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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요법 문화 (반양장) - 실존적 불안 시대에 취약한 주체 계발하기
프랭크 푸레디 지음, 박형신.박형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11월
평점 :
읽고서 머리가 복잡해지고 속이 부글부글 대어서 (=좋은 책이라는 것임) 두서 없이 남긴다.
인터넷 서점에 평점이나 리뷰 하나 없고 블로그에도 후기 하나 달랑 있다니. 표지 재미없어 보이게 만들고 가격만 오지게 비싸게 해서 (양장 나오기 전엔 4만원대...) 망한...듯. ;;;
그런데 이 책은 지금 한국사회에 퍼지고 있는 ‘감정 정치’와 ‘인정 정치’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줄 수 있다.
2004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으니까, 에바 일루즈가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나온 이후 한창 감정 사회학 분야가 부상했을 때이고... 치료요법 문화의 최대 ‘피해자’(?)인, 10대, 20대들의 무기력증(?)을 조망한 <커밍업쇼트>와도 겹친다.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벌어진 감정 정치/ 치료요법 문화 현상이 그러니까 한국에선 지금 2022년! 오은영 그리스도님 지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지. 전국민들에게 만연한 우울증과 급격히 증가하는 성인 ADHD 진단도 이 책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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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 이데올로기이건 의미체계이던 (이렇게 살면 어느정도는 옳게 사는 거다, 또는 잘살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거)간에 모조리 해체되어버린 이 포스트모던의 신자유주의시대에, 개인들에겐 어마어마한 불확실성과 의미상실이라는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앞날, 내가 누구이며 무얼해야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해야만하는 무시무시한 압박) 과제가 주어졌고, 이 감당하기 어려운 자유 속에서 개인들은 미친듯한 실존적 불안을 느끼게 된다.
텅 비어버린 존재 속에서 인간이 매 순간의 기투를 통해 자신의 실존을 생성해나간다면 참 좋겠지만, 인간은 의미없음 자체를 못 견딘다. 서구 사회나 한국 사회나 인간들이 이 실존의 부대낌을 감당하며 단단해질 시간을 사회적으로 서서히 갖기보다는 오히려 이 텅빈 존재 속으론 곧장 소비주의가 들어와 버렸고, 그 다음으론 ‘제도화된 치료 요법 문화’가 들어왔다는 것이 프랭크 푸레디의 주장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치료요법 문화의 핵심은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고통을 ‘병리화’하고 그것을 ‘의료적 범주’ 속으로 만들어버린다는데 있다.
쉽게 말해 내가 고통을 느끼거나 내 행동이 어딘가 문제적인건 내가 어떤 ‘정신병’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정신병은 과거의 어떤 사건에 의해 생긴 돌이킬 수 없는 ‘상처’ 때문인 것이고. 그러므로 당신의 그 병은 전문가에 의해 치료 받아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울증,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ADHD, 트라우마, .. 뭐 각종 증후군으로 명명되는 것들이 그러한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이런 증후군으로 자신의 고통에 이름을 붙여지는데에 내심 안심(?...그래 내가 이런 건 이거 때문이야라는 원인 발견)하기도 하고, 그에 따른 각종 의료적 실천을 하는 우리들에겐 막 불편함이 솟구치기 시작하는데,
이 책에선 인간이 겪은 어떤 고통이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그걸 무시하고 참고 살아라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런 고통이 병이건 그냥 증상이건 상처이건 간에 어쨌든 잘 ‘치료’하여 회복되고 정상적인 (!) 생활을 하는 것의 효과가 없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이런 사회학 책을 읽을 때 취해야 할 태도는 이런 책이 이런 치료요법의 임상적 효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이 책은 임상이 아닌 이런 치료 요법 ‘문화 현상’이 왜 발생했으며, 이것이 어떤 식으로 이 시대의 ‘특정한 주체성’을 만들고 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나는 이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나도 모르게 이 시대의 담론 속에서 어떤 실천들을 하고 살아갈 수 밖에 없는데, 내가 하는 것이 지금 어떤 것 속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 내가 그것으로 인해 무언가 도움을 얻고 있음을 부정하는게 아니다.
물론 다 부정 당하는 거 같고, 나는 다 틀렸고 그러므로 싹 다 그만둬야만 할 것 같이 읽고 싶어지는 면은 있다. 왜냐면, 앞에서 계속 썼듯이 우린 어떤 불확실성과 의미상실 자체를 못 견디므로. 또 어떤 식으로든 내가 제도 속에서 오염된 채 있는 건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니까.
푸레디는 고통이 반드시 ‘상처’가 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고통은 과정이다. 과정이라는 말은 그것은 흘러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치료요법의 에토스가 지배적으로 되면서 그것은 ‘상처’로 굳어지게 된다.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을 각인시킨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병리화한다. 고통 - 상처 - 병 ..으로 가는 거다. 병리화하는데엔 장점이 있다. 그것이 어떤 체계 속으로 들어오면서 거기에 따라 우린 제도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냥 쉽게 풀자면, 매일 잠만 자려고 하고 뭘 해도 의욕이 없는 상태에서 “나 우울증이래” 라고 ‘진단’을 받게 되면, 나의 행동이 어떤 범주 속으로 들어가면서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거기에 따라 어떤 조치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왜 나쁘냐고 묻는 건 정말 이 책을 잘못 독해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개인들에게 쓸데 없는 걸 한다고 푸레디는 말하지 않는다.
문제는 왜 이런 접근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제 정부정책의 주도하(특히 치료요법은 극우진영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에 이 사회의 어떤 지배적인 에토스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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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요법 에토스는 개인의 자아를 ‘감정’에 고정시킨다. 즉 감정만이 내가 나를 인식하는 끝판왕이 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면, 치료요법 에토스는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가 되겠다.
그런데 감정이란게 무어냐. 이것은 잡히지가 않는다. 계속 유동적이다. 모호하기 짝이없다. 그런데 외부의 모든 것이 계속 바뀌고 사라지는 시대에…나의 가족이나 직업조차도 유동적이다. 오로지 나만 있는 것인데, 나를 어떻게 인식해야하냐면 나의 감정으로 나를 인식한다. (왜 나의 신체로 나를 인식하지 않을까?)
모호한 감정에 이름을 계속 붙인다. 정확히는 이것은 기분에 가까운데, 내가 기분이 나쁘면 나는 나쁜 상태이고 기분이 좋으면 좋은 상태인 것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것이 감정은 늘 외부와의 촉발을 통해 생기게 된다. 우린 혼자 살지 않는 이상 늘 외부와 만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늘 무언가를 느낀다. 그런데 감정을 숭배하게 되면 나는 늘 좋은 감정을 느껴야만 병이 아니다!!! 나에게 나쁜 감정을 일으키는 타인은 나의 감정을 손상시키게 된다. 그런데 감정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고 내가 좋은 감정을 느끼는 것도 타인들에 의해 생기므로 인간은 끝없이 타인의 승인과 인정, 긍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비웃음, 헐뜯기, 모욕 등은 단지 그냥 고통이 아니라 나란 존재에 상처를 입히는 손상으로 여겨진다. (그게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하는게 아니다.)
그런데 이 과정의 치명적인 문제는.. 이러면서 개인은 점점 축소되고 취약해진다는 점이다. 끝없이 자기의 감정을 발견하고 관리하라고 하지만 개인은 스스로를 견디고 문제를 뚫고 나갈 힘을 상실한다.
진짜 더 큰 문제는 이런 인정과 존중을 정치가 ‘제도화’하여 일종의 통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인데...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도 절대로 ‘배제를’ 하면 안된다는 에토스가 형성이 되고 있는데, 무조건적인 환대와 존중,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존중 자체가 계속 제도적으로 범주를 만들면서 그 안으로 들여오는 방식으로 제도화되게 되면 … 푸레디의 표현에 따르면 공허해진다. 왜냐면 모든 인정을 제도 속에서 받으려고 하면 이제 시민은 ‘탄원자’가 되어버린다.
나를 인정해줘!! 라고 계속 외치게 된다는 것이다.
인정과 존중은 제도적으로 받는게 아니라 사적인 관계, 비공식적인 관계, 비제도화된 관계 속의 역동 안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앞으로 전업주부들을 존중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업주부들에겐 앞으로 한달에 10만원을 쓸 수 있는 체크카드를 발행해드리겠습니다.. 라는 어떤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하자. 그런 과정에서 얻는 사회적 인정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실존엔 그런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거다.
존재의 인정과 긍정은 관계 속에서의 구체적인 인정이어야 한다는 푸레디의 말은 굉장히 뼈 아프게 와닿는다. 그건 무조건 너는 틀리지 않았다,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인정 정치는 사적이고 비공식적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부대낌을 자신의 힘으로 뚫어내지 못하게 하고, 1)전문가에게 의존하게 함 - 당신이 그 관계에서 느끼는 고통은 무엇무엇이에요 라고 타인이 정의내려줌 2)제도화해서 어떤 범주로 인정받게 함 → 이것으로 개인은 점점 취약해진다.
…
그래서 뭐 어쩌라고?
치료요법을 다 그만둬야 하나?
라고 이 책을 읽고 생각하지 않길...
답을 주지 않는 텍스트 앞에서 우린 질문을 가져야 한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지금 나에게 뭐지?라고 물어야 한다.
어쩌면 우린 너무나 파다한 치료요법 문화 속에서 정작 자기에게 던져야 할 질문을 가지는 힘 조차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존재를 불안하게 하고, 그 불안은 내가 움켜쥐고 있던 어떤 의미를 해체시키는데, 그걸 집요하게 물고 나가기보다 당장 그 불안을 우린 어떤 문제 상황이라고 여기고, 빨리 해소하는 방식을 찾는 방법으로 접근하는 것 밖에 배우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우린 찾을 수 있다. 실험하고 변혁할 수 있다.
(리뷰 하나 없길래 그냥 떠오르는대로 아무말이나 막 던져놨지만 책 전체의 전개가 굉장히 촘촘한 편이다. 별 하나를 뺀 건 '사적영역'에 치료요법 에토스가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논증하지 않고 후다닥 지적만 하고 지나간다는 점이다.
사적영역이란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학대를 공론화하는 것과 치료요법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적 영역에서의 친밀성조차 매우 계산적으로 변하고, 친밀한 관계끼리 오히려 거리를 두게 만든다고 지적하는 지점에선 충분한 논의가 부족해보인다. 그래서 읽다가 좀 불끈 화가 나기도 하는데...사실 이런 건 에바 일루즈 책을 읽어도 지적되는 부분이긴 하고.. 이 책의 초점 자체는 사실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의 '치료요법 에토스'가 퍼지면서 벌어지는 현상이라.. 치료요법 문화가 정부 정책, 공공기관, 학교 등으로 확산되면서 어떤 주체를 생산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책이다. 그래서 뒤로 가면서 아쉬움은 그냥저냥 넘어갔다. 하여간 감정자본주의..요쪽으로 관심있는 분들은 꼭 읽어봤으면 하는 책!)
* 스토리에 읽을 때마다 단상을 남겨놨는데..귀찮아서 그냥 캡처해서 올림;;;



(어쩌면 이 부분은 다른 책에서 썼거나 또는 다른 저자들이 이미 다뤄서 별로 안 넣은 거 같기도 하다. 푸레디는 주로 정치에 초점을 맞춤)









(올리버 커트리지 읽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