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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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방영된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는 미니시리즈와 농촌드라마를 결합한 색다른 드라마였다. 동명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제목 그대로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전원 로맨스다. 촌스러운 시골 총각 장택기(오만석 분)와 깍쟁이 도시 아가씨 이지현(윤은혜 분)이 농사를 지으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택기는 무뚝뚝하면서 까칠한 성격의 청년이다. 지현에게 항상 시비조다. 지현은 포도밭을 차지하겠다는 큰 꿈을 안고 택기와 함께 시골 생활을 하게 됐지만, 쉽지 않다. 지현은 인터넷 한 번 이용하는 것마저 택기의 눈치를 받을 만큼 사생활의 제약을 받는다. 게다가 편하게 샤워할 곳도 없을 만큼 생활시설이 열악하다. 그렇지만 택기는 고단한 농촌생활을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한다.

 

《텍스트의 포도밭》에 가면 그 사나이가 있다. 그는 12세기부터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를 가꾸면서 홀로 지키고 있다. 수도사 후고는 텍스트를 보고 느끼면서 얻은 진리의 양분을 축적하여 <디다스칼리콘>이라는 자신만의 포도밭을 농작했다. <디다스칼리콘>에는 후고가 포도밭을 정성스럽게 대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과정이 바로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다. 후고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 즉 '렉티오 디바나(Lectio Divina)'는 오늘날의 읽기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후고는 신과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몸과 마음, 영혼을 다해 성서를 읽었다. 후고를 비롯한 중세의 수도사들은 한 구절이나 한 줄을 여러 시간이나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종이 위에 덩굴로 자란 텍스트 밭을 거닐면서 알알이 열린 포도알을 조심스럽게 따낸다. 그 속에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양분이 숨어 있다. 그것은 수도사들이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incipit, 인시피트) 첫째로 손꼽히는 지혜다. 수도사들은 이 양분을 얻기 위해서 숙고의 시간을 가진다.

 

먼저 자세와 호흡, 마음을 가다듬은 뒤 텍스트를 천천히 소리 내서 읽는다. 이후 다시 한 번 묵독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필사했다. 수도사의 공부 방식(studium, 스투디움)은 기본적으로 읽기와 필사를 반복한다. 종이에 기록한 것들을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그리고 그 구절들을 기억하거나 쪽지에 기록해 일상생활에서도 되새긴다. 후고는 읽기 행위에 절대로 빠져선 안 될 전제 조건으로 '기억력'을 강조한다. 기억력 훈련이 잘되면 텍스트에서 발견한 지혜의 보물들을 보관한 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아이야. 지혜는 보물이며 네 마음은 보물을 담아두는 곳이다. 지혜를 배우면 귀중한 보물을 모으는 것이다. 지혜의 보물은 여럿이며, 네 마음에도 감출 곳이 여럿 있다. 여기에는 금, 저기에는 은. 너는 이 자리들을 구분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것 저런 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이반 일리히가 후고의 책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56쪽)

 

 

사실 암기로 책을 읽는 시대는 한물갔다. 후고가 살았던 시대에서 '기억'이란 교양인의 삶을 한시도 떠나선 안 되며 부단히 단련시켜야 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몽테뉴는 암기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단순 암기의 독서법을 비판했다. 기억은 이성적 사유를 방해한다. 그저 암기한 것을 그대로 종이 위에 뱉어낸 토사물들은 지혜로 손쉽게 포장된다. 그것은 '쓰레기 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기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후고의 독서법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후고의 기억력 훈련은 단시간 내에 지식을 획득하는 데 쓰이는 오늘날의 기억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도사들의 기억력 훈련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수도사들은 텍스트의 지혜를 자신의 삶에 흡수하여 소화하기 위해서 독서를 했다. 그들의 독서는 일상적이다. 물이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듯이, 독서는 지속적인 읽기가 중요하다. 기억력 훈련은 독서의 일상적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예(artes, 아르테스)였다.

 

독서법은 다양하다. 다만 무조건 단 하나의 독서법이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책 읽는 과정은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다양한 독서법이 지혜에 목마른 우리 앞에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텍스트의 포도밭을 오랫동안 지킨 ‘중세인’ 후고와 그를 만난 ‘근대인’ 이반 일리히는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는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터넷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알려준다. 인터넷 도시에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축재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남이 올려놓은 인터넷 정보를 통해 지식을 얻는다. 인터넷의 지식에 의존한 우리는 지식의 이해가 깊어진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읽는 행위를 잊어버린 현대인은 책 속의 문장과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 소화하지 못한다. 인터넷은 우리의 지식습득 능력을 확대하지만, 사유와 성을 방해한다. 지식을 쉽게 습득한다고 해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후고의 책 속에는 인터넷 시대의 공부법에 대한 성찰적 기반이 되어주는 답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우둔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여 애써 지식을 쫓고, 쉬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간다. 이들은 노력의 결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의지력의 결과로 얻을 자격이 있다.

 

(이반 일리히가 <디다스칼리콘> 서문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117쪽)

 

 

속독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음식물을 꼭꼭 씹어 먹듯이 글을 음미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다. 후고는 매일 텍스트의 포도밭 한가운데서 우직하게 공부했다. 비록 텍스트를 거치는 동안 수차례 실패를 겪게 되더라도 그렇게 힘들게 터득한 지혜는 정말 소중하다. 공부와 독서에는 왕도(王度)가 없다. 공부와 독서는 자랑거리를 위한 유희가 아니다. 책 속의 영양분을 골고루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공부는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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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0-0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밭 그 사나이가 원작이 있었구나. 근데 외국작품일 거라곤 정말 생각 못했네. 정말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씹어 먹듯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할 책은 많고 읽는 시간은 한정되 있고 그래서라도 속독을 배워보고 싶은데, 막상 낭비되는 시간이 더 많거든. 그거 모아다 읽어도 충분할 것 같긴해.

stella.K 2016-10-02 18:20   좋아요 0 | URL
헉, 근데 확인해 본 결과 드라마와 책은 같은 게 아니었군.
나의 완벽한 오독인건가...?ㅠㅋㅋ

cyrus 2016-10-02 18:24   좋아요 0 | URL
원작소설이 한국 작가가 썼어요. 작가 이름은 `김랑`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6-10-02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비슷한 류의 책은
욕심을 자제하고
바이블이 되는
한권의 책을 여러번 깊이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브코프가
˝책은 읽을 수 없다.
다만 여러번 읽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재독의 중요성을 말했고,

히라노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서도
슬로우 리딩의 가르침이 눈에 띄었답니다.

싸이러스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시죠?^^/








cyrus 2016-10-02 18:29   좋아요 1 | URL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이미 읽었던 책의 내용을 몰라서 다시 읽거나 아니면 비슷한 주제의 책을 읽어요.

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괜찮은데, 이게 잊어버려서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을 또 읽어요. 상대성이론을 쉽게 소개한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요.

내일도 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북프리쿠키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아무 2016-10-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사실 알고 싶은 게 많다보니 많이 읽고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소화하고 있는지도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니까요..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네요ㅠ 남은 휴일도 편안히 보내시길..^^

cyrus 2016-10-03 09:44   좋아요 0 | URL
텍스트를 포도밭에 비유한 사람이 이반 일리히입니다.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독의 효과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다독에 집중하는 바람에 재독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아무님도 연휴 잘 보내세요. ^^

yureka01 2016-10-02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식의 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것만큼 지혜의 안목도 비례해서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비례되면 아주 곤란하거든요..포도 넝쿨같은 텍스트로 근사한 삶의 와인이 숙성되어 익어갔으면^^..

cyrus 2016-10-03 09:45   좋아요 0 | URL
삶의 와인, 탐나는 표현입니다. ^^

우마우마 2016-10-03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도사의 독서법은 무척 따라해보고 싶네요! 아무래도 경전 공부에 특화된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ㅎㅎ 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웹에 흩어진 텍스트를 그렇게 많이 봐도 역시 책으로 묶인 것을 읽는 경험이 즐거운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6-10-03 09:49   좋아요 0 | URL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듯이 필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공부 방법이라기 보다는 정신 치유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인터넷의 정보 대부분은 출처가 불명확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꺼립니다. 아무래도 책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믿을만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쉽습니다. ^^

파트라슈 2016-10-0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그사 정말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요. 윤은혜도 예쁘게 잘 나왔던 드라마인데 요즘 윤은혜 중국서 사고치고 다니는 것 같음.ㅎㅎ 오만석도 연기 좋았지요.

cyrus 2016-10-03 21:21   좋아요 0 | URL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말이 많았었죠. 시작하기 전부터 미스캐스팅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두 사람의 행보가 너무 달라졌어요. 윤은혜의 전성기 마지막은 커프1호인 것 같습니다. 국내에 복귀해도 궁, 커프 시절의 인기를 얻기 힘들 겁니다.

transient-guest 2016-10-04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꺼리가 많아진 시대와 그렇지 못했던 시대의 차이 (및 무수히 많은, 다른 삶의 방식과 자세까지)에서 오는 다른 독서방법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경건하게 책을 대하고 천천히 읽고 암송하는 건 좋은 방법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의 다수에겐 조금 요원한 듯 합니다. 좀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시기가 오면 잘 정리된 서재에서 이런 독서도 해보고 싶네요.ㅎ

cyrus 2016-10-04 18: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이 팔리지 않는 세상에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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