경험이었다.
흠흠. 목적없이 하는 공부가 삶의 방식이 되었다는 자랑을 길게도 적었네.
사람들이 ai랑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쫓아오면 조급해지고, 조급해지면 지친다.
그냥 가능하면 걔들이랑 잘 놀았으면 좋겠다.
멈추면 보인다.
오늘도 내 핸드폰에는 챗gpt로 일 더 잘하고, 돈 더 잘 벌고, 자동 수익화를 도모하는 안내 알림들이 ...
다들 그만 좀 하지?
나는 가끔 외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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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다 적고 나니 이것은 벵하민 라바투트의 소설 <매니악>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양자역학의 심연으로 시작해 극단적인 이성과 논리에의 집착으로 컴퓨터를 만든 천재 폰 노이만의 일생을 소묘하며,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으로 끝나는 경장편 모음을 읽으면서 2월의 나는 즐거웠고 괴로웠다. (책의 존잼 포인트는 아주 많지만. 1. 이 젊은 작가의 장점은 압도적인 천재들의 곤란함을 쓰는 것이고. 천재 아닌 나는 천재들을 선망하기에 그들이 겪는 곤란이 즐거웠다. 2. 이 책을 일종의 근대성 비판으로도 읽는 독후감을 쓰겠노라 야심찬 계획이 있었는 데, 이제 소설 내용 다 까먹어버림.)
당시 나는 엄청난 일감을 쌓아두고 쳐내기를 허덕이면서 스스로를 아자황(알파고가 시키는 대로 바둑돌을 놓아주기 위해 이세돌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이입하고 말았다. 아. 지금 나는 아자황이 아닌가. 인공지능은 바둑을 두지만 바둑 돌을 놓는 손 까지 만들 수는 없다!! 돈 버는 내 손 정말 소중해! 이러면서. (소중한 것과는 별개로 일에서는 별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 매번 바닥을 치는 근로 의욕과의 사투. 사실 일할 때의 나는 클라이언트들의 아자황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간은 흘러 흘러 넉 달이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OOO는 OOOOOO를 런칭했고. 생각보다 이른 시간안에 나는 곧 AI로 대체될 예정이다. 그 생각을 하면. 아악. 두렵다. 정말 두렵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고. 뭐라도 배워야 할 것 같고. 급박. 초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나는 세상이 원하지 않는 별로 필요가 없는 존재인 것 같고. 다행스러운 것은 고양이 말고는 부양가족이 없다는 것. 정도인데. 으윽.
하지만 이제 두려울 때, 술 대신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게 있었으니.
그것은!!!!!!!!!!!!!!!!!!!!!!!!!!!!!!!!!!!!!
책이다.
홍홍!
책이나 읽어야지.
컹컹!
대책은 없지만. 이대로라면 뭐 나만 죽겠는가. 다 죽겠지. 나는 이 난관을 헤쳐갈 능력이 없고 잘 몰겠다. 고민하느니 그냥 놀아야징~
이제 알고리즘은 인간의 직관마저 넘어선다.
그런 우리에게 남는 것은?
쓸데없이 기계랑 경쟁하지 말고 (나보다 똑똑한 기계의 기획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인간이여, 놉시다. 한가하게 책이나 읽으면서. 그리고 푹 자자. 잠을.
인공지능은 놀지 않고, 잠을 자지 않고, 인공지능은 꿈을 꾸지 않으니까. 걔들이 못하는 걸 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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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논문의 아이디어를 더 밀고 나가 오늘날 우리가 '폰 노이만 탐사선'이라 부르는, 자기 구축과 수리, 개량이 가능한 우주선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우주선을 발사해 태양계의 외행성을 식민화하고, 거기서부터 우주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떠나는 상상을 했다. 이 기계라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가 닿을 수 있는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머나먼 세계와 범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의 우주선은 외계 해안에 착륙해 필수 자재를 캐내어 자기 복제본을 만든 뒤 개량된 자손을 무한한 공간 속으로 떠나보낼 것이다."
"(229) 비록 튜링은 실패했으나 그가 자기 '아이들'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얻은 핵심적인 통찰이라고 한다면, 기계가 진정한 지능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런 기계는 오류를 저지르고 원래 설정된 프로그래밍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하며, 무작위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튜링은 바로 이런 무작위성이 지능을 가진 기계의 관건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처럼 놀 줄 알아야 한다고.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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