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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는 쉬고 업무에 치이던 지난 11월부터 혼자 야금야금 좋은 책들을 많이 읽었는데 리뷰를 못 쓰고 지나가서 영 찜찜하다. 간단히라도 남겨둔다. 



1. 아내의 역사 
















결혼제도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데 절판되어서 <진화하는 결혼>만큼이나 구하기 어렵게 구해서 읽어보았다. 조금 실망스럽게도 딱히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이미 페미니즘 책으로 다 접한 내용이 약간의 반복이었고, 스테파티 쿤츠의 <진화하는 결혼>이 훨씬 좋았다. 


영미권의 중도적인 학자들 서술 방식에서 오는 밋밋함? 담담함 때문인거 같기도 한데, 그럼에도 가부장제 결혼 제도 내에서 있는 힘껏 제멋대로 산 '기 센' 아내들을 알게 된 건 수확이었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에나 가부장제에 혹사 당한 비운의 여자들도 있지만, 그 시대를 거스르면서 제멋대로 산 여성들도 있었다. 가령 어떤 여인들은 당당하게 '나는 내가 부릴 수 있는 남자를 원한다!'라고 외치고, 가출해서 제멋대로 살다가, 남편이 재산 남기고 죽을 즈음 열심히 간병해서 재산을 받는 식으로 요령껏 산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남자만큼 자유롭게 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그럴 수 없었다는 것도 책에서 반복해서 서술해주고. 


스테파니 쿤츠의 <진화하는 결혼>에서도 비슷한 예들이 많이 나오는데, 거시적인 역사서나 페미니스트들의 저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돌출적인 결혼 생활'의 예들이 종종 나온다. 중세 후기나 빅토리아 시대에 부부들이 출산을 하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피임을 했던 예들도 그렇다.  '보스턴 결혼'으로 알려진 여성들간의 동거 생활만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관계가 있었다. 딱 빅토리아 시기에.  '이성애 여자/남자들의 뜨거운 우정' - 그러니까 정말 뽀뽀하고 서로 껴안고 자고 열렬히 사랑을 표현하고 하는 것들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하여간 이런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책들.  


이런 책들에서 알 수 있는 핵심만 한 줄로 쓰면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결혼의 역사에서 '돌연변이'라는 것"  



















2.  월든 















월든은 정말 읽을 생각 없었는데 <도시인의 월든>을 읽고 드디어 펼쳐보았다. 월든을 읽게 된 계기는 소로가 무척 웃긴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서인데, 죽을 때가 다 되어 친구 에릭슨이 "소로, 이제 신과 화해하게나' 라고 했더니, 소로의 답변. "나는 신과 싸운 적이 없는데." 


어찌 매력적이지 않을 수가! 예상대로 소로는 정말 깐깐하고 괴팍하며 꼬장꼬장한 사람이었다. 월든을 숲속 자연주의 생활로 읽으면 이 소로의 유머를 캐치하기가 어려울 수 있는데 중간 중간 빵 터지면서 웃기는 데들이 꽤 많다. 내가 이상하게 꽂힌 부분은.. 자신은 혼자 있는 고독을 사랑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찰.거.머.리 처럼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라고 표현한 부분이었는데 관조적으로 자연을 묘사하다가 이런게 툭툭 튀어나오는게 웃기다. 




3. 행복의 약속 
















너무나 좋아서 어디부터 어떻게 좋다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는 책이다. 원서와 대조하면서 서문 세 번 읽었고, 에필로그 두 번 읽었고, 새해부터 원서로 일주일에 3-4페이지씩 정독하고 있다. 사라 아메드 특유의 개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문장에 뽕뽕 빠졌다. 


내가 이 책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건 내가 '행복에 천착'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나의 탐구 주제이다. 나의 (졸저) 에세이 두권은 모두 행복에 대한 글로 끝을 맺었는데 2018년에 쓴 <엄마되기의 민낯> 에세이에서 '나는 행복을 목표로 두지 않는다. 행복은 순간에 스쳐지나가는 감정일 뿐이다'라고 썼다. 당시엔 행복 담론 관련 책들이 국내에 많이 나오지 않아서 사라 아메드 책도 당연히 없었는데, 나중에 사라 아메드가 정확히 저 문장을 책에 그대로 써놔서... 나 소름 돋았잖아!!!!

그러니까 이 책은 나에게 성서가 되었다.


이민자/혼혈/레즈비언/독립연구자 라는 사라 아메드의 위치성이 텍스트를 이토록 새롭게 해준다는 것도 알았다. 게다가 장르는 철학서도 아니고 문화비평. 올해 일년 동안 원서 완독이 목표다. 논문형 문장이고 개념과 단어가 반복되어서 10여년만에 접하는 영어인데, 그럭저럭 읽을만하다. 하루에 한 페이지니까.  




4.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스피노자빠로서 이 책을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절판되어서 읽기를 미루다가 다행히 알라딘에서 빨리 구해줘서 이번참에 읽었다. 아아아아, 너무너무너무 재밌는 철학 책이다. 

매튜 스튜어트의 유머 감각도 한 몫 하는데, 스피노자주의자이면서 라이프니츠를 묘하게 까면서도 변호하고 옹호하고, 끝내 라이프니츠조차 사랑하게 만드는 글쓰기!  

가령, 라이프니츠에게 들어가는 돈이면 스피노자 11명 먹여 살릴 수 있었다라거나... (정확한 문장은 기억 나지 않음) 


그동안 내가 스피노자 책을 읽어오면서도 여전히 벗어날 수 없던 선입견은 스피노자가 '은둔 철학자'라는 거였다. 스피노자에게선 뭔가 다 도통해버린 느낌이 나는데 매뉴 스튜어트는 이런 이미지를 깬다. 스피노자는..그러니까, 정신치료가 필요할 만큼 오만했으며, 기존 정치 체계와 자신을 적으로 보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멸로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은둔했으나 동시에 사교적이었다. 그리고 방 한칸에서 하숙하면서 무지 금욕적이었으나 동시에 자신이 좋아하는 담배라거나 악세사리(뭐였더라..)엔 사치스러웠다. 


라이프니츠..아, 딱하다고 해야하나 뭐라고 해야하나. 철학사에서 홀대받는 라이프니츠에 대해서도 너무나 애처로우면서도 사랑스럽게(?)그린다. 스피노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결국 스피노자주의자가 되고만 우리의 라이프니츠. 나는 이 책을 읽고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던 라이프니츠주의자들에게 애정이 생기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라이프니츠주의자들은 발전과 성장을 목표로 전력질주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이들인데,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를 너무나 잘 그려준다. 




5.올리버 키터리지 


















처음에 잔잔해서 방심해서 읽었다가 훅 치고 들어와서 깜짝 놀란 책.  


매일 매일 반복되는 삶은 어떤 안온함 속에 우리를 노곤하게 만들며 안심시키지만, 그 안에 미세한 균열은 계속 벌어진다.


삶을 급습할 불행은 어딘가에 늘 잔잔하게 깔려 있고 우린 이것들과 살아가야 한다. 그걸 의식하건 하지 않건. 불행은 무방비일 땐 비참함을 주고, 내가 의식하고 있을 땐 불안을 준다. 안심과 안도는 그저 그 사이 사이에 한숨이나 심호흡처럼 있을 뿐이다.


안심과 비참의 저울질을 무수히 오고가며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우린 그 안에서 작은 기쁨 또는 희망을 아주 내밀하고, 감질나게, 있는 힘껏 찾아내어간다. 그것이 이 잔인하고도 알 수 없는 삶에서, 지극히 하찮은 우리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방법.






6.친밀성의 거래 
















결혼제도/친밀성 이런 주제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도 비싼데 구매해서 계속 벼르다가 이번 참에 다 읽었다. 예상보다 ...무지 재미없었다. 아니 처음에 진입장벽이 있다. 왜냐면 계속 '법' 이야기다. 그런데 읽다보니 막장드라마급 예시가 계속 나와서 빠져들었다. 


이 책은 친밀한 관계와 경제적 거래의 접점을 보여준다. 커플링, 돌봄, 가족은 경제적 활동으로부터 '보호'된 아늑하고 순수한 영역이어야 한다는 '분리된 영역과 적대적인 세계' 관점을 비판한다.


또한 친밀한 관계는 이미 다 자본주의에 포섭되어버렸다는 '경제적 환원주의'에도 반대한다. 동시에 이 모든 건 가부장제 영향하에 있다는 관점과도 거리를 둔다.


다시 말해 친밀한 관계엔 애초에 경제적거래가 포함되어있으며 사람들은 관계를 친밀하게 만들기 위해 경제적 거래에 정성을 쏟는다.


-이 책은 관계의 실재와, 그것이 상속, 증여, 보상 등의 '법'과 어떻게 엮어지는지 밝힌다. 법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언제나 '제도적으로 보증된 친밀성'(혈육, 부부)이 아닌 '제도밖의 친밀한 관계'다. 친밀성=경제적 거래=제도=법의 일치 안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법은 이런 실재를 (점차) 반영해나가야 한다는(할 수 밖에 없다, 영향을 주고받는다)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인간관계와 경제적 유대 사이의 빈틈없는 장벽에서 살 수는 없다."


이 책 읽으며 새삼 발견하는 가장 놀라우면서도 당연한 점은 결혼제도와 혈육관계의 막강함이다.


이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분쟁은 결국 깊게 헌신하거나 엄청난 증여나 거래를 했는데 법적 배우자가 아니거나 혈육이 아닐경우다. 법적(!)으로 보장된 관계라면 심플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서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


왜 우리가 필사적으로 이성애혼인제도로 들어가려하는지, 그리고 단지 애정이 끝났다는이유로 계약을 종결시키지 못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법은 여전히 친밀함이란 공식적인 계약 또는 혈육만임을 공인해주는 것이고, 이 책은 나아가서 법이 혈육, 부부관계의 친밀성 뿐 아니라 다른 관계의 친밀성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함을 주장한다.




7.레이디크레딧  
















이건 따로 리뷰를 써놨다. 나중에 서재에 옮겨두기로. 진심 띵작이라고 생각함! 




이 밖에.. 아래 책들도 읽었는데 감상을 따로 정리해두진 않았다. 비비언 고닉은 너무 좋았고, 페렉은 아니 에르노가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읽어보았는데, 1960년대 프랑스 사회상과 그 시절 젊은이들의 멘탈을 알 수 있었다. 체공녀 강주룡은 오랜만에 읽은 한국 소설인데 무척 좋았다!




















그리고, 그리고, 내가 가장 쓰고 싶은 문장과 가까운 작가를 찾았다. 

그건 바로 조앤 디디온! 하하하하하하. 너무 넘사벽을 목표로 하는 거 같지만, 나는 이렇게 감정 안 들어가고 군더더기 하나 없고 건조한 문장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하하하. 




















8. 남근선망과 내안의 나쁜 감정들  
















알라딘 서재 자주 안 들어오지만 꼭 챙겨서 읽어보는 공쟝쟝님 강력 추천으로 이번 주에 빠져 읽게 된 책이다. 따로 리뷰 쓰려고 했지만 그러다가 몇 달 있어야 될 거 같아서 역시 거칠게 남겨둔다. 


이 책의 4장까지는  

얼마전에 읽은 <치료요법문화>와 <행복의 약속> <커밍업쇼트>의 문제의식이 다 꿰어져서 반갑고 좋았다.


쾌활하고 생산성 높은 행복 주체가 되어라 + 연애와 결혼같은 이성애 친밀성에서는 여자인 니가 졸라 노력해서 잘 유지해라. 지속적이고 안정된 친밀한 관계 안하면 넌 문제있다.

초성애화는 성적 자유나 해방이 아니라 결국 여성의 능력에 대한 사과이다, 이건 요즘 미세하게 불쾌하게 여겨지던 ‘섹시한 페미니즘’ 뭐 이딴거에 대해 일갈해줘서 속이 다 시원했다. (댓글 붙여넣음. ㅎㅎ)


이 책은 페미니즘 뿐 아니라 감정 정치에 대해 지적하는 책들과 같은 선에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좋은 점은 사회학 책처럼 분석에 끝나지 않고 있는 힘껏 돌파구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마리 루티가 봉착한 철학적 딜레마를 나도 겪었다. 


한번 더 읽고 좀 더 세밀하게 쓰려고 했지만 1독 하고 남겨진 인상대로 적은 것이라 구멍이 숭숭 뚫려있지만 일단 써본다.(이론적으로 으잉 할 수 있는 부분 있음 주의) 


딜레마가 뭐냐면 이성적, 계몽적 주체가 말하는, 명료함과 동시에 정신 꼭 바로 차리고 옳은 선택을 하라는 실존주의와 


푸코의 생명정치이론, 주체는 선택할 틈이 거의 없고 우린 그물처럼 짜인 구조 속에 있고, 더 나아가 자아도 없다고 해버리는 들뢰즈, 데리다 등의 구조주의 + 버틀러와 같은 모호성주의. 


이 두 가지 이론의 충돌인데, 후자가 현재 치료요법+신자유주의와 만나면서 무력하면서도 쾌활함으로 위장하고 실존적 결단을 미루는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지적한다. 루티는 기존의 계몽주의적 이성적 주체도 아니면서 구조에 결박되어 있거나 아니면 모든게 애~매~하다고 라는 주체도 아닌 주체를 라캉의 이론에서 찾아낸다.


마리 루티가 라캉을 사랑한다면, 나는 실존주의를 사랑한다고 감히 고백한다.


매 순간 나의 존재를, 나의 결정을 통해, 나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갈 수 있다는 실존주의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실존주의는(갈래는 다양하지만) 자칫하면 남성적/이성적/계몽적 주체로 오해되거나, 또는 정말 그렇게 가기도 쉽다. 그러니까 우리를 매우 부담스럽게 하는 것이다. 구조주의가 실존주의를 비판한 지점도 그것이다.


반면 들뢰즈나 데리다 이후로 보여지는 (포스트)구조주의는 이 주체를 다 지워버린다. 주체는 구조 속에서 또는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뭔가 우글우글하게 '생산'이 된다. 작년에 들뢰즈 세미나에서 다들 당혹스러워하며 하게 되는 질문은 그러면 나의 결정은? 나의 선택은? 그런 건 없단 말인가?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하지?'라는 거였다. 나의 결정과 선택이 다 사라진다. 모든 건 다 뒤섞여 있고 '모호'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철학이 그렇게 말하든 안하든)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쿨'하다. 


기를 쓰면서 뭔가 노력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바로 거기서 루티는 걸리는 거다. 왜냐면 루티의 삶은, 핀란드 노동자계급에서 하버드 교수로 자수성가한 삶이었고 어린 시절 가난을 버티게 해준 건 바로 '계몽적 주체'였으니까.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구식' 철학을 옹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처지에 처한 거다. 그럴 때, 나타난 게 바로 '라캉적 주체'다. 우리가 이 구조 속에 결박되어 있다는 거, 맞아. 우린 그리고 타인에 의해 계속 침범 당해. 그런데, 그런데, 말야. 다 지배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 그게 결여야. 그 결여는 계속 우리를 구속해. 그런데 동시에 욕망을 만들어내. 그 욕망은 우리를 종속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로 튀어 오르기도 해. 바로 그 지점이 '욕망적 주체'가 만들어지는 지점이야! 그러니까... 구조 속에 있음을 인정하되, '이성적/계몽적' 주체로 가지도 않을 지점... 그것은 바로 나의 선택과 결정이 이성이나 계몽이 아니라 나의 들끓는 욕망, 결핍에서 시작된 욕망, 전혀 비합리적 욕망에 의해서라는 거다. 그러니까 구조도 안 버리고 주체도 안 버리게 된다. 오예!! 라캉..사랑하게 될 수 밖에!!



라깡의 욕망.... 이건 설명할수도 없고 이성도 아니고 비합리적이다. 이걸 어떻게든 고치려는 게 아니라 루티는 이걸 적극 이용하자고 한다. 이 결여에 있는 우울 불안 ..그리고 욕망으로... 선택(!!!) 을 하자고 하는 거다. 그러니까 따지고 따져서 최적의 선택이 아닌 나의 비합리성이 추동하는 것으로 선택을 하는거다. 신자유주의적 실용성.합리성 계산에서 이탈하여 질러보자는 거다. 모든 걸 매끈하게 만들고 수많은 것들 속에서 제일 좋은 하나를 고르느라 전전긍긍하지 말고 그냥 니가 꽂히는 걸 엉망진창으로 해버려. 이거인 거다. 여기서 나도 딱 만났다.


이 책을 읽고 라깡을 하반기에 파보기로 했다. <라깡의 재발견>이라는 책인데... 음 절판인가? 왜 검색이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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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1-28 23: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목에는 간단이라고 써놓고 양질의 페이퍼를 던지는 제목사기꾼 매실님...

매실 2023-01-29 00:14   좋아요 2 | URL
분량만 많지 너무 거칠게 써놨는데, 귀찮아서 그냥 뒀습니다. 정확한 제목은 간단이 아니라 대충이라고 해야합니다. 하하.

2023-01-28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9 0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3-01-29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7. 디디온 ㅋㅋㅋ 매실님의 배포 앞에 군더더기 만연한 의식의 흐름 쟝지니아 쟝끼는 안심하고 갑니다 ㅋㅋㅋㅋ 제 문체에는 도전하지 마세요 ㅋㅋㅋㅋ (네?) 나만 할꺼다 !!

8. 어쩜 이렇게 요약을 ㅋㅋㅋㅋㅋ
그러니까 이 모호성이 내가 싫은 거!!!를 루티가 딱잡아줘서 행복해쒀여. 뭐랄까 어렵고 무기력해져…..

읽지 않는 다면 제가 보고 들어 접할 수 있는 매체들이 내놓는 선택지는 대략 거칠게
무기력이든 멜랑꼴리로든 뭐든 표현할 줄 아는 언어라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예술과 항우울제(치료요법)로만 견디는 모습 vs 야 너두! 재테크 자기계발적 주체들 vs 요상하게 자기계발로 또 빠지는 정신과 의사나 뇌과학, 심리학 너튜브(그나마 이게 낫닼ㅋㅋ 정보라도 줌 ㅋㅋㅋ)

것처럼 보이는 한국이 싫어요…
저는 라캉에게 끌리는 루티를 / 실존주의 철학자 보부아르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 자기계발할 기력이 딸리는 현시대가 도저히 적응이 안되는 우울증분노증잨ㅋㅋㅋ입니다ㅋㅋ

어떻게 살아야할지 졸라 모르겠어요 ㅋㅋㅋ 미치겠네 진짴ㅋㅋㅋ

매실 2023-01-29 13:41   좋아요 0 | URL
공쟝쟝님에겐 대문호 도끼옹의 문체를 양보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저는 사실 들뢰즈도 긍정적으로 보고, 버틀러가 젠더허물기에서 말하는 미지성도 너무 좋았고 그랬거든요. 그들이 재현과 범주를 다 와해시키는게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넘 멋지잖아요. (간지 나는 거 겁나 좋아함.ㅎㅎㅎ)

그런데.. 나 자신은 재현, 범주, 분류체계에 강박이 있는 사람이에요. .맨날 분류하고 표 만들거 있억.ㅋㅋㅋㅋㅋㅋㅋ 전 진짜 애매한거 못 견디고 명.료 해야하거든요. ㅋㅋㅋㅋㅋ
정말 한국은 쓰신대로 이 의미없는 세상에서 의미를 찾다가 지쳐 치료에 매진하는 주체이거나 아니면 성장과 발전을 목표로 하거나로 가는 거 같아요. (그렇게 보여요) 우울증과 분노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고 또 애매함으로 퉁치지 않고 선택과 욕망의 추동과 명료함으로 만들어가는 루티에게...저도 끌립니다.
책을 읽고 나 좀 이렇게 사는 거 같은데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옹호를 받은 기분이랄까 그랬어요. 루티가 말하는 과잉열정이나 망각, 결정력이 확 와닿더라고요. 자기 결정을 이성이 아니라 욕망으로 해라. 그러다가 뭐 하나 얻어걸리면 자본주의와 잘 맞아서 생산성으로 보이고, 아니면 다 삽질인 거고 뭐 그런거죠. ㅎㅎㅎㅎㅎ 루티도 그냥 니 맘대로 살라고 하는 거아닐까요? 하하.

 



(10년만에 들춰본 나의 인생 책이다. 책 리뷰라고 하긴 뭐하고, 이 책을 다시 읽으며 여러 군데에서 울컥거리고, 여전히 좋아서, 단상만 휘리릭 적어둔다. 매우 거친 글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의 직업/작업을 사랑하게 되었다.

한없이 미워하면서도 언제나 그만두고 싶어하면서도 돌아올 수 밖에 없는 나의 일. 


















***


장인의 작업은 비인격성에 바탕을 두며 문제를 찾는 것과 문제를 푸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사고와 행위가 분리되지 않고 손과 머리가 마주한 물건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하나가 해결되면 매번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작업이다.




***


자의식이 비대하면 장인의 작업은 망한다. 내가 비워지고 나와 도구가 일체감을 이루되 그 안에서 내가 소외되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장인이 되고 싶다.



**

예전에 <감정 자본주의> 읽는 세미나를 할 때였다. 나는 그때 보통의 서울 사는 중간계급 이상이 구사하는 '감정을 극도로 조절하고 상대방의 의중을 살피는 우회적인 표현'을 사회 생활하면서 거의 겪지 못했다고 했는데...(다분히 여초집단인 그곳에서도 여성들 특유의 감정조절/관계지향적 화법이 별로 없던 걸 생각해보면..)....내가 '장인 세계'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이런 비인격성은 모든 장인의식에서 중요한 요소다. 작업의 질을 따질 때 이게 누구의 작업이냐는 문제가 끼어들 여지가 없게 되면, 장인의 일에 타협과 관대한 처분이 통하기 어렵다. 이를테면 어느 목공 작업자가 아버지 때문에 신경과민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그가 만든 장부 맞춤이 헐거워도 좋다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영국인들이 주로 모이는 어느 리눅스 대화방에 나도 가입해 있는데, 영국 특유의 정중한 격식과 우회적 표현들이 없어졌다. "저라면 이런 생각을 했을 텐데요"와 같은 말투가 사라졌고, 그 대신에 "이 문제는 정말 개판이다"라는 식의 말투가 생겼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 면, 이 같은 비인격성에 바탕을 둔 직설적인 문화는 사람들을 외향적 으로 만든다."

(정말인지, 이런 거 너무 좋다. 개판인 건 개판이라고 해야지.)  


나는 20대 내내 도제식에 가까운 시스템에서 일을 배웠다. 장인들의 세계엔 '뻥'과 '변명', 또는 '소통의 기술'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돌려 돌려 기분 상하지 않게 말해준다 한들, 그냥 작업물이 별로이면 별로인 거거든. 못하는 건 못하는 거거든. 

장인들, 즉 선수들은 안다. 자기의 수준을. 그건 그냥 보이니까. 말이 결과로 보이는 세계는 솔직히 뻥이 통한다. (어떤 제품 생산 단계에서 기획이나 마케팅을 보면 그렇다.) 그러나 장인들의 결과물엔 뻥이 없다. 아무리 위로해줘도 자기 실력을...(남이 아니라) 자신에게 숨길 수가 없는 것이 장인의 세계다. 하지만 어떤 비평이나 피드백은 인격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이 아니다. 작업과 인격을 분리한다.

그래서..이건 예술이 아니기에, 당연히도, '제가 그래서 원래 이렇게 하려고 했는데요'... 이런 건 통하지 않는다. 알았으니까 그걸 결과물/품질로 보여달라고.




***

이게 '시험 점수'로 책정되는 '이데아'의 세계와 다른 것은, 장인이 만들어내는 도구는 끊임없는 실험과 개선, 반복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즉 정답에 맞추는게 아니다. 시험은 가상이다. 실전이 아니다. 그런데 장인의 세계는 매순간이 실전이자 실험이다. 단 <장인> 책에도 나오듯이 장인들에겐 '경쟁'은 오히려 장인 의식을 깎아먹는다. 그러니까... 조직이 줄세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적응하기가 그렇게 힘들었던 것.



*** 

"다시 말해 무언가를 정확하게 연주하기를 두 번 이상 해보면 그때부터는 틀 리는 것이 그리 겁먹을 일이 아니다. 더욱이 무언가를 두 번 이상 해내 게 되면, 곰곰이 생각할 거리가 생긴다. 이렇게 해보고 또 저렇게 해보 다 보면, 똑같은 게 무엇이고 다른 것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탐색하게 된다. 이래서 연습은 하나의 서사를 써가는 과정이 되고, 단순한 손놀 림의 반복에 그치지 않는다. 공을 들여 숙달할수록 동작은 몸속 깊숙 이 배게 돼서 연주자의 기량은 차츰 늘게 된다."


"장인은 손과 머리를 써서 마주한 물건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게 생업이어서 이런 분리를 겪지 않는다. 따라서 행동이든, 생각이든 간에 그 일으킴 자체가 좀 더 온전한 상태다. "


"리눅스 작업 방식처럼 문제를 푸는 일과 문제를 찾는 일이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이어져야만 기능이 숙달되고 또 확장 된다. 주어진 목표 하나를 달성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문제를 해 결하고 나서 새 지평이 열리는(또 새로운 지평에서 다시 문제를 해결하는 과 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되풀이되지 않으면, 기능은 늘지 않는다."





** 

내가 아는 걸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지를 모르겠어요. 라고 생각한다면 장인의식으로 일하자.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만들자. 실험하자. 계속 개선해나가자. 그리고 내 앞에 놓이는 그 결과물을 두눈 부릅뜨고 인정하자. 아, 이게 내 수준이군. 그리고 계속 하자. 그게 다다.




***

세미나 친구가 정희진 선생님 공개방송에 다녀온 후기를 들려줬다.

결국 플랫폼자본주의 시대. 대다수가 노동의욕을 상실하고 거대한 에고 이미지로 표상되는 소수의 인플루엔서 되기를 지향하는 시대에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친구들은 고민했다.

나는 여기서 감히 점쳐본다.


장인이 답이 될 수 있다고. 정희진샘이 공부의 기예를 몸에 새기는 장인이 되라고 하는 건 그냥 멋지게 하는 말이 아니다.



장인은 지식인이나 예술가가 아니다.

리처드 세넷의 <장인>에서도 계속 나오지만 장인은 문제는 찾고 푸는게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생각과 손이 분리되지 않고 자신의 신체 자체가 곧 자신의 사유인 사람들이다.


이걸 책이라는 텍스트를 내 몸에 붙이는 걸로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는 사유와 실천이라는 이분법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다.


그보다는 수영 같은 운동이라거나, 청소같은 일상적인 일에서부터. 악기연주. 프로그래밍. 목공. 요리 등. 내 손을 가지고 뭔가를 해내거나 만들어내는 일. 그걸로 돈을 받는 게 가능한 어느 수준까지 하도록 내 몸을 수련하는 걸 상상해보면 쉽다.


(장인처럼 뭘 한다는 건, 적당한 취미 수준을 말하 는게 아님. 아마추어라고 하더라도 거의 하급 프로까지는 도달하는 것. 그걸 누군가에게 알려줄 수 있거나 그걸 어느 정도 가격을 팔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수련에는.. 아는 것과 하는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만큼만 내가 아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에고가 끼어들틈이 없다. 계속 계속 계속 무언가를 하는 나를 실험하고 바꿔가는 그 행위, 그리고 그걸 관찰하는 내가 있을 뿐이다.


정희진 샘이 말하는 공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건 책을 단지 열심히 읽는게 아니라... 그러니까 기예라니까. 내 몸을 바꾸는 행위다. 그건 반복 반복 반복, 마치 계속 요리에 실패하지만 계속 시도하고, 물을 코로 들이마시고 빠지면서도 계속 하는 수영 처럼, 계속 하는 '실기'를 말한다.


아이들에게 알려줄 건 이게 아닐까?


조심스러운 진단이지만, 나는 요즘 아이들의 무기력은 여기에 있다고 본다.


스스로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만들고, 스스로 문제를 찾고, 그걸 반복해서 고쳐나가고, 이 모든 과정을 꾸준히 수련하고 훈련하고 단련해나가는 것. 그게 부족해서 무기력해지는 건 아닐까.


이런 수련이 몸에 베게 되고 이걸 버겁거나 힘들다고 느끼는게 아니라 산다는 건 이런 기예들을 익혀가는 것이고 실제로 아이가 자신의 손과 몸으로 할 수 있는 어떤 기술(!) 또는 실기가 있다면 그 아이는 서울 수도권 중산층으로 살지는 못해도 자기 인생을 우울하지 않게 꾸려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니까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매일 어떤 연습이고 반복일 뿐이다.


그건 비대해지는 에고를 꺼뜨리고 발을 땅으로 붙이게 하고 노동으로 사는 자신을 긍정하게 한다.


그렇게 믿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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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1-13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인생 책이라고 하실 정도니, 이 책 사실 이전부터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요. 이 페이퍼 읽고 나서야 구매욕구가 올라옵니다.. 매실님께 땡투를... 너무 좋아요!!!

매실 2023-01-13 15:54   좋아요 2 | URL
인생책이라는게 워낙에 맥락적이고 주관적이라서.. 어떤 분들은 이거 뭥미? 하실 수도 있습니다. 사실 90% 이상이 정말 지루하게...장인들의 노동이 어떤 단계에 의해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그게 너무나 너무나 좋았어요! (어쩌면 무시되곤 했던) 저의 일을 설명해주고, 나아가서 그 일을 하는 저를 긍정하게 해줬거든요.^_^

공쟝쟝 2023-01-13 23:13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공쟝쟝인은 이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 읽어볼꺼예욧@@

은오 2023-01-14 00:05   좋아요 1 | URL
오... 댓글까지 읽으니 기대 반 걱정 반입니다 ㅋㅋㅋㅋㅋ 정말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겠고 의외로 그 점이 좋을 수도 있겠어요. 시도해봐야겠습니다!😉

쟝님, 이게 그 장인이고, 쟝님이 선물받았다는 그책 ㅋㅋㅋㅋㅋ 나는 그냥 넘겼었는데 이 페이퍼 보니까 땡겨욬ㅋㅋㅋㅋ
 
치료요법 문화 (반양장) - 실존적 불안 시대에 취약한 주체 계발하기
프랭크 푸레디 지음, 박형신.박형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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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서 머리가 복잡해지고  속이 부글부글 대어서 (=좋은 책이라는 것임) 두서 없이 남긴다. 



인터넷 서점에 평점이나 리뷰 하나 없고 블로그에도 후기 하나 달랑 있다니. 표지 재미없어 보이게 만들고 가격만 오지게 비싸게 해서 (양장 나오기 전엔 4만원대...) 망한...듯. ;;;


그런데 이 책은 지금 한국사회에 퍼지고 있는 ‘감정 정치’와 ‘인정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 


2004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니까, 에바 일루즈가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나온 이후 한창 감정 사회학 분야가 부상했을 때이고... 치료요법 문화의 최대 ‘피해자’(?)인, 10대, 20대들의 무기력증(?)을 조망한 <커밍업쇼트>와도 겹친다.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벌어진 감정 정치/ 치료요법 문화 현상이 그러니까 한국에선 지금 2022년! 오은영 그리스도님 지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지. 전국민들에게 만연한 우울증과 급격히 증가하는 성인 ADHD 진단도 이 책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


공통의 이데올로기이건 의미체계이던 (이렇게 살면 어느정도는 옳게 사는 거다, 또는 잘살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거)간에 모조리 해체되어버린 이 포스트모던의 신자유주의시대에, 개인들에겐 어마어마한 불확실성과 의미상실이라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앞날, 내가 누구이며 무얼해야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하는 무시무시한 압박) 과제가 주어졌고, 이 감당하기 어려운 자유 속에서 개인들은 미친듯한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된다. 


텅 비어버린 존재 속에서 인간이 매 순간의 기투를 통해 자신의 실존을 생성해나간다면 참 좋겠지만,  인간은 의미없음 자체를 못 견딘다. 서구 사회나 한국 사회나 인간들이 이 실존의 부대낌을 감당하며 단단해질 시간을 사회적으로 서서히 갖기보다는 오히려 이 텅빈 존재 속으론 곧장 소비주의가 들어와 버렸고, 그 다음으론 ‘제도화된 치료 요법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이 프랭크 푸레디의 주장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치료요법 문화의 핵심은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을 ‘병리화’하고 그것을 ‘의료적 범주’ 속으로 만들어버린다는데 있다.


쉽게 말해 내가 고통을 느끼거나 내 행동이 어딘가 문제적인건 내가 어떤 ‘정신병’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정신병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의해 생긴 돌이킬 수 없는 ‘상처’ 때문인 것이고. 그러므로  당신의 그 병은 전문가에 의해 치료 받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증,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ADHD, 트라우마, .. 뭐 각종 증후군으로 명명되는 것들이 그러한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이런 증후군으로 자신의 고통에 이름을 붙여지는데에 내심 안심(?...그래 내가 이런 건 이거 때문이야라는 원인 발견)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각종 의료적 실천을 하는 우리들에겐 막 불편함이 솟구치기 시작하는데, 


이 책에선 인간이 겪은 어떤 고통이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그걸 무시하고 참고 살아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고통이 병이건 그냥 증상이건 상처이건 간에 어쨌든 잘 ‘치료’하여 회복되고 정상적인 (!) 생활을 하는 것의 효과가 없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이런 사회학 책을 읽을 때 취해야 할 태도는 이런 책이 이런 치료요법의 임상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이 책은 임상이 아닌 이런 치료 요법 ‘문화 현상’이 왜 발생했으며, 이것이 어떤 식으로 이 시대의 ‘특정한 주체성’을 만들고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나도 모르게 이 시대의 담론 속에서 어떤 실천들을 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내가 하는 것이 지금 어떤 것 속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내가 그것으로 인해 무언가 도움을 얻고 있음을 부정하는게 아니다.


물론 다 부정 당하는 거 같고, 나는 다 틀렸고 그러므로 싹 다 그만둬야만 할 것 같이 읽고 싶어지는 면은 있다. 왜냐면, 앞에서 계속 썼듯이 우린 어떤 불확실성과 의미상실 자체를 못 견디므로. 또 어떤 식으로든 내가 제도 속에서 오염된 채 있는 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니까.  



푸레디는 고통이 반드시 ‘상처’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고통은 과정이다. 과정이라는 말은 그것은 흘러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치료요법의 에토스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그것은 ‘상처’로 굳어지게 된다.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을 각인시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병리화한다. 고통 -  상처 - 병 ..으로 가는 거다. 병리화하는데엔 장점이 있다. 그것이 어떤 체계 속으로 들어오면서 거기에 따라 우린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냥 쉽게 풀자면, 매일 잠만 자려고 하고 뭘 해도 의욕이 없는 상태에서 “나 우울증이래” 라고 ‘진단’을 받게 되면, 나의 행동이 어떤 범주 속으로 들어가면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 어떤 조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왜 나쁘냐고 묻는 건 정말 이 책을 잘못 독해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개인들에게 쓸데 없는 걸 한다고 푸레디는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왜 이런 접근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제 정부정책의 주도하(특히 치료요법은 극우진영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에 이 사회의 어떤 지배적인 에토스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 

치료요법 에토스는 개인의 자아를 ‘감정’에 고정시킨다. 즉 감정만이 내가 나를 인식하는 끝판왕이 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면, 치료요법 에토스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겠다. 



그런데 감정이란게 무어냐. 이것은 잡히지가 않는다. 계속 유동적이다. 모호하기 짝이없다. 그런데 외부의 모든 것이 계속 바뀌고 사라지는 시대에…나의 가족이나 직업조차도 유동적이다. 오로지 나만 있는 것인데,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하냐면 나의 감정으로 나를 인식한다. (왜 나의 신체로 나를 인식하지 않을까?) 



모호한 감정에 이름을 계속 붙인다. 정확히는 이것은 기분에 가까운데, 내가 기분이 나쁘면 나는 나쁜 상태이고 기분이 좋으면 좋은 상태인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 감정은 늘 외부와의 촉발을 통해 생기게 된다. 우린 혼자 살지 않는 이상 늘 외부와 만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늘 무언가를 느낀다. 그런데 감정을 숭배하게 되면 나는 늘 좋은 감정을 느껴야만 병이 아니다!!! 나에게 나쁜 감정을 일으키는 타인은 나의 감정을 손상시키게 된다. 그런데 감정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고 내가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타인들에 의해 생기므로 인간은 끝없이 타인의 승인과 인정, 긍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비웃음, 헐뜯기, 모욕 등은 단지 그냥 고통이 아니라 나란 존재에 상처를 입히는 손상으로 여겨진다. (그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이 과정의 치명적인 문제는.. 이러면서 개인은 점점 축소되고 취약해진다는 점이다. 끝없이 자기의 감정을 발견하고 관리하라고 하지만 개인은 스스로를 견디고 문제를 뚫고 나갈 힘을 상실한다. 



진짜 더 큰 문제는 이런 인정과 존중을 정치가 ‘제도화’하여 일종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도 절대로 ‘배제를’ 하면 안된다는 에토스가 형성이 되고 있는데, 무조건적인 환대와 존중,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존중 자체가 계속 제도적으로 범주를 만들면서 그 안으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제도화되게 되면 … 푸레디의 표현에 따르면 공허해진다.  왜냐면 모든 인정을 제도 속에서 받으려고 하면 이제 시민은 ‘탄원자’가 되어버린다. 


나를 인정해줘!! 라고 계속 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인정과 존중은 제도적으로 받는게 아니라 사적인 관계, 비공식적인 관계, 비제도화된 관계 속의 역동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앞으로 전업주부들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업주부들에겐 앞으로 한달에 10만원을 쓸 수 있는 체크카드를 발행해드리겠습니다.. 라는 어떤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하자. 그런 과정에서 얻는 사회적 인정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실존엔 그런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거다. 



존재의 인정과 긍정은 관계 속에서의 구체적인 인정이어야 한다는 푸레디의 말은 굉장히 뼈 아프게 와닿는다. 그건 무조건 너는 틀리지 않았다,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인정 정치는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부대낌을 자신의 힘으로 뚫어내지 못하게 하고, 1)전문가에게 의존하게 함 - 당신이 그 관계에서 느끼는 고통은 무엇무엇이에요 라고 타인이 정의내려줌 2)제도화해서 어떤 범주로 인정받게 함 → 이것으로 개인은 점점 취약해진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치료요법을 다 그만둬야 하나? 

라고 이 책을 읽고 생각하지 않길...

답을 주지 않는 텍스트 앞에서 우린 질문을 가져야 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금 나에게 뭐지?라고 물어야 한다. 



어쩌면 우린 너무나 파다한 치료요법 문화 속에서 정작 자기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가지는 힘 조차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존재를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은 내가 움켜쥐고 있던 어떤 의미를 해체시키는데, 그걸 집요하게 물고 나가기보다 당장 그 불안을 우린 어떤 문제 상황이라고 여기고, 빨리 해소하는 방식을 찾는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 밖에 배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우린 찾을 수 있다. 실험하고 변혁할 수 있다.







(리뷰 하나 없길래 그냥 떠오르는대로 아무말이나 막 던져놨지만  책 전체의 전개가 굉장히 촘촘한 편이다. 별 하나를 뺀 건 '사적영역'에 치료요법 에토스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지 않고 후다닥 지적만 하고 지나간다는 점이다.  


사적영역이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학대를 공론화하는 것과 치료요법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적 영역에서의 친밀성조차 매우 계산적으로 변하고, 친밀한 관계끼리 오히려 거리를 두게 만든다고 지적하는 지점에선 충분한 논의가 부족해보인다. 그래서 읽다가 좀 불끈 화가 나기도 하는데...사실 이런 건 에바 일루즈 책을 읽어도 지적되는 부분이긴 하고.. 이 책의 초점 자체는 사실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치료요법 에토스'가 퍼지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 치료요법 문화가 정부 정책, 공공기관, 학교 등으로 확산되면서 어떤 주체를 생산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책이다. 그래서 뒤로 가면서 아쉬움은 그냥저냥 넘어갔다. 하여간 감정자본주의..요쪽으로 관심있는 분들은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 






* 스토리에 읽을 때마다 단상을 남겨놨는데..귀찮아서 그냥 캡처해서 올림;;; 







(어쩌면 이 부분은 다른 책에서 썼거나 또는 다른 저자들이 이미 다뤄서 별로 안 넣은 거 같기도 하다. 푸레디는 주로 정치에 초점을 맞춤) 




















(올리버 커트리지 읽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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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7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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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7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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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서 말하기의 핵심 쟁점

이책은 돌봄이 무엇이며 도덕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책이 아니다.

심리학의 도덕 발달 이론을 재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큰 흐름은 다음과 같다. (이 흐름을 알아야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

1) 기존 심리학 도덕 발달 이론에 대한 비판

-특히 콜버그 이론을 중심으로 기존의 발달이 '권리 중심' (정체성 확립과 분리)에 중점을 두면서 여성의 경험을 놓침을 지적함

2) 여성들의 도덕 판단에 대한 특징 분석

-남성과 다르게 여성들은 타인과 자신을 분리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는 것 선에서 자신의 독립을 주장하기보다는, 타인과의 관계를 1차적으로 놓고, 어떻게 하면 관계 속에서 튀지 않거나, 또는 상처 주지 않을지를 우선적으로 고민함. 그래서 맥락적 사고를 하게 됨. 그러나 이런 특징은 기존의 도덕발달이론에서 '미성숙' 한 것으로 치부됨.

3) 돌봄의 언어로 재구성한 도덕발달 이론

캐럴 길리건은 콜버그의 이론을 빌어 도덕 발달 과정을 전인습기 - 인습기- 후인습기로 가져오는데 각각의 발달 과정을 정의나 규칙이 아닌 ''돌봄과 책임의 문제로' 재 구성함.




***


정리하자면

전인습기에서는 철저하게 자신의 생존이나 욕구에만 집중한다면,

인습기에서는 타인과의 관계와 나 자신의 욕구 사이의 딜레마를 겪게 되고, 타인의 욕구를 들어주는 것을 '선'이라고 판단하며 자기 희생을 하는 단계이고.

후인습기는 주도적인 판단을 시작하고 자신에게 정직하고 진실해지는 단계이다.


이 과정을 알지 못하면 '돌봄'이 무엇이냐에 얽매이게 되며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놓쳐버리게 된다. 중요한 건 여성의 도덕 발달이 성숙할 수록 '돌봄을 스스로 재정의'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자기 희생에서 -> 자신에 대한 진실함과 책임으로 말이다.




***


다시 강조하건대,

길리건은 여성들은 관계를 위해 침묵했던 자기 희생적 돌봄을 깨고, '자기의 진실'을 들여다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침묵에서 말하기로>에서는 이 부분은 인터뷰이들의 발언으로 채워져 있어서 사실 이런 성숙의 단계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가부장 무너뜨리기>에서 좀 더 채워진다.


그리고


길리건은 가부장 무너뜨리기에서 단호하게 말한다.


"가부장제와 사랑은 공존할 수 없다."



여기에서 사랑은 무엇인가. 그건 연결에 대한 욕구다. 연결에 대한 욕구는 나를 상대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다. 나의 실존으로 상대와 만나고자 함이다. 그게 비록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불화를 안겨주더라도.


그러나 여성들은 관계를 위해 '관계(나의 존재로 만나는 연결된 관계)'를 포기한다. 자신을 속이고 상대가 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길리건은 말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가부장제는 사랑을 파괴하고 있다고.
















***


<침묵에서 말하기로>, <가부장 무너뜨리기>를 읽으며 복잡한 감정에 자주 휩싸였다. 일단 내 태도가 남성 중심의 '권리 중심 도덕'에 가까운 건 아닌지 하는 검열이 첫번째였다. 솔직히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자기 입을 꾹 다물고 참거나, 계속 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갈팡질팡하는 여성들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말을 못해? 왜 너 자신을 먼저 챙기지 못해?" 막 따져 묻고 싶다. 나는 살아오면서 화가 나거나 불편하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그 관계가 깨질망정 참지 않는 쪽이었다. 침묵함으로써 관계를 유지하기보다는 말함으로써 관계를 불화나 단절에 빠뜨리는 쪽이었다. 뭔가 대단한 나의 진실성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성질이 그걸 못 견뎠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것이 '반 가부장적인' 태도였냐면 찔리는 구석이 있다. 왜냐면 그런 말하기가 타인과의 연결을 끝내 이어가겠다는 의지라기보다는 그건 독립과 분리, 단절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도덕 발달이론이 말하듯이 나 역시도 그것이 '성장이고 성숙'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이 타인과의 분리를 목표로 할지라도 내가 나의 목소리를 갖고 말할 때, 그것의 예상치 못한 효과로서 전혀 다른 방식의 '연결'이 생기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즉 나는 타인과 나를 끊어내버리기 위해서 내 목소리를 낸 것인데 그것이 관계의 다른 양상을 펼쳐내보이는 것이다.

'연결'은 무엇인가. 그건 단순히 관계 자체를 잘 이어나가는 '소통'이 아니다. 단순히 의지하고 격려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건 "실존과 실존이 만나는 관계"이다.(풀어쓰자면 이것이 너의 본질이라며 규정한 역할극-엄마, 아내, 여자, 회사원...등에서 벗어난!) 


 내가 너로 인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지를 상대에게 드러낸다. 가면을 벗고. 겉으로 보이는 좋은 관계를 깰 각오를 하고, 역할을 벗고 실존으로 덤빈다. 길리건은 이것을 <가부장무너뜨리기>에서 '사랑'이면서 동시에 리커넥션의 욕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랑이란, 상대와 다시 관계를 맺고 싶어서 나를 그에게 맞추거나 말을 걸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관계가 아닌 '진실된 관계'를 위해 일종의 모험을 거는 것이다.

믿어본다. 내가 역할과 가면 연기를 모조리 내려놓고 실존으로서 상대를 대하면 상대는 그것에 맞춰 응답할 수 밖에 없다고. 그럼에도 상대가 여전히 가면극을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도 우리의 관계의 모습, 그리고 상대가 무엇을 놓지 않으려하는지가 환하게 보이게 될 거라고. 응답하면 응답하는대로 거부하면 거부하는대로 거기부터 뭔가를 해나가면 된다.

지금, 안정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면, '자기의 진실'이 무엇인지조차 도저히 모르겠다면, 캐릴 길리건을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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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2-18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점은 관계를 위해 자아를 조절하는 태도를 어느 한쪽 성 일방만이 수행해야하는 규범으로 만든 사회는 문제적이지만... (게다가 그 성별과 그 노동에 제 값을 쳐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더 문제적이고요...) 그 태도 자체가 문제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게 제 입장에 가까워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조율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요, 물론... 그 조율이 귀찮아서 그걸 제도화하는 인간들의 게으름도 이해는 합니다.

일전에 매실님의 내면아이 서사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말을 아꼈는데..ㅋ) 심리학이 일정부분 여성혐오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유용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게 상업화되어버리긴 했지만 (말해뭐해요 페미도 상업화되는 데요) 자본주의를 헤쳐나가는 데 페미니즘 만큼 필요한 지성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다 인간이 살려고 만들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이 글을 읽어보니 저는 돌아돌아 결국 캐럴 길리건을 읽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은 좀 더 날카롭게 보고 싶어요. (응?) 그리고 그 과정을 좀 즐길..(수 없다고 한다.)

매실 2022-12-19 15:01   좋아요 1 | URL
저도 여성이 가진 타인 지향적 돌봄의 태도, 자기를 조절하면서 맞춰주는 태도는 사실 매우 성숙된 태도 중 하나라고 보아요 엄청 정교한 감정이잖아요. 단 이게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따라 책임을 회피하는 우유부단함처럼 될 수도 있고 또는 정말 상대에게 자신의 진실을 조심스럽게 전달하는 태도가 될 수도 있는 거 같아요.

길리건이 말하는 것과 같은 ‘진실된 관계‘엔 정말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가는데, 그 훈련을 바쁜 현대인들은 하기가 너무 어려우니...각본화시켜서 가려고 한다는게...

저는 심리학을 별로 알진 못하는데 심리학 전에 사회학을 먼저 공부해서, 사회학에서 심리학을 하두 비판하니까 일단 비판적인 태도로 보던게 좀 있었어요. ㅎㅎ 그런데 길리건 책 읽으면서 심리학에도 정말 넓은 층위가 있고 심리학중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몇가지가 제도화/상업화 되면서 여성을 체제에 적응시키는 방향으로 고착시키는게 문제라는 걸 알게 된 거 같아요. 내년에 자본론 읽은 다음엔 프로이트, 라캉을 좀 파보려고 합니다.ㅎㅎㅎ (언젠가는..ㅎㅎㅎ)

 




많이 추천하면서도 비판도 많이 받는 캐럴 길리건의 문제적 페미니즘 고전 <침묵에서 말하기로>를 드디어 읽었다. 그동안 이 책 읽기 싫어서 계속 피해왔다.

'돌봄'? 아, 지긋지긋해!!! 그리고 나는 독립적이어서 그런 돌봄과 관계 따위에 눈치 보지 않고 스스로 잘 결정하면서 사는 21세기 페미니스트라구요!' 이런 마음이었다.

읽어보니 역시나, 이 책은 잘못 읽으면 이렇게 읽기가 매우 쉽다. '어? 나는 아닌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라고 쉴드 치면서 거리두기가 딱 좋다. 왜냐면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의 사례는 진짜 고구마다. 답답해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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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임신중지권이 시행된 후 미국, 70년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여성들을 주로 인터뷰한다. 여성들은 '임신 중지 선택'을 앞두고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다.

자신의 권리에 대한 주장과 타인에 대한 배려/헌신 속에서 충돌하는 '관계 지향적' 여성들은 자신에 대한 권리 주장을 이기심이라고 여기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남자친구나 남편이 임신중지를 요구하는 경우 스스로 아이를 원하는 걸 자신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거나, 또는 그 반대로 임신중지를 하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헌신을 선택하면서, 결과적으로 타인에 대한 원망이 남는 패턴을 반복한다. 즉 '누구 때문에 임신 중지를 선택했는데 결국 나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어'라는 자책이 남는다.

캐럴 길리건은 여성들의 이런 딜레마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들이 이 딜레마를 깨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건 무엇이 '인습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즉 타인과의 관계를 지키기 위해 또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임신중지를 하거나 하지 않는 것)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타인을 배려한다, 나는 이타적이다라는 명분으로 무엇을 자신에게 속이고 있었는지를 스스로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다. 즉 자기 안의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고려하며 누군가 상처 받을까봐, 또는 누군가를 잃을까봐, 그것에 휩쓸여 선택을 했던 여성들은 자기의 진실을 바라본다. 예를 들어 그건 끝날 거 같은 관계의 불안을 임신으로 묶어두려고 했던 자신의 욕망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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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길리건이 말하는 '도덕'과 '돌봄'과 '관계'란, 타인의 요구를 들어주며 헌신하는 자기 희생적 돌봄이 아니다. 그것이 돌봄이며 이타주의라고 사회적 인습이 여성에게 내면화되었기에 그게 '옳은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딜레마를 깨는 여성들은 자기 권리 주장은 이기심이고, 타인에 대한 헌신은 책임이라는 이분화된 틀을 부순다.

계속 누구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어...라고 원망하면서도 나의 행동은 이타심/타인에 대한 연민/아무도 상처주기 싫어서라고 스스로를 속이던 여성들이.....'자기 책임'을 인식해나가며 자기 안의 진실을 보는 과정을 길리건은 여성들이 찾는 상호관계적 돌봄이자 도덕의 발달 과정이라고 말한다.

즉 돌봄이란 관계의 역동성 속에서 자기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아나가는 과정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음'을 알고, 헌신이나 책임이란 이름으로 끌려다니지 않으면서 회피하지 않는다.

1970년대 대학생들은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의 도덕에 맞서기 위해 권리개념을 받아들인다. 자기부정이라는 금욕주의에 의문을 제시하고 순수함의 허구성을 선택에 대한 인식으로 대체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권리도 정당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권리의 본질적 개념을 파악하려고 애쓴다.

이런 차원에서 권리 개념은 여성의 자아 개념을 변화시키고 자신을 더 강한 존재로 여기게 하며 자신의 욕구를 직접 돌보게 한다. 자기주장의 행위를 더 이상 위험하게 여기지 않을때 관계의 개념은 지속적인 의존관계에서 역동적인 상호관계로 바뀐다.

이때 돌봄의 개념은 타인을 상처입히지 말라는 명령에서 자신과 타인의 필요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나아가 관계를 유지하라는 명령으로 확장된다. 인간관계의 역동성에 대한 인식은 도덕적 이해의 중심이 되며 논리적 사고와 돌봄활동이 결합되면서 눈과 마음이 연결된다.

5장 새로운 책임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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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은 기존의 남성 성인을 전제로 한 심리/도덕 발달 이론에선 결코 다루지 않았던 부분들이다.

캐럴 길리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여성들이여, 자기 안의 진실을 찾아봅시다'가 아니다. 여성들에게 그런 태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성들은 무엇이 자기에게 옳은지를 성찰하며 권리와 책임을 통합하고, 자기 희생이 아닌 자기 책임을 알아가는 돌봄으로 성숙해나아간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여성들의 이야기가 발달 심리학 이론에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길리건은 책임과 돌봄과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남성보다 '더 우월한 가치'라거나 그것이 인간의 성장에 더욱 중요한 것이라거나 그러므로 여성들이 그것을 지켜나가야 한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은 너무나 쉽게 그렇게 읽힐 수 있다. 대체 어쩌다?

길리건은 이토록 확실하게 여러번 말하는데도.

나의 목표는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성별 간의 입장을 모두 포괄하는 확장된 발달관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이 지속적인 애착의 가치와 돌봄의 중요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새로운 성인기 심리학을 요구한다.

6장 - 새로운 여성 심리학

성인 발달의 연구 주제 가운데 가장 시급한 안건 중 하나는 여성들의 성인기 삶에 대해 여성 자신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6장 - 삶의 진실을 이해하는 열쇠

인간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면서 발달하지도 않고, 관계만을 강조하면서 발달하지도 않는다. 이 둘은 생애 주기에 걸쳐 각자 다르게 교차하고 통합된다.

나 자신에게 진실할 것. 그리고 타인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책임질 것. 그럼으로써 나의 결정이 다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역동성(그것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라고 해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드러나야하고 기존의 도덕발달 이론엔 이런 관계성이 담기고 수정되어야 한다.

'침묵에서 말하기로'의 다른 제목은 '다른 목소리로'이다. 다른 목소리라는 것은 억압된 목소리, 피해자의 목소리, 갇혀있는 목소리라는 것만이 아니다. 여성들은 이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무거운 책임과 희생 의식을 깨고 나올 역량이 있었다. 단, 그 과정에서 여성들의 이야기, 즉 그 목소리가 해석되지도 않았고 인간됨의 한 과정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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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사회학이나 경제학으로는 설명되지 않은 부분이 심리학에 있다는 걸 알았다.

사회과학을 통해 이 사회의 구조를 파악하면서 내 문제가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를 알게 되긴 했는데 그 다음 스텝이 늘 문제였다. 어차피 다 자본주의 탓이구나, 어쩔 수 없구나...라고 체념해야 하는가?

아니다. 구조 자체를 바꾸는 실천과 별개로 결국 그러면 '나는?' 어떤 관점과 태도를 취할 거냐는 문제가 우리에게 남는다. 그게 윤리 또는 길리건이 말하는 도덕의 영역 같다. 계속 우린 구조만 문제 삼으면서 살 순 없으니까. 철학에서는 이걸 윤리학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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