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 대산세계문학총서 35
프랑수아 라블레 지음, 유석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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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1]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데 익숙하다. 어디서 무엇을 잘한다는 입소문이 나면 시간을 내서라도 한번 찾아가 먹어보고 자신도 맛집 소문을 퍼뜨리는 대열에 기꺼이 합류한다. 우리는 가벼운 쾌적함에서 극단적인 관능에 이르기까지 감각적 쾌감을 기꺼이 즐긴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에게 쾌감의 실체는 경험으로 육체에 기록되고 기억된다. 특히 먹고 마시는 행위는 가장 원초적인 쾌락이다. 삶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이 탐식의 쾌락과 겹쳐 있다. 우리는 좋은 식사를 하고 나면 특별한 행복감을 누린다. 표정이 밝아지고 혈색이 좋아지며, 눈은 빛나고 부드러운 열기가 온몸에 퍼진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가톨릭 세계관에서 탐식은 죄악으로 취급받았다.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지금도 '먹방' 신드롬의 영향력은 여전하나 고열량 음식을 피하고, 건강 식단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고열량 음식은 단지 높은 칼로리 때문이 아니라, 미각을 통해 뇌를 자극하는데 그 위험성이 있다. 고열량 음식이 뇌의 쾌감중추를 자극하고 지속적인 자극이 발생하면 음식중독으로 이어진다. 본인 의지로 체중 조절이 어려워져서 비만이 되고 건강까지 악화시킨다. 그러니까 종교의 힘이 약화된 오늘날에도 탐식은 현대인의 대죄인 셈이다.

 

먹는 것의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 미식가의 조상님 브리야 사바랭이다. 다만 사바랭보다 먼저 먹는 행위의 탐닉을 발견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프랑수아 라블레다. 라블레가 살았던 15세기의 유럽은 르네상스로 무르익은 시기였다. 그렇지만 엄격한 금욕주의를 강요하는 가톨릭의 힘은 여전했다. 라블레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로 활동하면서도 인간의 가치를 중히 여기는 시대로 변화하는 흐름을 몸으로 느꼈다. 그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개성을 가진 인물들을 창조했는데, 라블레의 정신을 통해 잉태된 인물들이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두 거인 부자(父子)는 쾌락을 향유하는 생기 넘치는 자들이다. 오히려 삶의 기쁨을 모르는 것이야말로 위선적인 삶의 태도라고 생각한다. 두 거인이 태어나는 과정이 범상치 않다. 게다가 먹는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가르강튀아의 어머니 가르가멜은 임신한 상태에 36만7천14마리의 소 내장을 먹어치웠다. 진통이 오기 시작하자 가르가멜은 있는 힘껏 배에 힘줬는데 처음에 나온 것은 태아가 아니었다. 그 전에 먹었던 소 내장 때문에 늘어난 직장이 항문 밖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 가르가멜은 무사히 건강한 가르강튀아를 출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가르강튀아가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기이하다. 가르강튀아는 가르가멜의 왼쪽 귀로 나왔다. 울음소리도 특이하다. "응애, 응애"가 아니라 "마실 것!, 마실 것!"이다. '자이언트 베이비' 가르강튀아에게 젖을 먹이는 데 필요한 암소의 수는 무려 1만7천9백13마리다. 팡타그뤼엘은 유아기 때 4천6백 마리의 암소 젖을 먹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에서 두 거인이 과식하는 장면은 생각보다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대의 예술가들은 거인들이 과식하는 모습을 묘사한 장면이 인상 깊었는지, 재창작 소재로 사용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묘사한 삽화가 구스타브 도레는 절정의 행복감에 젖은 채 음식을 먹는 행위 속에 인간 본연의 욕망을 읽었으리라. 라블레와 도레는 탐식하는 거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음식을 먹어도 실컷 먹을 수 없었다. 매일 먹는 기름진 음식의 향기만 맡는 것이 서민들에게는 평생의 꿈이었다. 서민들은 멀건 죽과 풀뿌리로 연명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가톨릭 금욕주의는 허기진 서민들을 아주 초라하게 만들었다. 성직자들은 서민들이 탐식에 빠지면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순진한 서민들은 "그래, 천국에 가기 위해서 고기 못 먹으면 어때?"라면서 자기 위안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신의 교리를 설파하는 성직자들의 모순에 실망한다. 성직자들의 식탁에 술과 고기가 푸짐하게 차려져 있다. 수도원 생활을 했던 라블레는 가르강튀아의 입을 빌려 탐식 욕망을 숨기면서 몰래 즐기는 성직자들의 이중성을 조롱한다. 성직자들은 신을 믿는 신자들의 욕망을 '돈줄'로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면죄부를 팔았다.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가져간 돈은 성직자들의 배를 채웠고, 사악한 냄새를 풍기는 똥으로 나왔다. 

 

 

 

 

"수도사의 겉옷과 소매 없는 외투가 세상의 치욕과 욕설, 저주를 불러온다는 것보다 자명한 사실은 없소. 그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세상 사람들의 똥, 다시 말해서 죄악을 먹기 때문이라오." (제6장 46~47쪽)

 

 

쾌락주의자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면서 눈부신 생산성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독자들에게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쾌락주의자가 되라고 말한다. 먹고 마시고 웃고 수다스러워질 것.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의 식탐은 ‘먹방’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먹방’은 폭식을 부추기는 ‘푸드 포르노’의 의미를 뜻하지 않는다. 거인의 ‘먹방’은 저급하지 않다. 위선적인 성직자들의 폭식이야말로 탐욕을 절제할 줄 모르는 비대한 욕망에 지배당한 것이다. 거인들이 먹는 행위는 생존, 특히 행복한 삶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를 유형화하는 표현 방식이다. 가톨릭이 지배하는 각박한 현실에 지친 15세기의 프랑스인들은 맛난 음식을 먹는 거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건강한 쾌락은 일상의 활기를 불어넣는 기폭제가 된다. 욕망의 자유로운 흐름을 지나치게 억압할수록 정신이 건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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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0-01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한 번 읽는다는 걸 지금은 아예 잊고 살았다.
그런데 내용이 그런거였군.

김명민 베바에서 정말 탱탱했군. 여기서도 좋긴했지만
이순신과 하얀거탑이 최고지 않나 싶다.ㅋ

cyrus 2016-10-01 20:19   좋아요 0 | URL
진짜 특별한 내용 없어요. 황당한 에피소드가 많이 나와요. 그리고 인물들이 똥, 불알 같은 용어를 편하게(?) 말합니다.

베바가 했을 때 저는 군 복무하고 있어서 드라마를 못봤어요. 군대 아니었으면 본방사수했을 거예요. ^^

비연 2016-10-0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르강튀아...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베바는 제가 본방사수한 몇안되는 드라마 중 하나에요. 김명민은 정말... 베리굿 이었죠. 요즘엔 이런 드라마 찍고 있는지.

cyrus 2016-10-02 16:45   좋아요 0 | URL
라블레의 소설이 다시 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책에 나오는 내용 절반이 상스러워도 시대를 앞서간 표현법과 서술 방식은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역시 베바를 많이 본 분들이 많군요. 제가 보고 싶은 드라마는 하필이면 군 복무 시기에 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

yureka01 2016-10-02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요.탐식도 문제고 거식도 문제죠..
하여간 음식에서만큼 정적성을 염두하지 않으면
몸이 맛탱이 가거든요.

몸이 맛이가면, 무얼 먹어도 맛이 오지는 않으니까요..

뭐든 잘 왔다가 적당하게 가야 되는 썰물과 밀물의 맛.ㅎㅎㅎ^^

cyrus 2016-10-02 16:47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비유입니다. 절제하는 삶도 아주 중요하죠. 통풍 진단을 받고 난 이후로 절제의 중요함을 몸소 깨달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