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속담에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냇물은 노래를 잃는다라는 말이 있다. 행복했던 우리의 삶에도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이 찾아올 때가 더러 있다. 키르케고르는 나는 고통스럽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다. 고통은 결코 저주나 심판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불과 백 년 전까지만 해도 평균 수명은 45세였고 사람들은 살면서 자주 죽음을 의식해야 했다. 죽음은 그저 전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보일 뿐 어김없이 우리를 찾아오지만,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잊고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두고 싶어 한다.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현대인이 죽음을 숨기고 회피하는 모습의 원인을 문명의 혜택에서 찾는다. 고대 사람들은 살아있음과 죽음을 하나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의학기술과 건강 식단이 발달한 오늘날 죽음을 떠올리는 것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푸드 포르노먹방 열풍은 일단 먹고 즐기자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다. 현대인들은 톱니바퀴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정서적 안정감을 느낀다. 죽어가는 자는 쓸쓸한 중환자실로 격리된다. 그는 일상으로부터 멀어진 고독한 존재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눈을 감는 날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데 주력해야 할까?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하버드 의대 교수 아툴 가완디는 노화와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삶을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의사들은 노화 과정을 삶의 일부로 보기보다는 고쳐야 할 질환으로 인식한다. 의사들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그것이 의사들의 의무이다. 하지만 환자의 병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죽음이 임박한 환자의 심정을 읽지 못한다. 아툴 가완디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의사 폴 칼라니티는 환자가 여생을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단순한 수명연장보다 자신에게 부여된 수명을 항시 건강하게 유지하고 긍정적인 죽음에 도달하면 성공적인 노화로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성공적인 노화를 맞을 수 없다.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절대적 고독이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는 않다. 자신의 과거 인생이 후회스럽거나 인생을 성숙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죽음을 분노와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프로이트, 수잔 손탁 같은 유명 인사들도 죽음이 코앞에 둔 상황 속에 죽음을 타협할 것인지 말 것인지 스스로 결정했다. 프로이트는 구강암의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진통제를 거부했다. 손탁은 유언장 작성을 거부함으로써 끝까지 죽음 앞에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이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들처럼 거역할 수 없는 죽음에 항거할 수 있다. 폴 칼라니티처럼 놀라운 참을성을 보이며 차분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지만, 자기 인생에 미진한 부분이 남았거나 질병으로 생을 마감할 때 종종 죽음을 부인한다. 살아있는 자들의 눈에는 죽어가는 자의 고군분투하는 저항이 집착으로 보이겠지만, 이러한 행위 역시 인간답게 사는 모습의 일부이다.

 

세상이 더 좋아질수록 우리는 죽음의 강박관념으로 점점 내몰게 될 것이다. 인간은 개별적 주체가 되어 고독에 쉽게 휩싸인다. 불안과 허무주의가 개인을 집단으로부터 단절시킨다. 개인의 죽음이 일상의 배후로 밀려나면서 고독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인의 죽음을 가벼운 대화 소재로 삼아서 쉽게 얘기하는 성향이 있다. 살아있는 자들은 죽음에 눈먼 상태다. 죽음에 대한 무심함은 타인의 죽음을 비하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인간답게 살다 갈 권리를 주는데 너무 인색하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을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단지 조금 늦게 죽는다는 이유 하나로 정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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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0-05 2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산다고 사는 기계처럼 습관적으로 사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부단하게 삶도 비워야죠. 다만 할일이 있고 의무가 남아 있을때 가버리면 무책임한 거니까요.

요즘 자살이 너무 많아서요,,죽음이 도피가 되는 걸 보면 사는 것도 죽는것도 쉽지가 않죠.

cyrus 2016-10-06 13:10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죽음으로 도피하는 선택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달걀부인 2016-10-06 0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죽음도 개인적 죽음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적 상황은 더욱 그렇죠. ..인간답게 살 권리도 주지않는데.. 인간답게 죽을 권리도 주지 않은 현실. 그래서 제목을 바꿔서 읽어봅니다. 시대의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로요.

cyrus 2016-10-06 13:16   좋아요 0 | URL
우리 사회가 타인의 죽음을 너무 가볍게 봅니다. 인간답게 죽지 못하면 온전히 죽은 자의 문제로 돌립니다.

안녕반짝 2016-10-14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툴가완디는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읽고 팬이되어서 책은 다 샀는데 요즘 신간중에서 바람이 숨결이 될때가 가장 읽어보고 싶더라고요.

cyrus 2016-10-17 11:22   좋아요 0 | URL
폴 칼라니티의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 해부학실에서의 경험담이었습니다. 끔찍하다기 보다는 숙연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를 정의해 달라는 물음에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시가 곧 삶인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만큼이나 난처한 질문임이 틀림없다. 에드거 앨런 포에게 시는 고독의 노래다. 비참한 삶을 살았던 포는 <애너벨 리>, <갈까마귀> 같은 우수와 연민으로 가득한 시를 남겼다. 포의 시를 읽는 것은 고독 속에 깊이 잠겨 서늘한 속살을 더듬는 것이다. 포는 육체에 각인된 고독을 고스란히 시화함으로써 서늘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하지만 싱거워 보이지 않는 포의 시적 언어를 읽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시에 묘사된 감각의 깊이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시의 운율을 고스란히 구현해내는 일이 번역의 관건이다.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ide of the sea.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애너벨 리중에서, 정규웅 역, 애너벨 리14)

 

    

 

 

달빛 비치면,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 꿈을 꾸고

별이 뜨기 무섭게,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의 밝은 눈 느끼네.

그렇게, 밤새도록 나는 누워 있네

내 사랑내 사랑내 목숨 내 신부 곁에

그 바닷가 그녀의 묘에서

파도치는 바닷가 그녀 무덤에서.

 

(김천봉 역, 19세기 미국명시 5 : 에드거 앨런 포79)

 

 

 

 

달빛은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면 따라오고

별들이 뜨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가

내 눈으로 들어오는 걸 느껴요.

그래서 이 밤에 나는나의 사랑이며, 내가 사랑하는,

내 생명인 내 신부 곁에 누워 있어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옆에

바닷가 옆, 내 여인이 누워 있는 곳에.

 

(김경주 역,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 애너벨 리)

 

 

 

 

왜냐면 달이 비추면 반드시, 가져다준다 내게 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들을;

그리고 별들이 뜨면 반드시, 내가 느낀다 그 밝은 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을:

그리고 그래서, 밤 밀물 내내, 내가 누워 있다 곁,

나의 사랑하는나의 사랑하는나의 생명이자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돌무덤의

소리 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의.

 

(김정환 역, 에드거 앨런 포 시선집124)

    

    

 

김정환 시인은 꾸밈 있는 시 번역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어려운 문장을 쉽게 고치는 것을 틀린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참고] 나는 김정환 시인의 입장을 반대한다. 운율을 갖춘 문장의 본뜻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라면 의역도 필요하다고 본다. 김정환 시인은 원문에 충실히 하려고 직역을 시도했지만,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게 나왔다. 경우에 따라 직역과 의역, 이 두 가지를 적절히 버무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참고]검은 고양이의 우울하고 깜깜한 시편들 (한국일보 20163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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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름다운 애너벨 리
    from You're Yeah! 2016-10-05 16:57 
    #. 0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
 
 
yureka01 2016-10-05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단순히 문장 번역은 가능하겠지만 시의 메타포나 운율 등 이런건 어떻게 이입이 될 수 있게 번역이 가능한지 참 궁금했어요..

cyrus 2016-10-05 16:08   좋아요 1 | URL
사실 저도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영시를 번역한 사람들은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말로 옮긴 시를 읽으면 운율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번역가 입장에서도 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겁니다. ^^;;

시이소오 2016-10-05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정말 원문으로 읽어야지. 번역자들마다 제 멋대로 번역이라
지금 읽고 있는 <필립 라킨>시 역자가 김정환 씨인데,
이분 연세가 지긋해서인지 시 번역이 제게는 너무 올드하게 느껴지네요.
더군다나 문장을 만들지 않아서 문장 순서들이 다 엉망진창입니다.

외국 시는 정말이지 각자가 해석해서 읽어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시 번역 잘 하는 거 정말 어려운 일인것 같습니다. ^^


cyrus 2016-10-05 16:14   좋아요 0 | URL
외래어 표기명도 오래된 느낌이 나죠. ㅎㅎㅎ 국내 시집이 많이 안 팔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외국 시집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많이 저조할 겁니다. 정말 아쉬워요. 많이 알려지지 못하고, 너무 일찍 절판되기도 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6-10-05 13: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를 번역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봅니다. 우리말로도 너와나의 감성이 다른데...
그래도 좋은 시가 멋진 감성으로 많이 번역되면 좋겠어요~
어차피 원문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테니까요~

cyrus 2016-10-05 16:1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관심 받지 못한 번역 일을 하는 분들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안쓰럽습니다.
 
태양을 멈춘 사람들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 1
남영 지음 / 궁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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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강물은 오류의 운하를 통해 흐른다. (타고르)

    

 

 

옛날 사람들에게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모두 지구의 주변을 도는 것으로 믿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믿음들은 미신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 한 부분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조그만 위성, 즉 티끌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학자들은 엄청난 사실을 밝혀내고서도 이를 떳떳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힌 종교의 교리에 어긋난다. 이러한 주장은 이단으로 몰려 종교 재판의 대상이 된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처음 주장된 지동설이 갈릴레이에 의해 공개적으로 지지받기까진 근 1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우리 눈에는 잘못된 미신에 집착했던 옛날 사람들이 고지식하게 보인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반면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척박한 땅에서 활짝 핀 기적의 꽃처럼 느껴진다. 과학사는 위대한 천재들만 기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사를 혁신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비범해서 천재가 된 것이 아니다. 과학사는 시행착오와 오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착각과 실패가 교훈을 낳고 그 속에서 독창적인 아디이어도 생겨난다.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사고의 틀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당대를 지배하는 사회체제, 보편적인 법칙과 이론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고의 틀이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사고의 틀이 바뀐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사회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믿고 있던 가치관마저 혼란이 생긴다. 질서의 안정성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를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나는 변하기 싫어!”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과학사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낯선 변화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지 않으면 혁신은 결코 나올 수가 없다는 논리가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면 과거의 틀은 무조건 틀린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과거의 틀은 과거의 상황에서 맞는 것이고 지금의 틀은 지금의 상황에서 맞는 것뿐이다. 갈릴레이 이전에 천동설은 옳은 것이었고, 갈릴레이 이후에는 지동설이 옳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은 처음부터 과거의 틀을 완전히 바꾸려는 마음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유래한 대부분 학문의 뿌리를 캐다 보면 첫머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다. ‘또 당신이야?’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기초를 다진 명실상부 최고의 학자인 만큼 그 영향력이 아직도 건재하다. 그는 죽어서도 최고의 지식인으로 추앙받아 세상 사람들 위에 군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고정된 천체로 인식했고, 그를 신봉하는 학자들마저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코페르니쿠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맞으나 과거 우주론을 완전히 폐기해야 할 낡은 틀로 생각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과거의 틀을 참고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질서 속에 조화로운 수학의 패턴이 숨겨져 있다고 봤다. 이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과 유사하다. 피타고라스학파도 지동설을 먼저 생각해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피타고라스학파가 생각한 과거의 틀을 정확한 관측과 수학적 계산을 이용해서 증명하고 싶었다. 과거의 틀을 조금씩 고쳐서 구체적으로 나온 것이 지동설이다.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과거의 틀이 섞인 잡종의 이론이다.

 

생각의 잡종은 비단 코페르니쿠스의 머릿속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 튀코 브라헤는 천동설을 믿은 최후의 천문학자다. 그의 제자 케플러는 스승이 평생 행성을 관측해 남겨놓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검토하여 천동설을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지구가 원을 그리며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헤와 케플러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의 인물이었지만 생각의 교배를 통해 행성 운행의 원리를 밝혀낸 대혁명을 이루었다. 데카르트는 뉴턴이 새로운 역학과 우주론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포함, 모든 생명체를 복잡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처음에 데카르트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현상을 바라봤지만, 몇 가지 결함을 발견하면서부터 자연현상을 움직이게 하는 의 실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기 시작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어깨를 빌려 남들이 보지 못한 생각의 영역에 한 발짝 더 내디딜 수 있었다.

 

과학사는 혁신의 역사가 아니다. 혁신과 잡종의 역사다. 과거의 틀과 현재의 틀이 같이 공존하다가 점진적인 검증을 통해서 더욱 더 확실한 지식만이 현존한다. 천재들이 과학을 이끈 것이 아니라, 의심과 시행착오가 과학자들이 과학을 하도록 만든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은 앞선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지식을 획득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등은 모두 자신들의 세계에서 진실에 가장 빨리 도달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모두는 갈등에 시달리는 운명을 겪는다. 과거의 틀을 부인해야 하는 운명이다. 우리가 생각한 것과 달리 그들은 급진적 발상을 무모하게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앞사람들이 치열하게 생각했던 세상의 이론을 짓이겨놓지 않았다. 오죽하면 뉴턴이 자신을 단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자라고 겸손한 말을 했겠는가. 과학의 진보는 특출한 개개인의 역량에 의해서 급작스럽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톺아볼 때 조금씩 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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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0-0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청출어람 청어람` 이 생각나네요 ㅋ

cyrus 2016-10-05 11:10   좋아요 1 | URL
책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잘 요약했습니다. ^^

yureka01 2016-10-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것이 진리겠죠.
변화를 예측하는 것의 진리와 오류들..
생명이 그러하고 죽음이 그러하니까요.

cyrus 2016-10-05 11:11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변화는 살아있는 것들이 쇠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변화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yamoo 2016-10-05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어째, 쿤의 생각과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과학사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논파한게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었다고 아는데요...새삼스럽게 옛 이론의 부활인 듯합니다...

cyrus 2016-10-05 11:12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카이스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쿤의 관점을 토대로 과학사를 설명한 것 같습니다. ^^
 
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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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방영된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는 미니시리즈와 농촌드라마를 결합한 색다른 드라마였다. 동명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제목 그대로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전원 로맨스다. 촌스러운 시골 총각 장택기(오만석 분)와 깍쟁이 도시 아가씨 이지현(윤은혜 분)이 농사를 지으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택기는 무뚝뚝하면서 까칠한 성격의 청년이다. 지현에게 항상 시비조다. 지현은 포도밭을 차지하겠다는 큰 꿈을 안고 택기와 함께 시골 생활을 하게 됐지만, 쉽지 않다. 지현은 인터넷 한 번 이용하는 것마저 택기의 눈치를 받을 만큼 사생활의 제약을 받는다. 게다가 편하게 샤워할 곳도 없을 만큼 생활시설이 열악하다. 그렇지만 택기는 고단한 농촌생활을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한다.

 

《텍스트의 포도밭》에 가면 그 사나이가 있다. 그는 12세기부터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를 가꾸면서 홀로 지키고 있다. 수도사 후고는 텍스트를 보고 느끼면서 얻은 진리의 양분을 축적하여 <디다스칼리콘>이라는 자신만의 포도밭을 농작했다. <디다스칼리콘>에는 후고가 포도밭을 정성스럽게 대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과정이 바로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다. 후고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 즉 '렉티오 디바나(Lectio Divina)'는 오늘날의 읽기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후고는 신과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몸과 마음, 영혼을 다해 성서를 읽었다. 후고를 비롯한 중세의 수도사들은 한 구절이나 한 줄을 여러 시간이나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종이 위에 덩굴로 자란 텍스트 밭을 거닐면서 알알이 열린 포도알을 조심스럽게 따낸다. 그 속에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양분이 숨어 있다. 그것은 수도사들이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incipit, 인시피트) 첫째로 손꼽히는 지혜다. 수도사들은 이 양분을 얻기 위해서 숙고의 시간을 가진다.

 

먼저 자세와 호흡, 마음을 가다듬은 뒤 텍스트를 천천히 소리 내서 읽는다. 이후 다시 한 번 묵독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필사했다. 수도사의 공부 방식(studium, 스투디움)은 기본적으로 읽기와 필사를 반복한다. 종이에 기록한 것들을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그리고 그 구절들을 기억하거나 쪽지에 기록해 일상생활에서도 되새긴다. 후고는 읽기 행위에 절대로 빠져선 안 될 전제 조건으로 '기억력'을 강조한다. 기억력 훈련이 잘되면 텍스트에서 발견한 지혜의 보물들을 보관한 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아이야. 지혜는 보물이며 네 마음은 보물을 담아두는 곳이다. 지혜를 배우면 귀중한 보물을 모으는 것이다. 지혜의 보물은 여럿이며, 네 마음에도 감출 곳이 여럿 있다. 여기에는 금, 저기에는 은. 너는 이 자리들을 구분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것 저런 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이반 일리히가 후고의 책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56쪽)

 

 

사실 암기로 책을 읽는 시대는 한물갔다. 후고가 살았던 시대에서 '기억'이란 교양인의 삶을 한시도 떠나선 안 되며 부단히 단련시켜야 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몽테뉴는 암기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단순 암기의 독서법을 비판했다. 기억은 이성적 사유를 방해한다. 그저 암기한 것을 그대로 종이 위에 뱉어낸 토사물들은 지혜로 손쉽게 포장된다. 그것은 '쓰레기 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기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후고의 독서법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후고의 기억력 훈련은 단시간 내에 지식을 획득하는 데 쓰이는 오늘날의 기억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도사들의 기억력 훈련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수도사들은 텍스트의 지혜를 자신의 삶에 흡수하여 소화하기 위해서 독서를 했다. 그들의 독서는 일상적이다. 물이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듯이, 독서는 지속적인 읽기가 중요하다. 기억력 훈련은 독서의 일상적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예(artes, 아르테스)였다.

 

독서법은 다양하다. 다만 무조건 단 하나의 독서법이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책 읽는 과정은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다양한 독서법이 지혜에 목마른 우리 앞에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텍스트의 포도밭을 오랫동안 지킨 ‘중세인’ 후고와 그를 만난 ‘근대인’ 이반 일리히는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는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터넷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알려준다. 인터넷 도시에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축재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남이 올려놓은 인터넷 정보를 통해 지식을 얻는다. 인터넷의 지식에 의존한 우리는 지식의 이해가 깊어진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읽는 행위를 잊어버린 현대인은 책 속의 문장과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 소화하지 못한다. 인터넷은 우리의 지식습득 능력을 확대하지만, 사유와 성을 방해한다. 지식을 쉽게 습득한다고 해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후고의 책 속에는 인터넷 시대의 공부법에 대한 성찰적 기반이 되어주는 답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우둔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여 애써 지식을 쫓고, 쉬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간다. 이들은 노력의 결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의지력의 결과로 얻을 자격이 있다.

 

(이반 일리히가 <디다스칼리콘> 서문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117쪽)

 

 

속독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음식물을 꼭꼭 씹어 먹듯이 글을 음미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다. 후고는 매일 텍스트의 포도밭 한가운데서 우직하게 공부했다. 비록 텍스트를 거치는 동안 수차례 실패를 겪게 되더라도 그렇게 힘들게 터득한 지혜는 정말 소중하다. 공부와 독서에는 왕도(王度)가 없다. 공부와 독서는 자랑거리를 위한 유희가 아니다. 책 속의 영양분을 골고루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공부는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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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0-0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밭 그 사나이가 원작이 있었구나. 근데 외국작품일 거라곤 정말 생각 못했네. 정말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씹어 먹듯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할 책은 많고 읽는 시간은 한정되 있고 그래서라도 속독을 배워보고 싶은데, 막상 낭비되는 시간이 더 많거든. 그거 모아다 읽어도 충분할 것 같긴해.

stella.K 2016-10-02 18:20   좋아요 0 | URL
헉, 근데 확인해 본 결과 드라마와 책은 같은 게 아니었군.
나의 완벽한 오독인건가...?ㅠㅋㅋ

cyrus 2016-10-02 18:24   좋아요 0 | URL
원작소설이 한국 작가가 썼어요. 작가 이름은 `김랑`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6-10-02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비슷한 류의 책은
욕심을 자제하고
바이블이 되는
한권의 책을 여러번 깊이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브코프가
˝책은 읽을 수 없다.
다만 여러번 읽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재독의 중요성을 말했고,

히라노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서도
슬로우 리딩의 가르침이 눈에 띄었답니다.

싸이러스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시죠?^^/








cyrus 2016-10-02 18:29   좋아요 1 | URL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이미 읽었던 책의 내용을 몰라서 다시 읽거나 아니면 비슷한 주제의 책을 읽어요.

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괜찮은데, 이게 잊어버려서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을 또 읽어요. 상대성이론을 쉽게 소개한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요.

내일도 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북프리쿠키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아무 2016-10-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사실 알고 싶은 게 많다보니 많이 읽고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소화하고 있는지도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니까요..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네요ㅠ 남은 휴일도 편안히 보내시길..^^

cyrus 2016-10-03 09:44   좋아요 0 | URL
텍스트를 포도밭에 비유한 사람이 이반 일리히입니다.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독의 효과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다독에 집중하는 바람에 재독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아무님도 연휴 잘 보내세요. ^^

yureka01 2016-10-02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식의 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것만큼 지혜의 안목도 비례해서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비례되면 아주 곤란하거든요..포도 넝쿨같은 텍스트로 근사한 삶의 와인이 숙성되어 익어갔으면^^..

cyrus 2016-10-03 09:45   좋아요 0 | URL
삶의 와인, 탐나는 표현입니다. ^^

우마우마 2016-10-03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도사의 독서법은 무척 따라해보고 싶네요! 아무래도 경전 공부에 특화된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ㅎㅎ 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웹에 흩어진 텍스트를 그렇게 많이 봐도 역시 책으로 묶인 것을 읽는 경험이 즐거운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6-10-03 09:49   좋아요 0 | URL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듯이 필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공부 방법이라기 보다는 정신 치유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인터넷의 정보 대부분은 출처가 불명확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꺼립니다. 아무래도 책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믿을만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쉽습니다. ^^

파트라슈 2016-10-0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그사 정말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요. 윤은혜도 예쁘게 잘 나왔던 드라마인데 요즘 윤은혜 중국서 사고치고 다니는 것 같음.ㅎㅎ 오만석도 연기 좋았지요.

cyrus 2016-10-03 21:21   좋아요 0 | URL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말이 많았었죠. 시작하기 전부터 미스캐스팅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두 사람의 행보가 너무 달라졌어요. 윤은혜의 전성기 마지막은 커프1호인 것 같습니다. 국내에 복귀해도 궁, 커프 시절의 인기를 얻기 힘들 겁니다.

transient-guest 2016-10-04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꺼리가 많아진 시대와 그렇지 못했던 시대의 차이 (및 무수히 많은, 다른 삶의 방식과 자세까지)에서 오는 다른 독서방법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경건하게 책을 대하고 천천히 읽고 암송하는 건 좋은 방법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의 다수에겐 조금 요원한 듯 합니다. 좀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시기가 오면 잘 정리된 서재에서 이런 독서도 해보고 싶네요.ㅎ

cyrus 2016-10-04 18: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이 팔리지 않는 세상에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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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1]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데 익숙하다. 어디서 무엇을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면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 찾아가 먹어보고 자신도 맛집 소문을 퍼뜨리는 대열에 기꺼이 합류한다. 우리는 가벼운 쾌적함에서 극단적인 관능에 이르기까지 감각적 쾌감을 기꺼이 즐긴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에게 쾌감의 실체는 경험으로 육체에 기록되고 기억된다. 특히 먹고 마시는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쾌락이다.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이 탐식의 쾌락과 겹쳐 있다. 우리는 좋은 식사를 하고 나면 특별한 행복감을 누린다. 표정이 밝아지고 혈색이 좋아지며, 눈은 빛나고 부드러운 열기가 온몸에 퍼진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가톨릭 세계관에서 탐식은 죄악으로 취급받았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지금도 '먹방' 신드롬의 영향력은 여전하나 고열량 음식을 피하고, 건강 식단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고열량 음식은 단지 높은 칼로리 때문이 아니라, 미각을 통해 뇌를 자극하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고열량 음식이 뇌의 쾌감중추를 자극하고 지속적인 자극이 발생하면 음식중독으로 이어진다. 본인 의지로 체중 조절이 어려워져서 비만이 되고 건강까지 악화시킨다. 그러니까 종교의 힘이 약화된 오늘날에도 탐식은 현대인의 대죄인 셈이다.

 

먹는 것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 미식가의 조상님 브리야 사바랭이다. 다만 사바랭보다 먼저 먹는 행위의 탐닉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프랑수아 라블레다. 라블레가 살았던 15세기의 유럽은 르네상스로 무르익은 시기였다. 그렇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가톨릭의 힘은 여전했다. 라블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로 활동하면서도 인간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시대로 변화하는 흐름을 몸으로 느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창조했는데, 라블레의 정신을 통해 잉태된 인물들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두 거인 부자(父子)는 쾌락을 향유하는 생기 넘치는 자들이다. 오히려 삶의 기쁨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위선적인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두 거인이 태어나는 과정이 범상치 않다. 게다가 먹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가르강튀아의 어머니 가르가멜은 임신한 상태에 36만7천14마리의 소 내장을 먹어치웠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가르가멜은 있는 힘껏 배에 힘줬는데 처음에 나온 것은 태아가 아니었다. 그 전에 먹었던 소 내장 때문에 늘어난 직장이 항문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 가르가멜은 무사히 건강한 가르강튀아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가르강튀아가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기이하다. 가르강튀아는 가르가멜의 왼쪽 귀로 나왔다. 울음소리도 특이하다. "응애, 응애"가 아니라 "마실 것!, 마실 것!"이다. '자이언트 베이비' 가르강튀아에게 젖을 먹이는 데 필요한 암소의 수는 무려 1만7천9백13마리다. 팡타그뤼엘은 유아기 때 4천6백 마리의 암소 젖을 먹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두 거인이 과식하는 장면은 생각보다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대의 예술가들은 거인들이 과식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 인상 깊었는지, 재창작 소재로 사용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묘사한 삽화가 구스타브 도레는 절정의 행복감에 젖은 채 음식을 먹는 행위 속에 인간 본연의 욕망을 읽었으리라. 라블레와 도레는 탐식하는 거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음식을 먹어도 실컷 먹을 수 없었다. 매일 먹는 기름진 음식의 향기만 맡는 것이 서민들에게는 평생의 꿈이었다. 서민들은 멀건 죽과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가톨릭 금욕주의는 허기진 서민들을 아주 초라하게 만들었다. 성직자들은 서민들이 탐식에 빠지면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순진한 서민들은 "그래, 천국에 가기 위해서 고기 못 먹으면 어때?"라면서 자기 위안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신의 교리를 설파하는 성직자들의 모순에 실망한다. 성직자들의 식탁에 술과 고기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수도원 생활을 했던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의 입을 빌려 탐식 욕망을 숨기면서 몰래 즐기는 성직자들의 이중성을 조롱한다. 성직자들은 신을 믿는 신자들의 욕망을 '돈줄'로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면죄부를 팔았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가져간 돈은 성직자들의 배를 채웠고, 사악한 냄새를 풍기는 똥으로 나왔다. 

 

 

 

 

"수도사의 겉옷과 소매 없는 외투가 세상의 치욕과 욕설, 저주를 불러온다는 것보다 자명한 사실은 없소. 그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의 똥, 다시 말해서 죄악을 먹기 때문이라오." (제6장 46~47쪽)

 

 

쾌락주의자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면서 눈부신 생산성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독자들에게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쾌락주의자가 되라고 말한다. 먹고 마시고 웃고 수다스러워질 것.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식탐은 ‘먹방’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먹방’은 폭식을 부추기는 ‘푸드 포르노’의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거인의 ‘먹방’은 저급하지 않다. 위선적인 성직자들의 폭식이야말로 탐욕을 절제할 줄 모르는 비대한 욕망에 지배당한 것이다. 거인들이 먹는 행위는 생존, 특히 행복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를 유형화하는 표현 방식이다. 가톨릭이 지배하는 각박한 현실에 지친 15세기의 프랑스인들은 맛난 음식을 먹는 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건강한 쾌락은 일상의 활기를 불어넣는 기폭제가 된다.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나치게 억압할수록 정신이 건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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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0-0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한 번 읽는다는 걸 지금은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런데 내용이 그런거였군.

김명민 베바에서 정말 탱탱했군. 여기서도 좋긴했지만
이순신과 하얀거탑이 최고지 않나 싶다.ㅋ

cyrus 2016-10-01 20:19   좋아요 0 | URL
진짜 특별한 내용 없어요. 황당한 에피소드가 많이 나와요. 그리고 인물들이 똥, 불알 같은 용어를 편하게(?) 말합니다.

베바가 했을 때 저는 군 복무하고 있어서 드라마를 못봤어요. 군대 아니었으면 본방사수했을 거예요. ^^

비연 2016-10-0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강튀아...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베바는 제가 본방사수한 몇안되는 드라마 중 하나에요. 김명민은 정말... 베리굿 이었죠. 요즘엔 이런 드라마 찍고 있는지.

cyrus 2016-10-02 16:45   좋아요 0 | URL
라블레의 소설이 다시 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책에 나오는 내용 절반이 상스러워도 시대를 앞서간 표현법과 서술 방식은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역시 베바를 많이 본 분들이 많군요. 제가 보고 싶은 드라마는 하필이면 군 복무 시기에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

yureka01 2016-10-02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요.탐식도 문제고 거식도 문제죠..
하여간 음식에서만큼 정적성을 염두하지 않으면
몸이 맛탱이 가거든요.

몸이 맛이가면, 무얼 먹어도 맛이 오지는 않으니까요..

뭐든 잘 왔다가 적당하게 가야 되는 썰물과 밀물의 맛.ㅎㅎㅎ^^

cyrus 2016-10-02 16:47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비유입니다. 절제하는 삶도 아주 중요하죠. 통풍 진단을 받고 난 이후로 절제의 중요함을 몸소 깨달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