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 이즈 섹스. 이 책은 섹스에 관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최신(?)의 존재론에 대한 철학 책이며, 나에게 이 책은 정확히 ‘페미니즘’ 책이다. ‘젠더’를 만나고 난 뒤 어딘가 시큰둥하게 되어버렸던 내 존재의 어떤 부분 (이 글에서는 ‘그것’이라고 임의로 설정해두겠다)에 ‘성차’라는 개념을 양념처럼 더하고 나니, 뭔가가 짭쪼름 맛이 나서 재밌어졌고, 더 집중해서 생각해 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그게 무엇인지 앞으로 살아보는 걸로.
이해해 보기 위해 썼던 개념 난무한 문장들은 아쉽지만 다 지워버리고, 읽는 사람들의 재미와 호기심을 위해서 썰 풀기부터 시작한다.
1. 왓 이즈 섹스
오랜 S리스 상태에서 해방되어 연애와 사랑이 주는 격렬 주파수에 뿅 빠져버린 이웃님이 독서광 아니랄까 봐 “현실의 섹스, 그것은 전자책과 종이책이 주는 것의 차이랄까요”라는 댓글들을 다시며 나를 부럽게 하고 말았는데. 우우와.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이래?!?
그런데 *그전에* 왜어왜우어 기혼녀도 이혼녀도 비혼녀도 왜 리스인가요? (풍문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나이 들면 못하는 건가요…? 😩 아, 결국 체력과 혈액순환… 그거시 젊음의 특권인가요? ㅠㅠ
풍족한 사람들은 풍족해서 숨기고, 없는 사람들은 없어서 숨기느라… 누구도 알 수 없어진 이 시대의 ‘섹스’. 우리 모두는 섹스로 태어난 존재이지만, 현시점 대한민국의 출생률을 보라. 드러워서 안하고 만다! ‘그것’은 매력 자원과 상호 노동(?)의 의지를 지닌 건강한 신체를 지닌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유니콘’ 비슷한 것이 되어 버린 것인가? 결핍은 과잉을 낳고… 그니까 부족해서, 없어서, 안 해서 이러는 거야? 정말로?!?!…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섹스는 그렇게 만인의 대상a가 되어 무더기의 이미지와 자본과 함께 유포되는 것이며… 쪽으로는 가지 말자. 자본주의 싫어하면 안 된다. 나는 원한다. 풍요와 부를. 끌어당김의 법칙이여, 방금 한 자본주의 비판은 취소 취소입니다. 나는 나는 부자가 될 거얏!
어디 가. 다시 돌아와. 현실의 섹스… 거기에 대해서 쓰자.
안 하고 살면 편해. 내 삶은 ‘그것’ 아니라도 문제투성이니까. 나는 지쳤다고. 너의 생물학적 한가함에 비하면 어딘가 조급해지는 나의 가임기의 시간을 견주며. 이것저것 안 따지기에는 과계몽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만약 연애를 한다고 치자. 내가 만날 수 있는 또래 남자 사람들 중에 결혼 생각 없이 연애만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이미 결혼한 사람 빼고?
(연애)관계를 위한 관계에(결국 이성애가 주는 건 섹스 아니냐며, 그것만 지우면 컴팩트하다고) 기운 쓰고 싶은 생각이 없노라. 건조하게 발라낸 생선 가시 같은 말에 친구 역시 뾰족뾰족 말했었다. 님, 참 잘났네요. (물론 섹스‘만’을 위한 관계도 용어도 있지만, 당시 나는 리얼 참 트루 컨츄리라서… 언감생심ㅋㅋㅋ)
좀 접어주면 됐을 텐데 취했으니 할 말은 해야 했다.
“잘날 수 있을 때 좀 잘나면 안 되냐? 앞으론 계속 잘난 척 못할걸? 난, 애매하게 젊거든.”
돌이켜보니 정말로 오만한 말이었다. 어떤 것을 빼버리는 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렇다 하더라도. 당시 나를 조금 변호하자면, 연애가 곧 결혼으로 미끄러지게 되는 나이의 애매함은 매번 심판대처럼 다가왔고, 나는 의지대로 삶을 통제하고 싶었다. (물론 그래봤자 통제가 안된다. 그래서 더 애썼다.) 애초에 심판대에 서지 않으면 된다. 관계를 위한 관계, 전면 봉쇄. 그날 대화는 사랑 찾아 모여든다는 중년들의 자만추 공간에 관한 이야기였고… 나는 지금보다 더 젊었기 때문에 남 일이라 여겼다. 구질구질하기 싫으면 돈을 더 많이 벌면 되는 거 아닐까?라고 조금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런데. 정말 그게 맞나?
아니 에르노의 문장을 가져와보자.
“(51)가장 커다란 행복처럼 가장 커다란 고통도 타자로부터 오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고통이 두려워 고통을 피해가려고, 적당히 사랑하고 음악이나 정치 참여나 정원 딸린 집 등의 관심사의 일치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 섹스 파트너를 삶과 유리된 쾌락의 대상으로 보고 여럿 둔다는 것이 이해된다. 그렇긴 해도,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다른 고통에 비해 내 고통이 비이성적이고 심지어 물의를 일으킨다고 여겨졌더라도, 내게는 그것이 하나의 사치로 여겨졌더라도, 그 고통이 생의 평온하고 유익했던 몇몇 순간보다 더 좋았다.
심지어, 학업과 악착스러운 노동, 결혼, 출산의 시기를 거치면서 사회에 갚아야 할 나의 몫을 다 지불하고 난 뒤, 드디어 청소년기 이래 시야에서 놓쳐버린 본질적인 것에 몰두하게 된 듯했다.”
- <집착>, 아니 에르노
마흔일곱 살의 아니.
내가 사회에 모든 빚을 갚고(물론, 결혼과 출산과 양육의 의무를 지지 않으면… 그게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로서는 지지 ‘못했다’ 정도로 언제나 이 질문에서 빠져나간다…)난 지금으로부터 10년 후에. 그녀처럼 ‘청소년기 이래 시야에서 놓쳐버린 본질적인 것에 몰두’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언제나 삶은 예측하지 못한 기반에서 문제의 문제를 만들어내니까. (다만, 이제 나에겐 그걸 끈질기게 언어화하고자 한 이들의 글씨들이 참조점 처럼 생겨났다.😬 다행스럽다.)
섹스… 그건 내가 포기한 건데?
선택을 선택하지 않기 위해서.
쾌락에 딸려오는 그 많은 관계들이 주는 고통과 복잡함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는.
2/3 정도를 포함하는 진술이라고 고백한다.
4B가 돼버린 채로 살다 보니 그 상태가 주는 경제적임에 안착한 케이스인 나는… 연애 시장 어쩌면 결혼시장(그렇다, 내게 그것은 시장이다) 진입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 부정은 시장 안에서 내 스펙이 경쟁력 없다는 조금 차거운 결론을 내렸기에 가능한 좁은 틈의 평안이기도 했다. 세상의 기준이 너무 높다고만 불평했다. 그게 제일 편했다. 애초에 없다고 생각하면 돼. 근지러운 노래와 로맨스를 끊었고 사랑 사랑 애절한 것을 촌스럽다고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내가 없다고. 내게 없다고. 남들에게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거.
그리고 남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나를 계속해서 침범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섹스 역시 그렇다는 이야기다. 왓. 이즈. 섹스. 함께 읽은 친구는 what이라고 물었다. 나는 is를 가져온다. 그것은 ‘어떤 상태로 존재’ 하는가.
2. 유니콘과 섹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실재’를 말한다. 성이 곧 실재다. 존재의 틈에서 비집고 나오는 결여. 상징적 질서 안에서 의미를 완성하는 것의 불가능. 언어가 가닿는 실패, 그것으로서의 성. 비어있지만 있기에 의미가 계속 생산되어 버리는. 예시로만 설명할 수밖에 없는 전자책 읽기와 실물 책 읽기 사이에서 상실되는 쾌감 같은 것. 행위에만 초점을 두고 ‘말’한다면... 두 가지는 다 ‘읽는 것’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 사이에는 뭐가 다르지? 뭐가 달라?
내 생각에 그건 ‘있다’는 것과 함께 붙어서 나타나기에 다르다. ‘있음과 연루된 설명할 수 없음’
책에서는 유니콘의 반대항을 예로 든다. 좀 길지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자.
“(46) 성이라는 역설적 지위는 말하자면 유니콘의 지위와 반대다: 성은, [유니콘처럼] 그것이 경험적으로 발견된다면 그것이 어떤 모습일지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어디에서든 발견될 수 없는 어떤 존재자에 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경험적으로 성이 존재함에 의심의 여지가 없(고 우리가 그것을 꽤 잘 식별하고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빠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성의 이데아, 성의 본질이다. 우리가 이것이 “성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정확히 무엇을 알아본 것일까? … 성은 어디에나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이렇게까지 말할 수도 있겠다 : 우리가 — 인간의 영역에서 — 어떤 것을 마주치게 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이 “성과 관련 있다"라고 꽤 힘주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식은 반어적인 것이 아니다. Il n’y a de sexe que de ce qui cloche: 오직 잘 작동하지 않는 어떤 것에만 성은 존재한다.”
이렇게 ‘성’은 인간 존재의 결여로서의 최종 심급에 위치하게 되어버린다. 라캉. 변퇴. 누가 프로이트 처돌이 아니랄까봐. 나는 설득되면 되는 거였다. 이 문단에서 괴로울 것은 없다. 내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세상의 원리가 그러하다는 데, 어깃장을 놓고 싶지 않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면, 언제나 나의 과계몽. 이게 문제가 되어버린다.
왜냐면 푸코 이후 한동안 나에게 섹스는 권력의 원리였기 때문이다.
글로만 배운 섹스. 입과 귀로 결론 내려버린 섹스. 섹스를 제거해버린 섹스. (인정하기 싫은데…) 신경증자의 섹스 🫠 ㅋㅋㅋㅋㅋ
있는 섹스를 없는 유니콘으로 만들고 꽝꽝 박아버린 섹스에 관한 문장을 좀 서글퍼하면서 가져와보자. 머머리 논리왕ㅋㅋㅋㅋㅋ 미셸 푸코는 본인의 저서 ⟪성의 역사 1권 : 지식의 의지⟫에서 이런 문장으로 나를 항복시킨 바 있다.
“(16) (성과 관련하여) 나는 이와 같은 담론뿐만 아니라 이것을 지탱하는 의지와 이것을 옹호하는 전략적 의도도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그토록 커다랑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
(19) 따라서 성을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금기를 내세우는가 허용을 명확히 표명하는가, 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는가 성의 효력을 부인하는가, 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을 억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 성에 관해 말하는 사람, 성에 관해 말하는 장소와 관점, 성에 관해 말하기를 부추기고 말한 내용을 수집하고 유포시키는 여러 제도, 요컨대 성에 관한 전반적 ‘담론현상’과 ‘담론화’를 고찰하는 것이 요점이다. 또한 어떤 형태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담론을 따라 권력이 가장 미묘하고 가장 개인적인 행동에까지 이르는가, 어떤 노정을 통해 권력이 희귀하거나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욕망의 형태에 도달하는가, 어떻게 권력이 일상의 쾌락에 침투하여 일상의 쾌락을 통제하는가 —거부, 봉쇄, 자격 박탈뿐만 아니라 선동과 강화일 수도 있는 결과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요컨대 ‘권력의 다형적 기술’을 아는 것이 중요한 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뭐 투항은 완전 백기🏳️🏳️였기에, 여기서 한 발 더 나가는(?) 주디스 버틀러는 당연한 스텝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주디스 버틀러에 정박 중이다. (솔깃하긴 하지만 아직 신유물론으로 건너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데… 버틀러에게서 건질 것이 더 많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그렇다.)
그 모든 섹스 전쟁을 종식시켜 버리고, 대문자 여성을 해체해 버렸으며, 페미니즘을 넘어서는 페미니즘을 열어버린, 어쩐지 2010년대의 한국에서는 토착화(?)에 실패하여 ‘본질주의=반지성주의’ 공식을 만들어버린 듯도 한. 랟펨과 일베모두 싫어하는 궁극의 문장. 바로.
3. 섹스는 언제나 젠더였다 -주디스 버틀러-
섹스(생물학적 성)는 언제나 젠더(사회적 성)였다. 그렇다. 이 문장을 만나고부터 나 역시 “섹스는 언제나 젠더였다” 어쩌면 이 문장을 자세하게 들여다보기로 결정한 순간에 난 섹스(그 섹스 맞닼ㅋㅋㅋ)와 내적 결별…을 한 것일지도 ㅋㅋㅋ
이후로 어떤 질문들은 가뿐히 지워진 것 같다. 인식이 어려웠지 인식 후에는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았다. 차라리 어떤 해방으로 기능했고, 버틀러의 사고방식은 이내 익숙해졌다.
섹스가 젠더가 되는 것은 해방이다. 누가 자연스러운 거죠. 할 때, 그게 왜 자연스러운 거죠?라고 마음속으로 반문하면 되었다. 하물며 섹스도 젠더인데 모든 것을 담론에 위치시킬 수 있게 되었다. 자연이라는 말을 방패 삼아 단 한 번의 숙고조차 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자신 있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생각해 봤다’는 것만으로 종종 지적인 우월함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우월감은 열등감의 요인이다. 열등감도 따라서 심해졌다.)
내 이미지를 위해 좀 더 쓰면… 와따시의 콘츄리함.에서 비롯된 어떤 진정성.도 있었다.
나에게 말하고 쓴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아서… 그 문장을 삶에 들인 이후 내가 할 수 있는 수행이란… 조금은 다른 젠더…를 만들어보는 거였다. (규범을 보는 눈을 갖추고, 그 규범을 연기하면서도 조금씩 위반하기. 내 표현으로 발연기. 블랙 코미디 같은 것.) 어느덧 연애도 사랑도 빤히 반복하는 각본처럼 느껴졌고,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섹스는 남의 일이 되었고…
인식과 실천이 주는 분열이 없고, 이대로 나는 돈만 벌면 되었지만… 어쩐지 막상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다 보니 돈 버는 것보다, 책 읽는 것에 습관이 들어서 거기에 몰빵을 하고 말았다… 만약… 이 모든 것을 억압된ㅋㅋㅋ 성충동으로 환원시킨다면… 더 이상 꽂을 곳이 없이 터져가는 나의 책장은 극심한 욕구불만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섹스를 읽지 말고 섹스를 해! 제발 좀! 라고 외치는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상대가 있어야 나오는 도파민과 자체적으로 생산 가능한 도파민은 역시 그 경제적임과 효율성 측면에서… 세로토닌… 뇌과학까지 가져와서 비섹스 옹호할꺼면 꺼지라고 외치는 친구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내면에서 화성악처럼 울려 퍼지는 그녀들의 목소리들을 훠이훠이 물리치며…
도달한 나의 정말 순수한 지적(성적ㅋㅋ) 호기심은 결국 이 책으로 현현하여
나를 ‘실재’에 가닿게 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억압된 것은 귀환한다…ㅋㅋㅋㅋ 실제로 나는 실재를 억압한 흔적을 3년 전 버틀러 공부에서 찾고 말았다. 실재는 없다고 하는 버틀러~ㅋㅋ)
“(76) 조운 콥젝 : 젠더라는 *중성화*된 범주가 선호되면서 성차라는 정신분석 범주가 의심스럽게 여겨지고 널리 버림받게 된 것은 이 시대[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 이 용어가 젠더에 의해 대체되었을 때 누락된 것이 바로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차의 성이기 때문이다. 젠더 이론은 하나의 주요한 업적을 수행했다. 즉 그것은 성에서 그 성을 제거했던 것이다. 젠더 이론가들은 계속해서 성적 실천을 말하면서도, 그들은 성이나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질문하기를 멈췄다.”
즉 성차의 개념에서 젠더의 개념으로 넘어가면서… ‘실재’(존재 속 균열…)가 빠져버렸다. 즉. ‘성’이 빠져버렸다. 이게 무슨 말인지 너무나도 뼈를 맞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나는. 나는. 내가 그랬으니까!!!!!
그날부터 나의 독서는 다시 종횡무진 하게 되어 결국 젠더와 성차의 존재 속 균열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아침일찍 일어나 열심히 공부하며 노동하며 또 갓생을 살아버리고… 그래 성급히 결론 내지 말자. 푸코랑 라캉… 버틀러랑 이리가레… 차분히 같이 읽도록 하자… (메이야수랑 들뢰즈도....?) 정도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요점은 이것이다.
“(81)라캉의 입장이 위에서 기술된 수행적 존재론과는 환원 불가능하게 다르다는 것을 주장한다. 정확히 어떤 면에서 그러한가?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할 때 라캉이 주장하는 실재의 지위는 무엇인가?”
“(86)인간의 섹슈얼리티는 그 빠져버린 기표의 대체기호/플레이스홀더이다. 그것은 엉망이지만 (쓰여지기)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성적 관계를 사실상 보충하는 것이 이 엉망이다. ... 섹슈얼리티는 이러한 간극을 엉망으로 봉합하는 것이다."
“(87)우리가 이제 이 모든 것이 존재론 일반, 더욱 특수하게는 동시대 젠더 연구의 수행적 존재론에 관하여 무엇을 함축하는가의 문제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다음의 중대한 함축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즉 *라캉은 존재와 실재 사이의 차이를 확립해야 했다*. 실재는 존재나 기체가 아니라 존재의 교착상태, 그것의 불가능성의 지점이다. 그것은 존재와 분리할 수는 없으나, 존재는 아니다. 정신분석에게는 언어(또는 담론)와 독립해 있는 어떤 존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때문에 *정신분석이 자주 동시대 유명론의 형태들과 양립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든 존재는 상징적이다. 즉 그것은 타자 속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중대한 추가를 통해 다음과 같이 정식화될 수 있을 것이다: 상징계 안에는 오직 존재만 있다 — 실재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고. 실재는 “있다.”그러나 이 실재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 이외의 무언가가 아니고, 존재의 공간의 발작이자 장애물이다. 그것은 단지 (상징적) 존재에 내속한 모순으로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이 성과 실재를 연결할 때 관건이 되는 것이다.”
4. 성차라는 개념(은 투비컨티뉴드)
원래 내가 끝까지 붙잡고 쓰려고 했던 글은 *“성”에서 “젠더”로 옮겨 갔을 때 상실된 것* 이었다. 나는 무언가를 잃은 것 같지는 않고, 나 스스로로 변화해온 느낌이다. 성에서 젠더로 옮겨온 후 그랬다. 그러나 젠더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대해 인정한다. ‘그것’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고 싶다. 있고 없고 가 아니라 ‘그것’이 내게는 유의미한 의미를 생산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성차와 젠더에 관한 논쟁은 페미니즘 안에서 꽤 오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이 긴장이 페미니즘을 빼어난 공부 방식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213)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라캉의 성차 개념을 젠더 개념보다 더 선호하는데, (그들이 생각하기에) *특히 젠더 개념이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관계 및 성적 관계가 쉽게 변화될 수 있다고 잘못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라캉은 생물학적 특성이 남성과 여성의 성적 지위를 결정한다는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적 관계가 남성 지배적이며 변화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한다. 라캉의 경우 생물학적 특성이 아닌 언어가 남성됨과 여성됨의 의미를 정한다.
그렇지만 라캉에게서 남성됨과 여성됨의 기본 의미가 단지 변화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그 의미는 결코 변화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는 남성 성기에 특권을 부여하고 여성을 수동적인 성적 대상으로 위치시킨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지위를 더 낫게 변화시키려고 애쓰기 때문에 언어가 이렇게 남성과 여성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라캉의 견해를 그들이 어떻게 지지할 수 있는지 분명치 않다. 그렇다고 페미니스트들이 라캉의 생각을 전체적으로 거부해야 한다고 결론지을 필요는 없다. 라캉의 성차 개념을 수정하여 왜 여성의 열등한 사회적·성적 지위를 변화시키는 것이 어려운지 설명하면서도 이러한 지위가 결코 향상될 수 없다고 [잘못] 시사하지 않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 *이리가레가 바로 이 방식으로 라캉의 개념을 수정한다.* 그녀는 모든 언어가 “팔루스 중심적인” 성차 해석을 구현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라캉의 추론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한다.” — <페미니즘 철학>, 앨리슨 스톤
“(266)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에서 버틀러는 신체와 쾌락이 전적으로 자연적이거나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본래의 질료(대문자 N의 자연)와 그것을 이후에 물질화하는 대문자 C의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통해 재창조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그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이론을 빌어 *팔루스라는 남성적 특권의 상징이 사실 남근이라는 신체기관이 아니라 우연적인 리비도 투자의 결과로 인지되며, 신체로 인식되는 자아에는 팔루스와 남근의 불일치로 인해 고정되지 못하고 계속 재인식되는 의미화 연쇄가 작동*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의 정신분석학에서는 상징계의 법인 언어가 내리는 금지와 명령에 대한 거부와 폐제를 통해 주체가 등장한다는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육체적/자연적/여성적인 것을 언어에 선행하는 결여로 환원시키는 입장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렇게 신체로서의 주체를 구성하는 틀거리인 상징계/언어/문화와 상상계/전언어/자연의 이분법을 반박하고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재호명되고 재생산되는 언어의 불안정성과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데리다의 반복 가능성 개념을 활용한다.” —<주디스 버틀러> 비키커비
성차와 젠더에 관한 조금 더 매끄러운 글을 써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성차도 젠더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라캉의 성차 공식에 관한 페이퍼는 단발머리님 글에 단 댓글로 일단은 갈음한다ㅋ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면으로서의 여성성에 대해서, 여성의 주이상스에 대해서 언젠가는 써보고 싶다.)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5974275
나는 삶이 아직 나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아
이해 불가능한 느낌으로만 다가오는 둔탁한 개념들을 접착 메모지에 써 붙여 놓고,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살아가 보기로 한다.
이 모든 것은
죽.어.야.끝.난.다.
5. 남은 질문들. 남은 공부들. 남은 농담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포함 권력은 ‘비-관계’를 전유한 채로 작동한다는 것. 그러니까 그것을 언어화하는 작업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그것을 드러내는 글쓰기, 그것을 보려고 하는 습관, 새로운 기표.
“(260) 쓰이지 않기를 중단stops not being written”하는 그것을 라캉은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세상을 사랑하는 걸까. 그러나 “‘쓰이지 않기를 중단하기’라는 기반 위에서 연명하는 모든 사랑은, 이 부정을 다른 부정, ‘즉 쓰이기를 중단하지 않기doesn’t stop being written’, 멈추지 않기로 변경시키는 경향”이 있다고도 한다. 어느 지점에서 그만둬야 멋진 이별이 되는 것인지. 사랑의 좋은 부분만 취하게 되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정정하겠다. 좋은 부분만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사랑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쓰고 또 읽을 때. 정말로 사랑을 하는 것 만 같으니까. 아무런 대가가 없는. 어떤 이득도 없는. 비이성적인 충동. 집중. 내일의 쓰기를 위한 오늘의 남겨 놓기.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했다.
이 책을 읽거나 내 글(자기고백)은 읽지 않아도 (좀 서운하겠지만?) 되지만, 아래의 성과 실재에 관한 주판치치의 농담은 읽어보시길. 분명 당신은 나처럼 웃을 것이다. (웃기지 않았다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나만 웃긴 걸로.) 그녀는 슬라보예 지젝이 무려 ‘질투하는’ 친구이시다.
#아담의배꼽
“(274)인류 최초의 커플에게 배꼽을 그려 넣을 것인가, 배꼽을 그려 넣으면 안 되는가? 아담은 생기와 흙으로 만들어졌다.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여성에게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그들에게 어찌 배꼽이 있으랴? 그러나 그들은 배꼽 없이는 이상해 보였다. 그들은 최초의 인간이었고 그들은 (다른) 인간들처럼 보여야 했다. 그러나 인간인 그들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면, 신 또한 배꼽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새로운 개념적 난국들을 만든다... (이것은 고스가 화석의 지질학적 연대와 창세기의 신의 창조를 화해시키려고 했을 때 직면했던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의 답은, 신이 아담을 창조했을 때, 그는 또한 배꼽도 창조했다는 것, 다시 말해 그의 “선조성”도 창조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직면한 문제는 꽤 실제적이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무화과 나뭇잎을 좀 더 크게 그려 넣어서 그 문제를 회피했다. 그들은 성기만 가린 것이 아니라 아랫배도 가린 것이다.
무화과 나뭇잎을 이렇게 크게 그려 넣어서 성기 그 이상을 가리려고 한 것은,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것에 대한 완벽한 삽화가 아닐까?
다시 말해, “성적인 것”을 덮으면 우리는 항상 또한 —그리고 아마도 일차적으로?— 다른 것도 덮을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없지만 심오한 형이상학의 문제들과 모호성들을 떠오르게 하는 어떤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