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mistry reading
푸코와의 케미스트리 리딩 1일 째... ㅋㅋㅋ 🤷🏻♀️ 애석하게도 그와 케미가 맞아버렸으므로(단발머리님 페이퍼 참조 :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639537 ) 변호를 좀 해야할 것 같다.
이이는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것 처럼 그렇게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물론 외모는 대머리에 부정 교합(말과 사물 책 표지 보니까 턱이..?)까지 있는 듯 하지만...
저명한 교수였음에도 경찰한테 처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ㅋㅋ 몸빵 시위를 즐기는 용감한 좌파였으며ㅋㅋㅋㅋ
자신의 철학을 살기 위해 자기 변형(transformation of the self)을 위한 다양한 성적 실천(m..ㅋㅋㅋ...?)도 즐겼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 철.학.을 하셨던 분이신 거죠...
“(255) 푸코에 따르면 철학은 현재의 진단학, 오늘의 진단학입니다. 철학은 이렇게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늘 변화하는 오늘 - 여기 - 우리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데카르트, 칸트 등으로 대변되는 ‘고전철학’과는 다른 ‘니체 이후’ 철학의 특징입니다. 푸코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우주의 본질이란무엇인가와 같이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문제를 탐구했던 고전철학과 달리, 자신은 오늘 - 지금 ‘우리’의 문제, 곧 오늘 우리는 누구인가? 오늘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종류의 철학자라고 말합니다.”
<상당한 위험>역자 허경님도 나 같은(?) 마음이셨던 듯. (이 사람 글케 이상한 사람 아녜효....) 책 각주에 붙어있길래 <처음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찾아읽었는 데, 푸코에 대한 오해를 안타까워하면서 글을 시작하신다 ㅜㅜ 이 글은 생각보다 더 친절하고 쉽게 푸코의 철학이 정리되어 있었다 —'미셸푸코와 자기변형의 기술' 부분—나중에 복습하려고 갈무리,,,
신자유주의페미인 나는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푸코를 읽어보려고 한다... 라고 말하면 거창하지만...
이젠 못 살아남아도 상관없으니까 그냥 이 인간의 고약한 문체와 문제 의식을 즐겨보마 싶다.
나에게 있어 철학이란 —나 자신이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내가 살기, 읽기, 쓰기, 친구들과 대화하기라는 도구로 철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로했)고, 이건 삶의 문제와 떨어져 있지 않으며, 언제나 세계와 협상하는 문제였다. 나의 철학함이 일상에서 가장 첨예하게 만나는 전선(?)은 투표를 하거나 재테크를 하는 것이 아닌 아무도 시키지 않은 공부를 알아서 스스로 하는 것 이다.
어차피 독서란 나 혼자하는 거고, 결국에는 글쓰기도 나 혼자하는 거였는 데, 그걸 깜빡할 뻔 했다.
다시 돌아와서, 그러니까, 푸코 어렵다고 엄살 부리지말고 방법을 찾자. 방법을!
푸코를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일원으로 간단히 규정해버리는 시각은 푸코를 전공하지 않은 미국학자들의 관점을(본의든 아니든) 무비판적으로 흡수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략) 사유의 대부분을 거의 늘 근대에 대한 연구로 일관했기에 푸코에게는 ‘탈구축‘이 아니라 오직 ‘문제의 재구성 reconstruction‘ 혹은 ‘재再문제화 reproblématisation‘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탈구축이라는 말은 데리다와 데리다의 이론을 받아들인 사상가에게 엄격히 한정해 써야 하는 용어이지 푸코에게 무차별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용어가 아닙니다. 한편 용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이 역시 이른바 ‘탈구축주의 =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미국 학자들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푸코는 포스트모더니즘(범주로 묶기에는 좀..) 해체주의 아님 - P246
푸코의 사유가 어떤 의미로든 ‘구조주의적 함축’을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시기는 아무리 넓게 잡아도 1969년에 나온 《지식의 고고학》까지이며, 1970년에 행한 강연 ‘담론의 질서’에서 푸코는 명시적으로 언어학적·기호학적·구조주의적 이해를 거부하고, 니체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담론 분석으로 나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1975년에 나온 《감시와 처벌》을 구조주의적 저작으로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요약하면, 푸코의 사유를 포스트 구조주의로 부르는 것은 우선 적지 않은 복잡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지칭 방식이고,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지식의 고고학》까지의 푸코에만 엄격히 한정해 불러야 합니다. 😫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포스트 구조주의는 <지식의 고고학> 까지만 - P248
푸코는 일단 우파 곧 자유주의자가 아닙니다. (중략) 푸코가 평생 지향했던 정치적 노선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좌파적 테제의 정립’ 입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좌파 자체의 몰락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푸코는 잘 아시다시피 1970년대 이후 사르트르를 잇는 저항적 지식인의 대표이자, 엄청난 양의 선언문을 직접 작성하는 등 지식인 투사의 아이콘이었습니다. 이는 푸코가 이론적으로는 좌파와 입장을 달리했지만, 실천의 측면에서는 늘 상당한 연대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는데, (중략) 결론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를 단순히 ‘마르크스 이후의 사유’라는 식으로 본다면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은 옳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푸코의 사유를 ‘후기마르크스주의’라는 식으로 푼다면 어떤 경우에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는 명칭은 그릇된 것입니다. 😫 푸코 당연히 우파 아님. 마르크스주의 아닌 좌파라서 그래ㅋㅋ - P249
푸코는 하버마스가 자신을 ‘비합리주의자’로 바라보는 게 자신이 하버마스가 유일한 합리성의 형식으로 생각하는 헤겔적 혹은 의사 소통적 합리성을 유일한 합리성 자체의 양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보고, 이를 ‘계몽주의의 협박‘이라 부른 것입니다. 푸코는 결코 비합리주의자가 아니며, 다만 합리성의 객관성, 보편성, 절대성, 유일성만을 부정하는 것이죠. 따라서 푸코에게 합리성의 형식은늘 복수複數이자, 다수多數의 형식, 곧 합리성‘들‘이라는 형식 아래에서만 나타납니다. 😫 하버마스 거부ㅋㅋㅋ 비합리주의 아님 ㅋㅋ - P251
그렇다면 니체와 푸코는 상대주의자 아닌가? 상대주의에 빠지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으실 수 있는데요. 일면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이는 이미 고등학교나 어딘가에서 배운 ‘상대주의는 나쁘고 우리는 상대주의에 머무를 수 없다‘는 말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인 학습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니체의 주장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상대주의와 절대주의 사이의 구분 자체를 공격하는 니체의 주장에 대한 적절한 비판이 아닙니다. 즉 니체에게는 절대와 상대의 구분 자체가 문제라는 것인데, 니체의 주장을 이러한 논의가 옳다는 전제 아래에서만 유의미한 말이 될 수 있는) ‘상대주의’로 비판하는 것은 논점 선취의 오류라는 것이죠. 😫 니체의 관점주의 방식을 채택함, 진리는 구성된 개념일 뿐 - P259
우선 유의해야 할 점은 ‘권력의 계보학’이 이전 시기의 ‘지식의 고고학’을 다 버리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령, 푸코는 이전의 지식을 버리고 권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권력 - 지식’ pouvoir-savoir 이라는 개념을 만들어서 늘 지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권력 - 지식의 복합체를 말합니다. 이렇게 푸코는 어떤 하나의 이전 개념이 있으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그 이전 개념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큰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서 기존의 개념을 부분 집합으로 넣습니다. 😫 푸코는 사유의 가성비를 추구...(응?) - P263
관련된 또 하나의 오해는 이러한 푸코의 관점이 미시적인 작은 권력들에만 사로잡혀서 정작 중요한 권력의 거시적 차원을 방기한다 혹은 그러한 차원에 대해 무력하다는 비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푸코의 미시 권력관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푸코의 미시 권력관은 미시적인 것에서 거시적인 것이 탄생한다고 주장하며, 거시적 것은 이러한 무한하게 작은 미시적 권력들의 효과로서 드러나는 권력 현상의 가장 가시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푸코에게 거시 권력은 미시 권력이라는 보다 커다란 권력에 모두 포함되는 가장 가시적인 영역입니다. 마치 뉴턴의 거시 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서 완전히 파기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전체의 한 함수로서 일정한 지위를 여전히 누리고 있는 것 처럼 말이죠. 😫 거시 정치를 바꾸려는 이유는 일상의 미시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관점에 기인한다 + 권력의 경제주의적 관점 비판 +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ㅎㅎㅎ) - P264
"나는 지식과 진리의 문제에 대해서는 1960년대 내가 지식의 고고학이라 이름 붙인 작업을 통해 수행했다. 그리고 권력 문제에 대해서는 1970년대 초중반 이른바 권력의 계보학을 통해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주체가 어떻게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하게 되는가라는 주체화의 문제를 탐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윤리의 계보학은 하나의주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하나의 도덕적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 권력관계에 대한 푸코의 시선은 당연히 개인들의 도덕/윤리에 대한 사유를 배태하고 있었던 거다.... 아.... - P267
푸코의 윤리의 계보학은 한마디로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혹은 됐는가?라는 주체화subjectivation 곧 주체의 역사적 형성historical formation of the subject이라는 문제를 다룹니다.(중략) 다시 개인의 주체화로 돌아오면, ‘성의 역사’ 시리즈에서 푸코는개인이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설립하는 방식의 역사, 곧 윤리적 문제화의 역사를 분석합니다. *문제화problématisation란 주체가 만들어지는 방식인 주체화, 대상이 설정되는 방식인 대상화objectivation, 그 사이의 인식이 확립되는 과정인 인식론화épistémologisation를 모두 합해 부르는 푸코의 포괄적 용어*입니다. 😫 아. 이렇게 자기에의 배려로 나아갔던 것... . - P268
*푸코는 ‘나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보다는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는가?’를 묻습니다.* 가령 푸코가 묻는 질문은 ‘대한민국 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는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가 되었는가? 어떻게 오늘의 대한민국과 같은 사회로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는가?’입니다. 푸코의 탐구는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계기들, 지점들, 문제화, 문제설정들을 분석하려는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화 혹은 문제설정에 대한 분석은 또 왜 하는 것일까요? 푸코에 따르면 자신의 이러한 모든 작업은 자기 변형 transformation of the self 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푸코는 트랜스포머입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사는 것, 철학 활동의 목적은 자기가 배우는 것에 의해서 자신의 삶에 자기 몸을 다 던져서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입니다. 😫 앍ㅋㅋ 미셸푸코 트랜스포머설 ㅋㅋ 모순적이어 보이지만 일관된 사상가 푸코 되겟슴.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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