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페이퍼는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것이다.
어제 일이다. 도시가스 계량기 교체 작업 때문에 기사님들이 집에 오셨고, 생각보다 오래 걸렸고, 뭔가 실수를 하셨는지 가스 새는 냄새가 심하게 났고, 영하 7도에 대대적인 실내환기를 하고 있었다. 거실과 부엌 사이를 오가면서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펼쳤다.
뇌과학 관련 책 이렇게 세 권인데, 제일 먼저 살펴본 책은 『생명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목차를 살펴보고 페이지를 넘겨보니, 아, 막 이렇고, 또 이런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두꺼운 책을 내려놓고. 『뇌과학 공부』를 펼친다. 이건 더하다. 이건 또 이렇고, 막 이런다.
이 책에서 저자는 뇌 공부란 <뇌구조 ‘그리기’와 ‘암기’>라고 강조해 말한다.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보자면, ‘뇌 공부의 핵심은 노트에 ‘그리고 쓴다’이다’(4쪽). 이 책도 안 되겠다.
알라딘 명랑토끼님이 읽는 책이라 저번 주에는 『독서의 기술』을 살짝 훑어봤는데, 그 책 60쪽에서 저자가 말한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것을 아는 것은 빠를수록 좋다.’ 굳이 변명하자면, ‘슬쩍 훑어봄’은 이러한 과정의 일환이다.
세 번째 책 『느끼고 아는 존재』를 펼친다. 이 책이 바로 내가 찾던 그 책이란 걸 알았다. 4장의 소제목, 의식과 앎에 관하여. 이 부분을 먼저 읽으면 되겠다.
그렇게 정리하고, 읽던 책으로 돌아간다.
여러 해가 지난 뒤 나는 심리치료사인 바버라에게 우리 의식 고양 모임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는지 물어봤다.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이 대체 모임에 뭘 입고 올지 조마조마했어요. 그러다 당신이 《여성과 광기》로 유명해지니 사람들은 당신을 록스타처럼 대했죠. 사람들 - 여성들, 페미니스트들은 당신의 성공을 질투했고, 나는 그 사실이 충격적이고 슬펐습니다. 나는 우리가 당연히 서로의 성공을 반가워할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90쪽)
헉, 하고 책을 내려놓는다. 부끄럽게도. 페미니즘 책을 이만큼 읽을 때까지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래서 12월의 책을 읽을 때, 나는 얼마큼 놀라고 얼마큼 당황스러웠다.
전통적으로 남성뿐 아니라 여성은 남성의 희생이나 협력보다는 다른 여성의 도움이나 희생을 보다 쉽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런 기대가 비교적 안전하고 성공 확률이 높다. (『여성과 광기』, 501쪽)
자매애에 대한 맹신이라 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환상은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재능 있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기량이 뛰어나고 표현에 능통한 여성들 - 유명하고, 기명 기사를 쓰고, 출간 계약을 하고, 그야말로 어떤 것이든 능력 있는 여성들 -은 혁명에 대한 반역자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는 내게도, 케이트 밀릿에게도, 나오미 웨이스타인에게도 일어났던 일이다. (110쪽)
재능 있는 여성들, 똑똑한 정도를 넘어서서 천재인 여성들을 바라보는 다른 여성들(천재인 여성들과 일반 여성들)의 시기와 질시. 그로 인한 페미니즘 운동의 갈등과 고민.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내가 읽은 책의 저자들이 서로간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너무 즐거웠다. 케이트 밀렛과 베티 프리단.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수전 브라운 밀러. 그리고 아직은 읽지 못한 책, 『여성, 거세당하다』의 저메인 그리어.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많은 이름이 있지만 내가 찾아낸 이름은 이 정도다. 읽어가면서, 더 많은 이름을 찾고 노트에 적고, 기억할 것이다.
한나 아렌트 책이 도착했다. 원래는 월요일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화요일 밤늦게 도착했다. 괜찮다. 오는 게 어딥니까. 책 많이 사는 사람은 아닌지라 반가운 책손님 사진을 찍어보았다. 이민진 작가님, 죄송합니다. 알파벳 머그잔 받아야 해서 진작에 샀어야 하는 책을 이제야 구입했네요. 그래도 제가 꼭 읽을게요. 진짜예요. 곧 만나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