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뭐고?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
칠곡 할매들 지음, (사)인문사회연구소 기획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5년 10월
평점 :
품절


 

 

시는 자기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 글쓰기는 옷을 벗고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감추었던 내면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시인은 몸을 감싼 외투를 벗어본다. 옷을 벗는 행위는 부끄럽다. 사실 글쓰기는 부끄러운 일이다. 감추었던 내면을 한 편의 글로 표현해서 수줍게 고백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것은 기교나 기술이 아니라 진심을 담는 것이다. 정신의 치유는 자기 안에 감춰진 자신을 찾아내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람마다 치유과정은 조금씩 다를 듯하다. 내 식으로 말하자면 치유하는 글쓰기는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랄까.

 

경북 칠곡군에 거주하는 할머니들이 지은 시집 시가 뭐고?를 들여다보면 글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치유의 도구인지 쉽게 드러난다. 자식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는가 하면,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회한도 털어놓는다. 그저 담담하게 지나온 일생을 돌아보면서 느낀 감정들을 꾸밈없이 써내려갔다. 화려한 기교와 인공조미료를 가득 뿌린 듯한 문장으로 멋 부리기 하는 시와는 확연하게 다르다. 맞춤법이 틀리지만,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섞은 할머니들의 입말이 시에서 생생하게 느껴진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논에 들에

할 일도 많은데

공부시간이라고

일도 놓고

헛둥지둥 왔는데

시를 쓰라 하네

시가 뭐고

나는 시금치씨

배추씨만 아는데

 

(‘시가 뭐고소화자, 55)

 

 

사랑이라카이

부끄럽따

내 사랑도

모르고 사라따

절을 때는 쪼매 사랑해조대

그래도 뽀뽀는 안해밧다

 

(‘사랑박월선, 106)

 

 

할머니들에게 시는 자기 고백적 글쓰기다. 다른 곳에서 말하지 못한 경험들을 마음껏 풀어낸다. 가부장제 사회규범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사회적 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뉜다. 후자의 경험에 대해 여성들은 경험 자체를 부정하거나 자신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결국 상처로 남게 한다. 이 때문에 시의 주된 소재가 가부장제 사회규범의 굴레에 벗어나는 내면의 성장이다.

 

 

어릴 적

산골짝에 남자아이들

학교 보내주고 여자들은

공부하면 남의 집에 간다고

보내주지 않았다 남동생

둘은 학교 가고

늦게 언니들은 서당에

갔다 나는 소꼴 베러 다니고

조금 베면 아버지 쫓아냈다

마을회관 한글 공부

내 눈을 뜨게 하고

흐리게 보였던 간판이

환하게 보인다

 

(‘한글 공부박후불, 51)

 

 

어린 시저레 초등학교 3학년예

아버님 살든 집을 다시 짓타가

다처서 병원에 수술을 밧게 댓다

병원생활 일년을 하다보니 엄마가

하신 말씀이 우리 분란이 학교 고마도라

우리집 살림을 사라야 댄다 여자은

공부를 안해도 댄다 하셨다

학교로 안 가니 너무 맘이 아파 밥도 안 먹고

누버서 우럿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대로 안됐다 울고 있으니 엄마가

아버지 병원 대원하면 학교 보내주겠다

그 말에 속았다 이레 속고 저레 속고

한평생 다 갔다

 

(‘이레 속고 저레 속고이분란, 59)

 

 

 

가부장제 사회의 남편들은 사회에서 꽤 근사하고 고상하게 알려졌지만, 그 아내들이 겪는 아픔이나 희생은 묻혀 있었다. 밝은 빛에 가려진 어두운 그림자와 같다. 남편이 집안 활동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가정일수록 아내가 겪는 아픔은 크다. 이런 아내로 살아왔던 할머니들의 내면은 치유할 게 많다. 적적한 산골에서 친구도 없이 살자니 누가 치유해주는 것도 아니다. 마음속에 드리운 그림자는 누가 대신 걷어주지 못한다. 스스로 걷어내는 수밖에. 할머니들은 시를 쓰면서 가슴속에 들어 있는 납덩이하나씩을 녹아 없앤다. 녹아내린 감정의 응어리를 로 주조한다. 시 쓰기는 상처받은 경험을 의미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경험과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경험을 공유한 다른 할머니들의 공감이다. 할머니들이 시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할머니들을 향한 믿음의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글을 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자신을 당당히 펼치기 위해서 쓰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쓴다. 그러나 치유라는 관점에서 볼 때 글쓰기는 남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 된다. 억울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이를 토해내지 않으면 그야말로 병이 된다. 말할 상대조차 마땅치 않을 때 글은 몹시 소중한 상대가 된다. 시 쓰는 할머니들은 과거 상처를 끄집어내어 핥고 어루만지고 보듬어간다. 지금까지 안고 있는 문제도 곰곰이 마음속으로 되씹으면서 안으로 소화한다. 이럴 때 시는 오랫동안 막혀 있던 마음을 뻥 뚫려주는 소화제가 된다. 할머니의 시 속에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여생을 건강하게 보내려는 열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편으로는 시는 아픔의 상처를 다른 느낌으로 재생한다는 뜻에서,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와도 같다. 할머니들의 시를 읽으면 오랫동안 외롭게 내면의 치유에 집중한 그 힘이 조금씩 가슴 속에 스며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레프 2016-05-17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힐링이 되는 듯 합니다 ^^

cyrus 2016-05-18 16:21   좋아요 0 | URL
여태까지 읽은 시집 중에서 가장 마음 편하게 읽었습니다.

singri 2016-05-17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레속고 저레속고 ㅡㅜ

cyrus 2016-05-18 16:21   좋아요 0 | URL
이 시가 가장 슬펐습니다. ㅠㅠ

쪼님 2016-05-17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항상 좋은글 잘 읽고 있습니다~^^

cyrus 2016-05-18 16:22   좋아요 0 | URL
긴 내용의 글을 북플로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yureka01 2016-05-17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억눌린 마음이 많았을까요.ㅠ.ㅠ

cyrus 2016-05-18 16:23   좋아요 1 | URL
할머니들은 속마음을 얘기 안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가 가족들이 눈치 볼까 봐 그냥 꾹 참고 있는 것이죠. ㅠㅠ

비로그인 2016-05-18 01: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ㅜㅜ

cyrus 2016-05-18 16:24   좋아요 1 | URL
재미있는 시뿐만 아니라 좀 슬픈 내용의 시도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18 11: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은근 진국이죠..ㅎㅎ

cyrus 2016-05-18 16:25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생각했던 시의 정의를 바꾸게 만들었습니다.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