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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 초기의 작가들에서 20세기 SF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홍근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엄청 많은 고전 중에 도대체 어떤 ‘재미있는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면 평생 책 속에 파묻혀 살아온 권위자의 조언을 따르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만약 그 권위자가 ‘천국의 도서관장’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라면 신뢰성은 더욱 높아진다. 그는 아예 도서관을 삶의 터전으로 삼을 정도로 도서관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부계의 유전병을 물려받으면서 태어난 보르헤스는 너무 많은 책을 읽은 탓에 실명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간결하고 압축적이며 짧고 재미있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역시 짧고 재미있다.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는 미국문학사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개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애서가의 지적 편력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일뿐만 아니라, 후대의 많은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엄선한 미국문학 고전들을 접할 수 있다. 지극히 저자의 개인적인 선택이지만, 하나같이 매혹적이면서도 환상적인 작품들이다.
보르헤스의 말에 따르면 ‘문학 작품 자체가 우리(독자들)를 끌어당기는 매력’[1]이 있다고 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문학 작품의 매력’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 서문만 봐도 좀처럼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보르헤스 문학의 매력을 아는 독자라면 충분히 감을 잡을 수 있다. 보르헤스의 글은 환상과 사실을 넘나들고 있다. 이러한 글쓰기는 완벽하고 독특한 상상의 산물이나 현상을 마치 실재했던 사실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만든다. 독자는 보르헤스의 문학이 가진 ‘환상성’을 이해해야 한다. ‘환상성’은 보르헤스가 강조한 독자를 끌어당기는 ‘문학 작품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에서 보르헤스가 추구한 ‘환상성’에 영향을 준 미국 작가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는 ‘환상문학’의 뿌리이다. 그 뿌리 속에 흐르는 문학적 영양분을 듬뿍 받고 자라 훌륭히 성장한 나무가 바로 보르헤스다. 그는 자신을 ‘달의 작가’로 분류했다. ‘달의 작가’는 홀로 사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사상을 재료로 삼아 글을 쓴다. 반면 ‘태양의 작가’는 정치적 상황에 참여하기를 좋아하는 현실주의자이며 능숙하게 글을 써내려간다. 보르헤스는 미국의 초월주의자들을 주목했는데, 그들은 ‘달의 작가’에 속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사회보다는 개인, 이성보다는 직관을 앞세웠고, 자연과의 접촉을 통해서 ‘초월적 자아’를 완성하는 삶을 살았다.
그밖에 보르헤스는 추리소설, 서부문학, 인디언 문학 등에 주목하여 러브크래프트(Lovecraft),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 등을 소개한다. 이들 역시 포의 문학적 영양분을 먹고 성장한 훌륭한 작가들이다. 그런데 보르헤스가 인디언 문학을 소개한 점은 아이러니하다. 보르헤스는 원주민 학살을 ‘문명화’를 위한 과정이라고 옹호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발언에 남아메리카 작가들도 한 목소리로 비난한다. 보르헤스가 19세기 미국 서부 시대에 활동했던 앰브로즈 비어스(Ambrose Bierce)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 의외다. 『아울크리트 다리에서 생긴 일(An Occurrence at Owl Creek Bridge)』, 『막힌 창(The Boarded Window)』, 『요물(The Damned Thing)』 등은 환상문학, 공포문학 단편 선집에 수록되는 비어스의 대표작들이다.
[1] 서문, 10쪽
* Trivia
‘베니토 세레노 선장’이라는 인물은 조셉 콘래드의 ‘나르시소스 호(Narcissus)’의 흑인을 떠올리게 하고,‥… (68쪽)
→ 『베니토 세레노(Benito Cereno)』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이 쓴 단편소설이다.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가 쓴 소설의 정확한 제목은 ‘나르시소스 호의 흑인(The Nigger of the Narcissus)’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