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Jean-Francois Millet)의 『만종』 같은 그림을 보면 경건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밀레는 밭에서 하루 일을 끝낸 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하느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멀리 보이는 교회에서 저녁기도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실제의 종소리야 바로 그쳤겠지만 ‘그림’에 담은 종소리는 1세기가 넘도록 울려 퍼지고 있다.

 

 

 

 

 

 

 

 

 

 

 

 

 

 

 

* 드림프로젝트 《세계 명화의 수수께끼》 (비채, 2006)

 

 

그런데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이 그림을 보자마자 ‘형언할 수 없는(Unnamable)’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만종』이 노동의 경건함과 일상의 평화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슬픔을 간직한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밀레는 『만종』을 부부가 아사한 어린 자식을 땅에 묻는 장면을 그리려고 했다. 달리의 주장이 사실로 판명되면 기도하는 부부는 실은 죽은 아기의 명복을 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밀레는 이 장면이 너무 암울하다고 판단하여 죽은 아기가 있는 관을 감자 바구니로 덧칠하여 그렸다. 이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달리는 『만종』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그림들을 제작했다.

 

 

 

 

 

『만종』을 소장한 루브르 박물관은 달리의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자외선 투시 작업을 진행했다. 감자 바구니가 있는 자리에 조그만 나무상자가 그려진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이 전 세계로 전해지자 사람들은 달리의 투시력(?)을 재평가했다. 달리의 해석을 신뢰한 사람들은 『만종』이 원래 죽은 아기를 위해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믿게 됐고, 『만종』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두어야 할 필수적인 정설이 되었다.

 

여전히 논란이 있는 달리의 『만종』 해석이 예술 상식으로 소개되는 상황이 난감하다. 예술에 생소한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에 흥미로워 한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예술 이야기를 접하면 어렵다고 생각한 예술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밀레의 그림을 연구한 학자들은 달리의 해석이 억측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사실 의문의 나무상자가 달리의 말대로 관인지 입증할 만한 근거가 없다. 그러므로 『만종』의 관 이야기는 그림을 보고 불안감을 느꼈던 달리의 주관적인 해석에 가깝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심리’는 가짜 지식을 유통하는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준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때문에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만종』에 진짜로 죽은 아기의 관이 그려져 있다고 믿는다.

 

 

 

 

 

 

 

 

 

 

 

 

 

 

 

* 살바도르 달리 《달리, 나는 천재다!》 (다빈치, 2004)

*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 : 어느 괴짜 천재의 기발하고도 상상력 넘치는 인생 이야기》 (이마고, 2002)

* 살바도르 달리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 (이마고, 2012)

 

 

달리는 일생에 걸쳐 확증편향에 가까운 기행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과시욕을 보여줬다. 그는 마치 돈키호테(Don Quixote)처럼 자신뿐만 아니라 둘러싼 세상과 주변 사람들까지 변형해서 봤다. 그런 자신의 시선을 반영한 그림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생뚱맞고 난해하게 느껴진다. 달리의 그림을 이해하려면 달리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달리가 직접 쓴 글은 달리의 과대망상 세계관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었는지 알 수 있는 문헌이다. 《달리, 나는 천재다!》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일기 형식에 가깝다. 달리는 이 책의 서문에서 ‘천재가 쓴 유일한 일기’라고 밝혔다. 《나는 세계의 배꼽이다》는 달리가 37살에 집필한 자서전이다. 달리는 스스로 ‘세계의 배꼽’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오만방자한 발언들을 했다. 괴팍한 성격답게 달리의 문장은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 어떤 내용은 의식의 흐름 기법이 연상되며 이게 과연 어디서부터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간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게다가 앞에 언급했던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위배하기까지 한다.

 

 

일곱 살부터 여덟 살까지 나는 꿈과 신화의 지배 속에서 살았다. 나중에 가서는 현실과 상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나의 기억은 진짜와 가짜를 뒤섞어서, 너무나 부조리한 몇몇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한 다음에라야만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나의 어떤 추억거리가 러시아에서 벌어졌다고 할 때,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추억을 가짜로 분류할 수 있다. 한 번도 그 나라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1]

 

 

이 문장은 달리의 머릿속 또는 환각과 몽상으로 이루어진 달리의 그림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기본 열쇠이다. 달리의 그림은 상상과 현실이 교묘하게 뒤섞여 있다. 얼핏 보면 아무 생각 없이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달리는 자신의 그림들이 '객관적인 분석'을 시도하여 제작한 것처럼 설명했다.

 

 

 

 

 

 

 

 

 

 

 

 

 

 

 

 

 

 

 

 

 

 

 

 

 

 

 

 

* 로버트 래드퍼드 《달리》 (한길아트, 2001)

* 자비에르 질 네레 《살바도르 달리》 (마로니에북스, 2005)

* 장 루이 가유맹 《달리 : 위대한 초현실주의자》 (시공사, 2006)

* 돈 애즈 《살바도르 달리》 (시공아트, 2014)

* 캐서린 잉그램, 앤드류 레이 《This is Dali》 (어젠다, 2014)

 

 

달리는 자신이 지향하는 초현실주의를 설명하기 위해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라고 명명했다. 편집증적 비평 방법은 현실 세계의 대상(사람, 사물)을 환각 또는 상상력을 동원해 또 다른 대상으로 변형하여 해석한다.

 

 

 

 

 

 

 

 

 

달리는 ‘편집증적 비평 방법’으로 『만종』을 새롭게 봤고, 재해석했다. 그는 그 그림 속에 무의식적 욕망이 반영된 서사가 있길 원했고, 그가 확인한 것이 바로 ‘죽은 아기의 관’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달리는 농부를 어머니에게 정욕을 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가 지배한 아들로, 농부의 모자를 발기의 상징으로 봤다. 건초 마차는 성관계를 암시하는 대상으로 해석했다. 어린 시절 달리는 죽은 형을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못마땅했고, 그런 어머니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무의식 속에 품은 공포와 절망감을 『만종』에 투영해서 바라본 것이다. 그가 천재 특유의 투시력이 있어서 그림에 가려진 나무상자를 알아챈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실 ‘편집증적 비평 방법’은 달리가 아포페니아(Apophenia)와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거창하게 보여주는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현상들에서 연관성을 찾는 착시의 심리 상태이다. 이 두 가지 착시에 빠지면, 보름달을 보다가 떡방아 찧는 토끼 한 쌍을 발견하기도 하고, 화성 표면을 찍은 사진에서 외계 생명체로 추정하는 얼굴 형태를 찾는다. 『만종』의 감자 바구니를 죽은 아기의 관으로 본 달리의 시선 역시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 현상과 관련 있다. 회의주의자 입장에서는 객관성과 거리가 먼 달리의 ‘편집증적 비평 방법’이 우습게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달리의 예술을 옹호한다. 초현실주의 미술은 아포페니아와 파레이돌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어떤 질서, 특히 사람 얼굴과 닮은 형상을 보려고 한다. 달리를 포함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그런 인식의 한계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이용했다. 며칠 전에 쓴 글에서도 밝혔다. 인간은 상상할 자유가 있다.

 

 

 

 

[추신] 글의 제목은 말콤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 : 참을 수 없이 궁금한 마음의 미스터리》에 착안해 정해졌다.

 

[1] 살바도르 달리 《달리, 나는 천재다!》 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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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08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착각이 심하면 두가지 경향의 극단으로 치닫죠.
미쳤거나, 천재거나..^^..
다행히 예술로 미친거라서 작품의 망상적 해석이
예술로 발현된듯 하네요..

cyrus 2017-03-08 18:50   좋아요 0 | URL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수준 미달 정도가 아니면 예술에서 망상 허용은 인정합니다. ^^

갱지 2017-03-08 18: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보고 싶은대로 보고, 듣고 싶은대로 듣죠. 소통으로 균형을 잡아가는 이와 단절시키고 스스로만 공고해져가는 이가 있을 뿐. 달리는 후자의 끝 쪽이었던 듯해요, 재밌는 글 잘 읽고갑니다-.

cyrus 2017-03-08 18:52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달리의 삶을 살펴보면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하고, 고집스럽고, 자신의 아내에만 의지하는 성향이 있어요. 그가 아내를 만나지 못하면 자신만만하게 살아가지 못했을 겁니다.
 
연옥의 봄 문학과지성 시인선 493
황동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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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한다. 우리는 삶 속에 항상 죽음이 있음을, 그리고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자신을 죽음에서 지켜내는 정신의 전략을 마련해왔다. 죽음에 대한 망각과 모른 척 잡아떼기 또는 죽음을 사회에서 배제해 삶과 분리했다.

     

황동규 시인의 《연옥의 봄》은 죽음을 관조하여 삶이 굳건해지는 경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시집이다. 이제 곧 여든에 가까운 시인이 죽음을 관조하는 자세는 삶 속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일인데, 그 과정은 마치 잊은 반쪽을 찾는 것과도 같다. 칠십 넘은 세월을 살면서 잊고 있었던 죽음의 의미를 확인한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죽음에 다가설수록 더욱 풍부해진다. 내가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할지도 모른다. 저 바퀴 바로 앞에 기어가는 달팽이처럼 말이다.

    

 

짧은 비 그치자 밝아진 골목길에 달팽이 하나

몸보다 큰 소용돌이를 등에 지고

끝에 눈 달린 두 더듬이 좌우로 헤저으며 기고 있다.

시멘트 조각 하나를 힘들게 피한다.

눈물보다 더 진득한 분비물을 온몸에 두르고

오체투지 하고 있군.

     

슬그머니 승용차 하나가 앞을 막아선다.

바퀴 바로 앞의 오체투지!

달팽이가 더듬이 조심조심 내저으며 침착히 기어 바퀴 폭을 벗어난다.

볼 것 다 봤다는 몸짓을 하며 나도 자리를 뜬다.

볼 것 다 보았다니?

그래, 살아 있는 것들 하나같이 열심히 피고 열고 기고 있는 곳에서

더 이상 볼 게 없다는 거짓말 없이 어떻게 자리 뜰 수 있겠는가?

     

(『오체투지』 중에서, 44~45쪽)

 

 

한없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 마리도 실은 온 힘을 다해 기어간다. 이 지구상의 존재들은 저마다 오체투지로 굴러가고 있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오체투지의 삶은 실존이며 생존이다. 그렇게 삶이 움직이는 순간이 힘들어도 달팽이를 생각하면 숨 쉬는 사소한 순간이 더없이 소중해진다.

     

망각은 곧 죽음이다. 다시 말해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도 같은 존재다. 우리는 모든 걸 너무 빨리 지우면서 산다. 심지어 ‘죽음’이 가까이에 있는 곳조차 잊어버린다. 죽음은 나로부터 먼 곳에 있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하루를 살아간다. 시인은 우리 삶 전체를 거대한 ‘기억의 집’으로 비유했다. 이승의 인간은 기억의 집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죽음을 앞두면 소중하고 행복했던 집을 떠날 채비를 해야 한다.

    

 

여기엔 이름 모를 하얀 꽃 한 무리가 피어 있군.

키 작고 꽃이파리 조금 산만하지만

가을 쑥부쟁이 닮은 봄꽃, 이름 가물가물.

아 저기에도 이름 사라진 노란 꽃.

머릿속이 캄캄해진다.

내가 드디어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보다.

     

이러다간 이 세상에서 같이 산 이름 몇마저

제대로 담지 못한 머리를 들고

저 세상 불 앞에 서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꽃들이여, 새들이여, 저세상에는

기억이 더 아픈 자들도 서성댈 것이다.

그대들, 이름 같은 데 신경 쓰지 말고

제 생김새, 제 색깔, 제 꿈들을 가지고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다들 가시게.

     

(『기억의 집에서 나오다』 중에서, 92~93쪽)

    

 

우리는 ‘기억의 집 들락날락하며’ 살고 있다. 잠은 죽음의 동생이다. 죽음의 본능을 가진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의 쌍둥이 동생이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이다. 잠은 외부로부터 자극이 차단되고 반응이 없는 상태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회복이 가능한 상태다. 그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기억의 집’을 들락날락하면서 살고 있었다. 인간은 보통 일생의 30~40%를 잠으로 보낸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뭐가 아쉬워서 수면 부족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노동을 한다. 삶과 죽음이 반반씩 섞인 잠마저 잊으니까 죽음도 같이 잊어버린 걸까. 삶의 여유마저 사라지는 것도 서러운데, 수면의 여유까지 없는 세상은 고통스럽기만 하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 삶은 ‘기억의 집’이 아니라 ‘고통의 집’이다. 기분 나쁜 고통을 짊어진 채 살아간다. 누구나 이 생기 없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혼이 어디 나갔지?

쥐똥나무 쪽에서 누군가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혼이라는 거, 그게 어디 따로 있는 거우꽈?

펭생 자기답게 열심히 살면, 그게 그의 혼입주.’

     

(『섬쥐똥나무들의 혼』 중에서, 82쪽)

    

 

정신이 건강한 혼일수록 생기가 싱싱하게 돌고, 삶의 의욕도 넘친다. 꿈, 사랑, 성실로 똘똘 뭉친 오체투지의 생은 특별하다. 즉, 정신이 건강한 혼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긴다. 주변을 의식해 경쟁 대상으로 삼지 말고, 마음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여 자기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다. 누구는 바른 역사 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 된다고 말했던데, 거짓과 허위 뒤에 비겁하게 숨은 사람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 그는 주변을 의식해서 자신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인다. 그 사람처럼 열심히 살지 못한 혼이 비정상이다.

   

삶이 하나의 전체로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삶의 한계’를 떠올릴 때이다. 시인은 시집을 통해 죽음과 친화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시인은 죽음을 미화하지 않는다. 연작시의 제목이자 시집 표제어인 ‘연옥의 봄’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간적 공간이다. 유한한 삶을 받아들이는 운명이지만, 그렇다고 일찍 죽을 정도는 아닌 어중간한 영혼이 머무는 곳. 그러므로 그곳에 사는 우리는 성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죽음의 공포에 전전긍긍하는 삶이 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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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7 22: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8 08:34   좋아요 0 | URL
죽음은 내곁에 머무는 생존의 그림자.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김이지 2017-04-15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많은 생각을 하게하는 좋은 글입니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란 공포에 떠는 삶이아니라, 삶을 보다 충만하고 건강하게 꾸려나가는 삶이라는 것이 와닿는 대목이네요. 감사합니다

cyrus 2017-04-15 19:49   좋아요 0 | URL
한 번뿐인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아직 오지 않은 죽음을 벌써 두려워해선 안 됩니다.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김훈 《공터에서》 (해냄, 2017)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김훈의 《공터에서》에 둘러싼 논란 말이다. 이 소설을 안 읽어 본 사람들도 안다. 유아 성기를 묘사한 소설의 문장이 문제라는 사실을.

 

북청(北靑)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 도로에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흘러갔다. 이도순은 머리에 쌀 한 말을 이었고, 신혼의 남편이 돌 지난 딸을 업었다. (중략) 아기가 남편의 등에서 오줌을 쌌다. 남편이 처네를 풀었다. 이도순은 보따리에서 기저귀를 꺼냈다. 딸아이의 작은 성기가 추위에 오므라져 있었는데 그 안쪽은 따쓰해 보였다. 거기가 따뜻하므로 거기가 가장 추울 것이었다. 젖은 기저귀에서 김이 올랐다.[1]

 

어떤 독자들은 이 문장을 보자마자 불편하다고 느꼈다. 특히 김현 시인은 ‘딸아이의 작은 성기’에 대한 묘사가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관음증적 시선이라고 주장했다.[참고1] 그런데 이 문장을 남성 중심적 · 관음증적 시선이 빚어낸 최악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비판의 근거들이 빈약해 보인다.

 

관음증은 남을 몰래 훔쳐보는 행위이다. 인간은 사회를 조직하고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개개인의 원시적 본능은 억제되어야만 했다. 남의 눈 때문에 억압되어 온 감정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보면서 해방감으로 전이돼 나타나는 것이 관음증으로 나타난다. 더욱 감춰질수록 관음증적 시선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김훈이 묘사한 ‘딸아이의 작은 성기’는 감춰진 상태가 아니다. 이도순은 딸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그 신체 부위를 보게 된다. 딸이든 아들이든 신생아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어머니는 아기의 성기를 자주 볼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다. 부모가 기저귀를 가는 도중에 아기의 성기를 흘끗 보는 것만 가지고 아이의 성기를 ‘성적 대상물’로 바라본다고 규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여자의 성기를 묘사한다고 해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장으로도 볼 수 없다. 문장에 대한 지나친 과잉 반응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나탈리 앤지어(Natalie Angier)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는 친구의 어린 딸(이름은 수전)의 기저귀를 가는 중에, 어린 딸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보게 된다. 그 문장을 인용하겠다. 이 문장을 읽는 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친구에게 자기 어린 딸을 좀 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딸을 수전이라고 부르자. 어머니는 신생아인 나 말고도 더 큰 딸이 있었으므로, 여자아기의 생식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수전의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음순의 동그란 둔덕 사이로 삐쭉 튀어나와 있는 클리토리스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음경 같지는 않았다. 내 어머니에게는 아들도 하나 있었기 때문에 아기 음경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아기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코끝이나 새끼손가락처럼 보였고, 어머니가 천으로 닦아내자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하게도 약간 단단해졌다. 어머니는 수전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 모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2]

 

 

수전의 클리토리스를 자세히 묘사한 장면을 보고 불편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꼈는가. 정말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생각했다면, (공개든 비밀이든) 댓글에 남겨주시라. 아! 덧붙여 말하자면, 나탈리 앤지어는 여성 작가이다.

 

성기가 따뜻해 보인다고 묘사한 문장도 성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기 어렵다. 이 문장이 정말로 외국에서는 ‘소아성애증(pedophilia)’으로 신고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소아성애증은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 성적 감정이나 성적 매력을 느끼는 증상이다. 소아성애자가 아무런 성적 의도가 없는 이 문장에서 성적 흥분을 느꼈다면 작가는 이 문장에 향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문장이 ‘소아성애증’을 유발하는 위험한 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린 시절 자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SNS에 공개하는 부모를 먼저 비판하는 것이 현명하다. 어떤 부모는 아기의 알몸 사진이 귀엽다고 SNS에 공개하기도 하는데, 소아성애자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성기는 신체 일부이며 당연히 주변 환경에 따라서 체온 변화가 나타난다. 추울 때 몸에 발산하는 열이 피부 표면 밑을 흐르는 혈액에 전해지면 그 피부 부위가 따뜻해진다. 여성의 성기는 온도 변화에 예민하다. 왜냐하면, 신경의 결합조직인 루피니 소체(Ruffini‘s corpuscle)가 체온을 감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3]

 

 

 

 

 

 

 

 

 

 

 

 

 

* 김훈 《칼의 노래》 (문학동네, 2014)

 

 

《공터에서》 묘사 논란 때문에 《칼의 노래》의 ‘젓국 냄새’도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유명한(?) ‘여진의 젓국 냄새’이다. 여진은 이순신과 같이 밤을 보낸 여성이다.

 

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 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 여자의 입 속은 달았고, 그 여자의 몸 속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는 다급한 갈증이 섞여 있었다.[4]

 

작가는 전쟁통에 제대로 씻지 못한 여진의 불결한 상태를 여성의 질 냄새로 비유했다. 과학적인 사실을 근거로 이 문장의 문제점을 따져본다.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 (동아시아, 2017)

 

 

정상인의 질 내는 pH3.6∼4.5로 약한 산성을 띤다. 이것은 주요 생식기관인 여성의 질을 보호하는 유산균 박테리아가 질 내에 살면서 계속해서 젖산을 생성, 산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이 다른 균에 감염되면 이 산성도가 깨져서 분비물이 많아지게 되고, 오래된 생선 냄새와 유사한 악취가 일어난다. 김훈의 ‘젓국 냄새’를 본 남성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이 질을 자주 씻지 않으면 지저분한 냄새가 나는구나.’ 이런 인식은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여성의 질 냄새는 수치스럽고, 불결하다, 문란하다’는 편견을 심어준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친구나 아내를 위해 질 세척을 권하기도 한다. 특이한 질 냄새가 난다고 해서 여성의 질이 불결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질 냄새가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다. 남성과 성관계를 자주 할수록 여성의 질은 정액에 노출되는데, 질 내 미생물 보존 상태가 교란된다. 그래서 질에 생선 냄새가 나고, 심하면 질염이 생길 수 있다. 질 세척은 안 해도, 그렇다고 너무 자주 해도 질 냄새가 생긴다. 질 세척을 자주 하면 질 내 유산균 같은 이로운 미생물마저 죽인다. 질 세척을 자주 할수록 난소의 건강이 악화하여 난소암 발병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참고2]  여자친구의 질에서 나는 생선 냄새를 맡는 게 죽어도 싫어도 섹스를 하고 싶은 남자들에게 유용한 충고를 한다. 여자친구에게 질 세척을 강요하지 말고, 섹스할 때 콘돔을 착용해라. 생선 냄새가 나는 것은 여자친구 잘못이 아니다.

 

사실 《공터에서》에서 읽으면서 내가 불편하게 느낀 묘사는 따로 있다. 양갈보는 미군을 상대하는 매춘부를 가리키는 은어이다. 그런데 참말로 신기하다. 《공터에서》를 비판하는 독자들은 왜 이 문장에서는 침묵하는 걸까. 《공터에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인용 · 공유한 ‘딸아이의 작은 성기’ 같은 사소한 것만 보고 분노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마장세는 구두 통을 메고, 자석에 끌리듯이 미군과 양갈보의 뒤를 따라갔다. 꽉 조이는 스커트에 여자의 엉덩이가 도드라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엉덩이가 흔들렸다. 하얀 다리가 미군의 바짓가랑이와 보폭을 맞추었다. 아, 여자의 엉덩이는 왜 저렇게 도드라지는 것일까.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 엉덩이는 꽃이 피듯이, 해가 뜨듯이 그렇게 명료하게 마장세의 눈앞에서 도드라져 있었다. 여자의 엉덩이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라는 사실에 마장세를 놀랐다.[5]

 

 

 

 

 

 

 

 

 

 

 

 

 

 

 

* 데즈먼드 모리스 《털 없는 원숭이》 (문예춘추, 2011)

* 플로렌스 윌리엄스 《가슴 이야기》 (Mid, 2014)

 

이 문장이야말로 ‘남성 중심적 · 관음증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왜 ‘여자의 엉덩이’를 도드라진 ‘여성의 가슴’처럼 묘사한 것으로 느껴질까. 여성의 엉덩이를 남성을 위한 성적 신호로 묘사한 이 문장이 심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한다면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J. Morris)의 《털 없는 원숭이》 96쪽과 플로렌스 윌리엄스(Florence Williams)의 《가슴 이야기》의 2장 ‘젖가슴의 기원’을 꼭 ‘함께’ 읽어보시라.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여성의 가슴이 엉덩이를 모방한 성적 기호라고 주장하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가설을 반박한다.

 

 

 

 

 

 

 

[1] 김훈 《공터에서》 95쪽

 

[참고 1] 『소설가 김훈, 신작서 ‘소아 성기 묘사’ 논란… “관음적 시선 불쾌”』 여성신문, 2017년 2월 13일

 

[2] 나탈리 앤지어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구판) 107쪽

 

[3] 옐토 드렌스 《버자이너 문화사》(《마이 버자이너》 구판) 56쪽

 

[4] 김훈 《칼의 노래》(2001년 구판, ‘생각의나무’ 출판사) 39쪽

 

[참고 2] 『질 세척 자주 하는 여성 난소암 위험 2배』 연합뉴스, 2016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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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의서재 2017-03-07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논란이 있었군요. 동의와 반대를 떠나 우리의 시선을 다시한번 재점검해야할 시기임을 느낍니다. 여성이 저 역시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기존의 틀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반성하거나 각성해야하는 지점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페미의 대세속에서 많이 배워야하는 요즘입니다.

cyrus 2017-03-07 20:58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저는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된 언어, 그리고 시선들을 비판하는 일이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교정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yureka01 2017-03-0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논란 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저도 딸아이 아기일때 기저귀 자주 갈았죠.
초딩때까지도 목욕을 시켰어요....

소설적 표현의 디테일이 관음증으로 까여야 하다니..ㅎㅎㅎㅎ
진짜 그런건 깔 게 아니고
좀더 큰 테마를 비평해야할텐데 말이죠...

사소한 것에는 까칠하게 까면서,
정작 중요한 담론에는 건들지 않더군요...

cyrus 2017-03-07 21:01   좋아요 1 | URL
김훈 작가가 다른 작가와 차별화하는 문장을 만들려는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어떤 문장들은 빼도 되고, 아기 성기 묘사하는 내용도 그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이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나저나, 꼼꼼한 사이러스 님의 성의에 감동하고 갑니다..

이참에 이 포스트를 이달의 당선작으로 강력 추천합니다..

cyrus 2017-03-07 21:04   좋아요 0 | URL
아기 성기 묘사가 있는 문장을 근거로 작가의 반 페미니즘적 입장을 비판하는 리뷰를 봤어요. 김훈이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을 경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건 문제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문장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저는 김현 시인이 굉장히 비겁한 태도로 김훈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아마 괘씸하게 여겼던 부분은 한때 최고은( 아니다.... 최보은 기자였나 ? ) 하튼 그런 대화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김훈의 생각이 담겨 있어서 꽤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는데, 김현은 그것에 대한 화답처럼 느껴집니다 . 김훈의 신작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말이죠..

cyrus 2017-03-07 21:08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한국 소설을 안 읽는데다가 국내 문단에 소홀했거든요.

페미니즘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훈의 작품을 타당한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비판하면 좋은데,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없는 원숭이 책에서 저도 저문장을 읽고나서 모리스 등신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 글에 이 사람 비판한 것도 있는데... 엉덩이 형태가 가슴을 모방했다고.. 그런 바보같은소리가 어디있냐교.. ㅋㅋㅋ

cyrus 2017-03-07 21:09   좋아요 0 | URL
데즈먼드 모리스를 깐 곰발님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요. 저보다 더 재미있게 깠을 것 같습니다. ^^

stella.K 2017-03-0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나도 작품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

이걸 가지고 문제를 삼을 것 같으면
하루키나 <롤리타> 같은 건 번역되지 말아야지.
1Q84 같은 경우 아오마메 부분은 여자잖아.
결국 하루키는 남자 작가아냐?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필요있나?
하루키는 변태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지.
근데 하루키는 그냥 끝판으로 다 보여 주거든.
그렇다고 누가 욕하는 사람 없잖아.
중요한 건 김훈이 그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는 거 아니겠냐?
전체를 보고 얘기해야지 단편적인 거 가지고 작가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건 좀 지양해야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본질 가지고 얘기 안하고 비본질 가지고 따지더라.
하긴 이러다 김훈도 뒤통수 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만...ㅋㅋ

cyrus 2017-03-07 21:15   좋아요 1 | URL
어떤 독자는 문제 있는 소설의 묘사에 반응하지 않는 다른 독자들을 욕하던데요. 보는 눈이 없다면서요.. ㅎㅎㅎ

저는 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올거로 예상했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썰렁해서 제가 무안해지네요. 곰발님처럼 전투적이면서 시니컬하게 글을 썼어야 했는데.. ㅎㅎㅎ

분노의휘갈김 2017-03-07 2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허나 마장세의 생각을 묘사하는 부분 마저도 마장세라는 인물을 전달하기 위한 서술일뿐 한쪽 성을 깔보는 인식이 드러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cyrus 2017-03-07 21:18   좋아요 0 | URL
사실 마장세의 시선에 대한 묘사는 보는 사람들마다 반응이 다를 겁니다. 다만 페미니스트 입장에서는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구경거리가 전락한 묘사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transient-guest 2017-03-08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잘 뜯어보셨네요. 저는 글쓴이의 의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똑같이 성행위묘사를 찍어도 하나는 에로가 되고, 아나는 멜로가 되잖아요.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하는건 안 좋은 것 같아요. 원론적인 비판 같은 것도 별로...비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비판 같은거.. 참 싫죠...

cyrus 2017-03-08 08:58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이번 김훈 작가의 신작소설에 대한 악평 대부분은 과거 작가의 반 페미니즘 발언까지 언급하면서 비판한 내용이 많았어요. 과거 발언이 잘못된 건 사실이지만, 이걸 굳이 리뷰에까지 언급해서 책에 평을 하는 방식이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건 리뷰가 아닙니다. 그냥 책이나 작가에 대한 감정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3-0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에서 계획서 검토해달라고 하면
전반적으로 내용을 봐야되는데
기껏 띄어쓰기나 오타 잡아내는 사람들이 있죠.

cyrus 2017-03-08 13: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리뷰 쓸 때 정말 쓸 내용이 없으면 오타나 꼬투리 잡을만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봅니다.

레삭매냐 2017-03-0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서 보고 싶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고 싶어 예약 신청을 했는데 자그마치
순번이 7번이나 되고, 전에 빌려간 사람이 2월
에 반납했어야 하는 책을 아직까지 끼고 있어서
언제나 읽게 될지 모르겠네요...

cyrus 2017-03-08 15:10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이 사는 곳, 서울의 도서관은 예약 대기자를 많이 받아주는군요. 대구 도서관은 무조건 예약 대기자는 2명으로 제한되어 있어요. 저는 운 좋게 대구시청 작은도서관에 있는 걸 대출예약해서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어요. 레삭매냐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

건조기후 2017-03-09 18:1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젠더 문제는 결국 바로 그 젠더 문제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결코 하나의 지점에(는 커녕 비슷한 지점에조차도)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네요. 단지 여아의 성기 표현 하나때문에 분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사안을 너무 단순하게 보시는 거예요. 그만큼 여성의 신체가 얼마나 함부로 표현되고 묘사되는지 문제의식을 갖지 못 할 만큼 익숙해져 있는 것이기도 하겠고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딱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선 한국의 남성작가가 쓴 소설 <공터에서>와 여성이 쓴 과학도서인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를 비교하는 것은 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분야에도 김훈 소설의 여성비하적 표현보다 더 심각한 책이 넘치고 넘치고 넘치겠지만 그 또한 비교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언가가 불쾌하고 불편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이 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는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핵심을 비껴간 비겁한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갓난아기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적 묘사와 표현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아 이 정도면 비판할만 하구나, 결론을 내린 이후에야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훈의 문장이 불쾌하다는 것이 다른 건 괜찮다는 의미가 아닌데요.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딸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성기를 보고 안쪽은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아기 엄마가 딸아이 질 안쪽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자기는 물론 딸아이든 누구든 질 안쪽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아요. 그것은 질에 삽입하는 사람의 느낌이고, 이도순이 딸아이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김훈이 여자 아기를 보는 시각입니다. 소아성애적이라고 비난하는 이유입니다. ‘관음증적 시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여성의 심리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작가가 이도순의 눈을 빌어 은밀하게 아기의 성기를 감상하는 것이 관음증적이라는 뜻입니다. 성기를 몰래 본 게 아니고 드러내놓고 봤으니 관음증이 아니라니 ;; 관음증이라는 단어를 너무 단순하게 지시적 의미로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설사 아기의 질 안쪽이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김훈이라는 작가가 그렇게 여성 캐릭터를 세밀하게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밀하게는 커녕 지금까지 일관되게 젓국, 생리혈 등등 여성의 존재의미를 오로지 질이라는 신체기관 하나에만 국한시켜왔던 작가입니다.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거나 생명을 잉태하는 도구로서의 여성 이외에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갖는 가치관이나 심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작가가 딸아이의 성기를 바라보는 애 엄마의 감정이랍시고 작가 본인이 여성의 질을 바라보는 눈으로 표현하니까 역겹고 어처구니가 없는 겁니다.

김훈의 과거 인터뷰가 저 문장에 대한 비난을 증폭시켰던 것은 사실이고, 책에 대한 비판과 인터뷰에 대한 비판이 혼재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런 여아 성기 묘사의 문제에 있어서 그가 실제로도 지독한 성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나요? 작가의 가치관이나 성향을 작품과 별개로 봐야할 경우도 있지만 작품이라는 게 결국 작가 내면세계의 정수를 담은 결과물이기에 결코 따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성차별적 사고방식을 가감없이 드러낸 작가의 인터뷰를 비판하는 것이 책 속의 성적 표현을 비난하는 것과 다르다고 보진 않습니다.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까 겹쳐지는 게 당연한 겁니다.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캡처된 문장 하나로 침소봉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읽기가 싫은 기분을 결코 이해하지 못 하실 것 같습니다. 욕을 하더라도 읽어나보자 하고 여러 번 시도를 해봤지만 정말 책을 만지기조차 싫더군요. 지금까지 줄곧 반복되어온 여성혐오패턴을 다시 눈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 단순히 문장 하나에 과잉반응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쌓여왔던 분노가 지난 강남역사건에서 비로소 터져나왔듯이 한국문단에서 지금까지 수없이 난무해온 여성혐오 여성비하적 표현에 대해서도 비로소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이 있고, 각종 사회문제를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맥락속에서 저런 표현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겁니다. 문장 하나로도 충분히 문제지만, 이런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쯤에서 줄여야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상세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능력의 한계네요.

cyrus 2017-03-10 10: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건조기후님. 댓글을 남겨주신 점 감사드리고요,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몇 시간 동안 건조기후님의 댓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읽었어요. 건조기후님의 생각에 대한 제 입장을 신중하게 밝히고 싶었고, 제가 잘못 생각한 점이 있는지 검토해봤습니다. 그래도 건조기후님이 제 의견에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에 대한 배움이 부족해서 미흡한 점이 있을 겁니다.

저는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을 둘러싼 논란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가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채 묘사된 것에 심각하게 생각하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이라는 글에서 마장세가 매춘부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비판했습니다.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과 아기의 클리토리스를 묘사한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비교한 점이 잘못되었다는 건조기후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사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쓰기 전까지 정말로 두 문장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인용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글쓴이와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인용했으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어요. 아니면 남성 작가가 쓴 글이라고 소개하면 이 또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요.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를 ‘아버지’로 살짝 바꿔서 썼다면 어땠을까요? 여러 가지 반응이 있겠지만, 아마도 글쓴이가 아기의 클리토리스를 바라보는 점, 그리고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마음에 들었다’라는 표현 때문에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은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 논란을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으로 판단해서 쓴 글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는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라는 의도로 글을 쓰지 않았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이보다 더 심한 사례’로 설정한 것도 아니고요. 제가 그런 의도로 글을 썼으면, 여성이든 갓난아기든 성기를 묘사한 다른 작가의 글을 인용했겠죠.

건조기후님이 딸아이 성기를 바라보는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를 언급하셨는데요, 건조기후님 말씀대로 김훈처럼 생각하는 여성이 없을 거예요. 딸아이 기저귀를 가는 아버지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고, 역시 김훈의 묘사에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건조기후님이 언급한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를 보면서 그 개념의 반대를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가 자기 딸들의 생식기에 마음에 들어 하는 감정이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에 부합되지 않는지 궁금했어요.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건조기후님의 논리대로라면 여성들이 자기 딸의 생식기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딸아이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남성 중심적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일부 남성은 ‘두드러지게 튀어나오는 클리토리스’를 선호하지 않고, 무조건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클리토리스’가 예뻐서 좋아하는,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건조기후님의 논리대로라면 제가 이 댓글에 인용한 문장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관음증을 단순하게 바라봤다는 건조기후님의 지적을 인정합니다. 소설, 각종 미디어에서의 ‘관음증적 시선’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협소한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관음증’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공터에서>를 읽으면서 김훈이 ‘가부장제의 힘에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적인 작가’로 보였습니다. 당연히 <공터에서>를 통해서 가부장제로 인해 주변에만 머무는 여성 인물(이도순)과 가부장제의 힘에 종속된 여성 인물(박상희)를 봤습니다. 제 리뷰를 보셨는지 모르지만, 제목이 『여성도 슬퍼했고, 아팠다』입니다. 안 보셔도 됩니다. 만약에 읽어보신다면, 제 글의 문제점을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김훈의 과거 반페미니즘 발언, 그리고 작품 속에 드러난 성차별주의를 모조리 덮자고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쓴 것이 아닙니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남성 작가들의 성차별적 · 남성 중심적 발언과 묘사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교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김훈의 성기 표현 논란 분위기가 너무 일찍 소강상태를 보인 게 아쉽습니다. 저는 점점 식혀지는 ‘뜨거운 감자’를 건드려봤고, 다른 관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 입장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닙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 또한 타당성 있게 설명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저도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찾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건조기후 2017-03-14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미니즘 공부가 많이 부족하고 또 제가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단지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 성기같은 것을 묘사했다고 해서 무조건 여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 페이퍼에서 마장세가 여성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부분이 오히려 여성혐오 아니냐 하셨는데 저는 이 대목은 그렇게 불쾌하지 않습니다. 물론 소설이 아니라 실제라면 다를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소설이라고 해도 불쾌할 수 있겠죠. 저는 되려 마장세가 아주 짠하게 느껴지는데, 사실 미군의 옆에 붙어가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저런 기분을 느끼는 남성 캐릭터는 여성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한심하고 토 나오는 캐릭터이긴 한데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고 소설에서 그리지 못 할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요.

불쾌하냐 아니냐 기준을 명확하게 딱 선을 긋기는 어렵습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저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긴 한데 왜 꼭 성적 대상화된 여성만을 소설에 등장시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저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저런 캐릭터가 소설의 재료로 취사선택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의 기준에 작가의 가치관과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겠고요. 세상은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데 여전히 구시대적인 여성관에 사로잡힌 작가를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결국 문학이란 인간에 대해 천착하는 것인데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작가를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저는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댓글에서 굉장히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여성이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오지 않은 깔끔한 생식기를 좋아하는 것이 왜 남성중심적 시각입니까? 남성이 선호하는 것과 여성이 선호하는 것이 같으면 여성이 남성의 선호를 따라가는 것인가요? 이해가 되지 않네요. 여성이 좋아하는 건 여성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성도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오지 않는 것을 좋아할 수 있죠. 당연한 것 아닌가요? 여성들이 왜 자기 몸을 남성의 시각으로 본다고 생각하세요? 남자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성형을 하는 여자들도 있긴 하지만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으시고 여성들의 존재를 찾는 데 노력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탈리 앤지어의 책에서 인용하신 부분을 처음에는 아버지가 한 말이라고 바꿔볼까 하셨다는데, 기본적인 인식부터 굉장히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적인 언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발화자의 성별인데 그것을 바꿔서 반응이 어떨까를 보려고 하셨다니 좀 당황스럽네요. 어머니가 한 말이라면 단순한 취향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한 말이라면 당연히 아기를 성적 대상화한 것이고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딸의 성기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하나요? 왜 여성의 성기가 남성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까? 당연히 이런 비판이 따랐겠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네요.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도 과학적인 시각으로 중립적으로 봐야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

저 위의 댓글도 쓸까말까 하다가 답답해서 쓴 것인데, 조금이라도 여성의 입장이 이해되기를 바랐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던 것 같네요. 나름대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페이퍼를 성실하게 작성하신 것은 알겠지만 진심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으신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기본적인 이해조차 잘 못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늘 이런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말하다 지칠 것이 뻔해서 댓글도 쓸까말까했던 것인데 역시 우려대로네요. 제가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하는 의미는 없는 것 같고, 평소에 워낙 다독하시는 분이니 앞으로도 관심이 있으신만큼 많이 읽으시고 사고의 깊이도 더해지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cyrus 2017-03-14 10: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건조기후님. 답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조기후님의 답글을 읽고 난 후 제 첫 번째 의견(댓글)을 다시 검토해봤습니다. 제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인데,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페미니즘의 기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을 인정합니다. 건조기후님의 충언,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나탈리 앤지어의 말을 아버지 입장으로 바꿔보려는 제 생각은 불순한 의도로 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의견을 전달하는 데 역효과가 된 건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를 비판하는 의견을 과학적 관점으로 검토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건조기후님의 의견을 듣고 보니 제 생각이 많은 분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여성의 신체 부위를 묘사했다고 해서 여성 혐오, 성차별적인 묘사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조기후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마장세가 엉덩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묘사한 장면이 여성 혐오인지 아닌지 의견이 엇갈릴 듯합니다. 건조기후님처럼 그 묘사가 여성 혐오라고 생각하지 않은 분들이 있으니까요. 서로 다른 관점을 시선의 차이로 이해하겠습니다.

여성도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의견에서 남녀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얽매 여셔 그 점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과거의 남성들은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했고, 자신의 취향을 여성에게 강요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온 여성을 ‘마녀’로 규정했고, 클리토리스의 형태를 여성의 또 다른 얼굴로 봤습니다. 여성들은 클리토리스를 예뻐 보이려고 화장을 했습니다. 남성들의 만족을 위해서죠. 남성들은 예쁘면서도 깔끔한 형태의 클리토리스를 선호했고요, 남초 커뮤니티나 군대에서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한다고 말하는 남자들을 만난 적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가 소수일지 아니면 생각보다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마이 버자이너》와 나탈리 앤지어의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에 호르몬 이상으로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가진 여성들의 사례가 나옵니다.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들은 그녀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남성중심적 사고와 편견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유를 억압합니다. 그리고 예쁜 클리토리스를 만들기 위해 미용 수술을 합니다. 《마이 버자이너》에 보면 네덜란드의 소녀들은 자신의 클리토리스가 못생겼다고 생각해서 고민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미용 목적의 클리토리스 성형 수술이 있습니다. 《마이 버자이너》의 저자가 이런 현상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장은 《마이 버자이너》의 구판 《버자이너 문화사》입니다. 제목만 다를 뿐, 저자와 내용은 동일합니다.

“여성 성기 미용 의사는 성기의 비대칭을 모조리 바로잡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 의사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는 수많은 사진들을 보았는데, 엄청나게 다채로운 개개인의 다양성이 천편일률적으로 다듬어져 일종의 표준 음부로 탈바꿈한 데 무척 놀랐다. 우리가 보는 포르노 사진들 역시 손질을 통해 다듬은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모델은 점점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되고 있다.” (《버자이너 문화사》 428쪽)

여성이 매끈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하는 건 그 여성 개인의 취향입니다. 그렇지만, 남성들이 좋아하는 포르노 배우처럼 여성이 클리토리스를 예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라면 클리토리스가 크든 작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클리토리스가 크다면서 무시하고, 놀리는 남성은 여성의 몸을 남성이 소유하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또 여성의 몸은 무조건 아름다워 해야하며 그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선호하지 못한 것을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봤던 것입니다. 제 입장을 오늘 ‘마이페이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 시선 때문에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가꾸려고 하고,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저는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남성들의 편견과 시선 때문에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갑갑한 상황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다락방 2017-03-14 18:23   좋아요 2 | URL
뒤늦게 덧붙이기가 저어되지만, 건조기후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서 부러 씁니다. 저는 이 페이퍼를 읽고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불쾌함을 백번 얘기해도 전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 역시 긴 댓글을 쓸까 하다가 피로함이 느껴졌어요. 게다가 주루룩 달린 댓글들을 보니 이 지점에 대해 제가 제 불쾌함을 적는다해도 전달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냥 뒤로 빠졌습니다. 페미니즘 얘기하면서 다른 남성 알라디너와도 얘기하다 벽을 느껴본지라 제 힘으로 이걸 전달할 순 없을거라 포기했어요. 그런데 건조기후님은 제가 포기한 걸 해주셨네요.


제가 일전에도 사이러스님께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여기 계신 다른 분들 역시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고 또 그 나름의 관점과 생각을 갖고 계실겁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들 비난한다면, 또 화를 냈다면, 사이러스님, 그건 그들이 뭔가를 놓쳐서가 아니라, 뭔가를 보았기 때문일겁니다.

cyrus 2017-03-14 18:45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이 제 글의 결함, 그러니까 제가 문제의 사태를 심각하게 깨닫지 못한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댓글을 남겨주신 건조기후님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물론, 잘못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페미니즘에 부합되지 않는 입장을 드러내는 제 글을 불편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네. 제가 페미니즘의 기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제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글을 쓴 이유가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제 입장을 공개해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문제점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역시 제가 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다락방님 말씀처럼 제가 다른 분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 글쓰기가 옳은 건지 확신할 수 없지만,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글쓰기로 제 자신을 교정하고 싶습니다.

너드 2017-03-16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책도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열받은 건 김훈의 인터뷰 시 여성에 대한 쓰레기같은 워딩들 때문이에요. 궁금하시면 검색해 보시면 수두룩하게 뜨니까 참고하시구요. 여성혐오와 남성우월주의에 찌든 그의 워딩의 저열함이란 사이러스님의 상상을 초월할 거예요 정말... 미리 눈뽕(...) 조심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여기에 반대 댓글이 잘 달리지 않는 건 알라딘 특히 모바일의 경우 지금 이 댓글 페이지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너무 까다로워서일 거예요. 접근성이 이렇게나 떨어지니 여기에 댓글이 뭐가 달렸는지 알기가 너무 어렵죠..(저만 해도 책 상세페이지 아래 의견 섹션은 그냥 책 살까말까 독자들 반응이나 보는 용도였지 이렇게 답글 달려고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 헤맸어요 ㅋㅋ 의견 나누는 창구 접근성이 이렇게 떨어지는 거 진짜 고쳐야 해요 알라딘...)

cyrus 2017-03-16 09: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Jeremias님. 죄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초면에 댓글을 남기기가 망설였을 텐데 의견을 밝혀주셔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공터에서>를 읽기 전부터 김훈의 반페미니즘 발언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때 김훈의 소설을 읽은 독자로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지적한, <칼의 노래>와 <화장>의 여성 차별적 묘사도 다시 봤습니다. 비판받을 만한 문장이었습니다. 몇몇 분들의 의견을 듣고 나니까 <공터에서>의 성기 묘사에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글에 반대 댓글이 달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겁니다. 첫 번째 이유는 Jeremias님이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북플 이전의 알라딘 서재 시절에는 회원들은 컴퓨터로 서재 글과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플이 생기니까 스마트폰으로 글을 보게 되고, 분량이 긴 글을 읽기가 불편해요. 댓글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긴 내용의 댓글을 스마트폰으로 입력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댓글은 컴퓨터로 접속해서 남기는 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제 서재가 ‘비회원 계정으로 댓글 달기’ 설정을 막아놨습니다. 비회원 계정으로 악의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건조기후님이나 Jeremias님처럼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히거나 소신 있게 비판하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설득할 수는 있어도, 상대방이 틀렸다는 식으로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욕설이나 인신 모욕 발언이 들어있지 않으면, 저를 비판한 다른 분들의 댓글을 지우지도 않습니다. 만약 제 서재에 ‘비회원 계정’으로 댓글을 달 수 있었다면, 거의 욕설로 도배되었을 겁니다. ^^;;

너드 2017-03-17 0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댓글을 어떻게 다는지 몰라 새로 냄깁니닼ㅋㅋㅋ 아 그러셨군요 저는 그런 기능(비회원 계정 댓글 막는)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너무나 신기.. 각설하고 사이러스님의 의견 나눔에 관한 성숙한 태도는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감사드려요.
 

 

 

사회가 점차 다원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는 차별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대통령 개인의 탁월한 리더십이나 포용력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회가 저급한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문제이다. 이러한 저급한 편견이 사회에 팽배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우리 사회가 과연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든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차별화에 따른 차등적 보상원리가 모든 사람을 더 열심히 살게 하고 나아가 사회 · 경제의 발전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분배정책이란 기회의 균등을 보장해 마음껏 재능과 창의를 발휘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결과의 불평등을 받아들인다. 분배 위주 정책이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다면 남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을 역차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이 올바르게 발전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개혁의 기본 방향이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 쪽으로 설정돼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민 모두를 위한 시장 개혁이 이루어지면 누구나 살맛 나는 사회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지만, 결국 재벌만 살맛 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착각이 불평등을 심화하고,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 인식만 심어줬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자신의 결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세상에 나타나는 ‘불필요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폐쇄적인 마음가짐이다. 이 문제점은 상대방이 겪는 정신적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일부 자유한국당 소속 정치인들, 대통령의 탄핵 심판을 국가의 내분을 조장하려는 좌파의 선동으로 우기는 박사모, 동성애자를 노골적으로 모욕하고 혐오하는 기독교인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믿는 ‘도덕’을 내세운다. 이 ‘도덕’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신념과 정반대인 사람들을 적대시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도덕을 몰이해하는 성향이 타인에 대한 무지한 편견을 만들어낸다.

 

 

 

 

 

 

 

 

 

 

 

 

 

 

 

 

* 앨런 G. 존슨 《사회학 공부의 기초》 (유유, 2016)

 

 

차별과 편견을 용인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사회학’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앨런 존슨(Allen G. Johnson)은 어떤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사회학을 공부한다고 말한다. 사회학은 사회의 고통이 특정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원인을 알아내고, 그 잘못된 상황이 개선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학문이다. 그래서 사회학은 ‘우리 자신에 관한 학문’이면서도 ‘세상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학문’이다.[1] 이러한 사회학의 기본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 공동의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한다. 이러면 이성의 힘이 작동할 수 없게 되고, 사회 문제를 오로지 그 문제와 관련된 개인의 원인 탓으로 돌린다.

 

 

 

 

 

 

 

 

 

 

 

 

 

 

 

 

* 대니얼 카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김영사, 2012)

 

 

우리는 사회 전체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진리 또는 문화를 의심과 검증의 여지 없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직관’을 의미하는 ‘빠른 사고(시스템 1)’와 ‘이성’을 뜻하는 ‘느린 사고(시스템 2)’가 충돌하면, 직관이 인간의 판단과 생활을 지배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우리의 뇌는 느리고, 복잡한 과정의 절차를 싫어한다. 그래서 가장 빠르고 손쉽게 결정하려는 직관에 의존한다. 문제는 이 직관을 ‘합리적 이성’으로 착각하게 된다. 즉 자신은 정확한 판단을 내렸으니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신뢰한다. 사회 집단에서의 소속감과 안정을 지향할수록 이성의 힘이 약해진다.

 

태극기 집회에 나서는 박사모나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단순히 그들이 용돈 벌기 위해 태극기를 들면서 ‘종북 척결’, ‘박근혜 대통령은 죄가 없다’라고 외치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만,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은 ‘최소 저항의 길’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다. ‘최소 저항의 길’은 복잡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부담스러워서 간편한 절차나 해결책을 찾으려는 경향을 의미한다.[2] 박사모 회원,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 채 광장에 모이는 노인들은 ‘탄핵 반대 집회’를 통해 소속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들이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애국 보수’로서의 의무감을 내세워 태극기를 휘날린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생각은 단순하다. ‘탄핵 촉구 집회’에 대항하는 ‘태극기와 성조기 콜라보 집회’를 열면서 혼란스러운 국정이 정상화되길 바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헌법을 어긴 것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 그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려우니까. ‘좌파 세력이 음모를 꾸민다’ 식의 허위 선동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 노인들은 레드 콤플렉스(red complex)를 먹고 자랐기 때문에 레드 콤플렉스를 교묘히 이용한 허위 선동을 ‘진실’로 그대로 받아들인다.

 

 

 

 

 

 

 

 

 

 

 

 

 

 

 

 

* 데버러 헬먼 《차별이란 무엇인가》 (서해문집, 2016)

 

 

박사모의 탄핵 반대 집회를 응원하는 박근혜 대통령은 정말 간사하기 짝이 없다. 그녀의 행동은 사회 안정화를 저해하는, 불필요한 일이다. 현 정부는 색안경을 낀 채 탄핵 반대를 주장하는 세력들의 도 넘은 행동과 비하 발언을 용인하고 있다. 상대를 깎아내리는 비하 행위가 권력의 힘에 기댈수록 위험해진다. 권력과 결합한 비하 행위는 상대방의 도덕적 가치를 낮게 보는 ‘부당한 차별’이 된다. 즉 비하 행위를 하는 자는 자신의 ‘도덕’에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반면에 상대방이 주장하는 ‘도덕’이 잘못되었다고 무시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사회 구성원은 HSD(history of mistreatment or current social disadvantage) 속성을 가지게 된다.[3] 기성 집단은 이 HSD 속성을 가진 특정 집단을 차별하고 비하한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간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보이지 않는 차별’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세월호 사고 소식에 지친 사람들이 ‘최소한 저항의 길’을 택한 지 오래됐다. 그들은 세월호 사고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여전히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는 세월호 유가족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형성된다. 비록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더라도 암묵적인 차별이 사회 분위기에 영향을 주는 것에 불편함을 느껴야 한다. 그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면 차별과 비하 행위에서 비롯된 불의의 사태를 방관하는 것이다.

 

 

 

 

[1] 앨런 G. 존슨 《사회학 공부의 기초》 14쪽

[2] 같은 책, 44쪽

[3] 데버러 헬먼 《차별이란 무엇인가》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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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4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5 14:15   좋아요 0 | URL
네, 정말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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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魔術)을 뜻하는 영어의 ‘Magic’은 라틴어 ‘Magus’에서 유래했다. ‘Magus’가 처음에는 ‘동방박사’, ‘점성술사’라는 의미의 단어였으나 나중에 ‘마법’으로 발전했다. 마술의 역사를 논할 때 제일 먼저 언급되는 사람이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이다. 흔히 ‘마술사 시몬’으로 알려졌다. 그는 마술로 사마리아인들의 병을 고치기로 소문이 난 유명인사였다. 당시 고대 세계에서는 마술이 몇 가지로 구별됐다. 첫 번째 마귀를 쫓는 마술이 있었고, 두 번째 병을 고치는 마술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기 있는 것으로는 남을 속이면서 돈을 받는 마술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 마술을 선보였던 시몬은 베드로로부터 성령의 능력을 매수하려고 했다. 그래서 마술은 기성 종교와 서로 대립한다. 마술의 행함이 비도덕적인 면이 많고 악령을 통해 일으키기 때문이다.

 

《도해 근대마술》은 속임수를 이용한 마술(Magic trick) 이전에 성행했던 각종 금단의 마법과 주술 그리고 관련 비밀 단체 및 종교 등을 소개한 책이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하던 ‘의심스러운 책’이다. 서구의 수많은 학자가 마술을 학술적으로 규정하느라고 애를 썼으나 아직 합의된 정의가 없을 정도로 마술의 범주는 애매하고, 여러 가지 모습을 지닌다. 공통된 것은 마술은 통상의 감각기관에 잡히지 않는 신비로운 힘들의 상호연관성을 전제하며, 과학과는 다른 작동 원리를 가진다는 주장이다. 마술은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과학과는 다른 법칙을 주장하기에 허황하고 불합리하다고 비난받는다. 또 기독교가 유일신의 의지에 순종함을 주장하는 데 반해, 민간신앙에 두드러진 마술은 인간의 뜻대로 신비로운 힘을 부리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적 오만함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래서 기독교와 근대과학의 배경을 가진 서구문화에서 마술은 항상 박해를 받아왔다. 르네상스 말기와 근대 초기 유럽에서 행해진 마녀사냥의 참혹한 역사는 마술에 대한 서구문화의 적대감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과학의 시대라고 해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마법, 신비주의, 심령술 등에 심취한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과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도 예외가 아니다. 말년의 에디슨(T.A. Edison) 코난 도일(Conan Doyle)은 심령술의 지지자였다. 독자적으로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라는 개념을 발견한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헬레나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가 만든 신지학 협회의 회원이었다. 신지학 협회는 근세 최대의 신비주의 단체이다. 여기에 유명 인사들이 협회에 가입되었는데, 월리스뿐만 아니라 에디슨, 화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등이 있다. 신지학(神智學)은 우주와 자연의 불가사의한 비밀, 인생 근원의 본질을 직관으로 인식하려는 학문이다. 합리성을 내세우는 서양 사상의 전통에서 신지학은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과소평가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신지학에는 불교, 힌두교, 심령술, 카발라(Kabbalah, 유대교의 신비주의) 심지어 진화론까지 섞여 있어서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논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신지학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진화론은 왜곡된 진화론이다. 열등 인종의 제거를 정당화하는 위험한 이론으로 작용했다.

 

마술이 주술이나 마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도해 근대마술》은 ‘비과학적’이고 ‘악마적’인 마술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순수한 독자들을 속이기 위해 비현실적인 마술을 옹호하고 있지 않다. 저자는 서문에서 마술의 세계관을 믿는 건 독자의 몫이라고 밝혔다. 당신이 건전한 회의주의자라면 마술의 세계를 흥밋거리 정도로 받아들여도 된다. 다만 마술이 사이비 과학으로 둔갑하면 검증해야 한다. 딱 봐도 의심이 드는 이상한 현상이나 논리를 막연하게 믿어선 안 된다.

 

이 책에 ‘심령술’ 항목의 사례로 ‘하이즈빌 사건’이 소개됐다. 하이즈빌(Hydesville)은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도시인데, 이곳에 살았던 마거릿 폭스(Magaret Fox)와 케이트 폭스(Kate Fox) 자매가 유령과의 교신에 성공하여 심령술사들 사이에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지금도 폭스 자매가 살았던 집은 그대로 보존되어 오컬트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자매는 유령과의 교신이 속임수라는 것을 자백했다. 폭스 자매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심령 현상으로 믿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고, 미스터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단골 떡밥으로 거론된다.

 

마술에 지나치게 심취하는 심리적 현상은 사회가 정서적으로 병들었을 때 현실도피와 불안감 해소 등의 기능을 하며 형성된다. 일종의 왜곡된 신앙처럼 구성원들은 무조건적인 결속력과 배타적인 집단 심리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사회를 교란하는 사이비 종교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 단점만 가지고 오컬트 문화가 ‘악마 숭배’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마녀사냥식으로 몰아세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오컬트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입장도 ‘검증’ 대상이다. 사람들을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마술의 매력이다. 마술에 흥미를 느끼는 일은 인간의 ‘상상할 자유’이다. 상상력마저 통제하면 이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으려나.

 

 

 

※ 《도해 근대마술》은 일본에서 발간된 책이다. 일본의 오컬트 문화는 하나의 대중문화로 자리 잡은 지 꽤 오래됐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정말 의심스러운 책들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심지어 오컬트 전문 잡지도 있다. 일본어 책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겨서 그런지 집시들이 점을 볼 때 사용하는 타로 카드(Tarot card)가 이 책에선 ‘타로트(タロット)’로 되어 있다. 그밖에 국내 외래어 표기법이 지켜지지 않은 외국 인명 몇 개 지적해본다.

 

 

* 98쪽 : 블가코프 → 미하일 불가코프(러시아의 소설가, 대표작이 <거장과 마르가리타>인데, 《도해 근대마술》에서는 ‘거근과 마르가리타’로 되어 있다)

 

* 117쪽 : 유이스만스 →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프랑스의 상징주의 작가)

 

* 128쪽 : 예츠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아일랜드의 시인, 책의 목차에 ‘예이츠’로 되어 있는 걸로 봐서는 편집상 실수로 생긴 오자로 추정된다)

 

* 137쪽 : 영국인 코린 윌슨

프랑스의 마녀 모니크 니키 윌슨의 남편. 이름만 봐서는 《아웃사이더》의 저자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콜린 윌슨(Colin Wilson)의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 콜린 윌슨가 오컬트에 심취하고 연구한 작가였으니까 마녀와 결혼해서 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영국인 코린 윌슨’은 ‘콜린 윌슨’과 전혀 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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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3-04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쪽 인물들 표기가 대거 틀린 거로 봐선 교정자가 그쪽을 잘 몰랐던 거 같다는 심증이....ㅎ; ˝거근˝은 너무하네요ㅜㅜ

cyrus 2017-03-04 16:37   좋아요 0 | URL
네,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집이 책 제작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인데, 교정을 맡는 편집자가 오자를 제대로 살필지 못한 건 심각합니다.

페크pek0501 2017-03-0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다양한 독서를 본받고 싶네요. 저도 지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그래야 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분야 쪽으로 편식을 하게 됩니다.
저는 심령술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믿는 편은 아니지만, 믿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모르는 어떤 게 있을 거라고 보는 거죠.
제가 확실하게 믿는 건 마음의 기적이에요. 실제로 경험한 일이 있어요.
아주 절실하고 다급할 때 초능력이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ㅋ

cyrus 2017-03-04 16:40   좋아요 0 | URL
pek님의 긍정적인 마음이 pek님이 위급할 때마다 큰 도움이 돼 주는 특별한 힘인 것 같습니다. ^^

2017-03-04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5 14:18   좋아요 0 | URL
온라인 게임에서의 마법사 캐릭터가 능력치가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