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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교령회장에서 ㅣ 빅토리안 호러 컬렉션 15
레티스 갤브레이스 / 올푸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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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4점 ★★★★ A-
우리는 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는 것을 표현할 때 ‘미상’이라는 단어를 쓴다. 여기서 잠깐 우스갯소리를 해볼까 한다. 입에서 ‘피식’이라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면 용서해주시라. 어렸을 때 집에 혼자 있으면 동요 비디오를 봤다. 어린 나는 비디오 영상 속에 나오는 동요의 노랫말 자막을 보면서 불렀다. 동요가 시작하기 전에 노래 제목과 작사가와 작곡가 이름이 자막으로 나온다. 동요 비디오를 계속 보면 ‘작가 미상, 작곡 미상’의 동요가 몇 곡 나온다. 나는 ‘작사 미상, 작곡 미상’이라고 적힌 자막을 보면서 “이 노래는 미상이라는 사람이 만든 거구나”라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많은 나는 어머니에게 미상이 누구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미상이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초등학생이 돼서야 나는 미상의 정체, 아니 미상의 뜻을 처음 알았다. 학교에서 국어사전을 이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국어사전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싶었던 미상을 우연히 만났다. 사전 보는 것을 유독 좋아했던 나는 인명사전도 탐독했다. ‘미생(美生: 신라의 화랑)’과 ‘이상(시인, 소설가, 본명은 김해경)’은 인명사전을 보면서 만난 사람들이다. 하지만 거기서도 ‘미상’이라는 이름의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
단편소설 《교령회장에서》(In the Séance Room)를 쓴 작가 레티스 갤브레이스(Lettice Galbraith)는 신원 미상의 영국인이다. 출생연도와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이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도 없다. 레티스 갤브레이스가 가명 또는 필명이라면 작가의 정체는 여성일 수 있다. 여성 작가가 선입견과 비난―여성이 쓴 글은 남성이 쓴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 여성이 쓴 글이 잘 썼으면 그것은 분명 남성(작가나 남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을 피하고자 남자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는 일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의 흔한 일이었다. 레티스 갤브레이스는 1892년에 첫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이듬해에 「교령회장에서」가 수록된 단편집 《새로운 귀신 이야기》(New Ghost Stories)를 발표했다. 갤브레이스가 남긴 작품 수는 많지 않다. 1897년에 단편소설 한 편이 나왔으며 1901년에 발표한 「또 다른 자신」(Alter Idem)을 마지막으로 미지의 작가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교령회장에서》는 단편으로 된 공포소설이지만, 가볍게 볼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에 나타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이 반영된 현실적인 이야기다. 소설의 주인공 밸런타인 버크(Valentine Burke)는 야심이 많은 내과 의사다. 그는 신분 상승을 위해서 돈이 되는 일에 손을 댄다. 밸런타인이 관심이 있는 분야는 심령 현상 연구와 최면술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부유한 영국 사람들은 한두 가지의 고상한 취미를 즐겼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심령 현상이었다. 영국의 상류층은 심령술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돈줄이었다. 밸런타인은 외모가 출중한 의사였고, 심령술을 잘 알고 있었다. 심령술 또는 신비주의 모임에 참석한 밸런타인은 부잣집 아가씨와 귀부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은 유명 인사였다. 그는 재산이 많은 아가씨 엘마 랭(Elma Lang)을 신비주의 모임에 끌어들였고, 자신의 약혼녀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밸런타인은 양다리를 걸친 바람둥이다. 그는 엘마를 만나기 전에 캐서린 그래브스(Katharine Greaves)라는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밸런타인은 이 여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면 끊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실종된 캐서린이 익사체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접한다. 그는 걸림돌 하나를 제거했다면서 안심했지만, 그 기사는 오보였다. 캐서린이 밸런타인의 집을 찾아왔다! 밸런타인은 옛 연인을 멸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캐서린은 자신의 사망 소식을 실은 기사를 확인했다. 무연고자가 된 그녀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밸런타인이었다. 그러나 밸런타인은 냉정하게 캐서린을 외면한다. 캐서린은 이제야 잔혹한 현실을 깨닫는다. 그녀에게 남은 최후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밸런타인은 비정하게도 캐서린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이 무언가를 말한다. 과연 그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밸런타인이 캐서린에게 한 말은 나오지 않는다. 작가는 밸런타인이 속삭인 몇 마디 말을 들은 캐서린의 얼굴에 ‘경악 어린 절망(terror)’이 떠올렸다고 묘사했을 뿐이다. 밸런타인은 이제 살 마음이 없는 그녀에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귀엣말은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게 한 ‘최악의 최면술’이다.
캐서린은 강물에 뛰어들었다. 밸런타인은 또 한 번 고인을 능욕하는 일을 저지른다. 자신이 강물에 뛰어든 자살자를 구하려고 시도한 의인으로 둔갑하여 명성을 얻었다. 밸런타인은 캐서린을 확실하게 죽이려고 강물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캐서린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이런 와중에 밸런타인은 자신의 손에 끼고 있던 약혼반지를 잃어버린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4년 후에 그 반지가 자신을 파멸로 몰아가게 만든 결정적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밸런타인은 심령술의 권위자로 승승장구한다. 그는 귀부인의 자택에서 열리는 교령회(Séance)에 참석한다. 이 자리에 심령술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모였다. 밸런타인은 교령회에 나타난 영혼의 존재를 보여주기 위해 귀신에게 질문을 보낸다.
4년 전 이 시각에 나는 뭘 하고 있었나? 혹시 다른 사람과 같이 있었다면 그 사람의 이니셜을 적으시오.
영혼은 밸런타인의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종이에 글을 남겼다.
당신과 같이 있던 사람은 나뿐이었다.
당신은 나에게 최면을 걸었다. - K. G.
‘K. G.’는 4년 전에 죽은 캐서린 그래브스의 머리글자다.
빅토리아 시대에 남녀 불문하고 자신의 과거 신분을 세탁해서 ‘사기 결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기 결혼으로 이혼하고, 경제적 파산까지 겪은 여성은 자신의 불행한 신세를 한탄하다가 끝내 강물에 뛰어들었다. 실제로 템스강 주변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거나 익사자의 시신을 건져내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익사자 중에 이혼해서 홀몸이 된 여성, 남편 없이 자녀를 키운 여성도 있었다. 이들 모두 빈곤에 시달리다가 끝내 극단의 선택을 했다.
비록 사회적 문제들의 현실적인 해결책이나 대안은 나오지 않지만,《교령회장에서》는 당시 시대상을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미지의 작가가 쓴 소설이다. 이 작품은 공포소설에 대한 선입견―공포소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소재를 다룬 허구적인 이야기―을 무너뜨렸다. 내가 생각하는 정말 재미있는 공포소설은 당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특정 존재와 사회적 현상 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야기다. 그러나 최고의 공포소설은 당대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못했던 현실적인 것, 그리고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했던 특정 존재와 사회적 현상 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야기다. 《교령회장에서》는 재미있는 공포소설과 최고의 공포소설의 중간 단계에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