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뜬금없이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연애대위법》을 읽고 싶어졌다. 헉슬리의 초기작으로 분류되는 장편인데,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어서 《멋진 신세계》를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헉슬리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먼저 《연애대위법》 번역본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현재 구할 수 있는 <연애대위법> 번역본은 딱 한 권뿐이다. 동서문화사의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이다. 동서문화사! 구설수가 많은 출판사다. 저작권을 위반한 채 뻔뻔하게 《대망》을 판매했으며(이 일로 동서문화사 대표 고정일 씨가 검찰에 기소됐다. 그런데도 《대망》은 절판되지 않았다), 기존에 나온 번역본을 표절한 것으로 의심되는 책들이 있다.[1] <연애대위법>이 수록된 동서문화사 번역본도 그냥 넘어가기 힘든 의문점이 남아 있다.
1.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1판 1쇄 날짜는 1987년 7월 1일이다. 그런데 1판이 출간된 적이 있었는가?
번역본 발행정보에 따르면 1판 1쇄 발행일이 1987년 7월 1일, 2판 1쇄가 2013년에 나왔다. 발행정보 밑에 보면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다.
이 책은 저작권법(5015호) 부칙 제4조 회복저작물 이용권에 의해
중판 발행합니다.
출판사는 이 번역본이 중판 발행임을 명시했다. 저작권법이 규정한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란 무엇일까?
“회복저작물 등을 원 저작물로 하는 2차적 저작물로서 1995년 1월 1일 이전에 작성된 것은 이 법 시행 후에도 이를 계속하여 이용할 수 있다. 다만, 그 원 저작물의 권리자는 1999년 12월 31일 이후의 이용에 대하여 상당한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2]
우리나라는 1995년에 세계 저작권 협약(베른 협약)에 가입했다. 2차적 저작물(번역본)을 출간하려면 앞서 원 저작물(외국인의 저작물)의 권리자와 정식 계약을 해야 한다. 즉 세계 저작권 협약을 맺음으로써 1990년대 초반까지 쏟아져 나오던 해적판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예외 조항이 있다. 그것이 바로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다. 1995년 1월 1일 이전에 나온 2차적 저작물이 정식 계약을 거치지 않은 해적판이라도 출판될 수 있다.
1987년에 나온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은 원 저작물의 권리자와 출판 계약하지 않은 번역본이지만, 이 회복저작물 이용권이 적용되어 중판 형태로 재출간할 수 있다. 그래도 미심쩍은 점이 있다. 정말로 1987년에 동서문화사의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1판이 출간된 적이 있었는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동서문화사 판(2013년에 나온 중판)을 포함한 ‘연애대위법’ 번역본 총 12종이 소장되어 있다. 1959년 동아출판사를 시작으로 을유문화사, 삼성출판사 등이 <연애대위법> 번역본을 출간했다. 그런데 1987년에 나온 동서문화사 번역본은 없다! 중판으로 발행된 번역본만 있을 뿐이다.
나는 회복저작물 이용권이 정식계약을 하지 않은 책을 오늘날까지 나오게 만드는 ‘악법’이자 비양심적인 출판사들이 좋아하는 ‘편법’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저작권 협약 가입 이전에 나온 해적판의 번역 질은 그리 좋지 않다. 21세기에 요즘 잘 쓰지도 않는 단어,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맞지 않은 외래어를 보는 것이 거북하다. 그런데도 동서문화사는 회복저작물 이용권이라는 ‘편법’을 이용해서 기존의 번역본 일부를 무단 도용하거나 아예 중판으로 출간한다. 편집 교정을 거치지 않은 채 질 떨어지는 해적판 번역본을 내놓는다는 것은 독자를 기만하는 일이다.
2. 책을 번역한 ‘이경직’은 누굴까? 설마, 당신도 ‘유령 번역자’인가?
《멋진 신세계, 연애대위법》 번역자인 이경직의 약력이 의심스럽다. ‘국제대학 영문과 교수’라고 되어 있는데, 혹시 경기도에 있는 ‘국제대학교’를 말하는 것일까? 이 학교는 1997년에 세워진 사립 전문대학이다. 2006년에 ‘국제대학’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이 학교에 ‘영문학과’는 개설되지 않았다. 이거, 경력 위조인가?
이경직 씨가 ‘문예지 소설 <추운 밤>으로 등단’했다고 한다. ‘문예지 소설’이라면서 소설이 등재된 문예지 이름은 없는 것일까?
이경직 씨가 지은 책은 <영원과 사랑의 시>, 번역본으로는 윌리엄 사로얀(William Saroyan)의 <인간 희극>이 있다. 이 정보 또한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영원과 사랑의 시>라는 제목의 책이 1981년 문학출판사에 나온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일본 작가의 글을 번역한 것이고, 번역자 이름은 ‘이서종’이다. 또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인간 희극> 번역본 중에 이경직 씨가 번역한 것은 없다.
[1] [동서문화사 번역본의 불편한 진실] 2016년 3월 2일
http://blog.aladin.co.kr/haesung/8284417
[돈 내놔라! 출판사야!] 2017년 6월 18일
http://blog.aladin.co.kr/haesung/9402985
[2] 네이버 지식백과, <회복저작물과 출판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