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뜬금없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연애대위법》을 읽고 싶어졌다. 헉슬리의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장편인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어서 《멋진 신세계》를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헉슬리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연애대위법》 번역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현재 구할 수 있는 <연애대위법> 번역본은 딱 한 권뿐이다. 동서문화사《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이다. 동서문화사! 구설수가 많은 출판사다. 저작권을 위반한 채 뻔뻔하게 《대망》을 판매했으며(이 일로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 씨가 검찰에 기소됐다. 그런데도 《대망》은 절판되지 않았다), 기존에 나온 번역본을 표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책들이 있다.[1] <연애대위법>이 수록된 동서문화사 번역본도 그냥 넘어가기 힘든 의문점이 남아 있다.

 

 

 

 

1.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1판 1쇄 날짜는 1987년 7월 1일이다. 그런데 1판이 출간된 적이 있었는가?

 

 

 

 

 

 

번역본 발행정보에 따르면 1판 1쇄 발행일이 1987년 7월 1일, 2판 1쇄가 2013년에 나왔다. 발행정보 밑에 보면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다.

 

 

이 책은 저작권법(5015호) 부칙 제4조 회복저작물 이용권에 의해

중판 발행합니다.

 

 

출판사는 이 번역본이 중판 발행임을 명시했다. 저작권법이 규정한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란 무엇일까?

 

 

“회복저작물 등을 원 저작물로 하는 2차적 저작물로서 1995년 1월 1일 이전에 작성된 것은 이 법 시행 후에도 이를 계속하여 이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원 저작물의 권리자는 1999년 12월 31일 이후의 이용에 대하여 상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2]

 

 

우리나라는 1995년에 세계 저작권 협약(베른 협약)에 가입했다. 2차적 저작물(번역본)을 출간하려면 앞서 원 저작물(외국인의 저작물)의 권리자와 정식 계약을 해야 한다. 즉 세계 저작권 협약을 맺음으로써 1990년대 초반까지 쏟아져 나오던 해적판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외 조항이 있다. 그것이 바로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다. 1995년 1월 1일 이전에 나온 2차적 저작물이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이라도 출판될 수 있다.

 

1987년에 나온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은 원 저작물의 권리자와 출판 계약하지 않은 번역본이지만, 이 회복저작물 이용권이 적용되어 중판 형태로 재출간할 수 있다. 그래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 정말로 1987년에 동서문화사의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1판이 출간된 적이 있었는가?

 

국립중앙도서관동서문화사 판(2013년에 나온 중판)을 포함한 ‘연애대위법’ 번역본 총 12종이 소장되어 있다. 1959년 동아출판사를 시작으로 을유문화사, 삼성출판사 등이 <연애대위법> 번역본을 출간했다. 그런데 1987년에 나온 동서문화사 번역본은 없다! 중판으로 발행된 번역본만 있을 뿐이다.

 

나는 회복저작물 이용권이 정식계약을 하지 않은 책을 오늘날까지 나오게 만드는 ‘악법’이자 비양심적인 출판사들이 좋아하는 ‘편법’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저작권 협약 가입 이전에 나온 해적판의 번역 질은 그리 좋지 않다. 21세기에 요즘 잘 쓰지도 않는 단어,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은 외래어를 보는 것이 거북하다. 그런데도 동서문화사는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라는 ‘편법’을 이용해서 기존의 번역본 일부를 무단 도용하거나 아예 중판으로 출간한다. 편집 교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질 떨어지는 해적판 번역본을 내놓는다는 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일이다.

 

 

 

 

2. 책을 번역한 ‘이경직’은 누굴까? 설마, 당신도 유령 번역자’인가?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번역자인 이경직의 약력이 의심스럽다. 국제대학 영문과 교수’라고 되어 있는데, 혹시 경기도에 있는 ‘국제대학교’를 말하는 것일까? 이 학교는 1997년에 세워진 사립 전문대학이다. 2006년에 ‘국제대학’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영문학과’는 개설되지 않았다. 이거, 경력 위조인가?

 

이경직 씨가 ‘문예지 소설 <추운 밤>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문예지 소설’이라면서 소설이 등재된 문예지 이름은 없는 것일까?

 

 

 

 

 

 

이경직 씨가 지은 책은 <영원과 사랑의 시>, 번역본으로는 윌리엄 사로얀(William Saroyan)의 <인간 희극>이 있다. 이 정보 또한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영원과 사랑의 시>라는 제목의 책이 1981년 문학출판사에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 작가의 글을 번역한 것이고, 번역자 이름은 ‘이서종’이다. 또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인간 희극> 번역본 중에 이경직 씨가 번역한 것은 없다.

 

 

 

 

[1] [동서문화사 번역본의 불편한 진실] 2016년 3월 2일

http://blog.aladin.co.kr/haesung/8284417

 

[돈 내놔라! 출판사야!] 2017년 6월 18일

http://blog.aladin.co.kr/haesung/9402985

 

 

[2] 네이버 지식백과, <회복저작물과 출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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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22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의 눈이네요..회복저작물 이용권은 처음들어보는데..우리 출판풍토도 이런적폐를 없애야 독자에게 외면받지 않을텐데,한심한 노릇입니다^^.

cyrus 2017-12-22 17:48   좋아요 0 | URL
적폐 출판사들 때문에 정식 계약을 맺고 정당한 절차로 책을 만든 출판사들이 손해를 입습니다. 독자들은 적폐 출판사들의 실체를 모른 채, 허술한 책을 사게 됩니다. 출판 업계 사람들도 동서문화사의 구린 행보를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기호 씨도 자신의 블로그에 동서문화사를 여러 번 깐 적이 있었습니다.

이리스 2017-12-2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문화사 저격수다운 예리함!안그래도 멋진신세게계 읽는중인데, 좀 열받네요. 아무리 세상은 넓고 읽어야하는 책이 많다지만 이런 책들이 버젓이 스리슬쩍 성업중이라는게...

cyrus 2017-12-22 17:49   좋아요 0 | URL
저격수까지는 아닙니다.. ^^;; 동서문화사 책값이 비교적 저렴한 편인데, 사실 저렴하게 만든 책을 많이 팔려는 저렴한 마케팅입니다.

Falstaff 2019-08-17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제대학˝은 1980년대까지 서대문 로타리에 있었던 ˝야간대학˝이었습니다. 당시 공부는 잘하지만 집이 가난한 학생들이 주로 덕수상고, 경기상고에 입학했는데 사무실이 서울시내에 있던 (그러니 유명 공업고등학교 졸업생들은 다니기 힘들었고요) 직장인들이 많이 다녔던 학교입니다.
머리 좋은, 그러나 가난한 학생들이 많이 다녀서 그 학교 졸업생들이 보통 도전적이고 투쟁적인 경향이 좀 있었습니다. 직장에서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하지만. 지금은 은퇴한 고위 공무원 가운데 국제대학 출신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이젠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국제대학 후신이 성북구 정릉동으로 언덕 꼭대기에 있는 예전 대일고등학교 자리로 옮긴 서경대학교입니다.
저도 더 이상 <연애 대위법>의 새로운 번역을 기다리지 못해 이 책을 구입했습니다. 저는 이 책이 일본어 중역판이 아닐까를 의심하고 있습니다만.

cyrus 2019-08-17 12:18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저자의 약력을 속이는 출판사의 행보 때문에 국제대학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어요... ^^;;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 여성 예술가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 주은정 옮김 / 아트북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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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지 않은 습관이다. 자화상은 그냥 화가 개인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화가로서의 나라는 고유명사를 그리는 것이다. 얼굴에는 한 사람의 삶의 발자취, 감정과 욕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반성이며 성찰이다. 사실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술의 역할이 아니라 철학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자화상은 자기의 눈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창구다.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붓으로 대답한다.

 

누구나 와 타자의 외면 및 내면세계,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붓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에서 여성이 미술의 세계에 동참한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 미술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미술가들은 눈부신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고, 연인이거나 경쟁 상대 격인 남성 미술가들의 그늘에 가려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Holofernes)의 목을 자르는 이스라엘의 여성 영웅 유디트(Judith)를 그리며 남성의 우월성에 반기를 드는 도발적인 그림을 남겼다. 아르테미시아는 남자 미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오랫동안 남성중심주의의 미술사에서는 잊혀 왔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페미니즘 미술의 씨앗을 뿌렸다. 생전에 서른 번 넘은 수술을 받은 프리다는 다양한 고통의 표정을 간직한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여성 자화상속 여성의 이미지를 탐구한 책이다. 남성 우월적 시선에 대한 통시적 분석과 비판을 담은 이 책은 미술사의 조역이었던 여성을 공동 주역의 위치로 격상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히 페미니즘적이다.

 

 

여성은 자신을 남성과 동등한 전문가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남성은 그들을 미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보았고 여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중략) 미술가란 무엇인가? 만약 그 답이 그저 미술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된 역사에 의해 미술가는 항상 남성으로 전제되며 여성 미술가는 예외적인 영재에 해당한다. [1]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은 남성중심주의 미술사 속에서 상실되고 매몰되어왔던 여성 이야기의 재발견이라는 커다란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출발한다. 페미니즘 미술 영역 중의 하나가 저평가받고 알려지지 않은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 그녀들의 항변, 남성 못지않은 위대한 창조성 등을 재발견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성 자화상은 14세기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유명한 여성에 대하여>[2]에 실린 삽화다. 이 삽화에 마르시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이 있다. 여성 미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여성 미술가들은 자신의 미적 감각을 과시하고 입증할 수 있는 자기 묘사 방식을 선호했다. 17세기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은 이전 세기 자화상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분위기가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모습을 회화로 의인화하는 소재로 선택, 자화상을 제작했다. 아르테미시아 이전에 남성 미술가들은 여성을 남성 미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조력자뮤즈(Muse)로 형상화했다. 아르테미시아는 고전적 · 남성적 여성 형상 방식을 거부하고 여성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부각했다.

 

 

 

 

 

 

 

18세기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여성 미술가들이 활동했다.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앙겔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mann)[3],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Elisabeth Vigee-Lebrun) 등이 대표적인 전문 화가들이다. 비제르브룅은 루벤스(Rubens)의 초상화를 의도적으로 모방하여 자화상을 그렸다. 루벤스의 초상화 속 여성은 다분히 남성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그녀의 자세, 그리고 남성 감상자를 향해 요염하게 바라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은 남성 감상자를 만족스럽게 하는 클리셰이다. 하지만 자화상 속 비제르브룅은 적극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남성 감상자를 바라본다. 그녀의 한 손에 들고 있는 붓과 팔레트는 비제르브룅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만약 남성 감상자가 자화상을 보면서 그림 속 여성의 미모가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자화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무지한 감상이며 여성 미술가에게는 실례가 되는 발언이다. 루벤스의 여성은 코르셋(corset)을 착용한 상태다. 코르셋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의복이다. 비제르브룅은 코르셋이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녀는 코르셋이 만드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불쾌하게 여겼고 항상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 또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누드화라면 으레 20대의 늘씬한 모습만을 연상하는 남성들에게 질리언 멜링(Giliian Melling)나와 나의 아기(1992년 작)는 확실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자화상이다. 임신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 축 처진 가슴을 드러낸 그녀의 그림 앞에서 남성 관람객들은 일반 누드화를 대하는 감상을 전혀 할 수 없다. 이 그림에는 미술에 대한 경험, ‘여성의 정체성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이 그림에 남성이 즐겨 사용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

 

여성 자화상의 매력은 여성 미술가의 내면과 이미지로 형상화된 목소리를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화상 속 여성 미술가들은 남성 감상자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한다. 이 그림에 네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여성은 없어.” 여성 자화상의 매력은 남성 감상자의 모습을 똑바로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기도 한다. 거울은 성찰의 은유적 대상이다. 거울은 분명 외모를 비추지만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내면을 찾으려고 한다. 남성 감상자는 거울이 된 여성 자화상을 바라보면서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남성성의 문제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반응을 통해 남성은 여성을 전시하고, 품평하고, 눈요기 대상으로 묘사한 남성 미술가의 그림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성 자화상은 남성 감상자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의 눈으로 그림을 보는 것도 예술 이해의 기본이다.

 

 

 

 

 

[1] 서문, 34

[2]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임옥희 역, 나무와숲)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있다.

[3] 안젤리카 카우프만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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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21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술평론지에 실릴만한 글 이네요. 칭찬과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cyrus 2017-12-22 11:43   좋아요 0 | URL
저는 미술을 아는 것을 즐기는 딜레탕트입니다. 사실 요즘 국내 화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몰라요. 저한텐 미술평론을 쓸 수 있는 수준이 없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7-12-21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도 말씀 드렸던 것 같은데 사이러스 님 글은 글을 완성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는 글입니다.
자료 찾고 인용하고 그러닌 게 사실 글쓰기의 팔 할은 소비되는 것 같거든요..
항상 정성스러운 글들이라 아껴 읽게 됩니다.

cyrus 2017-12-22 11:45   좋아요 0 | URL
아껴 읽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이런 글, 하루 공개하고 나면 잊혀질 건데요. 리뷰를 당장은 보지 않겠지만, 누군가가 책을 검색하다가 제 글을 보겠죠. 리뷰라는 게 그런 겁니다.. ㅎㅎㅎ 다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알라딘 서재에 활동하는 분들 모두 나름 글 한 편을 정성스럽게 씁니다. ^^

sprenown 2017-12-21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은 잘 모르는데 프리다 칼로 얘기가 나오니 트로츠키가 생각나네요ㅎㅎ

cyrus 2017-12-22 11:46   좋아요 0 | URL
네. 두 사람의 인연도 꽤 유명하죠. ^^

AgalmA 2017-12-21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했는데 cyrus 님이 별 다섯 개 줄 정도면 신뢰 확보구만요 :)

cyrus 2017-12-22 11:48   좋아요 0 | URL
별 네 개, 다섯 개 수준의 책입니다. 화가의 자화상을 주제로 한 책은 있어도 여성 화가의 자화상과 그 그림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책은 없었어요. ^^

수이 2017-12-21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이거 계속 사고싶었는데 미루었는데 사야지!

cyrus 2017-12-22 11:50   좋아요 0 | URL
이 책의 ‘20세기 여성 미술가’를 소개한 내용이 이 책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독창적인 그림들을 만나볼 수 있어요. ^^
 

 

 

 

한국 문학사에서 이상(李箱)이 차지하는 위상은 자신의 시, 소설만큼이나 독특하다. 무엇보다 이상 시의 접근을 막는 것은 특유의 난해성이다. 예컨대 이상이 일본어로 쓴 조감도(鳥瞰圖)-LE URINE[1]은 악명 높은 연작시 오감도(烏瞰圖)보다 먼저 나온 시인데, 이 작품 또한 난해하다.

 

 

 불길과같은바람이불었것만불었건감얼음과같은수정체는있다. 우수는DICTIONAIRE와같이순백하다. 녹색풍경은망막에다무표정을가져오고그리하여무엇이건모두회색의명랑한색조로다.

     

  들쥐와같은험준한지구등성이를포복하는것은대체누가시작하였는가를수척하고왜소한ORGANE을애무하면서역사책비인페이지를넘기는마음은평화로운문약이다. 그러는동안에도매장되어가는고고학은과연성욕을느끼게함은없는바가가장무미하고신성한미소와더불어소규모하나마이동되어가는실과같은동화가아니면아니되는것이아니면무엇이었는가.

     

  진녹색납죽한사류는무해롭게도수영하는유리의유동체는무해롭게도반도도아닌어느무명의산악을도서와같이유동하게하는것이며그럼으로써경이와신비와또한불안까지를함께뱉어놓는바투명한공기는북국과같이차기는하나양광을보라. 까마귀는흡사공작과같이비상하여비늘을질서없이번득이는반개의천체에금강석과추호도다름없이평민적윤곽을일몰전에빗보이며교만함은없이소유하고있는것이다.

     

  숫자의COMBINATION을망각하였던약간소량의뇌장에는설탕과같이청렴한이국정조로하여가수상태를입술위에꽃피워가지고있을즈음번화로운꽃들은모두어데로사라지고이것을목조의작은양이두다리를잃고가만히무엇엔가귀기울이고있는가.

     

  수분이없는증기하여온갖고리짝은마르고말라도시원치않은오후의해수욕장근처에있는휴업일의조탕은파초선과같이비애에분열하는원형음악과휴지부, 오오춤추려므나, 일요일의뷔너스여, 목쉰소리나마노래부르려무나일요일의뷔너스여.

     

  그평화로운식당또어에는백색투명한MEMSTRUATION이라는문패가붙어서한정없는전화를피로하여LIT위에놓고다시백색여송연을그냥물고있는데. 마리아여, 마리아여, 피부는새까만마리아여, 어디로갔느냐, 욕실수도콕크에선열탕이서서히흘러나오고있는데가서얼른어젯밤을막으렴, 나는밥이먹고싶지아니하니슬립퍼어를축음기위에얹어놓아주려무나.

     

  무수한비가무수한추녀끝은두드린다두드리는것이다. 분명상박과하박과의 공동피로임에틀림없는식어빠진점심을먹어볼까-먹어본다. 만도린은제스스로포장하고지팽이잡은손에들고자그마한삽짝문을나설라치면언제어느때향선과같은황혼은벌써왔다는소식이냐, 수탉아, 되도록이면순사가오기전에고개숙으린채미미한대로울어다오, 태양은이유도없이사보타아지를자행하고있는것은전연사건이외의일이아니면아니된다.

 

 

이상 시는 주석과 보충 설명 없이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텍스트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독자와 비평가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낡은 느낌을 주지 않는다. 자기 정신과 폐병으로 삭은 몸을 학대해가며 빚어낸 사유의 뼈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상의 시는 강골(强骨)이다. 이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자기 세계를 고집했다. 이상(李箱/異常)한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문학인들이 도전했다.

 

이상 문학의 정본을 새로이 만들려면 이상이 생전에 발표한 텍스트의 원전(原典)뿐만 아니라 유고, 습작 노트까지 수집, 꼼꼼히 분석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원전을 기존에 나온 이상 문학 전집들과 대조하는 작업도 진행된다. 연구자는 원전에 오식이 있는지 검토한다. 왜냐하면, 오식을 바로 잡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와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상 문학을 연구하는 다음 사람을 위해서 이상 문학 정본을 만들려면 원전과 우리말로 풀이한 시, 그리고 주석 및 보충 설명 순으로 편집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구성 요소 중 하나라도 빠지면 이상 문학에 접근하기 어렵다.

 

 

 

 

 

 

 

 

 

 

 

 

 

 

 

 

 

 

 

 

 

 

 

 

 

 

 

 

 

 

 

 

 

 

 

 

 

 

 

 

 

 

 

 

 

 

 

 

 

 

 

 

 

 

 

 

 

 

 

 

 

 

 

 

 

 

 

 

 

 

 

 

 

 

 

 

 

 

 

 

 

 

 

 

 

 

 

 

* 김종년 주해 이상 전집(가람기획, 2004)

* 김주현 주해 정본 이상 문학 전집(소명출판, 2005)

* 김주현 주해 정본 이상 문학 전집 (증보판)(소명출판, 2009)

* 권영민 주해 이상 전집(, 2009)

* 권영민 주해 이상 전집(태학사, 2013)

    

 

 

국내 최초 이상 문학 정본이 무엇인지 연구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김주현 교수는 1956년에 임종국이 엮은 세 권짜리 이상 전집을 가장 먼저 언급했고, 권영민 교수는 1949년 시인 김기림이 엮은 한 권의 이상 전집을 임종국이 선보인 이상 문학 전집보다 앞서 언급했다.

 

 

 

 

 

 

 

 

 

 

 

 

 

 

 

 

 

* 조해옥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소명출판, 2001)

 

 

 

이상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1950년대이다.[2] 오식을 바로 잡고 믿을 만한 텍스트를 제공하는 것이 정본의 일차적 조건이. 물론 임종국의 <이상 전집>도 오류가 있긴 하나, 이상 문학 연구를 활성화하는 촉매 역할을 한 정본으로 볼 수 있겠다.

 

 

 

 

 

 

 

 

 

 

 

 

 

 

 

 

 

 

 

* 이승훈 주해 이상문학전집 1(문학사상사, 1989)

* 김윤식 주해 이상문학전집 2(문학사상사, 1991)

* 김윤식 주해 이상문학전집 3(문학사상사, 1993)

 

 

 

임종국의 <이상 전집> 출간 이후로 이어령(1977~1978), 이승훈과 김윤식(1989, 1991, 1993), 김종년(2004), 김주현(2005), 권영민(2009)으로 이어지는 이상 문학 정본들이 선보였다. 그러나 이어령, 이승훈, 김윤식 <이상 전집>은 절판되었다. 이상 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절판된 책을 구할 필요는 없다. 김주현과 권영민 <이상 전집>은 앞서 나온 <이상 전집>들의 오류를 검토하기 위해 정확한 원전 비평과 판본 비교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 사실, 김종년 <이상 전집>정본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책에 원전은 없고, 우리말로 풀이한 텍스트로 편집되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풀이한 텍스트는 원전보다 가독성이 나은 편이므로 이상 문학을 처음으로 접근하는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적합하다. 반면, 김주현 <이상 전집>은 원전과 주석으로만 구성된 책이다. 따라서 정확한 원전을 알고 싶으면 김주현 <이상 전집>을(이상 문학 전공자를 위한 책), 깊이 있는 주석을 중심으로 이상 문학을 이해하고 싶으면 권영민 <이상 전집>을 고르면 된다.

 

 

 

 

 

 

 

 

 

 

 

 

 

 

 

 

 

 

* 신범순 주해 이상 시 전집 1 : 원전 주해(나녹, 2017)

* 신범순 주해 이상 시 전집 2 : 수정 확정(나녹, 2017)

 

 

 

필자는 김주현 <이상 문학 전집 1 : >와 권영민 <이상 전집 1 : >(뿔 출판사에서 나온 구판)를 같이 읽고 있다. 최근신범순 교수가 엮은 <이상 시 전집>이 출간되었는데, 아마도 김주현, 권영민 판본의 오류를 비교 · 검토했을 거로 짐작해 본다. (이 책을 아직 안 읽어봤다) 김주현, 권영민 판본을 더듬더듬 번갈아 읽으면서 두 판본에 수록된 원전 텍스트의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했다.

 

 

 

* 파편의 경치

 

 

나는遊戲한다

의슬립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떠하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김주현 판본, 35)

 

 

 

나는논다

의슬립퍼어는菓子와같지아니하다

어떠하게나는울어야할것인가

 

(권영민 판본, 190)

 

 

 

김주현 판본의 원전에는 나는遊戲(유희)한다라고 되어 있지만, 권영민 판본은 우리말로 나는논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 신경질적으로 비만한 삼각형

 

나의 生涯는 원색과같하여 豐富하도다.

 

(김주현 판본, 47, 띄어쓰기 허용)

 

 

 

나의 生涯는원색과같하여豐富하도다.

 

(권영민 판본, 47, 띄어쓰기 없음.)

 

 

 

띄어쓰기를 거부하는 글쓰기는 이상 문학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상은 띄어쓰기를 지키면서 문장을 쓰다가도 갑작스럽게 띄어쓰기를 무시한 문장을 쓴다. ‘기인다운 글쓰기다. 정확한 원전을 공개하려면 띄어쓰기가 된 문장띄어쓰기를 무시한 문장을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

 

 

 

* 거울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만은

또꽤닮앗소

 

(김주현 판본, 83)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反對요마는

또꽤닮앗소

 

(권영민 판본, 34)

 

 

 

 

* 오감도-시제 3

 

싸훔하는사람은즉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훔하는사람은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훔하는사람이싸훔하는구경을하고십거든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훔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훔하는구경을하든지싸훔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훔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훔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얏으면그만이다

 

(김주현 판본, 88)

 

 

 

싸홈하는사람은즉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고또싸홈하는사람은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엇기도하니까싸홈하는사람이싸홈하는구경을하고십거든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싸홈하는것을구경하든지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홈하는구경을하든지싸홈하지아니하든사람이나싸홈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홈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얏으면그만이다

 

(권영민 판본, 34)

 

 

 

김주현 판본은 싸훔’, 권영민 판본은 싸홈으로 표기되어 있다. ‘싸움의 옛말은 싸홈이다. 국어사전에 싸홈은 있지만, ‘싸훔은 없다.

 

이상의 글을 읽는 일은 장님 코끼리를 만지는 상황과 같다. 연구자와 독자 모두 이상의 작품 앞에만 서면 장님이 되고 만다. (이상 : 아니, 종이에 문자가 있는데 왜 읽지를 못하니!)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이상의 작품을 더듬더듬 읽어야 한다. 이렇다 보니 하나의 텍스트에서 다양한 해석이 등장한다. 한 사람이 정리한 <이상 전집>을 여러 번 읽어도 이상의 문학 세계를 100%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상과 관련된 새로운 텍스트 자료들이 발굴된다면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확장 범위는 넓어진다. 지금도 한 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다는이상에게 도전하는 비평적 탐험가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들의 활약으로 언어와 기호로 만들어진 이상의 텍스트 미로는 자가 번식하는 세포처럼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상이라는 기존의 미로에 새로운 미로들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1] ‘LE URINE’의 바른 표기는 L’urine이다. 이 단어는 오줌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권영민, 이상 전집 1236, 2009)

 

[2] 조해옥, 이상 시의 근대성 연구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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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12-2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 연구서가 의외로 많이 나와있구나.
시는 정말 난감해. 이상이니까 봐주는 거지
나 같은 사람이 저렇게 썼다고 하면 단박에
뭐라고 하지 않았을까?ㅋ
그만큼 그의 내면이 예사롭지 않다는 얘기겠지.
그나마 소설이나 산문이 낫긴한데 말야.

cyrus 2017-12-21 17:13   좋아요 0 | URL
네, 이상 연구서가 생각보다 많았어요. 학술논문까지 포함하면 자료가 어마어마할 거예요. 그런데 인터넷 서점에서 이상 연구서를 찾기 어려워요. ‘이상’을 검색하면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 ‘이상심리학’, 이상 문학과 무관한 책들이 나와요. 그런 검색 결과 내용 속에 이상 연구서를 찾기가 힘들어요. 소설, 수필은 읽을 만해요. 물론, 주석이 달린 가정 하에서요. ^^

붕붕툐툐 2017-12-21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빵 터졌는데, 내용은 이상 문학에 대한 애정과 깊이가 있어 감탄했네요!

cyrus 2017-12-21 17:15   좋아요 0 | URL
눈치를 챈 분들이 있겠지만, 제목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속 김첨지의 유명한 대사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상 연구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서 깊이는 없어요. ^^;;

sprenown 2017-12-21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의 시가 미친 놈의 헛소리 같지만 그게 우리 문학의 근대성에 있어 단초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달려드는 형국이네요..도대체 이상본인조차도 어떤의도로 썼는지 모를것 같은데..해설서나 연구서가 더 난해해지는것 같아요.^^.

cyrus 2017-12-21 17:18   좋아요 0 | URL
이상의 시가 얼마나 난해했으면 애초에 이상은 ‘의미 없는 시’를 썼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로 이상이 아무 생각 없이 시를 썼다면 해석에 매달린 문학인들의 노력이 무의미해져요. ^^;;

2017-12-2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1 17:25   좋아요 0 | URL
자신의 글을 해설한 이상의 자필 메모가 발견된다면 국문학 전체를 뒤흔들 획기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국문학자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고, 수험생들은 수능 언어영역 시험에 출제될 이상의 글을 부담스러워할 것입니다. 이상의 글을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라서 시 <거울>, <오감도>, 단편소설 <날개>, 수필 <조춘점묘>를 제외한 작품들은 수능 언어영역 지문으로 출제될 확률이 적어요. 나머지 작품들이 완전히 해석 가능하게 된다면 수능 언어영역 지문으로 출제될 거예요. ^^;;

겨울호랑이 2017-12-2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셜록 홈즈 번역본 비교 페이퍼 때의 예리한 분석이 이번 이상 페이퍼에서도 진가가 드러나고 있네요^^:

cyrus 2017-12-21 17:26   좋아요 1 | URL
홈즈 전집을 완독하지 않은 상태인데, 잊힐 뻔한 책을 언급하셨군요.. ㅎㅎㅎ 아직 안 읽은 작품들은 그냥 즐기면서 읽을 생각입니다. ^^;;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를 원한다. 실제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보다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첫 만남에서는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만나는 사이에 첫인상이 형성된다. 사람들이 첫인상을 형성할 때에 사용할 수 있는 정보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쓸 수 있는 정보라고는 기껏해야 상대방의 외모, 목소리, 복장이 전부다. 사람들은 첫인상으로 상대방의 모든 것을 판단하려 든다. 얼굴, 신장, 체격 등의 겉모습과 제스처, 말투라는 극히 제한된 정보로 그 사람의 성격까지 판단해버린다.

 

 

 

 

 

 

 

 

 

 

 

 

 

 

 

 

 

* 말콤 글래드웰 블링크(21세기북스, 2016)

 

 

 

이렇듯 첫인상은 매우 짧은 순간에 결정된다. 첫인상이 좋으면 쉽고 편하게 생각되지만, 반대의 경우는 부정적인 사람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다.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첫인상을 블링크(blink)’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블링크는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을 가리킨다. 글래드웰은 상대의 첫인상을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초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눈으로 헤어스타일, 액세서리, 옷 등 잘게 쪼개진 정보를 모은 뒤 살아온 과정에서 축적된 판단력으로 사람을 단번에 평가한다는 얘기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시간은 학자마다 다르긴 하나 길어야 7초다.

 

첫인상이 나중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초두 효과(primary effect)’라고 한다. 사람은 일단 첫인상이 형성되면 후에 들어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처럼 먼저 제시된 정보가 나중에 들어온 정보보다 전반적인 인상 형성 및 인물 평가에 영향을 준다.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의 뇌는 낯선 장소가 안전한지, 상대가 사기꾼은 아닌지 재빨리 판단해 움직이는 생존 기계로 진화해온 결과다.

 

 

 

 

 

 

 

 

 

 

 

 

 

 

 

 

 

* 생텍쥐페리, 황현산 역 어린 왕자(열린책들, 2015)

 

 

 

한 사람의 실속 있는 내면이나 진가를 보지 않고 겉모습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만의 색안경에 갇혀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어린 왕자에 나오는 천문학자 이야기는 첫인상만으로 사람을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어른들의 심리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행성을 발견한 터키의 천문학자는 국제천문학회가 참석하여 소행성의 존재를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터키 천문학자의 단출한 복장 때문에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몇 년 지난 후, 터키에 서양식 문화가 유입되었고 터키의 독재자가 국민들에게 서양식 복장을 하지 않으면 사형에 처한다고 선포했다. 터키 천문학자는 멋있는 서양식 복장을 하고 국제천문학회 연단 위에 다시 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천문학자가 그의 말을 믿어주었다.

 

 

 

 

 

 

 

 

 

 

 

 

 

 

 

 

 

 

 

* 존 파렐 빅뱅-어제가 없는 오늘(양문, 2009)

* 데이비드 보더니스 아인슈타인 일생 최대의 실수(까치, 2017)

 

 

 

아인슈타인(Einstein)과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itre)의 첫 만남어린 왕자속 천문학자 이야기와 묘하게 겹친다. 빅뱅(big bang)’을 처음으로 제안한 사람이 조지 가모(George Gamow)로 널리 알려졌지만, ‘빅뱅 이론으로 자라게 될 생각의 씨앗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조르주 르메트르이다. 가모는 빅뱅 이론을 체계화화한 학자다. 그는 빅뱅 이론을 뒷받침해줄 증거-우주의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를 관측했다-를 발견했다. 프레드 호일(Fred Hoyle)빅뱅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빅뱅 이론을 비웃은 학자였다.

 

 

 

 

 

 

르메트르는 벨기에 출신의 과학자이자 가톨릭 신부였다. 그는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한 점에서 출발했으며 그 점이 바로 태초의 우주의 탄생을 알리는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주의 모습을 불꽃놀이에 비유했다.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이 고안한 방정식을 토대로 팽창하는 우주를 증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우주 팽창 가설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르메트르는 직접 아인슈타인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지만, 아인슈타인은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마도 르메트르는 위대한 과학자를 만나러 갔을 때 평소에 입던 검은색 신부 복장(사진 속에 르메르트가 입은 옷이다)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가 교회 신부라는 이유로 의심의 눈길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벨기에 신부의 주장을 묵살한 천재의 판단은 실수였다.

 

대부분 우주론을 설명한 책에 보면 르메트르를 조연급으로 언급한다. 이렇다 보니 르메트르는 조지 가모, 심지어 빅뱅 이론을 무시한 호일보다 인지도가 밀린다. 우주 팽창을 이해하려면 먼저 르메트르의 생각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는 신부였지만, 자신의 종교관을 무너뜨릴 수 있는 생각의 씨앗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빅뱅-어제가 없는 오늘은 르메트르의 일생과 종교라는 이름에 갇힌 그의 과학적 성과를 재조명한 유일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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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20 17: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1 12:47   좋아요 0 | URL
과학자, 종교인 양쪽에서 외면받은 외로운 학자였어요. 교황이 빅뱅 이론을 창조론의 근거로 사용한 것에 반발할 정도로 과학 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7-12-20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빅뱅이론은 기독교의 창조론과도 잘 부합되는 이론이라 여겨집니다. ‘태초에 빛이 있어라‘라는 창조론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에 과학의 다른 이론보다 상대적으로 저항없이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cyrus 2017-12-21 12:50   좋아요 1 | URL
종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빅뱅 이론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르메트르 신부는 빅뱅이론의 종교적 관점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빅뱅 이론이 종교와 과학의 중간 다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 초기의 작가들에서 20세기 SF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홍근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엄청 많은 고전 중에 도대체 어떤 재미있는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면 평생 책 속에 파묻혀 살아온 권위자의 조언을 따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만약 그 권위자가 천국의 도서관장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라면 신뢰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는 아예 도서관을 삶의 터전으로 삼을 정도로 도서관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부계의 유전병을 물려받으면서 태어난 보르헤스는 너무 많은 책을 읽은 탓에 실명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짧고 재미있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역시 짧고 재미있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는 미국문학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개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애서가의 지적 편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일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엄선한 미국문학 고전들을 접할 수 있다. 지극히 저자의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하나같이 매혹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이다.

 

보르헤스의 말에 따르면 문학 작품 자체가 우리(독자들)를 끌어당기는 매력[1]이 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문학 작품의 매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서문만 봐도 좀처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보르헤스 문학의 매력을 아는 독자라면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다. 보르헤스의 글은 환상과 사실을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완벽하고 독특한 상상의 산물이나 현상을 마치 실재했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독자는 보르헤스의 문학이 가진 환상성을 이해해야 한다. ‘환상성은 보르헤스가 강조한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학 작품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추구한 환상성에 영향을 준 미국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환상문학의 뿌리이다. 그 뿌리 속에 흐르는 문학적 영양분을 듬뿍 받고 자라 훌륭히 성장한 나무가 바로 보르헤스다. 그는 자신을 달의 작가로 분류했다. ‘달의 작가는 홀로 사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사상을 재료로 삼아 글을 쓴다. 반면 태양의 작가는 정치적 상황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현실주의자이며 능숙하게 글을 써내려간다. 보르헤스는 미국의 초월주의자들을 주목했는데, 그들은 달의 작가에 속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사회보다는 개인, 이성보다는 직관을 앞세웠고,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서 초월적 자아를 완성하는 삶을 살았다.

 

그밖에 보르헤스는 추리소설, 서부문학, 인디언 문학 등에 주목하여 러브크래프트(Lovecraft),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등을 소개한다. 이들 역시 포의 문학적 영양분을 먹고 성장한 훌륭한 작가들이다. 그런데 보르헤스가 인디언 문학을 소개한 점은 아이러니하다. 보르헤스는 원주민 학살을 문명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옹호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발언에 남아메리카 작가들도 한 목소리로 비난한다. 보르헤스가 19세기 미국 서부 시대에 활동했던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의외다. 아울크리트 다리에서 생긴 일(An Occurrence at Owl Creek Bridge), 막힌 창(The Boarded Window), 요물(The Damned Thing) 등은 환상문학, 공포문학 단편 선집에 수록되는 비어스의 대표작들이다.

 

   

 

[1] 서문, 10 

 

 

 

 

* Trivia

 

베니토 세레노 선장이라는 인물은 조셉 콘래드의 나르시소스 호(Narcissus)’의 흑인을 떠올리게 하고,‥… (68)

 

베니토 세레노(Benito Cereno)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이 쓴 단편소설이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가 쓴 소설의 정확한 제목은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The Nigger of the Narcissu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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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의 책 몇권을 헌책방에서 사놓은지 꽤 되었는데 얼른 손이 안가네요

cyrus 2017-12-20 16:07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 전집 1권을 읽어봤는데 재미없어서 포기했어요. 단편이라고 만만히 보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

레삭매냐 2017-12-20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르헤스 책들을 몇 권 가지고는 있는데
도통 읽게 되질 않네요 허허

cyrus 2017-12-20 16:10   좋아요 0 | URL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보르헤스의 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보르헤스 관련 서적을 먼저 보고, 소설 읽기에 재도전해야겠어요. ^^

2017-12-20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0 16:12   좋아요 1 | URL
렌즈를 잘못 착용해서 실명할 뻔 했어요. 안경을 썼는데도 시야가 흐렸어요. 그 때 얼마나 식겁했는지.. ㅎㅎㅎ 눈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페크pek0501 2017-12-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의 말>을 완독했는데 좋았습니다.
이 책은 어떨지 관심이 갑니다.

cyrus 2017-12-20 16:13   좋아요 1 | URL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분량이 얇아서 전공 책 느낌이 1도 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