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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그리는 여자들 - 여성 예술가는 자신을 어떻게 보여주는가
프랜시스 보르젤로 지음, 주은정 옮김 / 아트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인간이 제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거나 관심을 가지면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 한 것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지 않은 습관이다. 자화상은 그냥 화가 개인의 얼굴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화가로서의 나’라는 고유명사를 그리는 것이다. 얼굴에는 한 사람의 삶의 발자취, 감정과 욕망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반성이며 성찰이다. 사실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술의 역할이 아니라 철학의 역할이다. 그렇지만 자화상은 자기의 눈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세계를 바라보는 창구다.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붓으로 대답한다.
누구나 ‘나’와 타자의 외면 및 내면세계,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붓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서양에서 여성이 미술의 세계에 동참한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 미술은 남성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 미술가들은 눈부신 재능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하고, 연인이거나 경쟁 상대 격인 남성 미술가들의 그늘에 가려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는 아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네스(Holofernes)의 목을 자르는 이스라엘의 여성 영웅 유디트(Judith)를 그리며 남성의 우월성에 반기를 드는 도발적인 그림을 남겼다. 아르테미시아는 남자 미술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고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오랫동안 남성중심주의의 미술사에서는 잊혀 왔다.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지극히 사적이고 내밀한 자신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페미니즘 미술의 씨앗을 뿌렸다. 생전에 서른 번 넘은 수술을 받은 프리다는 다양한 고통의 표정을 간직한 자화상을 많이 남겼다.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은 ‘여성 자화상’ 속 여성의 이미지를 탐구한 책이다. 남성 우월적 시선에 대한 통시적 분석과 비판을 담은 이 책은 미술사의 조역이었던 여성을 공동 주역의 위치로 격상시킨다는 점에서 확실히 페미니즘적이다.
여성은 자신을 남성과 동등한 전문가라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남성은 그들을 미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 보았고 여성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뒤섞인,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중략) 미술가란 무엇인가? 만약 그 답이 그저 미술을 실행하는 사람이라면 여성 미술가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록된 역사에 의해 미술가는 항상 남성으로 전제되며 여성 미술가는 예외적인 영재에 해당한다. [1]
《자화상 그리는 여자들》은 남성중심주의 미술사 속에서 상실되고 매몰되어왔던 ‘여성 이야기’의 재발견이라는 커다란 페미니즘의 틀 안에서 출발한다. 페미니즘 미술 영역 중의 하나가 저평가받고 알려지지 않은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 그녀들의 항변, 남성 못지않은 위대한 창조성 등을 재발견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여성 자화상은 14세기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cio)의 <유명한 여성에 대하여>[2]에 실린 삽화다. 이 삽화에 ‘마르시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모습이 있다. 여성 미술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여성 미술가들은 자신의 미적 감각을 과시하고 입증할 수 있는 자기 묘사 방식을 선호했다. 17세기 여성 미술가의 자화상은 이전 세기 자화상보다 자신감이 넘치는 분위기가 있다.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모습을 ‘회화’로 의인화하는 소재로 선택, 자화상을 제작했다. 아르테미시아 이전에 남성 미술가들은 여성을 ‘남성 미술가에게 영감을 주는 조력자’인 뮤즈(Muse)로 형상화했다. 아르테미시아는 고전적 · 남성적 여성 형상 방식을 거부하고 여성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부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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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여성 미술가들이 활동했다. 로살바 카리에라(Rosalba Carriera), 앙겔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mann)[3], 엘리자베트 비제르브룅(Elisabeth Vigee-Lebrun) 등이 대표적인 전문 화가들이다. 비제르브룅은 루벤스(Rubens)의 초상화를 의도적으로 모방하여 자화상을 그렸다. 루벤스의 초상화 속 여성은 다분히 남성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는 그녀의 자세, 그리고 남성 감상자를 향해 요염하게 바라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은 남성 감상자를 만족스럽게 하는 클리셰이다. 하지만 자화상 속 비제르브룅은 적극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남성 감상자를 바라본다. 그녀의 한 손에 들고 있는 붓과 팔레트는 비제르브룅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만약 남성 감상자가 자화상을 보면서 ‘그림 속 여성의 미모가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자화상을 제대로 보지 않은 무지한 감상이며 여성 미술가에게는 실례가 되는 발언이다. 루벤스의 여성은 코르셋(corset)을 착용한 상태다. 코르셋은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의복이다. 비제르브룅은 코르셋이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녀는 코르셋이 만드는 인공적인 아름다움을 불쾌하게 여겼고 항상 코르셋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 또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누드화라면 으레 20대의 늘씬한 모습만을 연상하는 남성들에게 질리언 멜링(Giliian Melling)의 『나와 나의 아기』(1992년 작)는 확실히 여성의 신체에 대한 고정관념을 무너뜨리는 자화상이다. 임신으로 불룩 튀어나온 배, 축 처진 가슴을 드러낸 그녀의 그림 앞에서 남성 관람객들은 일반 누드화를 대하는 감상을 전혀 할 수 없다. 이 그림에는 ‘미술’에 대한 경험, ‘여성’의 정체성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이 그림에 남성이 즐겨 사용하는 ‘아름다움’이란 단어가 절대로 들어올 수 없다.
여성 자화상의 매력은 여성 미술가의 내면과 이미지로 형상화된 목소리를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자화상 속 여성 미술가들은 남성 감상자 앞에서 자신 있게 말한다. “이 그림에 네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여성’은 없어.” 여성 자화상의 매력은 남성 감상자의 모습을 똑바로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기도 한다. 거울은 성찰의 은유적 대상이다. 거울은 분명 외모를 비추지만 우리는 거울 안에 비친 제 모습으로부터 내면을 찾으려고 한다. 남성 감상자는 ‘거울’이 된 여성 자화상을 바라보면서 내면에 들어앉아 있는 남성성의 문제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반응을 통해 남성은 여성을 전시하고, 품평하고, 눈요기 대상으로 묘사한 남성 미술가의 그림을 비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여성 자화상은 남성 감상자에게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여성의 눈’으로 그림을 보는 것도 예술 이해의 기본이다.
[1] 서문, 34쪽
[2] 《보카치오의 유명한 여자들》(임옥희 역, 나무와숲)이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있다.
[3] ‘안젤리카 카우프만’으로도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