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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프 이너프 - 진실을 직시하는 강인함에 관하여
데보라 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책세상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148)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괴상한 동기라도, 동기가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범죄의 거대한 규모를 뒷받침하는 극악무도한 악이 존재하는 효과가 생긴다. 반면 동기가 없다고 가정하면(혹은 아이히만의 출세욕처럼 부적절한 동기를 상정하면)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 자체가 진부해지고 평범해진다.* 대량학살의 배후에 혐오스러운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 편이, 아무 이유도 없을 때보다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기실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고통은 애초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이 말은, 이 태도는,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나몰라라 하겠다는 것 역시 당연히 아니다.
현실직시—아렌트는 현실을 직면하자고 했는 데,—물론 나는 동의하지만— 그녀의 요구와 이미 벌어진 고통 사이에는 어떤 심연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래서 감정을 떼어 낸다는 것이 불가해 할 만큼 어려운 일이란 걸 알(것도 같)지만, 그렇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주문이 끝끝내 모두가 저지른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심오한 윤리적 태도라는 것을 감히 이해한다.
내 생각에 … 그녀는 ‘진짜’로 고통을 알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나는 거칠게 이렇게 해석한다. 아렌트를 비정하다고 공감 능력이 없다고 짜증스러워했던 (당시의 남자) 평론가들은 고통의 곁에 가까이 있어보마한(뭐 그것도 어느 정도의 윤리적인 태도라고 생각해두기로 하자. 한국의 현실은 좌우를 막론하고 아이히만만 드글드글 하니까.)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150) 즉,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를 말한다. 아이히만과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과 존재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막을 둘러치고 ‘현실’ 자체를 차단해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비탈에 있는 것은 아닐까. “왜곡이나 회피 없이 현실과 일대일로 마주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만큼은? 그러니까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은 결국 나를 당신을 지켜보는 모두를 … 어떤 사유의 지평으로 떠민다. 동정과 연민에의 호소보다 불편하기에 무정하다 욕하지는 말자. 감정은 편하다(이건 자동 반응이니까) 사유는 불편하다(이건 노동이니까) 그러나 인간 개개인은 각자의 고유한 인식 방법이 있고 가끔 우리는 ‘다르게 생각해보기’라는 방식으로 연대를 도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상황이 너무도 불편하면 사유라는 불편한 노동을 해야 한다. 단 쉬운 사유방식이 아니라 안 해 본 방식의 사유(사유 자체에 대한 사유?)를 해보아야 한다. 그게… 그게 어쩌면 이 고통의 의미일지도. 감히.
그러므로 이 무정하고 터프하고 강인하고 멋있어서 죽겠는 아렌트를 꼭 읽어야겠다. (요 며칠 간의 나는 심각한 정신적 치임에 성 정체성까지 위협받았다. 언니, 날 가져요. 엉엉)
다시 돌아와서.
고통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고통 자체의 참담함 앞에 가해자의 비인간성을 지목하며 이것을 우리 모두는 반복하지는 맙시다라고 말하며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다. 혹은 이 구조가 나쁩니다, 이 구조를 바꿉시다 하며 연대를 공감을 싸움을 촉구(대체로 매우 추상적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만이 고통을 직면하는 태도인가? 그것은 정말로 고통에 필요한 감정 이입인가?
내가 아는 한 현재진행형인 고통에 감정을 이입하는 용기와 결단이야 말로 오만이고 위선에 찬 나르시시즘이다. 모든 자아를 타자를 위해 통째로 비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에 테레사 수녀라고 할지라도) 그 대상이 고통이든 욕망이든 상관 없이 유아론이다. 우리는 이미 끝나버린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이입하는 태도를 가져볼 수 있다. 애석하게도, 환장하겠게도.
현재 진행형인 고통. 리얼리티로서의 고통. 은 통째로 고통이므로 그냥 견뎌지는 것이지 어떤 함량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더 수월해지는 것도 까닭이 있다고 해서 더 참을 만해지는 것도 아니다. 매는 그 이유를 알고 맞아도 아프고 모르고 맞아도 아프고 첫번째로 맞아도 아프고 마지막으로 맞아도 아프다. 아프다. 아픈 거다.
그리고 그것은 끝났다. 다른 종류의 고통이 시작된다.
왜.
상황이 심각해지면 육하원칙까지 간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내가 왜 그랬을까.
그는 왜 그랬던 걸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되돌아와버리는 같은 질문들이 무한대로 반복되고 고통은 리플레이 된다. 때때로 나는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된다. 사람들은 잊으라고 말하고 아직도냐고 묻고 실은 어쩔 줄 몰라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어쩔 줄 모르게 만드는 것, 곁을 괴롭히는 것 까지도 고통의 연장선일까. 나의 고통이 정말로 벗어날 수 없는 것 처럼 여겨지는 극점은 내 상처가 내 곁을 상처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때다.
어쨌든 나는 살아야 한다.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
씻어야할 설거지가 있고 벌어야할 돈이 있다.
더는 리플레이를 하고 있을 겨를이 없다. 그건 나에게 밥을 주지도 않고, 위안을 주지도 않으며, 답을 주지도 이미 벌어진 고통을 없어지게 하지도 않는다. 자기 혐오와 인간 혐오의 상태만을 부추길 뿐이다.
이제 사유의 방식을 바꿀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이유를 찾지 않는다. 같은 말로 의미 역시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이유와 의미에 원인과 결과에) 내 생각에 고통의 핵심으로 곧장 진입하면 결국엔 이유가 없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붙잡는 것은 좀 서글픈 기대이고 어쩌면 최면이다. 그거 없이는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환상과 판타지 없는 인생이란 황량하기 그지 없을 것과 같다는 비유까지 들어가며. 현대의 뇌과학은 인간의 뇌가 인과론에 얼마나 익숙하고 음모론에 얼마나 취약한지 알려준다. 고통으로 변해버린 뇌가 정당한 이유를 찾다가 결국 음모론으로 안착해버리는 것 까지도—고통의 효과라고 생각하면 고통에 치가 떨리지만.
나에겐 아렌트가 있다. (그리고 푸코도 있는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하자. 현실을 직면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
기운내 서 생각하고, 타자와 현실을 공유하고 논쟁하자. 나를 보호하는 것은 맞지만 현실을 부정하면서까지 보호하진 말자.
이유를 묻지 않고 까닭을 찾지 않으면서도 고통에 취해버린 뇌의 운동 방식을 끊어내는 방법.
취하지 않는 방법. 도피하지 않는 방법.
살아가는 방법 혹은 사랑하는 방법 어쩌면 아렌트가 승리한 방법.
나는 한나 아렌트를 읽을 것이다. (!!!)
먹고사니즘에 팍팍한 만국의 노동자(ㅋㅋㅋㅋ)들이 기를 쓰고 읽고 쓰는 것들이 지적 허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범한 우리들이 읽고 쓰자. 살아야 하는 거니까. 쉬운 이유와 연민에 안도해봤자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으니까.
덧붙임, 아래의 인용문의 아이히만에 조주빈을 넣어보자. ㅋㅋ
그러니까 이는 결코 "공감능력empthy이 아니다. … 다른 사람의 관점을 가정하고 수용한다는 의미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아렌트의 견해로 보면, 그건 아이히만이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다(물론 그의 증언만 봐서는 그에게 감정을 느낄 능력이 있었다는 증거도 없다). 아이히만이 마비된 양심으로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건, 유대인에게 자기 자신의 입장과 다른 독자적인 견해가 있다는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렌트의 아이러니는 비록 조롱을 통해서라도 복수성을 실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말 자체를 꼬투리 잡음으로써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관점을 보여주고, 동시에 그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누구나 볼 수 있을 거라는 전제를 깔았던 것이다. 아이러니가 무감정한 수사라는 점은 복수성과 공감능력 사이의 간극을 암시한다. 그러나 아렌트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그 간극을 넘지 못했다. *문해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치의 악행을 감정적으로 설명하는 쪽을 선호하는 취향과 기존의 독서습관이 아이러니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나치의 도덕적 붕괴를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인지하려 했던 "악의 평범성" 개념이 나치의 범죄를 진부하게 만들고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오해받아 많은 독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듯이, 아렌트의 어휘는 나치의 동기를 변질시켜 범죄를 더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괴상한 동기라도, 동기가 있다는 가정만으로도, 범죄의 거대한 규모를 뒷받침하는 극악무도한 악이 존재하는 효과가 생긴다. 반면 동기가 없다고 가정하면(혹은 아이히만의 출세욕처럼 부적절한 동기를 상정하면) 범죄자가 아니라 범죄 자체가 진부해지고 평범해진다. *대량학살의 배후에 혐오스러운 동기가 도사리고 있는 편이, 아무 이유도 없을 때보다 견디기 쉬운 것도 아닌데 말이다*. - P148
*아이히만의 "무사유"는 현실과 접점을 유지하고 타자와 현실을 공유하고 논쟁하는 데 철저히 실패한 원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렌트가 정의하는 "공통감"이다. "아이히만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그의 무능력은 ‘사유’의 무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 즉,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능력의 부재를 말한다. 아이히만과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타인의 말과 존재에 대항해 자신을 보호하는 강력한 막을 둘러치고 ‘현실’ 자체를 차단해 자신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은 현실에 직면하게 만드는 부류의 사유에 저항하기 때문에 독일의 도덕적 붕괴를 너무나 잘 보여준다. 바로 그것이 아이히만이 봉사했던 체제의 범죄이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의 무사유가 지적능력의 결핍 또는 교육의 결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아렌트는 무사유가 천성이나 사회화보다는 의지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이 구분은 《정신의 삶》에서 핵심적 개념으로 발전한다. 사유가 도덕의 보루가 되고, 따라서 당연히 교육받은 자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자질로 제시되기 때문이다). 언어 안에서 복수성과 구체성은 현실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지키는 방어막으로 함께 어우러져 작용한다. 복수성은 자기 자신을 거울로 비추어 그 거울상만을 보여주지 않으며, 구체성은―아렌트가 진델 그린즈판의 증언에서 보았듯―인간이 왜곡이나 회피 없이 현실과 일대일로 마주하게 해준다. - P150
현실은 언제나 복수성과 공통감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타자와 세계를 공유해야 한다는 의미다. 아렌트는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질문은 ‘무언가가 전체주의로 이끄는가 아닌가’라고 믿었기에, 정치적 행동과 정치적 숙고에 대한 아렌트의 처방은 더 이상 명확할 수 없으리만큼 명징했다. *바로, 모두 함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있는 그대로 공유하려는 현실은 고통스럽지만, 아마 더 중요한 점은, "미리 숙고하지 않은 주목"으로 현실을 보기 위해서는, 잠시 참여를 멈춰야 할 만큼 불편한 수난의 양식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타인의 관점에 대입해 현실을 시험하는 일 역시, 우리 자신의 관점을 보강하고 확장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는 가치를 내재하면서도 위험성을 지닌다. 복수성에 가치를 두는 사유자는 그 예측불가능성과 불확정성 또한 포용해야 한다. 그리고 구체성은 현실을 인지가능하게 하고 공유할 수 있게 해주지만, 현실의 사실성 자체는 우리를 지독하게 견디기 어렵게 할 수도 있다. 현실을 지키는 방어막(복수성과 구체성)은, 그렇다면, 아렌트의 사유와 감정의 철학에서 가압지점이기 때문에 더욱더 투철한 검증을 받아 마땅하다. *방어막 없이 현실을 직시하고, 이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도덕적·정치적·심리적 위험성을 감수하도록 하는 자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실패의 위험성은 무엇인가? 아렌트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수양해야 할 자질보다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는 데 실패할 경우의 위험성을 훨씬 더 힘주어 상술한다. - P152
요점은 *정신이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신은 감정이 드러나는 방식을 통제할 수는 있다. 그리고 "우리는 격정을 노출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자제력을 수련해 길러야 한다".(LOTM, 72) 공적 삶을 감정으로 오염시키거나 도덕적으로 위험이 다분한 무사유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고통을, 그게 아무리 압도적인 고통이라도 그저 순수하게 참아내야만 한다. 암묵적으로 오로지 시간만이 격정을 잠재울 테고 압도하는 감정을 잦아들게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고요를 기다리는 행위를 무사유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아렌트가 보기에 무사유는 고의로 생각을 하지 않는 행위다. 아니, 그보다 사유를 ‘미루는’ 짓이다*. 무사유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것이며, 대체할 만한 사유의 양식으로 위로하고 달래주는 사유를 제시한다. - P173
"현실 직시"는 클리셰처럼 들리고 또 실제로도 아렌트와 매카시가 생각한 과정의 역동성을 상상하지 못한다면 클리셰로 전락한다. 아렌트의 현실 직시 개념은 칸트의 ‘공통감’에 근거한다. 합리적 존재는 그 자체로 명백하고 자연스러운 진실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세계를 바라보는 필연적으로 불완전한 시각을 능동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통해 공유한다는 개념이다. - P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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