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시'를 정의해 달라는 물음에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시가 곧 삶인 시인들에게 시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인생이란 무엇이냐는 질문만큼이나 난처한 질문임이 틀림없다. 에드거 앨런 포에게 시는 고독의 노래다. 비참한 삶을 살았던 포는 <애너벨 리>, <갈까마귀> 같은 우수와 연민으로 가득한 시를 남겼다. 포의 시를 읽는 것은 고독 속에 깊이 잠겨 서늘한 속살을 더듬는 것이다. 포는 육체에 각인된 고독을 고스란히 시화함으로써 ‘서늘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하지만 싱거워 보이지 않는 포의 시적 언어를 읽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특히 시에 묘사된 감각의 깊이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시의 운율을 고스란히 구현해내는 일이 번역의 관건이다.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see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her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ide of the sea.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애너벨 리』 중에서, 정규웅 역, 《애너벨 리》 14쪽)
달빛 비치면,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 꿈을 꾸고
별이 뜨기 무섭게, 어김없이 예쁜
애너벨 리의 밝은 눈 느끼네.
그렇게, 밤새도록 나는 누워 있네
내 사랑―내 사랑―내 목숨 내 신부 곁에
그 바닷가 그녀의 묘에서―
파도치는 바닷가 그녀 무덤에서.
(김천봉 역, 《19세기 미국명시 5 : 에드거 앨런 포》 79쪽)
달빛은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면 따라오고
별들이 뜨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동자가
내 눈으로 들어오는 걸 느껴요.
그래서 이 밤에 나는―나의 사랑이며, 내가 사랑하는,
내 생명인 내 신부 곁에 누워 있어요.
파도 소리가 들려오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옆에
바닷가 옆, 내 여인이 누워 있는 곳에.
(김경주 역,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 애너벨 리》)
왜냐면 달이 비추면 반드시, 가져다준다 내게 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들을;
그리고 별들이 뜨면 반드시, 내가 느낀다 그 밝은 눈,
아름다운 애너벨리의 그것을:
그리고 그래서, 밤 밀물 내내, 내가 누워 있다 곁,
나의 사랑하는―나의 사랑하는―나의 생명이자 나의 신부 곁에,
거기 바닷가 돌무덤의―
소리 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의.
(김정환 역, 《에드거 앨런 포 시선집》 124쪽)
김정환 시인은 꾸밈 있는 시 번역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어려운 문장을 쉽게 고치는 것을 ‘틀린 번역’이라고 주장한다. [참고] 나는 김정환 시인의 입장을 반대한다. 운율을 갖춘 문장의 본뜻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라면 의역도 필요하다고 본다. 김정환 시인은 원문에 충실히 하려고 직역을 시도했지만, 우리말 문장이 어색하게 나왔다. 경우에 따라 직역과 의역, 이 두 가지를 적절히 버무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참고] 「검은 고양이의 우울하고 깜깜한 시편들」 (한국일보 2016년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