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
피터 디어 지음, 정원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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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혁명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죽기 직전에 발간된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으며 오랜 세월을 지배해왔던 천동설의 체계를 무너뜨렸다.    

이처럼 사유방식에서 혁명적인 대전환을 이룰 때 '코페르니쿠스적 전회' 라고 부른다. 코페르니쿠스는 처음엔 의학을 공부한 폴란드의 천문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주류였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꿔서 '천문학의 대전환' 을 초래한 장본인이다. 그것은 '사고의 혁명'을 가져왔다.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고, 혹성의 하나인 지구도 태양의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지구 중심적인 견지를 태양 중심적인 견지로 바꿔 놓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신이 만든 천체는 완전한 원의 궤도를 돈다고 말하는 한계를 노출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케플러 는 혹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타원궤도를 돈다는 케플러의 법칙을 발표한다. 이 법칙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관성의 법칙으로 이어지고, 갈릴레이의 법칙으로부터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과학사에서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지는 근대과학의 확립과 그에 따른 자연상. 세계상의 변혁의 성립이 이루어졌던 17세기 유럽의 시대를 '과학혁명'(Scientific Revolution) 라고 불리우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마스 S. 쿤<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서 과학 지식의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쿤은 과학의 발전은 과학이 이상 현상의 출현으로 위기에 부딪혀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그 결과는 새로운 과학의 출현을 가져온다고 주장하였다. 

중세 때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천체현상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학설이었다. 이처럼 상당기간 동안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단계를 정상과학 단계라고 한다.  이렇게 연구를 진행하다가 정상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면서 정상과학은 권위를 상실하게 된다.  근대가 시작될 즈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이 너무 복잡한 천체현상을 상당수 과학자들은 발견하게 되면서 천동설은 학문적 당위성으러부터 도전을 받게 된다. 이를 위기 단계라고 한다.  

이 위기 단계에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설명체계를 모색하게 되면서 많은 가설이 등장하고, 그 가설들 중에서 보다 많은 과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가설이나 모형이 타당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천동설의 대안으로 많은 지지를 받은 가설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었고, 또 다른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는 이 지동설이 실제로 맞는지를 확인하고자 30여년 동안이나 실험과 관측을 하기 시작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브라헤의 천문학 연구를 이어 받은 케플러에 의해 그 오류가 지적되었지만 지구중심설을 태양중심설로 전환시켰으며 이러한 지배학설의 전환을 과학혁명 단계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혁명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 속에서 ‘과학 혁명’ 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우리가 ‘과학’ 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이 추상적인가 아니면 단일한 실재인가라는 것이다.  도리어 여러 개의 구체적인 ‘과학들’이 있으며, 이것들은 자연이라는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기존의 역사관이 오늘날의 시각에서 과거를 보는 현재주의에 물들어 있다고 비판하면서 당대인들의 경험과 시각 속에서 역사를 볼 것을 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 혁명을 볼 때 필요한 질문은 과학혁명이라고 명명하고 있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과연 혁명적인 것이 진행되고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는가이다. 

피터 디어가 쓴 <과학혁명 : 유럽의 지식과 야망, 1500~1700>은 16세기 초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과학 혁명’ 이라고 부르는 시대를 통해 근대 과학의 발달 과정뿐만 아니라 그 당시 과학자들이 '과학' 이라는 학문을 어떻게 바라보고 탐구하였는지 묘사하고 있다.  

 

 


   1500년 : 아퀴나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만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텔레스주의?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스콜라 철학을 탄생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이성적인 사유를 통하여 논증하고 이해하려고 하였다.  스콜라 철학의 목표는 중세 사람들이 진리라고 믿었던 기독교 신앙에 철학을 이용하여 이성적인 근거를 부여하는 것인데 그 당시 오랫동안 중세 학문을 지배하고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을 반영하였다.  

그 당시만해도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던 학문의 내용은 스콜라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따르고 있었다. 이 때부터 자연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 이 유행하였는데 중세의 자연철학은 과학적. 실용적 가치보다는 신학적 가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철학은 '신학의 시녀' 로 격하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신학적 교리를 설명하는데 이용하였다.  오직 신이 조물주를 어떻게 창조하였는가를 이해하는 학문이 자연철학이었던 것이다.    

한 때 몇 몇 학자들 사이에서는 12세기 아랍 철학자였던 아베로에스(1126~1198)의 사상을 받아들여 철학을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철학의 독립적 지위를 강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에 대해 논의를 점화시켰지만 자연철학과 종교와의 불가분적 관계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 스콜라 철학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16세기 인문주의 :  '과학적 르네상스' , 공존의 시대

 

 

 

  

(위) 코페르니쿠스의 <천제의 회전에 관하여>에 실린 지동설 체계도  

(아래)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에 실린 도판    

  

14세기에 르네상스 시대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인문주의자들은 고대문화의 부흥을 통하여 인간의 지적. 창조적 힘 역시 재흥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1543년에 코페르니쿠스의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와 베살리우스의 <인체 해부에 대하여>의 동시 출간은 ' 과학적 르네상스 ' 가 등장하게 되는 신호탄이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Renaissance)' 라는 단어에는 '부활, 부흥, 재생' 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대문화의 부흥을 부르짖는 당시 인문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코페르니쿠스 역시 오랫동안 지배해오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의 문제점을 개선하면서도 고대의 권위적인 학문의 영향력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이전에 유지되어온 기존의 학설을 폐기하려는 의지보다는 선대 학자들의 이론을 전수받아 복원하겠다는 인문주의적 의지가 더 강했다.  

근대 해부학의 창시자인 베살리우스 역시 인문주의적 감수성을 탈피하지 못했다.  중세의 천문학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지배했다면 의학에서는 갈레노스(131?~201?)의 해부학 이론은 오랫동안 학문적 권위를 누렸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해부학 이론의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모방해야 할 모델로 삼았으며 자신이 주장한 원칙들은 어느 정도 갈레노스의 원칙을 수용하고 있다.  

이처럼 '과학적 르네상스' 에는 고대인의 지식을 뛰어넘는 창조성과 함께 그들의 지식을 모방하고 복원이 강조되었던 공존의 시대였다.   

  

 

  17세기  :  혼합된 잡종의 과학

   

  

' 아는 것이 힘이다 '  프랜시스 베이컨 (1561~1626)  

 

이전의 과학이 자연에 대한 철학적 탐구였다면 16~17세기에는 자연을 통제하려는 실용적인 노력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 섭정 시대 때 궁정 행정인으로 활동했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국가의 역할에 요구되는 자연철학을 강조하였다.  그는 관조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정면으로 반박하여 인간의 기술적 진보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베이컨의 등장으로 학문에서의 '실험' 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그의 자연철학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답게 베이컨은 자연을 이해하는데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으며 지식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방식은 중세 스콜라주의 철학자들의 특징과 비슷하다.  베이컨에게 '실험' 이란 자신이 이미 경험한 결과를 다시 한 번 검증하는 행위일뿐이었다. 

 

 

 토머스 홉스 (1588~1679)

 

후에 파스칼, 보일 등이 과학적인 검증 과정으로 이루어진 '실험철학' 이 성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부터 이어져 온 '자연철학' 의 영향력은 여전하였다.   <리바이어던>의 저자인 철학자 토머스 홉스마저 보일의 실험이 전혀 '자연철학' 적이지 않다고 반박하였다.    

 

 

  

  

자연현상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와  

자연현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자 했던 뉴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철학을 애초부터 고수하려는 의도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영국 경험론자들은 자연에 대한 지식을 획득하는데 귀납적인 방식과 경험을 강조하였으며 훗날 '뉴턴주의' 라는 과학철학 스타일을 형성하게 된다.    

뉴턴은 가설을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설명이라 하여, 이를 배격했다. 따라서 자연과학에 있어서 그저 현상을 정확하게 기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미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관념적, 이성적 고찰보다는 거시적 차원의 현상에 대한 경험적 기술에 치중했다.  뉴턴은 <광학>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빛을 입자라고 설명하면서도 빛 입자의 구체적 운동과 작용에 대해서는 어떤 실험적 증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뉴턴주의와는 반대로 데카르트주의는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관을 강조하였다.  세계와 자연의 모든 과정이 필연적이고도 자연적인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이성으로 그 기계적 인과관계를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봤다.  이들은 자연의 생물학적 현상들을 물리적, 화학적 과정으로 환원하여 설명하려고 하였다. 

책의 저자 피터 디어의 표현대로 베이컨에서부터 데카르트주의와 뉴턴주의 간의 논쟁의 시대동안 과학은 형이상학적이면서도 실증적인 면이 혼합된 잡종의 학문이었다.  

 

 

  과학혁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서 과학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는 시대에는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서로 다른 방식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피터 디어의 <과학혁명>은 자신의 책이 발간하기 5년 전에 쓰여진 동명 제목인 스티븐 샤핀<과학혁명>(영림카디널, 2002)에 응수하기 위해서 쓰여진 책이다.  스티븐 샤핀은 '과학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 주장함으로써 전통적인 학계의 주장에 맞서 도발하였지만 피터 디어는 샤핀의 주장을 정면에 반박하기보다는 샤핀의 관점대로 기존의 과학혁명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전 전회' 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의 선천적 형식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다고 설명하였다. 즉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시, 구질서의 파괴를 동반한 사고방식의 변혁을 강조하고 있다.  니체는 커다란 사유의 망치로 낡은 구 이론들을 파괴함으로써 '망치로 철학하기' 가 가능했겠지만 패러다임의 전환을 꾀한 과학자로 알려져 있는 코페르니쿠스는 니체처럼 '망치로 과학하기' 가 불가능했다.  아니, 아예 망치를 집어 들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17세기까지 자연 철학은 여전히 중세적인 사고 방식을 보존하고 있었으며, 근대 과학의 주요한 분야인 화학이나 생물학은 18세기에 와서야 ‘과학 혁명’에 해당하는 변화를 이룰 수 있었다. 신구의 과학 학문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구성요소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의 차는 있을지라도 통일성을 내포하면서 상호작용하여 새로운 양식의 과학으로 발전하였다.  로마 제국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과학혁명 역시 하루 아침에 근대사회로 전환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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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7-28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정말 다양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읽으시네요.
만화만 빼고 다 읽으시는것 같아요, 아, 판타지도 안 읽으시지.. ^^

저는 맹목적인 진리를 추구하던 때가 차라리 속편하구나 싶기도 해요.
칸트처럼 주관적인 현상학의 관념은 정말 피곤하거든요.
대체! 무엇인 진리인지 알 수도 없을 뿐더라, 아무것도 속단할 수 없으니까요. ㅎㅎ

cyrus 2011-07-28 19:36   좋아요 0 | URL
만화도 좋아해요. 판타지나 SF도 읽어보면 좋을텐데,,
아무래도 독서 습관에 변화를 준다는게 쉽지 않네요. ^^;;
현상학이라는 학문이 좀 그런 면이 있죠, 전 학기 때
현상학을 공부했었는데,, 추상적인 내용이라서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