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최측의농간 출판사로부터 새 책을 소개한 내용을 담은 자료를 메일로 통해 받았습니다. 평소 관심 있는 출판사로부터 새 책 소식을 전해 듣는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새 책이 5월 25일에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사실 여림이라는 이름의 시인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어제 처음 알았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저는 알지 못하는 책에 침묵하겠습니다. 신간 소식을 먼저 알려준 출판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번에 나오는 책은 꼭 사겠습니다. 

 

글의 분량상 글 일부 내용을 부득이하게 뺐음을 알립니다.  

 

 

 

 

 

밤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꿈꿀 수 없듯이 침묵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말[詩]을 얻을 수 없다.

……

내가 지금, 왜, 침묵을 말하고 있느냐 하면, 침묵처럼 무섭고 슬프게 살다 간, 한 시인을 생각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인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를 몇 편 보내어 당선의 영예를 안았을 뿐, 그 이후 어떤 곳에도 작품 한편 발표하지 않았으며, 시인이라는 관사를 쓰고 어느 자리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홀로 남양주의 작은 아파트에서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 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다. 뒤늦게 친구들이 찾아가 시신을 불태우고 재를 산과 강에 뿌렸다. 그가 여림이었다.

 

최하림, 「그는 왜 침묵을 살아야 했을까」 중에서

 

 

 

 

 

전화는 언제나 불통이었다. 사람들은

 

늘 나를 배경으로 지나가고 어두워진

하늘에는 대형 네온이 달처럼

황망했었다. 비상구마다 환하게 잠궈진

고립이 눈이 부셨고 나의 탈출은 그때마다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살아있는 날들이 징그러웠다. 어디서나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고 목발을 쥔 나의 손은 수전증을 앓았다.

 

 

여림, 「계단의 끝은 벼랑이었다」 전문.

 

 

 

계단 끝에 선 시인, 우리에게 여림은 무엇보다도 ‘응답 없음’의 시인이었다. 아는 사람들은 절실히 알 것이다. 시인 ‘여림’(본명 여영진)의 유고시집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2003, 작가)를 손에 넣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시집들이 그렇듯 초판조차 겨우 소진된 채 잊혀진 이 시집은 오히려 절판 후에야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도서관에서도 『안개 속으로 새들이 걸어간다』라는 이 기이한 시집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그의 시를 알게 된 많은 독자들은 그러므로 유고시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조차 제대로 접하기 어려웠다. 단지 누군가가 부분적으로 필사한 노트나 인터넷 공간의 한 귀퉁이에서, 혹은 어떤 시인들의 아주 짧은 글 토막에서 그의 시를 그것도 부분적으로만 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시들은 시인을 따라 닿을 수 없는 저편으로 발화해버린 것만 같았다.

 

 

여림은 등단 후에도 자신의 시들이 묶여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했던 시인이었다. 시인이 되고자 서울에 왔으나, 역설적으로 시를 떠나고자 서울을 탈출하였을 때, 세상은 그가 시인임을 알아주었다. 신춘문예를 다룬 한 칼럼에서 비평가 황현산은 시인이 스스로 자신을 시인으로서 자각, 선언하는 순간이야말로 한 인간이 시인으로 태어나는 가장 중요한 실존의 전환점이라고 쓴 적이 있다. 고독하게 살면서 밤마다 술을 마시고 골목을 배회하고 시를 쓰다가 죽었던 여림은 등단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시인이었다. 스스로를 고독 속에 가둔 채 끈질기고 간절하게 시인으로 살다 떠났던 사람. 세상에, 시에 사로잡힐 때마다 여림은 늘 그보다 몇 발짝씩은 더 절망하였다.

 

 

여림 전집의 기획은 유고시집의 복간 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15년 가을이었다. 기획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유고시집에 묶이지 못했던 미발표 원고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 그 외에도 많은 자료와 작품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복간 계획은 자연스럽게 전집이라는 신간 계획으로 수정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잠들어 있던 다른 작품들을 한 편이라도 더 읽어 보고 싶었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경험을 전하고 싶었다. 유고시집에 포함되지 않았던 원고 외에도 적지 않은 분량의 잠들어 있던 원고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를 토대로 오랜 협의와 원문 대조, 편집, 교열 과정을 거쳐 여림 유고 전집의 출간 작업은 구체화 되었다. 그의 시를 더 읽고 싶었던 많은 사람들은 기다리고 찾다 지쳐, 서서히 그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책에는 무엇보다 그를 기억하고 그의 시를 한편이라도 더 만나고 싶어 했던 어떤 사람들에게 기쁜 놀라움을 전하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다. ‘안개 속으로 걸어간’ 시인 여림을 우리는 이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간’ 시인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최측의농간에서는 미완성 상태의 짧은 단락으로 남아 있는 유작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을 시인 자신의 운명과 그를 추적하는 우리들 삶의 한 컷에 대한 중층 은유로서 전집의 제목으로 수습하였다. 여림은 응답 없음의 시인이 아니었음을, 그의 전집이 말해 줄 것이다. ‘살아가는 일로서만/모든 것들이 이루어지질 않는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고민했던 여림이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이라고 썼을 때, 그는 이미 우리에게 응답하였다. 잡스러운 전파들의 공해 속에서 시인 여림을 수신하기 위하여 최측의농간은 안테나 하나를 간신히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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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8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18 20:24   좋아요 1 | URL
시인의 약력은 직접 시집을 사서 확인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