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부는 출산하기 전에 다음 사항들을 지켜주세요.”

 






1. 생필품 점검하기: 화장지, 치약, 비누 등의 남은 양을 확인하여 집에 있는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게 합니다.

 

2. 밑반찬 챙기기: 냉장고에 오래된 음식은 버리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준비해주세요. 그러면 요리에 서투른 남편이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을 수 있습니다.

 

3. 옷 챙기기: 입원 날짜에 맞춰 남편과 아이들이 갈아입을 속옷, 양말, 겉옷 등을 옷장에 보관해둡니다.

 

 

저기요, 선생님. 임신부가 아닌 제가 봐도 지침 내용이 이상한데요? 누가 그러던가요? ? ○○시 임신출산정보센터 웹사이트에 나온 내용이라고요? 어휴, 내가 임신부라면 이걸 전부 지켜야 할 바에 차라리 아이를 안 낳고 말지. 선생님. 밥 챙겨 먹고, 옷 갈아입고, 생필품 점검하는 건 남편도 할 수 있어요.



















*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민음사, 2018)




보아하니 선생님은 영국의 사회평론가 존 러스킨 씨군요. 참깨와 백합이라는 책을 쓰신 분 맞죠? 참깨와 백합참깨: 왕들의 보물백합: 여왕들의 화원이라는 두 편의 글을 묶은 책이죠. 첫 번째 글에 올바른 독서법이 나오고, 두 번째 글에 선생님이 생각한 여성의 사적·공적 역할과 여성이 받아야 할 교육이 나오죠. 그런데요, 선생님. 한 손에 참깨와 백합을 들면서 여성 앞에 설교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21세기에요. 참깨와 백합이 나온 19세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선생님은 백합꽃을 정말 좋아하시네요. 하긴 선생님은 유럽의 중세를 동경했던 만큼 중세의 귀부인을 상징하는 백합에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죠. 참깨와 백합에서 드러난 선생님의 모습이 마치 백합과 같은 집 안의 여성을 보호하는 중세의 기사 같았어요. 선생님의 눈에 비친 여성은 가정의 안락함을 지키는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집에 없으면 남성은 집안일을 하지 못해서 쩔쩔맵니다. 선생님은 남편이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임신부에게 가사 노동을 해달라고 당부했어요. 저와 선생님을 포함한 남성이 집에서 누린 안락함은 집안일을 도맡은 여성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엄마는 페미니스트: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민음사, 2017)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쓴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마만다 아디치에가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내를 돕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집안일은 아내와 남편이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출산을 앞둔 임신부에게 가족을 위한 배려를 강요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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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1-14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지침 기사 보고 정말 황당했는데 속시원한 글 감사합니다 ㅎㅎ

cyrus 2021-01-14 11:06   좋아요 1 | URL
제가 캡처한 내용보다 더 심각한 것도 있어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을게요. ^^;;

청아 2021-01-14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스활명수 찾다가 이 글 읽고 관뒀습니다.ㅋㅋ

cyrus 2021-01-14 11:07   좋아요 2 | URL
센스 있는 칭찬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 2021-01-14 1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문구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찍힌 거라구요?

cyrus 2021-01-14 11:08   좋아요 4 | URL
네.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 홈페이지에 있었던 내용입니다. 지금은 삭제돼서 없지만, 검색창에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를 입력하면 관련 기사와 캡처 사진들이 나옵니다.

mini74 2021-01-14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출산 하러 가기 전날 저희 시어머님이 저 말씀 고대로 하셨죠. 저희 시어머님인줄 ㅎㅎ 저희 시어머님은 그래도 40년생이시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분노가 차오르는데 참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ㅠㅠ

cyrus 2021-01-14 19:01   좋아요 0 | URL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제 자신도 변화에 둔감한 편이라 남들보다 늦게 유행을 받아들이거나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편이에요. ^^;;

psyche 2021-01-1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글을 페이스 북에서 보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현재 대한민국 서울시에서 나온 거라는 게 믿을 수가 없더라고요.

cyrus 2021-01-14 19:04   좋아요 0 | URL
이번 해프닝을 보면서 점점 변해가는 시대에 맞추지 못하고,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느꼈어요.
 




연표로 보는 과학사 400 서평을 쓴 어느 독자가 이 책에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라면서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침묵의 봄을 언급했다.


















* 고야마 게타 연표로 보는 과학사 400(AK커뮤니케이션즈, 2020)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에코리브르, 2011)

 

 

 

나는 독자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궁금했다. 이유를 묻고 싶어서 댓글을 남기려다가 말았다이유가 어떻든 간에 나는 서평에 있는 독자의 주관적인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레이첼 카슨은 해양생물학자 겸 작가, 환경보호주의자다. 침묵의 봄은 과학적 검증을 소홀한 채 살충제를 기적의 물질이라고 치켜세웠던 과학계를 비판한 과학책이다이미 나는 과학자로서의 레이첼 카슨을 소개한 몇 편의 글을 썼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다.








 










* 개서린 휘틀록, 로드리 에벤스 과학으로 세계를 뒤흔든 10명의 여성(문학사상사, 2020)


평점

4점  ★★★★  A-





과학으로 세계를 뒤흔든 10명의 여성은 고인이 된 여성 과학자 열 명의 삶과 업적을 소개한 책이다. 여기에 레이첼 카슨이 포함되었다. 원서는 2019년에 출간되었고, 이듬해 여름에 국역본이 나왔다. 책에서는 노벨 과학상(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을 받은 여성이 총 18명이라고 나온다. 작년에 미국의 안드레아 게즈(Andrea Ghez)가 물리학상을, 유전자 가위기술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제니퍼 앤 다우드나(Jennifer Anne Doudna)프랑스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Emmanuelle Charpentier)가 화학상을 받으면서 현재는 총 21명이다.


















* 강양구, 김상욱 외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 한다: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과학 고전 50(사이언스북스, 2017)


평점

4점  ★★★★  A-

 

 


과학은 그 책을 고전이라 한다는 국내의 과학자들과 작가들이 추천한 50권의 과학 고전 서평 모음집이다. 도서 평론가 이권우 씨가 이 책의 집필진으로 참여했으며 침묵의 봄서평을 썼다.


레이첼 카슨이 과학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준 책들은 더 있지만, 책 소개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레이첼 카슨을 과학자가 아닌 환경보호주의자라고만 생각한 그 독자는 이 글을 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분이 쓴 서평을 본 다른 독자들이 레이첼 카슨의 업적을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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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1-01-12 1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으로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현대의 민낯을 더 보여주셨을텐데 생각할수록 아쉬워요.

cyrus 2021-01-13 08:27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과거의 의사들은 진료 받는 여성 환자가 기혼자일 경우에 환자에게 병의 증상이라든가 호전 상태 등을 얘기했어요. 당시 레이첼은 미혼(비혼)이라서 담당 의사에게 유방암의 상태에 대해서 자세히 듣지 못했다고 해요. 레이첼은 유방암이 금방 나을 줄 알았대요. 다른 주치의를 만나고 나서야 유방암이 심각한 상태라는 걸 알았어요. 레이첼이 제때 치료받았으면 더 살 수 있었을 거예요.
 
[전자책] 교령회장에서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15
레티스 갤브레이스 / 올푸리 / 2020년 6월
평점 :
판매중지




평점


4점  ★★★★  A-





우리는 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는 것을 표현할 때 미상이라는 단어를 쓴다. 여기서 잠깐 우스갯소리를 해볼까 한다. 입에서 피식이라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용서해주시라.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으면 동요 비디오를 봤다. 어린 나는 비디오 영상 속에 나오는 동요의 노랫말 자막을 보면서 불렀다. 동요가 시작하기 전에 노래 제목과 작사가와 작곡가 이름이 자막으로 나온다. 동요 비디오를 계속 보면 작가 미상, 작곡 미상의 동요가 몇 곡 나온다. 나는 작사 미상, 작곡 미상이라고 적힌 자막을 보면서 이 노래는 미상이라는 사람이 만든 거구나라고 생각했다호기심이 많은 나는 어머니에게 미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미상이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초등학생이 돼서야 나는 미상의 정체, 아니 미상의 뜻을 처음 알았다. 학교에서 국어사전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국어사전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던 미상을 우연히 만났다사전 보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나는 인명사전도 탐독했다. 미생(美生: 신라의 화랑)’이상(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은 인명사전을 보면서 만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미상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


단편소설 교령회장에서(In the Séance Room)를 쓴 작가 레티스 갤브레이스(Lettice Galbraith)신원 미상의 영국인이다. 출생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도 없다레티스 갤브레이스가 가명 또는 필명이라면 작가의 정체는 여성일 수 있다. 여성 작가가 선입견과 비난여성이 쓴 글은 남성이 쓴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 여성이 쓴 글이 잘 썼으면 그것은 분명 남성(작가나 남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을 피하고자 남자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는 일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의 흔한 일이었다레티스 갤브레이스는 1892년에 첫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이듬해에 교령회장에서」가 수록된 단편집 새로운 귀신 이야기(New Ghost Stories)를 발표했다. 갤브레이스가 남긴 작품 수는 많지 않다. 1897년에 단편소설 한 편이 나왔으며 1901년에 발표한 또 다른 자신(Alter Idem)을 마지막으로 미지의 작가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교령회장에서는 단편으로 된 공포소설이지만, 가볍게 볼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반영된 현실적인 이야기다소설의 주인공 밸런타인 버크(Valentine Burke)는 야심이 많은 내과 의사다. 그는 신분 상승을 위해서 돈이 되는 일에 손을 댄다. 밸런타인이 관심이 있는 분야는 심령 현상 연구와 최면술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유한 영국 사람들은 한두 가지의 고상한 취미를 즐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심령 현상이었다. 영국의 상류층은 심령술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돈줄이었다. 밸런타인은 외모가 출중한 의사였고, 심령술을 잘 알고 있었다. 심령술 또는 신비주의 모임에 참석한 밸런타인은 부잣집 아가씨와 귀부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유명 인사였다. 그는 재산이 많은 아가씨 엘마 랭(Elma Lang)을 신비주의 모임에 끌어들였고, 자신의 약혼녀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밸런타인은 양다리를 걸친 바람둥이다. 그는 엘마를 만나기 전에 캐서린 그래브스(Katharine Greaves)라는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밸런타인은 이 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실종된 캐서린이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한다. 그는 걸림돌 하나를 제거했다면서 안심했지만, 그 기사는 오보였다. 캐서린이 밸런타인의 집을 찾아왔다! 밸런타인은 옛 연인을 멸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캐서린은 자신의 사망 소식을 실은 기사를 확인했다. 무연고자가 된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밸런타인이었다. 그러나 밸런타인은 냉정하게 캐서린을 외면한다. 캐서린은 이제야 잔혹한 현실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남은 최후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밸런타인은 비정하게도 캐서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무언가를 말한다. 과연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밸런타인이 캐서린에게 한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밸런타인이 속삭인 몇 마디 말을 들은 캐서린의 얼굴에 경악 어린 절망(terror)’이 떠올렸다고 묘사했을 뿐이다. 밸런타인은 이제 살 마음이 없는 그녀에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귀엣말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게 한 최악의 최면술이다.


캐서린은 강물에 뛰어들었다. 밸런타인은 또 한 번 고인을 능욕하는 일을 저지른다. 자신이 강물에 뛰어든 자살자를 구하려고 시도한 의인으로 둔갑하여 명성을 얻었다. 밸런타인은 캐서린을 확실하게 죽이려고 강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캐서린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이런 와중에 밸런타인은 자신의 손에 끼고 있던 약혼반지를 잃어버린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4년 후에 그 반지가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게 만든 결정적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밸런타인은 심령술의 권위자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귀부인의 자택에서 열리는 교령회(Séance)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 심령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였다. 밸런타인은 교령회에 나타난 영혼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 귀신에게 질문을 보낸다.



 4년 전 이 시각에 나는 뭘 하고 있었나? 혹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이니셜을 적으시오.

 

 

영혼은 밸런타인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종이에 글을 남겼다.



당신과 같이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최면을 걸었다. - K. G.

 

 

‘K. G.’는 4년 전에 죽은 캐서린 그래브스의 머리글자.


빅토리아 시대에 남녀 불문하고 자신의 과거 신분을 세탁해서 사기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기 결혼으로 이혼하고, 경제적 파산까지 겪은 여성은 자신의 불행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끝내 강물에 뛰어들었다. 실제로 템스강 주변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거나 익사자의 시신을 건져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사자 중에 이혼해서 홀몸이 된 여성, 남편 없이 자녀를 키운 여성도 있었다. 이들 모두 빈곤에 시달리다가 끝내 극단의 선택을 했다.


비록 사회적 문제들의 현실적인 해결책이나 대안은 나오지 않지만,교령회장에서는 당시 시대상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미지의 작가가 쓴 소설이다. 이 작품은 공포소설에 대한 선입견공포소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를 다룬 허구적인 이야기을 무너뜨렸다. 내가 생각하는 정말 재미있는 공포소설은 당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특정 존재와 사회적 현상 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그러나 최고의 공포소설은 당대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현실적인 것,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던 특정 존재와 사회적 현상 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야기. 교령회장에서는 재미있는 공포소설과 최고의 공포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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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

 

EP. 3

 


202119일 토요일, 수성못이 얼 정도로 추웠음.







책방에 오실 때 사진기 꼭 챙겨오세요. 오랜만에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싶어요.” 담담 책방(담담)에서 특별한 지인을 만나기로 했다. 그분을 안 본 지 거의 일 년 조금 넘었다. 나는 책방에 먼저 가서 지인을 기다리기로 했다.







지인은 커피를 좋아한다. 그래서 서재를 탐하다(·)’ 책방에서 판매하는 케냐 AA 커피 원두 가루를 챙겨왔다. 연말에 서·탐 책방지기가 케냐 AA 원두 가루를 담은 작은 봉투 세 개를 선물로 줬다. 갈색 종이 봉투를 열면 그 안에 종이 주머니(티백)가 있다. 종이 주머니를 연 다음, 그것을 찻잔 안에 고정한다. 뜨거운 물을 종이 주머니에 붓는다. 그러면 종이 주머니에서 우러나온 커피가 찻잔을 채운다.


담담에 오면 책방지기가 커피를 대접했다. 이번에는 내가 대접할 차례다. 그런데 내가 너무 기분이 들떴던 것일까.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종이 주머니를 열지 않은 채 그냥 뜨거운 물을 부었다. 책방지기는 실제로 녹차를 마시듯이 종이 주머니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커피를 마시는 방식이 있다고 말했다그분은 커피 향과 맛이 좋다고 했다. 다행이다.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뒤에 지인’을 드디어 책방에서 만났다. 이 분이 누구냐면‥…






사진 에세이를 낸 작가이자 알라딘 블로거인 유레카(yureka01) 이다사진 에세이를 낸 작가이자 알라딘 블로거인 유레카 님이다. 그분의 한 손에 소리 없는 빛의 노래 다섯 권이 들려 있었다.

















 

* 유병찬 소리 없는 빛의 노래(만인사, 2015)



 

유레카 님은 책방에 오자마자 사진기를 꺼냈다. 책방 내부를 쭉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유레카 님은 작년에 어떻게 지내셨을까? 유레카 님은 이직에 성공했지만,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독서와 사진 찍기는 물론 블로그 활동도 하지 못했다유레카 님은 뒤늦게 경제와 투자에 눈을 떴다고 했다. 노후 보장을 위해서 틈틈이 경제 및 투자 관련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책방지기, 유레카 님, 그리고 나, 이 세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눴다. 아무래도 유레카 님과 나는 알라딘 블로거라서 알라딘에 대한 이야기가 안 나올 수가 없다. 책방지기는 책과 쓰기 마니아들이 모인 알라딘 서재에 흥미를 보였다유레카 님은 알라딘 서재의 좋은 점을 주로 얘기했지만, 반대로 나는 알라딘 서재의 문제점과 한계 들을 언급했다삼자 대화를 할 땐 나 같은 악당(villain) 한 명은 있어야 한다.


유레카 님과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고, 그분은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담담이 잠들 때까지 계속 책방에 있었다. 나만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담담 책방 안에 있는 히터가 고장나는 바람에 책방 내부는 냉기로 가득했다. 책방지기는 히터를 고치기 위해 정비업체 직원을 불렀다. 히터 고장의 원인을 자세하게 알지 못했지만,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주말 첫날이라서 그런지 그날은 책방지기가 바빠 보였다. 유레카 님이 가고 난 후에 대구 녹색당원으로 활동 중인 부부가 책방에 왔다. 책방지기는 그분들을 반갑게 맞이했고, 커피를 대접했다.

 

부부가 가고 난 후에 책방지기는 자신의 작은 사무실(책방 안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 개인 업무를 봤다. 나는 부부가 앉은 탁상 위에 놓은 두 개의 찻잔을 치웠다. 책방지기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커피를 다 마셨으면 빈 찻잔을 스스로 치우는 건 당연한 일이다책방지기가 바쁘면 책방에 있는 손님이 책방 정리를 해야 한다


책방지기는 기회가 되면 서·탐과 같은 동네 책방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서 담담 책방지기와 서·탐 책방지기가 만날 수 있게 연결고리를 만들어보려고 노력 중이다. 그런데 두 분 모두 각자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책방지기 두 분이 서로 만나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제발 그 날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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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1-11 17: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수성못이 얼었군요. 삼자 대화뿐 아니라 알라딘서재에도 꼭 필요한 악당이십니다 *^^*

cyrus 2021-01-12 10:24   좋아요 1 | URL
책의 오자를 잡는 빌런이 되겠습니다! ^^

서니데이 2021-01-11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레카님 소식이 궁금했는데, cyrus님의 서재에서 들을 수 있어서 좋네요. cyrus님 날씨가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cyrus 2021-01-12 10:25   좋아요 1 | URL
오늘부터 날씨가 조금 풀린다고 해요. 밖에 나가 햇빛을 받아야겠어요. 서니데이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

stella.K 2021-01-11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럴 줄 알았다. 유레카님이 고생이 많으신가 보다.
벌써 서재를 떠나신지가 꽤 되는 것 같은데
서재는 고사하고 그 좋아하시는 사진도 여태 못 찍고 계시다니.ㅠ

근데 너 참 용감하다. 수성못이 얼 정도면 집에 있지.
2008년인가 9년도 겨울이 무척 추웠지.
하필 그렇게 추운데 시나리오 학원 동기들이 모인다는 거야.
추우면 웬만해서 안 나가는데 만날 때야 반갑지만
오가는 버스안에서 무슨 열일인가 싶더군.
그나마 눈이 안 오니까 나갔지 눈 왔으면 나 죽었소 하고 안 나갔을 거다. ㅋ

cyrus 2021-01-12 10:28   좋아요 1 | URL
집에서 책방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추워도 걸어 다닐 수 있어요. 문제는 집으로 돌아갈 때가 힘들죠. 책방이 잠들 시간이면 해가 져서 날씨가 춥거든요.. ^^;;

얄라알라 2021-01-11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유레카님을 뵈었네요. 저도 가끔씩 들러서 사진보며 감탄하는 분이신데, 근사한 커피 포장과 깊은 커피 향 그리고 아마도 우아한 대화로 행복하셨겠어요. 어른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 나눠본지 언제인지^^

cyrus 2021-01-12 10:30   좋아요 1 | URL
책방에 오면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21-01-1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운 유레카 님....
저도 요즘 알라딘 시스템의 단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어느 정도 떠난 상태.

cyrus 2021-01-12 10:32   좋아요 2 | URL
알라딘 서재의 수준과 비슷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아보는 중인데, 그런 데가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니면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에 독서와 서평 쓰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제가 지금 눈여겨보는 온라인 플랫폼은 브런치입니다.

붕붕툐툐 2021-01-12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유레카님께 마음의 빚이 있어서.. 언젠간 꼭 갚아야 할텐데요... 죄송스럽지만 그래서 더 궁금한 유레카님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의 오작교(?)도 꼭 성공하시길!!^^😊

cyrus 2021-01-12 10:33   좋아요 1 | URL
책방지기 두 분은 기혼자라서, 우정의 오작교가 어울리네요. ^^;;
 
[전자책] 고르곤의 머리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17
거트루드 베이컨 / 올푸리 / 2020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평점


2.5점  ★★☆  B-





메두사(Medus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고르곤(Gorgon) 세 자매 중 한 명이다. 세 자매는 멧돼지의 어금니 같은 커다란 이빨과 뱀으로 된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다. 세 자매의 막내 메두사는 원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한다. 말의 모습으로 변신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은 아테나(Athena, 지성의 신) 신전 안에서 메두사와 사랑을 나누었다. 이 사실을 안 아테나는 메두사에게 저주를 내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뱀으로 만들었고, 메두사를 직접 본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하게 했다.


거트루드 베이컨(Gertrude Bacon, 1874~1949)이 쓴 고르곤의 머리(The Gorgon’s Head) 잘린 메두사의 머리를 소재로 한 괴담 형식의 단편소설이다이 소설은 <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 189912월호에 실렸다. <스트랜드 매거진>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의 대표작 셜록 홈스(Sherlock Holmes) 시리즈가 연재된 월간지다베이컨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열기구 조종사(balloonist) 중 한 사람이다. 하늘과 탐험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열기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최초의 영국 여성, 비행선을 탄 최초의 여성, 최초의 수상 비행기 탑승객 등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화자는 여객선에 탑승한 여성이다. 그녀의 이름은 베이커(Baker). 여객선 항해를 지휘하는 브랜더 선장(Captain Brander)은 해운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선원들은 그가 회사 내에서 가장 입담이 좋은 이야기꾼이라고 칭송한다. 베이커는 선장이 30년 전에 겪은 기이한 일을 듣게 된다30년 전의 브랜더는 삼등 항해사였다. 그가 탄 여객선은 선장의 실수로 그리스의 자킨토스(Zante, Zacynthus) 근처에 좌초되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선원들은 여객선이 완전히 고칠 때까지 섬에 정박한다.


브랜더는 일등 항해사로부터 이 섬에 마귀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동료 선원인 트래버스(Travers)와 함께 마귀굴에 가보기로 한다섬 주민은 두 사람에게 마귀굴에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마귀굴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기가 넘친 두 사람은 섬 주민의 말을 무시하고, 마귀굴로 향한다브랜더는 겁에 질린 상태에서 기암으로 가득한 마귀굴의 통로를 걷다가 무언가를 보고 놀라서 외친 트래버스의 목소리를 듣는다. 브랜더는 트래버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트래버스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서 있었던 자리에 따뜻한 온기가 있는 돌덩이가 있었다


브랜더가 살아서 마귀굴을 탈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이와 관련된 힌트는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우스(Perseus) 이야기’ 속에 있다고르곤의 머리가 중편소설 분량으로 만들어졌으면, 공포에 질린 브랜더가 동굴 속에서 고생하는 장면이 좀 더 나왔을텐데. 브랜더는 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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