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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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은 쇼다’. 우리나라 1세대 프로레슬러 故 장영철의 발언으로 우리나라의 프로 레슬링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WWE는 쇼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WWE는 아주 잘 짜인 쇼다. 트릭(trick)과는 다르다. 프로레슬링은 영화나 연속극처럼 자신의 배역에 따른 역할(entertainment)을 수행하는 것이다. WWE의 모든 경기의 승패는 경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있다. 하지만 이것을 문제 삼는 팬들은 거의 없다. WWE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킨다. 악역을 하는 선수가 선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동료 프로 레슬러 선수와의 급작스러운 갈등으로 인한 배신, 혹은 현 WWE 회장인 빈스 맥마흔과 그의 가족을 직접 각본상에 포함하며 권력에 놀아나는 레슬러들 등 실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진다. 물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잘 짜인 시나리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팬들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몸을 사리지 않은 선수들의 고난도 묘기에 열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프로레슬링 무대와 같다고 말했다. 소설가는 프로레슬러에 해당한다. 누구나 링 위에 오를 수 있다. 이 말인즉슨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링 한가운데에 선 소설가는 다음 상대를 기다린다.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쇼.” 그렇지만 링 위의 현장, 즉 문단(文壇)은 냉혹하다. 링이 널찍해도 거기에 올라오려는 소설가들이 너무나도 많다. 링은 포화 상태다. 소설가가 소설로 먹고살려면 끝까지 버티어 살아남아야 한다. 레슬링에 관심 없는 독자는 하루키의 표현이 크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이 소설과 같다고 말하다니.

 

나는 하루키가 소설가의 세계를 아주 적절하게 비유했다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자격은 없다. 독자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렸다면 원고지에 옮겨 써 내려 가면 된다. 소설이 다 완성되었으면 문단의 링 위에 오를 준비한다. 자신의 소설을 독자들에게 알릴 절호의 기회다. 사각 링 주변에는 곧 무대에 등장할 선수를 기다리는 수많은 관객이 있다. 선수가 링 위에 올라서면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한다.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문단의 링 위에 들어서게 될 신진 작가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가 쓴 소설이 마음에 들면 찬사를 보낸다. 반면, 소설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야유를 한다.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도 레슬링 경기가 지루하게 진행되면 실망한 관중들이 ‘우~~’하는 야유 소리를 낸다.

 

 

 

 

 

소설가의 세계는 ‘배틀 로열(battle royal)’이다. 배틀 로열은 레슬링 경기 방식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10명 혹은 20명이 동시에 링 위에 경기한다. 링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순간, 탈락한다. 탈락한 선수는 패자 대열에 합류한다. 배틀 로열의 승자가 되려면 동료 선수들을 링 밖으로 몰아내면서 끝까지 링 위에 살아남으면 된다. “자, 올 테면 얼마든지 오시죠.” 용기가 대범한 신진 작가는 자신이 배틀 로열에 당당히 우승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얼마 안 돼서 링 밖으로 떨어진다. 링 위에 끝까지 살아남은 승자의 선수에게는 ‘챔피언’이라는 화려한 영광이 주어진다. 문단의 링 위에 오래 살아남으면서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하고, 독자와 비평가로부터 인정받은 작가에게는 명예로운 ‘문학상’이 주어진다.

 

레슬러의 선수 생활은 길어봤자 평균적으로 10년이다. 그만큼 전성기도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 선수들의 공격에 끄떡없던 튼튼한 육체가 점점 노쇠화되면 경기에 뛸 수가 없다. 운동 신경이 상당히 좋으나 불의의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는 레슬링 선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전성기는 얼마나 될까. 하루키는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을 10년으로 잡았다. 작가 생활 10년째로 접어들면 창조력이 감퇴한다. 이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이전보다 더 나은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하루키가 말하는 ‘영속적인 자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는 물고기처럼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소설가의 숙명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역설적인 말이지만, 소설 한 편 잘 쓰려면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글을 써야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작업이 몹시 둔해 빠진 일이라고 말한다. 소설가는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원고지 속으로 들어간다. 사각의 원고지는 작가 혼자만 올라서는 링이다. 문단의 링에 오르기 전 작가는 원고지 한가운데 앉아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고심한다. 여기에 대해서 하루키는 글을 지속해서 쓰려면 끈질기고 다부진 기본 체력을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전하는 하루키의 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가의 링에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오래 버티는 건 아니란다.’ 그런데 정작 하루키 본인은 지금까지 소설을 쓰면서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문장을 만들 때가 항상 즐겁단다. 이 사람 뭐야, 무서워!

 

 

 

 

 

하루키를 프로레슬러로 비유하면 ‘WWE의 아이콘’ 존 시나(John cena)에 가깝다. 그는 경기에 쉽게 지지 않는다. 경기 우승 횟수가 많다. 그는 의료진조차 최소 6개월의 회복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을 내린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과 3개월도 안 돼 링으로 복귀한 적이 있다. 꾸준함의 대명사로 인정받은 존 시나는 헐크 호건을 이은 ‘WWE의 선역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프로레슬러 팬들이 만든 존 시나의 별명이 ‘존 나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존 나쎄’다. 칠순을 눈앞에 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하게 소설을 쓰고 있다. 문단의 링 위에 서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하루키의 팬은 아니지만, 고독한 글쓰기를 놓치지 않는 그가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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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6-05-1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재밌게 읽고 갑니다. ㅎㅎ

cyrus 2016-05-19 15:59   좋아요 0 | URL
알라딘 북플에 진짜 재미있게 글 쓰시는 몇 몇 분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님, 마태우스(서민)님 블로그 즐찾 해두세요. ^^

보물선 2016-05-18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존나쎄^^

cyrus 2016-05-19 16:00   좋아요 0 | URL
띄어쓰기를 잘 해야 됩니다. ㅎㅎㅎ

수이 2016-05-18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팬은 아니지만 팬이었던 적이 있었는데_ 현역 작가라는 점에서 역시 존경심.

cyrus 2016-05-19 16:01   좋아요 0 | URL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도 열심히 쓰잖아요.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에요.

호빵 2016-05-1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나쎄였군요 ㅋㅋㅋ

cyrus 2016-05-19 16:02   좋아요 0 | URL
하루키가 마라톤을 즐겨 하는 이유도 기초 체력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

yamoo 2016-05-18 2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의 문학상은 돌려먹기 같다는..^^;;
근데, 워째 하루키의 비유가 좀 거시기 하네요. 소설가는 1:100의 싸움이 아닌 거 같습니다. 누구나 복수로 사랑받을 수 있으니까요. 하루키가 비유로 든 그로레슬링은 녹다운 방식인 거 같은데..


어쨌거나 타이틀은 정말 재밌네요~ㅎ 존 나쎄..ㅋㅋ

cyrus 2016-05-19 16:08   좋아요 0 | URL
사실 이 글은 10% 부족한 서평입니다. 제가 약 빨면서 글을 쓰는 바람에 하루키의 표현을 제 마음대로 해석했습니다. 저는 하루키의 ‘프로레슬링’ 발언 의미를 경쟁 관계로 해석했어요. 그렇다 보니 뜬금없이 WWE, 존 시나 얘기까지 나오게 됐어요. 그러니까 하루키는 링 위에 혼자 서 있는 레슬러(소설가)가 스스로 지쳐가는 과정을 알려주고 싶었을 겁니다. ^^

yureka01 2016-05-18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문학은 타고난 글의 근육이 있어야 되더군요..ㅎㅎㅎㅎ

cyrus 2016-05-19 16: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양한 소재의 생각을 영양분으로 삼아 글의 근육을 만들어야합니다. ^^

비로그인 2016-05-18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로 초고를 쓰고 다시 일본어로 자신의 작품을 번역한다는 하루키의 집필방식이 전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ㅜㅜ 진정 `존 나쎄`다니!! ㅎㅎㅎ

cyrus 2016-05-19 16:12   좋아요 0 | URL
그 내용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영어로 초고를 써서 다시 번역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나 될 지 궁금했어요. 정말 하루키는 대단한 능력자입니다. ^^

보슬비 2016-05-19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질투나요. 존 나쎄서...

cyrus 2016-05-19 16:14   좋아요 0 | URL
소설을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쓰기가 어렵다고 말해 놓고선, 자기는 글쓰기가 힘들지 않다고 했으니 질투가 날 만합니다. ^^

transient-guest 2016-05-19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문단을 읽고 문단은 배틀로얄 같구나 했는데, 바로 쓰셨네요.ㅎㅎㅎ 하루키와 존 씨나...재미있는 비교 같습니다.

cyrus 2016-05-19 16:15   좋아요 0 | URL
간만에 약 빨고 썼습니다. ㅎㅎㅎ
 

 

 

어제 최측의농간 출판사로부터 새 책을 소개한 내용을 담은 자료를 메일로 통해 받았습니다. 평소 관심 있는 출판사로부터 새 책 소식을 전해 듣는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새 책이 5월 25일에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사실 여림이라는 이름의 시인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어제 처음 알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저는 알지 못하는 책에 침묵하겠습니다. 신간 소식을 먼저 알려준 출판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에 나오는 책은 꼭 사겠습니다. 

 

글의 분량상 글 일부 내용을 부득이하게 뺐음을 알립니다.  

 

 

 

 

 

밤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꿈꿀 수 없듯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말[詩]을 얻을 수 없다.

……

내가 지금, 왜, 침묵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 침묵처럼 무섭고 슬프게 살다 간, 한 시인을 생각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를 몇 편 보내어 당선의 영예를 안았을 뿐, 그 이후 어떤 곳에도 작품 한편 발표하지 않았으며, 시인이라는 관사를 쓰고 어느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홀로 남양주의 작은 아파트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 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뒤늦게 친구들이 찾아가 시신을 불태우고 재를 산과 강에 뿌렸다. 그가 여림이었다.

 

최하림, 「그는 왜 침묵을 살아야 했을까」 중에서

 

 

 

 

 

전화는 언제나 불통이었다. 사람들은

 

늘 나를 배경으로 지나가고 어두워진

하늘에는 대형 네온이 달처럼

황망했었다. 비상구마다 환하게 잠궈진

고립이 눈이 부셨고 나의 탈출은 그때마다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살아있는 날들이 징그러웠다. 어디서나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고 목발을 쥔 나의 손은 수전증을 앓았다.

 

 

여림,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 전문.

 

 

 

계단 끝에 선 시인, 우리에게 여림은 무엇보다도 ‘응답 없음’의 시인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절실히 알 것이다. 시인 ‘여림’(본명 여영진)의 유고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2003, 작가)를 손에 넣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시집들이 그렇듯 초판조차 겨우 소진된 채 잊혀진 이 시집은 오히려 절판 후에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도서관에서도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라는 이 기이한 시집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그의 시를 알게 된 많은 독자들은 그러므로 유고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조차 제대로 접하기 어려웠다. 단지 누군가가 부분적으로 필사한 노트나 인터넷 공간의 한 귀퉁이에서, 혹은 어떤 시인들의 아주 짧은 글 토막에서 그의 시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들은 시인을 따라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발화해버린 것만 같았다.

 

 

여림은 등단 후에도 자신의 시들이 묶여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던 시인이었다. 시인이 되고자 서울에 왔으나, 역설적으로 시를 떠나고자 서울을 탈출하였을 때, 세상은 그가 시인임을 알아주었다. 신춘문예를 다룬 한 칼럼에서 비평가 황현산은 시인이 스스로 자신을 시인으로서 자각, 선언하는 순간이야말로 한 인간이 시인으로 태어나는 가장 중요한 실존의 전환점이라고 쓴 적이 있다.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 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던 여림은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시인이었다. 스스로를 고독 속에 가둔 채 끈질기고 간절하게 시인으로 살다 떠났던 사람. 세상에, 시에 사로잡힐 때마다 여림은 늘 그보다 몇 발짝씩은 더 절망하였다.

 

 

여림 전집의 기획은 유고시집의 복간 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15년 가을이었다. 기획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유고시집에 묶이지 못했던 미발표 원고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 그 외에도 많은 자료와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간 계획은 자연스럽게 전집이라는 신간 계획으로 수정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잠들어 있던 다른 작품들을 한 편이라도 더 읽어 보고 싶었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경험을 전하고 싶었다. 유고시집에 포함되지 않았던 원고 외에도 적지 않은 분량의 잠들어 있던 원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오랜 협의와 원문 대조, 편집, 교열 과정을 거쳐 여림 유고 전집의 출간 작업은 구체화 되었다. 그의 시를 더 읽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고 찾다 지쳐, 서서히 그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책에는 무엇보다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를 한편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 했던 어떤 사람들에게 기쁜 놀라움을 전하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다. ‘안개 속으로 걸어간’ 시인 여림을 우리는 이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시인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최측의농간에서는 미완성 상태의 짧은 단락으로 남아 있는 유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을 시인 자신의 운명과 그를 추적하는 우리들 삶의 한 컷에 대한 중층 은유로서 전집의 제목으로 수습하였다. 여림은 응답 없음의 시인이 아니었음을, 그의 전집이 말해 줄 것이다. ‘살아가는 일로서만/모든 것들이 이루어지질 않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고민했던 여림이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이라고 썼을 때, 그는 이미 우리에게 응답하였다. 잡스러운 전파들의 공해 속에서 시인 여림을 수신하기 위하여 최측의농간은 안테나 하나를 간신히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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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8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18 20:24   좋아요 1 | URL
시인의 약력은 직접 시집을 사서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시가 뭐고?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
칠곡 할매들 지음, (사)인문사회연구소 기획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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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자기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글쓰기는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감추었던 내면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시인은 몸을 감싼 외투를 벗어본다. 옷을 벗는 행위는 부끄럽다. 사실 글쓰기는 부끄러운 일이다. 감추었던 내면을 한 편의 글로 표현해서 수줍게 고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은 기교나 기술이 아니라 진심을 담는 것이다. 정신의 치유는 자기 안에 감춰진 자신을 찾아내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람마다 치유과정은 조금씩 다를 듯하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치유하는 글쓰기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랄까.

 

경북 칠곡군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이 지은 시집 시가 뭐고?를 들여다보면 글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치유의 도구인지 쉽게 드러난다. 자식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는가 하면,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회한도 털어놓는다. 그저 담담하게 지나온 일생을 돌아보면서 느낀 감정들을 꾸밈없이 써내려갔다. 화려한 기교와 인공조미료를 가득 뿌린 듯한 문장으로 멋 부리기 하는 시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맞춤법이 틀리지만,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섞은 할머니들의 입말이 시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

시를 쓰라 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시가 뭐고소화자, 55)

 

 

사랑이라카이

부끄럽따

내 사랑도

모르고 사라따

절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그래도 뽀뽀는 안해밧다

 

(‘사랑박월선, 106)

 

 

할머니들에게 시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다. 다른 곳에서 말하지 못한 경험들을 마음껏 풀어낸다. 가부장제 사회규범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사회적 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 후자의 경험에 대해 여성들은 경험 자체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결국 상처로 남게 한다. 이 때문에 시의 주된 소재가 가부장제 사회규범의 굴레에 벗어나는 내면의 성장이다.

 

 

어릴 적

산골짝에 남자아이들

학교 보내주고 여자들은

공부하면 남의 집에 간다고

보내주지 않았다 남동생

둘은 학교 가고

늦게 언니들은 서당에

갔다 나는 소꼴 베러 다니고

조금 베면 아버지 쫓아냈다

마을회관 한글 공부

내 눈을 뜨게 하고

흐리게 보였던 간판이

환하게 보인다

 

(‘한글 공부박후불, 51)

 

 

어린 시저레 초등학교 3학년예

아버님 살든 집을 다시 짓타가

다처서 병원에 수술을 밧게 댓다

병원생활 일년을 하다보니 엄마가

하신 말씀이 우리 분란이 학교 고마도라

우리집 살림을 사라야 댄다 여자은

공부를 안해도 댄다 하셨다

학교로 안 가니 너무 맘이 아파 밥도 안 먹고

누버서 우럿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대로 안됐다 울고 있으니 엄마가

아버지 병원 대원하면 학교 보내주겠다

그 말에 속았다 이레 속고 저레 속고

한평생 다 갔다

 

(‘이레 속고 저레 속고이분란, 59)

 

 

 

가부장제 사회의 남편들은 사회에서 꽤 근사하고 고상하게 알려졌지만, 그 아내들이 겪는 아픔이나 희생은 묻혀 있었다. 밝은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와 같다. 남편이 집안 활동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가정일수록 아내가 겪는 아픔은 크다. 이런 아내로 살아왔던 할머니들의 내면은 치유할 게 많다. 적적한 산골에서 친구도 없이 살자니 누가 치유해주는 것도 아니다. 마음속에 드리운 그림자는 누가 대신 걷어주지 못한다. 스스로 걷어내는 수밖에. 할머니들은 시를 쓰면서 가슴속에 들어 있는 납덩이하나씩을 녹아 없앤다. 녹아내린 감정의 응어리를 로 주조한다. 시 쓰기는 상처받은 경험을 의미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경험과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경험을 공유한 다른 할머니들의 공감이다. 할머니들이 시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할머니들을 향한 믿음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자신을 당당히 펼치기 위해서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쓴다. 그러나 치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쓰기는 남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 된다. 억울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이를 토해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병이 된다. 말할 상대조차 마땅치 않을 때 글은 몹시 소중한 상대가 된다. 시 쓰는 할머니들은 과거 상처를 끄집어내어 핥고 어루만지고 보듬어간다. 지금까지 안고 있는 문제도 곰곰이 마음속으로 되씹으면서 안으로 소화한다. 이럴 때 시는 오랫동안 막혀 있던 마음을 뻥 뚫려주는 소화제가 된다. 할머니의 시 속에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여생을 건강하게 보내려는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편으로는 시는 아픔의 상처를 다른 느낌으로 재생한다는 뜻에서,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와도 같다. 할머니들의 시를 읽으면 오랫동안 외롭게 내면의 치유에 집중한 그 힘이 조금씩 가슴 속에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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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2016-05-1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힐링이 되는 듯 합니다 ^^

cyrus 2016-05-18 16:21   좋아요 0 | URL
여태까지 읽은 시집 중에서 가장 마음 편하게 읽었습니다.

singri 2016-05-1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레속고 저레속고 ㅡㅜ

cyrus 2016-05-18 16:21   좋아요 0 | URL
이 시가 가장 슬펐습니다. ㅠㅠ

쪼님 2016-05-17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글 잘 읽고 있습니다~^^

cyrus 2016-05-18 16:22   좋아요 0 | URL
긴 내용의 글을 북플로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yureka01 2016-05-17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억눌린 마음이 많았을까요.ㅠ.ㅠ

cyrus 2016-05-18 16:23   좋아요 1 | URL
할머니들은 속마음을 얘기 안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가 가족들이 눈치 볼까 봐 그냥 꾹 참고 있는 것이죠. ㅠㅠ

비로그인 2016-05-18 0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ㅜㅜ

cyrus 2016-05-18 16:24   좋아요 1 | URL
재미있는 시뿐만 아니라 좀 슬픈 내용의 시도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8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은근 진국이죠..ㅎㅎ

cyrus 2016-05-18 16:25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생각했던 시의 정의를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이번 주부터 시작해서 매주 한 편씩 외국 공포문학 작품을 소개해볼까 한다. 우선 단편소설 위주로 작품을 찾아볼 생각이다. 기록한 글의 양이 어느 정도 축적되면, 장편소설 쪽에도 눈을 돌려보겠다.

 

 

 

 

No. 1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 - 원숭이 손 (The Monkey’s Paw)

 

 

 

 

영국 출신 작가 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는 화려한 부를 누리는 삶에 욕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동료 작가 아놀드 베넷은 제이콥스가 여섯 편의 단편소설을 집필하면서 얻는 수입을 거절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 밝혔다. 작가로 활동하기 전 제이콥스는 우체국의 저축은행 업무를 담당하는 서기였다. 그는 꽤 이른 나이인 열여섯 살 때부터 우체국에 출근하기 시작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었으니 슬슬 우체국 일이 따분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제이콥스는 남아도는 시간에 틈틈이 글을 썼을 것이다. 1899년에 우체국 서기를 그만두었는데,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제이콥스는 자신이 쓴 단편소설 한 편이 지금까지도 널리 회자할 줄은 꿈에 몰랐을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쓴 단편소설이 1980년 미국 워싱턴포스트가 선정한 영문학 걸작 50대 작품 목록에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소설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원숭이 손>이다. <원숭이 손>1902년에 나온 단편소설집 The Lady of the Barge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소설의 주요 소재는 원숭이 손이 아닌 세 가지 소원이다. <원숭이 손>은 사랑스럽고 닭살 돋는 노랫말로 알려진 이승환의 세 가지 소원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원숭이 손은 미라 상태가 된 동물 사체의 일부다. 그런데 원숭이 손은 특별한 힘을 지녔다. 세 가지 소원을 빌면 실제로 이루어진다. 화이트 씨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으로부터 원숭이 손 미신을 듣게 되었다. 손님은 원숭이 손을 탐내는 화이트 씨를 향해 무슨 일이 벌어져도 후회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화이트 씨는 첫 번째 소원으로 집값을 충당할 수 있는 생활비 200파운드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200파운드가 화이트 씨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화이트 씨의 외아들이 직장에서 일하던 도중, 기계에 끼여 사망하고 말았다. 아들 회사로부터 받은 위로금 액수가 200파운드였다.

 

아들을 잃은 슬픔에 정신적 충격으로 울부짖는 화이트 씨의 아내가 남편에게 두 번째 소원을 빌어서 아들을 되살리자고 말했다. 원숭이 손의 섬뜩한 분위기에 혼란스러웠던 화이트 씨는 아내의 소원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렇게 두 번째 소원을 빌기로 했다. 그러자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내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생각에 기쁨의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문을 열어 아들을 반갑게 맞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 순간, 화이트 씨는 이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과연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일까? 화이트 씨는 두 번째 소원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믿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끔찍하게 손상된 아들의 시체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소설 마지막에 화이트 씨는 세 번째 소원을 빈다. 그 마지막 소원의 내용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직접 소설을 읽어보시라.

 

 

 

 

 

 

 

 

 

 

 

 

 

 

 

 

 

 

 

 

<원숭이 손>의 원제(The Monkey’s Paw)에 있는 ‘Paw’는 동물의 발톱이 달린 발 또는 사람의 손을 뜻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알려진 제목이 원숭이 손이다. <원숭이 손> 플롯은 영화로 만들어지고 했으며,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 <신들의 워드프로세스><원숭이 발>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원숭이 손>은 미신이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서서히 파괴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흔히 미신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버리지만, 가끔 확신적 믿음을 버리지 못하기도 한다. 미신은 미래를 점치고 규명하는 형태로서 마술과 같이 무조건적인 직관과 행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미신은 막연한 기대와 허상을 좇는 데서 비롯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과 모호성, 위기나 위험 증대로 인한 심리적, 정신적 압박이 클수록 미신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 미신이 미신을 낳는 상황은 주술을 탄생시킨다. 미신으로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이 많을수록 주술사가 번성한다. 삶의 불안과 운명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미신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윌리엄 W. 제이콥스의 작품이 있는 번역본>

 

 

* 원숭이 손 (The Monkey’s Paw, 1902)

 

 

 

 

 

 

 

 

 

 

 

 

 

 

 

 

 

 

 

공포특급 5 : 세계편정태원 엮음 / 한뜻 (1996, 품절)

 

 

낡은 극장에서 생긴 일 : 세계환상문학 걸작선알베르토 망겔 엮음 / 문학세계사 (1997, 절판)

 

환상과 공포의 세계명작괴담문화사랑 (1998, 절판)

 

세계 호러 걸작선정진영 역 / 책세상 (2004)

※ 제목을 <원숭이 발>로 옮겼다. 작품 발표 연도를 '1920년'으로 잘못 소개했다. (327쪽)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자유문학사 (2004, 품절)

 

 

 

* 세 자매 (The Three Sister, 1914)

 

 

 

 

 

 

 

 

 

 

 

 

 

 

 

 

세계 호러 단편 100정진영 역 / 책세상 (2005)

 

 

 

* 훼방 (The Interruption, 1926)

 

 

 

 

 

 

 

 

 

 

 

 

 

 

 

단편 걸작 환상 문학판도라북스 (e-Book,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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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프 2016-05-17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아악! 세번째 소원이 무엇인지요???

cyrus 2016-05-18 16:27   좋아요 1 | URL
결말을 스포일러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양해바랍니다. 네이버 검색창에 ‘원숭이 손’, ‘제이콥스 원숭이의 손’이라고 입력하면, 줄거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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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가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 펼친다. 몇 년 전에 읽은 책이다. 펴보니 군데군데 밑줄까지 그어져 있다. 어떤 쪽에는 연필로 끼적여 적은 나름대로 주석도 있다. 그런데 당혹스러운 것은 책의 내용이 생소하다. 책 속의 기록은 남아 있어도 머릿속 기록은 이미 지워지고 없다.

 

사람은 누구나 기억과 망각 사이의 균형을 잡으면서 살아간다. 잊지 못하는 것도 무서운 고통이지만 너무 잘 잊는 것 또한 끔찍한 일이다. 남들은 생생하게 떠올리는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덜컥 겁이 난다. 인간이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는 건 단 2초에 불과하다. 그 이후는 기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도 기억 덕분이다. 단기기억은 금방 사라진다. 반면 같은 정보가 반복되거나 개인적 감정과 얽히면 장기 기억으로 머릿속에 남는다. 또 시각과 감성, 공간이 한데 어우러진 경험이나 지식일수록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망각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불상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알츠하이머병은 온전한 의식과 정신을 말살한다. 자그마한 회복의 가능성도 남겨두지 않는 완벽한 불치병이다.

 

사랑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만큼 애절한 게 있을까. 치매로 과거를 잃어가는 이와 어떻게든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의 사투는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알츠하이머병은 백혈병과 더불어 멜로영화의 단골 소재다.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은 알츠하이머병이 소재다. 그러나 수많은 로맨스에서 반복된, 닳고 닳은 얘깃거리가 아니다. 하얗게 지워져 가는 기억과 그것을 붙들고 싶은 욕망, 그리고 이야기를 통해 생의 원초적 의문을 매만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에세이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그려낸다.

 

솔닛은 자신의 어머니 곁에 갑작스럽게 찾아온 알츠하이머란 놈을 만났다. 그렇게 어머니의 뇌는 잠들어버렸다. 마다가스카르 섬에 사는 나방은 잠든 새의 눈물을 마신다고 한다. 나방은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잠든 새의 눈물에 접근한다. 그 눈물엔 뭔가 달콤한 유혹이 있는 것 같다. 새와 나방은 솔닛과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리는 비유다. 꿈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불청객을 맞게 된 그녀는 버텨내야만 할 슬픔에 천천히 자신을 적신다. 슬픔을 먹으면서 지낸다. 그런데 그 슬픔은 결코 달콤할 수가 없다. ‘사랑하는 것’들이 점점 잊힌다는 것은 고통스럽다. 메마르면서 사라지는 눈물 한 방울을 훔치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힘겨운 고통의 나날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

 

솔닛은 어머니의 망각을 받아들이는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했다. 망각의 미로 속에 강제로 유폐된 기억의 조각들을 찾기 위해 이야기의 실타래를 끊임없이 푼다. 그녀의 이야기는 살구 열매부터 시작해서 프랑켄슈타인, 체 게바라 등 어지러이 오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럼에도 전혀 소란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끄럽게 이어 붙이는 이야기의 마름질 솜씨가 뛰어나다. 그녀의 글에서 생의 무상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읽기, 쓰기, 듣기 행위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삶을 긍정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종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사랑하라고, 미워하라고. 두 눈으로 보라고 혹은 눈을 감으라고. 종종, 아니 매우 자주,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 그렇게 올라타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채찍질을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 주면, 우리는 아무 의심 없이 그걸 따른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이야기에 질문을 던지고, 잠시 멈추고, 침묵에 귀 기울이고, 이야기에 이름을 지어 주고, 그런 다음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15쪽)

 

 

이야기가 있는 삶은 생동감이 넘친다. 솔닛은 ‘이야기가 우리를 올라탄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을 걸수록 깨어 있는 상태는 유지된다. 그렇게 우리는 이야기꾼이 된다. 망각의 그림자를 피해 새로 발견한 일상의 세계 속에 발을 딛게 되어 거기에 정착하려는 여행자다. 기억을 잃어버린 이야기꾼은 ‘짐 없는 여행자’다. 망각과 함께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험난하다. 기억들이 최근의 것부터 서서히 삭제되고, 남의 얘기를 듣는 행위조차 너무나 피곤하다. 말과 글이 엉키고, 소리와 이미지가 뒤섞이는가 하면, 환각과 환청이 찾아온다. 일기장과 약이 아니면 오늘이 며칠인지도 알 수 없다.

 

각자의 찬란한 기억들은 누구나 한번은 지나왔음직한 과거의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 들어 있었다. 그 특별하지 않은 ‘과거의 것’들은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 때로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현재를 이룬 과거를 관조하고 촘촘히 기억해내는 과정은 현재와 미래만을 주시하는 일상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세상에는 잊어야 할 것과 잊어도 될 것,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많이 잊는다. 겪은 일을 모두 기억한다면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살 수 없기에 인간은 선택적 망각을 감행한다. 그러나 망각이 주는 부재의 고통은 극복되거나 잊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들도 왔다가 언젠가는 사라진다. 이야기라는 생의 한 조각 하나하나 잘 모아서 거대한 인생의 모자이크를 완성해갈 도리밖에 없다.

 

 

 

※ 딴죽걸기

 

* 파멸로 이어졌던 유럽 세계와의 접촉, 1972년 부활절에 시작된 그 접촉 이후에 이스터 섬의 원주민이던 라파누이는, 위험하고 예측할 수 없는 그 의식을 좀 더 삶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94쪽, 초판 1쇄)

 

⇒ 이스터 섬은 1722년 부활절에 처음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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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6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17 12:51   좋아요 1 | URL
사소한 것들의 기억이 너무 쉽게 잊히는 과정이 죽음보다 더 두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