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쿠르베씨 

 

 

지난 주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위원 박경신이 자신의 블로그에 남자 성기사진을 올린데 이어 여성의 음부를 그린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을 게재해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그러자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 “ 촌스럽게 아직도 이런 것 갖고 논쟁해야하나? ” 라며  “쿠르베의 그림은 원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소유하고 있던 것이며 라캉 사후 유족이 상승세 대신 국가에 헌납했고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있다” 라며 박경신의 논란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는 박경신 관련한 비방 기사들은 21세기에 참으로 한심한 일이며 " 평소엔 ’하의실종‘ 어쩌고 선정적으로 기사를 쓰다가 왜 이런 맥락에서 갑자기 유교 탈레반으로 돌변하는 건지“ 라고 덧붙였다.

이어 진중권은 “방통심의위원들을 위한 현대예술” 이란글과 함께 남녀 성기가 묘사되거나 이미지가 대입된 명화들을 트위터에 게재하며 “방통심의위 자체를 해체시켜야 합니다. 21세기에 그런 검열기관이 왜 필요한지..대한민국이 무슨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 영토도 아니고..” 라고 전했다. 
  

  

 귀스타브 쿠르베 <만남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1854년 

화가 자신의 후원자인 알프레드 브뤼야스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 고급스럽게 잘 차려 입고 옆에 하인까지 대동한 사람이 알프레드 브뤼야스이며 왼쪽에 허름한 복장에 등에 휴대용 화구를 메고 있는 사람이 화가 쿠르베이다. 쿠르베는 단지 특별한 것이 없는 경험적인 순간을 화폭에 담아냈지만 출품 당시 관객들로부터 냉담한 반응과 조롱을 받아야했다.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속한 후원자 앞에서 격조 없이 당당하게 그려져 있는 그림 속 화가의 모습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쿠르베의 저 당당한 모습은 파리 부르주아들의 눈에는 상당히 도발적인 자세로 보였던 것이다. 

  

남자 성기 사진 게재 논란이 일어나면서 논란의 진상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박경신이라는 이름 석 자가 한동안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 올랐지만 '박경신 블로그' 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수백 년 전에 태어난 화가 쿠르베가 자신의 그림 <세상의 근원>과 함께 최고 3위까지 오르는 등 검색어 순위에 랭크되었다.  그것도 자신의 조국이 프랑스도 아닌, 남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비록 검색어 순위에 등장한 순간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자신과 동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프랑스 츨신의 화가들인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도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Top 10 축에도 껴보지도 못했던 것을 쿠르베는 자신이 그림 그림 한 장과 한국 네티즌들 덕분에(?) 사후 130여 년 만에 첫 인기 검색어 순위에 오르게 되었다.    

나 역시 화제의 논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   

직접 문제가 된 박경신 블로그의 글을 읽어봤다.   역시 진중권이 왜 이 논란에 대해서 비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쿠르베의 그림이 올려진 글에는 수천개의 댓글이 달려져 있었는데 그림의 출처도 모르는채 그저 음란한 그림이라고 규정한 댓글이 많았다.   박경신이 이전에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진짜 남자 성기 사진처럼 포르노에서 볼 수 있는 '리얼' 여성 음부의 사진이었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박경신과 진중권이 언급했지만 음란한 그림이라고 규정한 여성의 음부 그림은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 쿠르베의 작품이며 현재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즐비한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쿠르베라는 화가와 그가 그린 여성 음부 그림을 네티즌들이 모른다치더라도 더 웃긴 것은 이에 대한 언론매체들의 기사 내용이다.   쿠르베의 그림을 기사 원문에 게재해 당당히 기사 제목에 '음란사진' 이라고 올린 기사 내용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자신의 주장, 즉 표현의 자유를 위해서 남성 성기 사진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박경신의 태도는  '오바' 였지만 이보다 더 '오바' 스러운 것은 단지 예술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남자 성기 사진과 같이 음란그림이 아닌, 그것도 '음란사진' 이라고 호들갑 떨었던 언론매체의 과민한 반응이었다. 

 

  

 

  서양화에 여성 누드가 많은 이유

   

  

 

 

 

 

   

   

 

19세기 인상주의 이전 서양의 화가들이 화폭에 담은 여성의 모습에는 그저 '남성적인' 시선이 많이 반영되었다.  그 남성적인 시선에는 여성을 남성보다는 한 단계 낮은 피지배적이며 인간이 아닌 타자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오늘날에 볼 수 있는 (비록 복제품이지만)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조각상을 보면 대부분 남성 누드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만큼 여성이라는 존재는 '인간' 이라는 존재 규정에 벗어난 연약하면서도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 누드로 그림을 그릴 수도, 조각상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이런 남성 모델 중심의 고대 미술의 취향은 근대 미술에서도 오랫동안 이어지게 된다.   

고전주의와 귀족의 취향에 맞춰져 있는 미술 학교에서는 누드 실기를 시행하게 되면 무조건 남성 모델을 사용해야 했으며 절대로 여성 모델을 그릴 수 있는 기회조차 마련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점점 여성의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이 각광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여성 누드화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예술의 터부를 깨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그래서 화가들은 여성의 몸을 표현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이 바로 신화와 종교라는 주제를 빌린 것이다.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미의 여신 비너스나 성녀와 같은 고전적이면서도 신성한 대상을 그린답시고 세속적인 여성의 몸을 간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소설가인 존 버거는 남성적인 소유의 욕망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에 가장 적잘한 장르가 정물화라고 말했는데 존 버거의 말을 그대로 비유하자면 여성의 누드화는 여자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성적 욕망을 간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그리고 남성중심 사회에 가장 적절한 장르였던 것이다.     전시회에 찾아오는 남성 관객들은 화가의 여성 누드화를 구경함으로써 자신들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마네, 그림으로 파리 상류 사회를 도발하다    

근대 사회에 접어들수록 여성 누드화는 '남성' 화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그림을 구입하고 후원하는 '남성' 패트런(patron)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865년, 살롱전에서도 이전의 전시회와 다름 없이 벌거벗은 여인의 그려진 그림 한 점이 출품되었는데 관객들은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온갖 야유와 비난을 쏟아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이전에는 <올랭피아>의 모델이 창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KBS 1TV <명작 스캔들>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올랭피아>의 진짜 모델은 <풀밭 위의 점심>의 누드모델로 나선 빅토린 뫼랑이라는 사실이다.  빅토린 뫼랑은 <풀밭 위의 점심>뿐만 아니라 마네의 다른 그림 몇 점에도 등장하는 모델이다. 오늘날 쿠르베의 그림에 대한 음란성 논란처럼 <올랭피아> 역시 세상에 공개되자마자 '노골적인 나체 그림' 으로 조롱을 받아야했다.  수백년 전 '노골적인 나체 그림'은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과 함께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논란의 그림이 바로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였다.  평소에 벨라스케스와 같은 선대의 화가들을 모방했던 마네는 여성 누드화의 고전적인 구도를 자신의 누드화에 차용했고 남성 관객들이 좋아할만한 여성의 몸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차디찬 반응을 피할 수 없었다. 

살롱의 관객들인 마네의 <올랭피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마네가 <올랭피아>에서 표현한 묘사법에 있었다.    

별로 아릅답지도 않은 여자가 홀랑 나체를 드러내고, 그녀의 발치에는 검은 고양이가 눈을 번뜩이고 있다.  그리고 그녀 옆에는 흑인 여자가 전달된 꽃다발을 든 채 들어오고 있다.  

벌거벗은 여자, 검은 고양이 그리고 하녀로 보이는 흑인 여자.  

관객들은 <올랭피아>에 당시 파리 상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폭로되어 있다고 생각하여 분노를 터뜨린 것이다.  밤이 되면 남성 고객을 위해 몸을 파는 창부의 나체였고 창부의 방을 거쳐간 고객들 중에는 상류층 귀족들, 일명 사회지도층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의 모델은 여성 미의 상징인 비너스가 아니다.  관객들의 눈에는 아름다운 비너스의 누드가 아닌 이름 없는 싸구려 창녀의 누드가 그려진 음란한 그림으로 보였다. 자신들이 은밀하게 보던 창부의 나체를 고급스럽고 격조 높은 살롱 전시회에서 적나라하게 보게 될 줄 생각하지 못했고 적잖이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자신들이 숨기고 감춰왔던 은밀한 성적 욕구의 감정이 <올랭피아> 한 점 때문에 만천하에 공개된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3년 

 

 

그러나 파리 상류 사회에 대한 마네의 도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년 전에도 여성의 누드를 그렸다는 내용으로 커다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마네는 이 그림을 구상하면서 자신에게 미술적 영감을 제공해준 벨라스케스의 기법을 모방하였으며 그저 단순히 목욕하는 여인이 그려진 그림을 제작하려고 염두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롱의 반응은 냉담했으며 끝내 거절당하여  마네는 낙선전에 재출품하는 굴욕을 맛봐야했다.   거절당한 이유는 2년 후에 자신이 그리게 될 <올랭피아> 때 반응과 유사했다.  

여자의 누드가 너무 '사실적' 이라서.  

여성의 누드가 정중앙에 배치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이 그림을 불쾌하게 본 또 다른 이유는 여성의 누드를 둘러싼 남자 모델들이었다.   당시 파리 남성들이 입고 있었던 댄디 스타일 복장을 입은 채 중앙에 위치한 벌거벗은 여인에 둘러싸 앉아 있는 남자 모델들의 모습이 남성 관객들에게는 자신을 보는 '거울' 이었던 것이다.  2년 후에 <올랭피아>를 본 반응처럼 말이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감출줄만 알았던 자신들의 성적 욕구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대낮에 공개되는듯한 불쾌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사실은 마네는 그림으로 파리 상류 사회를 도발할 의도는 없었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보들레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그림에 대한 관객들의 냉담한 반응에 대한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로 마네는 자신의 이름을 화단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 그에게도 자신의 미술을 후원하는 패트런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마네의 패트런은 르조슨 사령관이라는 군인이었다.   르조슨 사령관은 파리의 정계의 유력 인사들과 인맥을 맺고 있는 거물급 인사였다.  그는 마네의 그림 한 점을 구입하여 자신의 작업실에 걸어놓았는데 그의 작업실에 방문하는 유명 사회지도층과 귀족들은 르조슨 사령관이 구입한 그림 한 점을 통해서 마네의 예술적 가치를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르조슨 사령관이 구입한 그림이 바로 여성 누드를 사실적으로 그렸다고해서 혹평을 받았던 <풀밭 위의 점심>이었다.

 

 

  박경신 블로그 사태에 대한 나의 생각  

우리나라의 과거를 되돌아보면 대중매체 또는 예술의 음란성 기준에 대해서 사회적인 논란이 많았다.  1992년에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에서 시작되어 96년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 2003년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까지 음란물로 규정받아 법정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오늘날에는 청소년들이 듣는 아이돌 가수들의 음악 가사에 성적 뉘앙스가 있다고 판단되면 청소년유해매체물로 판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박경신이 블로그에 올렸던 말대로 " 현재 대한민국의 음란기준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 "  하다.  음란한 목적에 올린 사진이라면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어서 공공성에 위반되는 행위이지만 예술의 입장에서 보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행위로 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표현의 자유가 인정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논란은 현재진행형이다. 최근에 불거진 논란에 대해서 ' 내 생각은 이렇다 ' 라고 주장하고 싶은 여지는 없다.    

이번 박경신 블로그 사태를 보면서 느꼈던 점은 표현의 자유가 허용될 수 있는 기준의 의미에 대한 합일점을 찾으려한다기 보다 그저 '야하고 음란하다 ' 는 이유만으로 예술을 음란물로 매도하는 대중과 언론의 경박스러운 태도가 마네의 <올랭피아>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19세기 말에 무지한 파리 대중들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쿠르베는 " 자신은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 라고 말함으로써 실재하는 현실을 주관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며 사실주의 미술을 강조하였다.  그가 실제로 에로티시즘에 의도하여 그렸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실주의 미술에 대한 쿠르베의 예술적 신념과 '세상의 근원' 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쿠르베는 자궁이 만들어낸 생명 탄생의 경험을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구차하게 쿠르베의 그림을 싸잡아서 음란사진으로 규정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여성의 음부를 그저 '음란한 대상' 으로만 보이는, 혼자서 은밀하게 즐기려는 폐쇄적인 성 문화에 갇힌 우리들의 어두운 치부를 자신 스스로 만천하에 공개하는 꼴인 셈이다.    

 

 

 

P.S> 요즘 사회적 논란에 대해 개인적인 감상을 나름 주저리한 글입니다.  그래서 비논리적인 내용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있다면 필자의 취약한 문제라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제 생각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빵가게재습격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저는 대학원생이 아니고, 논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지 못한 어느 지방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부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지적으로 많이 부족해서 독서나 알라딘 서재에 만나는 분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배우고 있는 많이 모자란(?) 학생입니다. ^^;; 

가끔 제 댓글에 저를 대학원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어서 사족을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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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4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4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6 0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1-08-04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버자이너 문화사와 함께 읽어보면 재미있겠네요. 그리고 쿠르베의 그림은 홍상수 감독의 밤과 낮 포스터에도 등장해서 정면에 걸려 있죠. 다만 초점이 살짝 빗나가게 처리되어 있는데 만약 초점이 맞았다면 큰일날 뻔 했네요. 비 오는데 사이러스님 조심하시길..

cyrus 2011-08-04 23:5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예전에 <명작 스캔들>이라는 심야에 방송되는 교양 프로그램에는
마네의 <올랭피아>를 소개했는데요, ^^;; 세인트님도 비 비해 없으시고
더위 조심하세요 ^^

마녀고양이 2011-08-04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박경신 씨 논쟁은 진짜 우습죠... 그리고
그런 용기를 낸 박경신 씨에게 저는 박수를 보냈답니다. 요즘
우리의 언론 통제, 문화 통제 진짜 우스워요.. 이리 갈팡 저리 갈팡.
코에 끼면 코걸이, 귀에 끼면 귀걸이.. 그런데 실제는 팔찌였다는 이런 상황 처럼요.

cyrus 2011-08-04 23:56   좋아요 0 | URL
확실한 기준 없이 음란으로 규정하는 것도 문제가 있죠.
이에 대한 기준의 획일점을 찾아가는 것이 참 어려운거 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8-0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의 미술관]은 전부터 보고싶던 건데.. 쿠르베 그림 구경 좋고, 이 페이퍼 좋아요. 저는 미술사를 진짜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거든요. 박경신님이 올린 사진의 의미가 그런 거였군요. 저는 제대로 보지 않고 그냥 넘겼었는데 뭐 사실 음란물의 기준도 그렇고, 사실 음란물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그걸 대하는 사람들의 관념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요.

cyrus 2011-08-07 00:54   좋아요 0 | URL
<지식의 미술관> 강추합니다. 저자가 이주헌 씨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미술사에서 많이 다루고 있는 개념들을 지루하지 않게 잘 설명해주고 있거든요. 저는 전에 글을 올리면 그림도 같이 올리다보니 저 역시 저절로
미술사에 대해서 공부해보고 싶더라고요, ^^
 
오셀로 펭귄클래식 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석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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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이유가 있어서 질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질투심이 있어서 질투하는 거예요.  

질투는 저절로 잉태되고 저절로 태어나는 괴물이거든요.  

 

- 셰익스피어 <오셀로> 제3막 4장, 에밀리아의 대사 중에서, 펭귄클래식코리아, pp 208 -

 

 

 

  질투심 많은 사내의 슬픈 사연 

 

   
 

" 밥을 빌어서 죽을 쓸지라도 / 제발 덕분에 뱃놈 노릇은 하지 마라 / 에 - 야, 어그여지야 - " 

 
   

 

김동인의 단편소설 <배따라기>에 나오는 노랫말이다.  '배따라기' 는 평안도 민요의 하나이며 뱃사람들의 고달프고 덧없는 생활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아내를 사랑했지만 충동적인 감정과 본능 때문에 아내과 자신의 동생을 잃게 된 소석 속 무명의 인물이 20년 동안이나 정처 없이 헤매면서 부르는 것이 바로 배따라기다.    

독자는 김동인의 소설 속에서 흘러나오는 배따라기의 구슬픈 어조를 들을 수 없지만 배따라기를 부르는 주인공의 슬픈 사연은 들을 수 있다.

배따라기를 부르는 그는 원래 영유라는 지역에 사는 사람으로 자신의 아내랑 아우와 함께 살고 있었다.  부부의 금실도 좋았고 형수와 시동생의 사이도 원만할 정도로 그는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지만 질투심이라는 마음 속에 생긴 불씨 하나가 행복한 시간을 한순간에 파괴해버렸다.  그는 평소에 친절하고 성품이 쾌활한 아내가 미남인 동생에게 친절한 것을 보고 이를 질투하게 된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는 아내와 동생 사이를 의심하게 되어 자주 부부싸움을 일으켰다.  

어느 날 장에 가서 아내에게 줄 거울을 사 가지고 돌아온 그는 아내와 동생이 방 안에 든 쥐를 잡느라고 옷매무새를 흐트린 것을 보고는 결정적으로 오해하여 아내를 내쫓고 만다. 며칠 뒤 아내는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동생은 형의 곁을 떠나버린다.  그후 형은 동생의 종적을 찾기 위해 배따라기를 부르면서 기나긴 유랑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질투심이 만들어낸 한 순간의 오해 때문에 평생동안 비극적인 운명을 짊어져야 했다.  

 

 

  질투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자

질투심이 많아 비극을 초래한 이야기는 비단 김동인의 소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문학사에서 유명한 질투의 화신에는 셰익스피어의 <오셀로>가 있다.

500여 년이 지났지만 <오셀로>가 여전히 널리 읽히는 것은 질투심이 단지 그만의 옹졸한 성격이 자초한 불행하면서도 극적인 결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질투심이란 인간의 보편적인 본능이고 어느 누구도 이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배우자의 정조를 의심하는 '부정망상(不貞妄想)' 을 일컫는 '오셀로 증후군' 은 질투의 화신인 오셀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질투는 분노와 연결이 되고, 질투는 살인적인 속성을 지닌 날카로운 칼이 된다.  질투 본능은 작품 주인공 오셀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아고 한 사람이 오셀로를 파멸의 궁지로 몰아 넣을 수 있었던 것도 단순히 오셀로를 향한 질투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아고는 흑인인 주제에 아름다운 귀족의 딸인 데스데모나를 아내로 맞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명장으로 칭송받는 오셀로를 인정할 수 없다.  질투란 그런 감정이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내 논리 안에서 인정할 수 없는 것, 바로 그 불편한 감정 말이다. 

이아고는 사람들이 칭송하는 오셀로의 인품을 믿지 않는다. 그는 이 칭송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의 화약고, 질투를 자극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격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 누구나에게 질투는 있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이아고의 추측이 옳았다. 질투는 의심과 짝을 이룬다. 의심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할 때 더 치명적이다. 의심이란 함께 있지 않았던 시간이 만들어낸 궁금증의 그늘이다. 언제나 함께 할 수는 없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허감의 거리가 의심과 질투를 부추기게 된다.

  

   

  대화가 필요해  

 

 

데오도르 샤세리오 <데스데모나의 잠>  19세기경 

 

   
 

자신에게 곧 닥쳐 올 죽음의 운명을 데스데모나는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표졍이 애처롭게 느껴지면서도  

'순결' 을 상징하는 흰 색 드레스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창녀' 로 오해받아야하는 그녀의 서글픈 처지를 더욱 강조되고 있다

 
   

  

데스데모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목이 졸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오셀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반면 출신 성분과 피부색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오셀로는 이아고의 간계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 아내를 의심하고 만다.  결국 일방통행적 사랑은 살인이라는 충동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고(事故)를 일으키고 말았다. 

좀 더 데스데모나를 존중하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이러한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셀로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너무나 일방적이었고 비록 이아고의 계락이었지만 이미 아내의 부정에 대한 확고한 심증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였기에 아내의 변론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 어떠한 변명도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일방적인 사랑 방법으로 인한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상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충분한 대화를 가진다면 더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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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02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엔 데이트도 맘놓고 못하는 세상이 된 것 같아요.
데이트 폭력이 그렇게도 많고 맘대로 헤어지지도 못하고.
누구를 만나기 전에 내가 이 사람을 만나도 될만큼 성숙한가?
그런 것도 좀 생각해 봐야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셀로는 너무 우아한데가 있어요. 그죠?ㅠ

cyrus 2011-08-03 17:16   좋아요 0 | URL
1학년 때 교양과목으로 가정폭력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는데
데이트 폭력 피해자로 여성이 많은 이유가 여전히 여성의 마음
속에는 남자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얻어맞으면서도 쉽게 헤어지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오셀로는 아무래도 장르가 비극이다보니 잔인한 인간의 파멸을
참 우아하게 표현되고 있는거 같아요. 그래서 지금도 연극으로도
나오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겠죠. ^^

마녀고양이 2011-08-02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완전 말되는걸요, 역시 고전이예요.
'원래 질투심이 있어서 질투하는 거예요.' 라는 말. 저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분노하고 짜증내고 질투한다면, 그것은 상대의 영향이 절반, 제 속에 넘치는 무엇이 절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요. 어떤 때는 제 속에 넘치는 무엇이 절반도 넘을지 모르겠어요.

사랑이라,,, 저는 가끔 사랑은 자기애의 투사가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사랑이란 단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나 봐요. 애정이란 단어가 더 좋아요.

cyrus 2011-08-03 17:17   좋아요 0 | URL
저는 저 대사 몇 줄 보는 순간 소름이 돋았어요 ^^;;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게 되면 정말 삶의 진리들이
담겨져 있거든요.

아이리시스 2011-08-07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셀로에 저런 멋진 대사가 나오는군요. 읽은 것 같은데 안 읽은 듯한 이 느낌은 뭐지?ㅎㅎ 질투심은 적이예요. 나를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망가뜨리는. 그 질투심으로 차라리 내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게 나아요. 힘든 얘기지만요.

cyrus 2011-08-07 00:52   좋아요 0 | URL
<오셀로>는 아직 안 읽어봤는데 <햄릿>을 민음사랑 펭귄클래식 판본
다 같이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조금은 번역이 다른 부분이 있었어요.
나중에 민음사판 <오셀로>로 읽어보려고 하는데,, 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펭귄 번역이 독서하는데 나았어요. 주석도 많았고요.

아이리시스 2011-08-07 01:18   좋아요 0 | URL
저는 번역까지는 안 따지지만 고전은 다른가 보더라구요. 꼭 참고할게요.^^ 오셀로랑 햄릿 끌려요. 셰익스피어 읽는 시루스님도 넘 멋있구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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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왕족의 말 못한 고민  

 

   
 

매사가 나를 고발하며 내 무딘 복수심을 채찍질하는구나!  허구한 날 하는 일이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사람이란 대체 뭐지?     (중략)   난 왜 ' 이 일을 해야 한다 ' 고 뇌까리고만 있는 거지?   그럴 만한 명분, 의지, 힘, 수단을 다 갖췄으면서도 말이야.  막중한 사례들이 나를 훈계하는구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제4막 5장 중 햄릿의 대사, pp 236, 펭귄클래식코리아 -

 
   

 

'햄릿' 이라고 하면 아마도 우유부단한 인간형의 대표적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맞다. 그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나이 30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엔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덴마크의 왕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처음 읽는다거나 혹은 두 세 번 읽게 되면 이 젊은 덴마크의 왕자가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 만큼 덕망이 있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친의 혼령을 본 이후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분노에 사로잡혀 미치광이 노릇을 할 뿐이지 그는 분명 사색적인 성향의 왕자임에는 틀립없다.  햄릿은 분명 정상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갈수록 우유부단한 면이 많이 부각되다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극명한 평가로 엇갈려져 있다.  

 

햄릿뿐만 아니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황제와 왕족들 중에는 후대의 역사가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많다. 

진시황. 그 이름은 최초로 중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한 영웅이면서 폭군이라는 상반된 평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진시황 역시 햄릿처럼 기형적인 친자 관계를 안은채 세상에 등장했고 증명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자신의 기형적인 출생 비밀로 인해서 적잖이 고뇌를 겪어야했다.     햄릿은 선왕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함으로써 조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친자라고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가 된 반면에 진시황은 사생아로 태어나 두 명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진나라를 다스려야했다.   진시황의 출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불위라는 사람의 존재로 거슬러 올러가게 된다.  

 

  

  나의 진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친척보다는 가깝고 혈육만큼은 못 되지!  

- <햄릿> 제1막 2장 중 햄릿의 대사, 같은 책 pp 102 -

 
   

 

전국시대 여불위라는 장사꾼은 진(秦)나라 왕손인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소양왕은 연로했고, 그의 아들 안국군에게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비(正妃)인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의 가치를 알아보고,엄청난 자금력으로 자초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도록 힘쓴다.  나중에 자초는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고 여불위는 재상이 된다.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아는 여불위의 시야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과 미래를 보는 시야를 가진 그 역시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비극적인 운명으로  종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운명, 아니 진나라의 운명에 판도를 뒤바뀌게 되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인 조희를 자초에게 선사한 것이다.  자초와 결호한 조희는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여불위의 아들은 자초의 왕위를 승계했다. 그 아들이 바로 진시황이다.  

사마천은 <사기> ‘진시황본기’ 에선 진시황이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해놓고 같은 책 ‘여불위열전’ 에선 장양왕을 왕으로 만든 여불위의 아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여불위가 이미 뱃속에 자신의 아이를 갖고 있던 애첩 조희를 장양왕에게 보내 그 아이가 대국을 있게 한 음모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진시황과 여불위, 복잡미묘한 관계

하지만 20대의 진시황에게는 복잡미묘한 출생 관계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태후와 환관과의 은밀한 내연 관계였다.   

마침 자신에게 날아온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진시황의 의혹을 증폭시켜주고 말았다.  투서에는 환관 노애는 진시황의 어머니 태후를 유혹하기 위하여 환관 행세를 하면서 접근한 것이며 노애와 태후의 내연의 관계를 맺어주게 한 사람이 바로 여불위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그치기 위해서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의 시종을 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태후와 노애는 서로 정을 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전국책>이라는 또 다른 사료에는 여불위와 노애는 서로 권력을 다투는 대립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다.  엇갈린 기록으로 인해 노애와 태후와의 내연 관계에 여불위가 실제로 연루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여불위 역시 태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태후와 자신의 은밀한 관계가 진시황에게 발각되면 그동안 누리고 있던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막기 위해서 노애를 불러들였건만 도리어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부채질하고 만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노애는 자신을 둘러싼 태후와의 내연 관계가 진시황의 귀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이는 여불위의 몰락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공로 덕분에 여불위는 무거운 처벌 대신에 관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진시황의 마음에는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만큼 여불위는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여불위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편지를 읽고난 뒤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만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여불위열전' 중에서, 김원중 역, 민음사, pp 620~621 -     

 

사마천은 여불위가 진시황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할까봐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가들은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는 사마천의 기록이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기록의 진위성을 의심하고 있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고 똑부러지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려던 진시황에게는 여불위의 존재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환관과의 추찹한 내연관계에 중부라고 칭할 정도로 존경해온 여불위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젋은 진시황에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궁정에서의 모의가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  반란으로 거대한 정권을 무너지기도 하며 십년도 채우지 못하고 왕의 얼굴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권력 타툼의 장소나 다름 없는 궁정의 현실을 생각하면 진시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첩의 자식' 이라는 콤플렉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1장 '여불위의 숙청' 편에 들어있는 각주에 의하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설이라는 기록은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사생아' 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정말로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인정 없는 잔인한 황제로 묘사하기 위한 의도로 기록했을까?

진시황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본기>의 '진시황본기' 에는 정양왕이 여불위의 첩에 반해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진시황을 낳았다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여불위의 숙청' 편 각주에 "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 에서 이 설을 받아들였지만, '진시황본기' 에는 적지 않았다. " (pp 55)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내용만 가지고 사마천이 여불위 생부설을 부정하고 있다기에는 근거로 삼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은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라 첩의 자식이라는 점이다.  여불위가 생부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진시황에게는 자신이 첩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비밀이 권력자로서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만약에 이 사실이 궁정에 알려진다면 왕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으며 훗날 권력을 확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력했지만 고독했던 권력가

현존하고 있는 사료를 통해서 진시황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족함 없이 완벽할 것만 같았던 어린 진시황에게는 이런 사실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고민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 속에서 두터운 신임과 존경을 보낸 '중부' 여불위가 은밀한 음모 관계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알아버린 진시황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거나 다름없다.    

진시황은 중국의 황제이기 전에 번뇌와 불안에 시달려야하는 불완전한 '인간' 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환관이랑 놀아다니고 무한한 신뢰를 주었던 중부 여불위는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다.  두 가지 사건이 진시황에게는 강력한 군주로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커다란 인생의 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은 쉴 틈 없이 하룻동안 업무에 매진할 정도로 진나라 국정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시황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른 것이 '분서갱유' ,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게 한 장본인' , ' 불로초를 찾으려고 했던 왕 ' 으로만 알려져 있다.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서 유학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으며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기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였고 아방궁은 향락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진시황에게 남아있는 것은 난폭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진시황이 절대권력의 군주로 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원인에는 황제가 되기 전 태자 시절 때 겪은 사건들도 무시할 수 없다.   여불위의 계획에서 비롯된 환관 노애와 어머니인 태후와의 내연 관계는 황제가 되려는 진시황에게는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방술사의 말에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진시황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권력이 무너질지 모르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궁정에 비밀통로로 만들 정도로 철저한 비밀주의적 생활을 하였고 자신에게 충언하는 아들 부소를 의심하고 스스로 자결하도록 명할 정도로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간언만 듣고 여불위 다음으로 자신의 곁에 둔 이사를 처형시켰다.  무엇보다도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하루 국정 업무에 열심히 했던 진시황은 주위 신하들로부터 ' 권력욕에 지니치다 ' 라고 할 정도로 거꾸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갈면 갈수록 진시황에게는 주위에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고 고독한 권력은 이어져만 갔다.   

 

   
 

나는 최초의 황제다. 나는 이 땅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 왔다.  나는 법을 세워 힘센 자들의 횡포를 없앴다.  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했는데 왜 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내가 아니라 어디에 이 백성은 마음을 준단 말인가?  

 - 김태권 <한나라 이야기 1> pp 210~211 -

 
   

  

그의 고독한 읊조림을 파헤쳐 보면, 진시황은 꽤나 복잡한 관계에 얽혀 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미칠 듯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인간 자체로서 할 수밖에 없는 고뇌가 아니라 ‘ 한 나라의 황제이기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고뇌’, 그 중심에 강력한 군주인줄만 알았던 진시황은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사람 없이 피바람이 부는 권력 다툼의 장에서 너무나 외롭게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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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3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반가와요 ㅇㅅㅇ
앞으로 알라딘 블로그에서 자주 뵈요 ㅋㅋ

cyrus 2011-08-01 22:23   좋아요 0 | URL
ㅎㅎ 카페에서도 자주 뵈요 ^^

아이리시스 2011-07-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시루스님, 이 많은 리뷰 페이퍼를 언제 다 읽으라고... 더워 죽겠어요. 그리고 토요일이예요. 멋진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알라딘에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 제일 더워요.
그래서 항상 제 앞에는 시원한 것이 있어야해요. 지금도 시원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답글을 달고 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1-07-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조도 자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었음을 평생 열등감으로 생각했다지 않습니까...김두한의 어머니도 김좌진의 스쳐지나가는 여인이었을 뿐...여하튼 여러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면 그 후손들이 골치아파집니다.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복잡한 출신 관계 때문에 인생 역시 복잡하게 꼬아버리는거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1-07-3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불쌍하죠, 진시황제.
두고두고 최고의 폭군이라는 소실에, 생전에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 했으니 말이예요.
과연 제가 진시황의 입장에 서서, 역사에 끌려 어쩔 수 없는 위치로 간다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그저 저런 위치에는 가지 않도록 빌 뿐이예요.

요즘 문재인 이사장은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야하는 심정...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답니다.

cyrus 2011-08-01 22:28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지도자라면 고독이라는 권력의 특성을 견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님도 그렇고,,
역시 지도자의 길은 정말 쉽지도 않고 어려운 일인거 같아요,,
 
룸살롱 공화국 인사 갈마들 총서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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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특유의 접대 문화

최근에 시청자들의 논란을 뒤로한 채 드라마 <신기생뎐>이 막을 내렸다.  드라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첫 회가 방영될 때부터 드라마 속 설정이 시청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화제가 된 동시에 '막장 설정' 이라는 극명한 평가를 받았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기생들은 전통을 지키는 자존심을 유지하면서 한국 최고의 부유층들이 다닌다는 '부용각' 이라는 최고급 요정에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들이 자존심을 걸고 지키는 한국 전통문화가 한국사회에서 근절되어야 할 바로 ’술접대 문화‘ 라는 것은 몇 번의 에피소드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드라마 속의 부용각 소속 기생들은 마치 황진이처럼 노래와 춤을 선사하며 술 접대를 하고 있다. <부용각> 손님들은 ‘양주’ 를 마시며 ‘한국 전통’ 을 지키고, 또 현대판 기생들인 그녀들은 기생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영어를 배우며 한국전통을 지켜 간다. 한국에선 바이어들에게 한국여성을 접대시키며 비즈니스를 한다는 사실이 이미 국제화되었는데, 이 드라마에서도 서구 비즈니스 손님들까지 등장시키며 ‘한국여성은 술접대용‘ 이란 전통을 세계적으로 알리고 있다. 이런 한국의 접대문화를 예쁘게 단장해 세계화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신기생뎐>뿐만 아니라 몇 몇 드라마에서도 진한 화장에다 야한 옷을 입은 젋은 여자들을 양쪽에 끼고 술을 마시는 접대 장면이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 국내 언론매체의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과 공직자들이 생각하는 향응, 접대 문화가 가장 심각하다고 인식하는 분야가 '정치' 쪽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합뉴스, 2010년 7월 6일자)   그리고 기업에서도 접대 한 번 하는데 드는 비용이 평균 40만 원이 초과할 정도로 사회조직적 집단 내에서 접대문화는 빠질 수가 없다.  '룸살롱 접대' 를 관행으로 인정하는 정계와 기업의 모습을 통해 접대문화가 독특하면서도 올바르지 못한(?) 또 하나의 문화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 접대문화의 불편한 역사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 3대 고급 요정 중의 하나였던 오진암이  

작년에 매각되어 철거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울 종로구 익산동에 위치했던 오진암은 1950~70년대 밀실 정치의 주무대였다. 

(사진출처: 한겨레)  


 

책의 저자 강준만 교수는 룸살롱의 전신인 '요정'이 전성시대를 구가한 해방정국을 그 발원지로 보고, 마침내 위세가 절정에 달한 현재까지 룸살롱 발달의 과정과 변모의 순간을 생생하게 전한다. 

1947년 서울에만 3천여개 이상의 요정이 있었으니, 요릿집과 기생집이 보통 사람들의 화제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요릿집과 기생집 출입은 정치 지도자들에서부터 경찰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분야에 걸쳐 만연된 관행이었다.  

1963년 광화문전화국의 최고 사용률을 기록한 업소는 요정이었다. 2위는 다방, 3위 여관, 4위는 언론사다. 1967년에 언론과 학계에서는 “요정정치를 청산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그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 야당 정치인에게 정치보복을 하더라도 여자관계만큼은 건드리지 말라 " 는 지시를 내릴 정도로 기생 파티의 가치를 인정하거나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분명 좋은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 때만해도 정계와 접대문화의 은밀한 관계는 땔래야 땔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위에서부터 늘 요릿집과 기생집을 출입하는데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있었던 접대문화가 쉽사리 근절될 리는 없었다. 

1970년대부터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룸살롱과 이에 따른 '호스티스 문화' 가 번화가 한가운데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룸살롱이 아닌 업소들도 룸살롱 흉내를 내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도 유사 룸살롱으로 인해 룸살롱의 엄격한 정의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룸살롱 '원맨밴드' 경력 33년인 A씨에 따르면, 국내에 룸살롱이 들어선 것은 1970년대 중반이며, 1세대 룸살롱은 서울 퇴계로 주변에 모여 있었다. 이후 이태원 근처에 '길싸롱', '밤길' 같은 룸살롱이 생기기 시작했다.   

88 서울올림픽은 ‘룸살롱 올림픽’ 이라 불릴 정도로 룸살롱이 흥행하기 시작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11개 대형 요정업체에 20억원이나 되는 돈을 특별융자했고, 요정 수십곳은 ‘모범업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책에서도 강준만 교수는 정계, 경영계에서 이루어지는 룸살롱 관련 사건뿐만 아니라 연예인 성 접대 사건 그리고 최근에 경기 불황으로 인해 룸살롱 접대부로 일하는 20대들의 현실까지 읽는 내내 얼굴이 화근거리고 민망함을 느낄 정도로 룸살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밀한 밀실문화를 적나라하면서도 담담하게 소개하고 있다.  



 

  룸살롱에서 부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부패의 막장으로 파고 들어가는 구조적 악습의 뿌리는 '패거리 문화' 에 있다. 그리고 이런 룸살롱 문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칸막이' 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준만 교수는  ‘칸막이' 는 연고, 정실 중심의 패거리 만들기의 필수 요소라고 분석하고 있다.  칸막이 현상의 이익을 쟁취하고자 하는 게 접대이고 주고받는 접대 속에 부정부패가 꽃을 피울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가청렴도가 답보 상태인 우리나라가 공정한 사회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회 각 부분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부패 친화적 접대 문화의 개선이 필요하다.  횡령, 뇌물, 유용 등 전통적인 형태의 부패행위 외에 부패친화적 문화와 연계된 향응, 접대 등에 대해서도 부패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룸살롱은 정치인과 판·검사, 재벌과 언론 등 권력 자본가, 엘리트들이 음주와 놀이를 기본으로 접대를 주고받은 장소다. 술자리 접대와 성상납 강요를 폭로한 문건을 남기고 자살한 탤런트 故 장자연씨는 한국 접대 문화의 희생양인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경기 불황을 이유로 젋은 20대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본인 스스로 화려하면서도 음침한 룸살롱으로 향하고 있다. 권력자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접대부(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들 중에는 더욱 희망의 빛은커녕 어둠의 늪으로 빠져들어가는 파탄된 삶에 후회만 거듭하다가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룸살롱 메커니즘은 부정부패의 꽃만 피우는 것이 아니다. 사회지도층이란 사람은 룸살롱에 들어서는 순간 악마가 되어 자신들의 쾌락을 충족하고 미래를 꿈꾸는 서민들의 희망을 짓뭉개기도 한다.  그만큼 이 사회는 곪을 대로 곪아 썩은 '룸살롱 공화국' 의 현실인 것이다.

먼저 떠나간 사람들은 숙제를 남겨 놓았다.  남은 사람들은 그 숙제를 나누어 풀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란 비극적이고 불미스러운 일이 없도록 접대문화의 문제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제기하여 재고해야 한다. 우리 사회 각 부문에서 공동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반부패 청렴문화가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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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28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기생뎐은 하두 어이가 없어서 처음부터 보지 않았습니다.
정말 웃기는 설정이었지요, 일본의 게이샤 흉내를 내고 싶었던걸까요?

룸싸롱이라, 시루스님..
이번에 남성 전용 클럽으로 회원 딱 300명인가만 모집하는 외국 체인점 생긴거 아세요?
영국에서 들여왔다던가... 부유층 전용으로 회비가 어마어마한데
남성들만의 장소를 만들거라고 합니다. ㅎㅎ. 머하는 짓거리랍니까..

cyrus 2011-07-28 19:34   좋아요 0 | URL
요즘 VIP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외국 회사에서도 우리나라에
그런 클럽을 만든다고 하더군요. 노는 건 좋긴 좋지만 너무 과할 정도로
흥청망청 노는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

아이리시스 2011-07-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끝에 쫌 봤어요. 신기생뎐. 이 책 흥미롭네요. 이런 걸 문화라고 하기도 좀 뭐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 술문화,접대문화 저는 너무 잘못됐다고 보거든요. 접대가 꼭 술이라는 것도 그렇고 우리도 밤 몇 시 이후에는 술을 안팔았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어요. 미국 어느 주들은 요일제한,시간제한 그런 거 있다고 하던데............

아 맞다, 시루스님 장학금 축하해요.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
피터 디어 지음, 정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과학혁명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죽기 직전에 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오랜 세월을 지배해왔던 천동설의 체계를 무너뜨렸다.    

이처럼 사유방식에서 혁명적인 대전환을 이룰 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엔 의학을 공부한 폴란드의 천문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주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꿔서 '천문학의 대전환' 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것은 '사고의 혁명'을 가져왔다.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혹성의 하나인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구 중심적인 견지를 태양 중심적인 견지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신이 만든 천체는 완전한 원의 궤도를 돈다고 말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케플러 는 혹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돈다는 케플러의 법칙을 발표한다. 이 법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으로 이어지고, 갈릴레이의 법칙으로부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과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의 확립과 그에 따른 자연상. 세계상의 변혁의 성립이 이루어졌던 17세기 유럽의 시대를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라고 불리우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마스 S. 쿤<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서 과학 지식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학이 이상 현상의 출현으로 위기에 부딪혀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그 결과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중세 때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천체현상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학설이었다. 이처럼 상당기간 동안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단계를 정상과학 단계라고 한다.  이렇게 연구를 진행하다가 정상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정상과학은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근대가 시작될 즈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이 너무 복잡한 천체현상을 상당수 과학자들은 발견하게 되면서 천동설은 학문적 당위성으러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이를 위기 단계라고 한다.  

이 위기 단계에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설명체계를 모색하게 되면서 많은 가설이 등장하고, 그 가설들 중에서 보다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이나 모형이 타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천동설의 대안으로 많은 지지를 받은 가설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었고, 또 다른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이 지동설이 실제로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30여년 동안이나 실험과 관측을 하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브라헤의 천문학 연구를 이어 받은 케플러에 의해 그 오류가 지적되었지만 지구중심설을 태양중심설로 전환시켰으며 이러한 지배학설의 전환을 과학혁명 단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혁명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 속에서 ‘과학 혁명’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우리가 ‘과학’ 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추상적인가 아니면 단일한 실재인가라는 것이다.  도리어 여러 개의 구체적인 ‘과학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자연이라는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기존의 역사관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과거를 보는 현재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당대인들의 경험과 시각 속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 혁명을 볼 때 필요한 질문은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과연 혁명적인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는가이다. 

피터 디어가 쓴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은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과학 혁명’ 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통해 근대 과학의 발달 과정뿐만 아니라 그 당시 과학자들이 '과학' 이라는 학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탐구하였는지 묘사하고 있다.  

 

 


   1500년 :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텔레스주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스콜라 철학을 탄생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논증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목표는 중세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었던 기독교 신앙에 철학을 이용하여 이성적인 근거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 당시 오랫동안 중세 학문을 지배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을 반영하였다.  

그 당시만해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학문의 내용은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이 때부터 자연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이 유행하였는데 중세의 자연철학은 과학적. 실용적 가치보다는 신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 로 격하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신학적 교리를 설명하는데 이용하였다.  오직 신이 조물주를 어떻게 창조하였는가를 이해하는 학문이 자연철학이었던 것이다.    

한 때 몇 몇 학자들 사이에서는 12세기 아랍 철학자였던 아베로에스(1126~1198)의 사상을 받아들여 철학을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철학의 독립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대해 논의를 점화시켰지만 자연철학과 종교와의 불가분적 관계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16세기 인문주의 :  '과학적 르네상스' , 공존의 시대

 

 

 

  

(위) 코페르니쿠스의 <천제의 회전에 관하여>에 실린 지동설 체계도  

(아래)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에 실린 도판    

  

14세기에 르네상스 시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인간의 지적. 창조적 힘 역시 재흥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의 동시 출간은 ' 과학적 르네상스 ' 가 등장하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Renaissance)' 라는 단어에는 '부활, 부흥, 재생'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문화의 부흥을 부르짖는 당시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 역시 오랫동안 지배해오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의 문제점을 개선하면서도 고대의 권위적인 학문의 영향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이전에 유지되어온 기존의 학설을 폐기하려는 의지보다는 선대 학자들의 이론을 전수받아 복원하겠다는 인문주의적 의지가 더 강했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인 베살리우스 역시 인문주의적 감수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중세의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지배했다면 의학에서는 갈레노스(131?~201?)의 해부학 이론은 오랫동안 학문적 권위를 누렸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해부학 이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삼았으며 자신이 주장한 원칙들은 어느 정도 갈레노스의 원칙을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적 르네상스' 에는 고대인의 지식을 뛰어넘는 창조성과 함께 그들의 지식을 모방하고 복원이 강조되었던 공존의 시대였다.   

  

 

  17세기  :  혼합된 잡종의 과학

   

  

' 아는 것이 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1561~1626)  

 

이전의 과학이 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면 16~17세기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실용적인 노력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섭정 시대 때 궁정 행정인으로 활동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국가의 역할에 요구되는 자연철학을 강조하였다.  그는 관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인간의 기술적 진보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베이컨의 등장으로 학문에서의 '실험' 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의 자연철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답게 베이컨은 자연을 이해하는데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지식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자들의 특징과 비슷하다.  베이컨에게 '실험' 이란 자신이 이미 경험한 결과를 다시 한 번 검증하는 행위일뿐이었다. 

 

 

 토머스 홉스 (1588~1679)

 

후에 파스칼, 보일 등이 과학적인 검증 과정으로 이루어진 '실험철학' 이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부터 이어져 온 '자연철학' 의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리바이어던>의 저자인 철학자 토머스 홉스마저 보일의 실험이 전혀 '자연철학' 적이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자연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와  

자연현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뉴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애초부터 고수하려는 의도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영국 경험론자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데 귀납적인 방식과 경험을 강조하였으며 훗날 '뉴턴주의' 라는 과학철학 스타일을 형성하게 된다.    

뉴턴은 가설을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설명이라 하여, 이를 배격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저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미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관념적, 이성적 고찰보다는 거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경험적 기술에 치중했다.  뉴턴은 <광학>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빛을 입자라고 설명하면서도 빛 입자의 구체적 운동과 작용에 대해서는 어떤 실험적 증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뉴턴주의와는 반대로 데카르트주의는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관을 강조하였다.  세계와 자연의 모든 과정이 필연적이고도 자연적인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이성으로 그 기계적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이들은 자연의 생물학적 현상들을 물리적,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책의 저자 피터 디어의 표현대로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주의와 뉴턴주의 간의 논쟁의 시대동안 과학은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실증적인 면이 혼합된 잡종의 학문이었다.  

 

 

  과학혁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서 과학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는 시대에는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터 디어의 <과학혁명>은 자신의 책이 발간하기 5년 전에 쓰여진 동명 제목인 스티븐 샤핀<과학혁명>(영림카디널, 2002)에 응수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스티븐 샤핀은 '과학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학계의 주장에 맞서 도발하였지만 피터 디어는 샤핀의 주장을 정면에 반박하기보다는 샤핀의 관점대로 기존의 과학혁명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전 전회' 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선천적 형식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다고 설명하였다. 즉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 구질서의 파괴를 동반한 사고방식의 변혁을 강조하고 있다.  니체는 커다란 사유의 망치로 낡은 구 이론들을 파괴함으로써 '망치로 철학하기' 가 가능했겠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는 코페르니쿠스는 니체처럼 '망치로 과학하기' 가 불가능했다.  아니, 아예 망치를 집어 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7세기까지 자연 철학은 여전히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근대 과학의 주요한 분야인 화학이나 생물학은 18세기에 와서야 ‘과학 혁명’에 해당하는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신구의 과학 학문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구성요소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통일성을 내포하면서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양식의 과학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제국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과학혁명 역시 하루 아침에 근대사회로 전환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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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28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정말 다양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읽으시네요.
만화만 빼고 다 읽으시는것 같아요, 아, 판타지도 안 읽으시지.. ^^

저는 맹목적인 진리를 추구하던 때가 차라리 속편하구나 싶기도 해요.
칸트처럼 주관적인 현상학의 관념은 정말 피곤하거든요.
대체! 무엇인 진리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라,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으니까요. ㅎㅎ

cyrus 2011-07-28 19:36   좋아요 0 | URL
만화도 좋아해요. 판타지나 SF도 읽어보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독서 습관에 변화를 준다는게 쉽지 않네요. ^^;;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좀 그런 면이 있죠, 전 학기 때
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 추상적인 내용이라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