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부는 출산하기 전에 다음 사항들을 지켜주세요.”

 






1. 생필품 점검하기: 화장지, 치약, 비누 등의 남은 양을 확인하여 집에 있는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게 합니다.

 

2. 밑반찬 챙기기: 냉장고에 오래된 음식은 버리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준비해주세요. 그러면 요리에 서투른 남편이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을 수 있습니다.

 

3. 옷 챙기기: 입원 날짜에 맞춰 남편과 아이들이 갈아입을 속옷, 양말, 겉옷 등을 옷장에 보관해둡니다.

 

 

저기요, 선생님. 임신부가 아닌 제가 봐도 지침 내용이 이상한데요? 누가 그러던가요? ? ○○시 임신출산정보센터 웹사이트에 나온 내용이라고요? 어휴, 내가 임신부라면 이걸 전부 지켜야 할 바에 차라리 아이를 안 낳고 말지. 선생님. 밥 챙겨 먹고, 옷 갈아입고, 생필품 점검하는 건 남편도 할 수 있어요.



















*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민음사, 2018)




보아하니 선생님은 영국의 사회평론가 존 러스킨 씨군요. 참깨와 백합이라는 책을 쓰신 분 맞죠? 참깨와 백합참깨: 왕들의 보물백합: 여왕들의 화원이라는 두 편의 글을 묶은 책이죠. 첫 번째 글에 올바른 독서법이 나오고, 두 번째 글에 선생님이 생각한 여성의 사적·공적 역할과 여성이 받아야 할 교육이 나오죠. 그런데요, 선생님. 한 손에 참깨와 백합을 들면서 여성 앞에 설교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21세기에요. 참깨와 백합이 나온 19세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선생님은 백합꽃을 정말 좋아하시네요. 하긴 선생님은 유럽의 중세를 동경했던 만큼 중세의 귀부인을 상징하는 백합에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죠. 참깨와 백합에서 드러난 선생님의 모습이 마치 백합과 같은 집 안의 여성을 보호하는 중세의 기사 같았어요. 선생님의 눈에 비친 여성은 가정의 안락함을 지키는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집에 없으면 남성은 집안일을 하지 못해서 쩔쩔맵니다. 선생님은 남편이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임신부에게 가사 노동을 해달라고 당부했어요. 저와 선생님을 포함한 남성이 집에서 누린 안락함은 집안일을 도맡은 여성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엄마는 페미니스트: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민음사, 2017)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쓴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마만다 아디치에가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내를 돕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집안일은 아내와 남편이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출산을 앞둔 임신부에게 가족을 위한 배려를 강요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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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1-14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지침 기사 보고 정말 황당했는데 속시원한 글 감사합니다 ㅎㅎ

cyrus 2021-01-14 11:06   좋아요 1 | URL
제가 캡처한 내용보다 더 심각한 것도 있어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을게요. ^^;;

청아 2021-01-14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스활명수 찾다가 이 글 읽고 관뒀습니다.ㅋㅋ

cyrus 2021-01-14 11:07   좋아요 2 | URL
센스 있는 칭찬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 2021-01-14 1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문구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찍힌 거라구요?

cyrus 2021-01-14 11:08   좋아요 4 | URL
네.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 홈페이지에 있었던 내용입니다. 지금은 삭제돼서 없지만, 검색창에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를 입력하면 관련 기사와 캡처 사진들이 나옵니다.

mini74 2021-01-14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출산 하러 가기 전날 저희 시어머님이 저 말씀 고대로 하셨죠. 저희 시어머님인줄 ㅎㅎ 저희 시어머님은 그래도 40년생이시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분노가 차오르는데 참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ㅠㅠ

cyrus 2021-01-14 19:01   좋아요 0 | URL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제 자신도 변화에 둔감한 편이라 남들보다 늦게 유행을 받아들이거나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편이에요. ^^;;

psyche 2021-01-1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글을 페이스 북에서 보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현재 대한민국 서울시에서 나온 거라는 게 믿을 수가 없더라고요.

cyrus 2021-01-14 19:04   좋아요 0 | URL
이번 해프닝을 보면서 점점 변해가는 시대에 맞추지 못하고,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느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