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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프로레슬링은 쇼다’. 우리나라 1세대 프로레슬러 故 장영철의 발언으로 우리나라의 프로 레슬링은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WWE는 쇼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WWE는 아주 잘 짜인 쇼다. 트릭(trick)과는 다르다. 프로레슬링은 영화나 연속극처럼 자신의 배역에 따른 역할(entertainment)을 수행하는 것이다. WWE의 모든 경기의 승패는 경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있다. 하지만 이것을 문제 삼는 팬들은 거의 없다. WWE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고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영웅을 등장시킨다. 악역을 하는 선수가 선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동료 프로 레슬러 선수와의 급작스러운 갈등으로 인한 배신, 혹은 현 WWE 회장인 빈스 맥마흔과 그의 가족을 직접 각본상에 포함하며 권력에 놀아나는 레슬러들 등 실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계속 펼쳐진다. 물론 그러한 모든 과정이 잘 짜인 시나리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팬들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몸을 사리지 않은 선수들의 고난도 묘기에 열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이라는 장르가 프로레슬링 무대와 같다고 말했다. 소설가는 프로레슬러에 해당한다. 누구나 링 위에 오를 수 있다. 이 말인즉슨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링 한가운데에 선 소설가는 다음 상대를 기다린다. “누구라도 다 올라오십쇼.” 그렇지만 링 위의 현장, 즉 문단(文壇)은 냉혹하다. 링이 널찍해도 거기에 올라오려는 소설가들이 너무나도 많다. 링은 포화 상태다. 소설가가 소설로 먹고살려면 끝까지 버티어 살아남아야 한다. 레슬링에 관심 없는 독자는 하루키의 표현이 크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짜고 치는’ 프로레슬링이 소설과 같다고 말하다니.
나는 하루키가 소설가의 세계를 아주 적절하게 비유했다고 생각한다. 소설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자격은 없다. 독자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렸다면 원고지에 옮겨 써 내려 가면 된다. 소설이 다 완성되었으면 문단의 링 위에 오를 준비한다. 자신의 소설을 독자들에게 알릴 절호의 기회다. 사각 링 주변에는 곧 무대에 등장할 선수를 기다리는 수많은 관객이 있다. 선수가 링 위에 올라서면 관객들은 열렬히 환호한다. 마찬가지로 독자들은 문단의 링 위에 들어서게 될 신진 작가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가 쓴 소설이 마음에 들면 찬사를 보낸다. 반면, 소설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야유를 한다. 아무리 유명한 선수라도 레슬링 경기가 지루하게 진행되면 실망한 관중들이 ‘우~~’하는 야유 소리를 낸다.
소설가의 세계는 ‘배틀 로열(battle royal)’이다. 배틀 로열은 레슬링 경기 방식을 의미한다.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10명 혹은 20명이 동시에 링 위에 경기한다. 링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순간, 탈락한다. 탈락한 선수는 패자 대열에 합류한다. 배틀 로열의 승자가 되려면 동료 선수들을 링 밖으로 몰아내면서 끝까지 링 위에 살아남으면 된다. “자, 올 테면 얼마든지 오시죠.” 용기가 대범한 신진 작가는 자신이 배틀 로열에 당당히 우승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 그러나 무모하게 도전했다가 얼마 안 돼서 링 밖으로 떨어진다. 링 위에 끝까지 살아남은 승자의 선수에게는 ‘챔피언’이라는 화려한 영광이 주어진다. 문단의 링 위에 오래 살아남으면서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하고, 독자와 비평가로부터 인정받은 작가에게는 명예로운 ‘문학상’이 주어진다.
레슬러의 선수 생활은 길어봤자 평균적으로 10년이다. 그만큼 전성기도 비교적 짧은 편이다. 상대 선수들의 공격에 끄떡없던 튼튼한 육체가 점점 노쇠화되면 경기에 뛸 수가 없다. 운동 신경이 상당히 좋으나 불의의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선수 생활을 일찍 마감하는 레슬링 선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설가의 전성기는 얼마나 될까. 하루키는 ‘소설가로서의 유통기한’을 10년으로 잡았다. 작가 생활 10년째로 접어들면 창조력이 감퇴한다. 이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이전보다 더 나은 ‘영속적인 자질’이 필요하다. 하루키가 말하는 ‘영속적인 자질’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가는 물고기처럼 글을 계속 써야 하는 소설가의 숙명을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역설적인 말이지만, 소설 한 편 잘 쓰려면 일단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글을 써야 한다.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작업이 몹시 둔해 빠진 일이라고 말한다. 소설가는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원고지 속으로 들어간다. 사각의 원고지는 작가 혼자만 올라서는 링이다. 문단의 링에 오르기 전 작가는 원고지 한가운데 앉아서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고심한다. 여기에 대해서 하루키는 글을 지속해서 쓰려면 끈질기고 다부진 기본 체력을 유지하라고 조언한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전하는 하루키의 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소설가의 링에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오래 버티는 건 아니란다.’ 그런데 정작 하루키 본인은 지금까지 소설을 쓰면서 고통이라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밝혔다. 문장을 만들 때가 항상 즐겁단다. 이 사람 뭐야, 무서워!
하루키를 프로레슬러로 비유하면 ‘WWE의 아이콘’ 존 시나(John cena)에 가깝다. 그는 경기에 쉽게 지지 않는다. 경기 우승 횟수가 많다. 그는 의료진조차 최소 6개월의 회복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을 내린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과 3개월도 안 돼 링으로 복귀한 적이 있다. 꾸준함의 대명사로 인정받은 존 시나는 헐크 호건을 이은 ‘WWE의 선역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국내 프로레슬러 팬들이 만든 존 시나의 별명이 ‘존 나쎄’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존 나쎄’다. 칠순을 눈앞에 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꾸준하게 소설을 쓰고 있다. 문단의 링 위에 서서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하루키의 팬은 아니지만, 고독한 글쓰기를 놓치지 않는 그가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