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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ㅣ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평점 :
두 왕족의 말 못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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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가 나를 고발하며 내 무딘 복수심을 채찍질하는구나! 허구한 날 하는 일이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사람이란 대체 뭐지? (중략) 난 왜 ' 이 일을 해야 한다 ' 고 뇌까리고만 있는 거지? 그럴 만한 명분, 의지, 힘, 수단을 다 갖췄으면서도 말이야. 막중한 사례들이 나를 훈계하는구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제4막 5장 중 햄릿의 대사, pp 236, 펭귄클래식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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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이라고 하면 아마도 우유부단한 인간형의 대표적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맞다. 그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나이 30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엔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덴마크의 왕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처음 읽는다거나 혹은 두 세 번 읽게 되면 이 젊은 덴마크의 왕자가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 만큼 덕망이 있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친의 혼령을 본 이후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분노에 사로잡혀 미치광이 노릇을 할 뿐이지 그는 분명 사색적인 성향의 왕자임에는 틀립없다. 햄릿은 분명 정상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갈수록 우유부단한 면이 많이 부각되다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극명한 평가로 엇갈려져 있다.
햄릿뿐만 아니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황제와 왕족들 중에는 후대의 역사가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많다.
진시황. 그 이름은 최초로 중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한 영웅이면서 폭군이라는 상반된 평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진시황 역시 햄릿처럼 기형적인 친자 관계를 안은채 세상에 등장했고 증명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자신의 기형적인 출생 비밀로 인해서 적잖이 고뇌를 겪어야했다. 햄릿은 선왕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함으로써 조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친자라고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가 된 반면에 진시황은 사생아로 태어나 두 명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진나라를 다스려야했다. 진시황의 출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불위라는 사람의 존재로 거슬러 올러가게 된다.
나의 진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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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보다는 가깝고 혈육만큼은 못 되지!
- <햄릿> 제1막 2장 중 햄릿의 대사, 같은 책 pp 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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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여불위라는 장사꾼은 진(秦)나라 왕손인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소양왕은 연로했고, 그의 아들 안국군에게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비(正妃)인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의 가치를 알아보고,엄청난 자금력으로 자초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도록 힘쓴다. 나중에 자초는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고 여불위는 재상이 된다.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아는 여불위의 시야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과 미래를 보는 시야를 가진 그 역시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비극적인 운명으로 종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운명, 아니 진나라의 운명에 판도를 뒤바뀌게 되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인 조희를 자초에게 선사한 것이다. 자초와 결호한 조희는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여불위의 아들은 자초의 왕위를 승계했다. 그 아들이 바로 진시황이다.
사마천은 <사기> ‘진시황본기’ 에선 진시황이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해놓고 같은 책 ‘여불위열전’ 에선 장양왕을 왕으로 만든 여불위의 아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여불위가 이미 뱃속에 자신의 아이를 갖고 있던 애첩 조희를 장양왕에게 보내 그 아이가 대국을 있게 한 음모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진시황과 여불위, 복잡미묘한 관계
하지만 20대의 진시황에게는 복잡미묘한 출생 관계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태후와 환관과의 은밀한 내연 관계였다.
마침 자신에게 날아온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진시황의 의혹을 증폭시켜주고 말았다. 투서에는 환관 노애는 진시황의 어머니 태후를 유혹하기 위하여 환관 행세를 하면서 접근한 것이며 노애와 태후의 내연의 관계를 맺어주게 한 사람이 바로 여불위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그치기 위해서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의 시종을 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태후와 노애는 서로 정을 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전국책>이라는 또 다른 사료에는 여불위와 노애는 서로 권력을 다투는 대립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다. 엇갈린 기록으로 인해 노애와 태후와의 내연 관계에 여불위가 실제로 연루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여불위 역시 태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태후와 자신의 은밀한 관계가 진시황에게 발각되면 그동안 누리고 있던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막기 위해서 노애를 불러들였건만 도리어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부채질하고 만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노애는 자신을 둘러싼 태후와의 내연 관계가 진시황의 귀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이는 여불위의 몰락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공로 덕분에 여불위는 무거운 처벌 대신에 관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진시황의 마음에는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만큼 여불위는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여불위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편지를 읽고난 뒤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만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여불위열전' 중에서, 김원중 역, 민음사, pp 620~621 -
사마천은 여불위가 진시황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할까봐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가들은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는 사마천의 기록이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기록의 진위성을 의심하고 있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고 똑부러지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려던 진시황에게는 여불위의 존재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환관과의 추찹한 내연관계에 중부라고 칭할 정도로 존경해온 여불위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젋은 진시황에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궁정에서의 모의가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 반란으로 거대한 정권을 무너지기도 하며 십년도 채우지 못하고 왕의 얼굴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권력 타툼의 장소나 다름 없는 궁정의 현실을 생각하면 진시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첩의 자식' 이라는 콤플렉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1장 '여불위의 숙청' 편에 들어있는 각주에 의하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설이라는 기록은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사생아' 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정말로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인정 없는 잔인한 황제로 묘사하기 위한 의도로 기록했을까?
진시황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본기>의 '진시황본기' 에는 정양왕이 여불위의 첩에 반해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진시황을 낳았다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여불위의 숙청' 편 각주에 "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 에서 이 설을 받아들였지만, '진시황본기' 에는 적지 않았다. " (pp 55)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내용만 가지고 사마천이 여불위 생부설을 부정하고 있다기에는 근거로 삼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은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라 첩의 자식이라는 점이다. 여불위가 생부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진시황에게는 자신이 첩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비밀이 권력자로서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만약에 이 사실이 궁정에 알려진다면 왕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으며 훗날 권력을 확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력했지만 고독했던 권력가
현존하고 있는 사료를 통해서 진시황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족함 없이 완벽할 것만 같았던 어린 진시황에게는 이런 사실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고민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 속에서 두터운 신임과 존경을 보낸 '중부' 여불위가 은밀한 음모 관계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알아버린 진시황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거나 다름없다.
진시황은 중국의 황제이기 전에 번뇌와 불안에 시달려야하는 불완전한 '인간' 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환관이랑 놀아다니고 무한한 신뢰를 주었던 중부 여불위는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다. 두 가지 사건이 진시황에게는 강력한 군주로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커다란 인생의 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은 쉴 틈 없이 하룻동안 업무에 매진할 정도로 진나라 국정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시황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른 것이 '분서갱유' ,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게 한 장본인' , ' 불로초를 찾으려고 했던 왕 ' 으로만 알려져 있다.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서 유학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으며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기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였고 아방궁은 향락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진시황에게 남아있는 것은 난폭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진시황이 절대권력의 군주로 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원인에는 황제가 되기 전 태자 시절 때 겪은 사건들도 무시할 수 없다. 여불위의 계획에서 비롯된 환관 노애와 어머니인 태후와의 내연 관계는 황제가 되려는 진시황에게는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방술사의 말에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진시황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권력이 무너질지 모르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궁정에 비밀통로로 만들 정도로 철저한 비밀주의적 생활을 하였고 자신에게 충언하는 아들 부소를 의심하고 스스로 자결하도록 명할 정도로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간언만 듣고 여불위 다음으로 자신의 곁에 둔 이사를 처형시켰다. 무엇보다도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하루 국정 업무에 열심히 했던 진시황은 주위 신하들로부터 ' 권력욕에 지니치다 ' 라고 할 정도로 거꾸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갈면 갈수록 진시황에게는 주위에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고 고독한 권력은 이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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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최초의 황제다. 나는 이 땅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 왔다. 나는 법을 세워 힘센 자들의 횡포를 없앴다. 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했는데 왜 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내가 아니라 어디에 이 백성은 마음을 준단 말인가?
- 김태권 <한나라 이야기 1> pp 210~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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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독한 읊조림을 파헤쳐 보면, 진시황은 꽤나 복잡한 관계에 얽혀 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미칠 듯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인간 자체로서 할 수밖에 없는 고뇌가 아니라 ‘ 한 나라의 황제이기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고뇌’, 그 중심에 강력한 군주인줄만 알았던 진시황은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사람 없이 피바람이 부는 권력 다툼의 장에서 너무나 외롭게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