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 중국 최고 석학 장치청 교수의 건강 고전 명강의 장치청의 중국 고전 강해
장치청 지음, 오수현 옮김, 정창현 감수 / 판미동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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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게이션과 캡슐을 이용해 환자의 병변을 찾아 수술하는 기법이 등장하는 등 서양 의학의 발전이 눈부신데도 아직도 한방 치료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다. 과학 시대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한의학을 찾는 사람이 많은 첫째 이유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는 서양 의학의 효과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인체의 기능 현상을 연구하는 한의학을 대안으로 찾기 때문이다. 둘째는 마취 수술로 인한 부작용, 특정 약물의 내성 축적 부작용에 의한 피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스트레스와 환경호르몬 식품첨가물 농약 등 각종 인공 유해물질에 대한 방어 수단으로 자연 친화적인 한의학을 찾는 것이다. 서양 의학은 해부학적 생리학 개념에 따라 인체를 연구한다. 이에 비해 한의학은 기의 흐름과 조화를 중시한다.

 

 

 

 

 

 

총체적인 한의학 이론인 ‘소문’과 침구학의 비조로 꼽히는 ‘영추’로 구성된 황제내경은 천지자연의 기와 인체의 기의 조화를 모색하는 한의학 최고의 고전이다. 질병을 치료하는 것 못지않게 병이 들지 않게 하는 양생을 최고 목표로 삼는다. 황제라는 이름이 책 이름에 보이듯, 안의 내용이 대체로 황제와 그의 스승들의 문답 형식을 띠고 있다. 내경이라는 말은 생명의 핵심 또는 의학의 핵심을 담은 경전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정(精), 기(氣), 신(神)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싱명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기와 신은 에너지적인 생명력을 말하며, 정은 인간의 생명력이 구현된 형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다. 정신기는 따로따로가 아니다. 인위적인 나눔일 뿐 상호의존적인 관계에서 성립된다.

 

한의학에서는 인간을 소우주라고 한다. 즉,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여 인간의 생체리듬도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자연의 흐름 중 가장 주기적이고 구체적인 것이 계절의 변화와 낮과 밤의 순환이다. 음양오행 이론도 여기에서 나온다. 한마디로 음양이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낮은 양이고, 밤은 음이다. 남자는 양이요, 여자는 음이다. 기(氣)는 양이요 혈(血)은 음이다. 이렇게 어떤 사물이든 간에 상대적으로 우주 간에 존재하며 여기에서 또 음과 양의 양면으로 나누어진다. 우주 만물이 음양과 오행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음양오행의 상대성에서 서로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할 때 우주 만물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며 소우주인 우리 인체에는 질병이 생긴다. 옛날에는 계절과 주야의 변화에 인간은 직접 영향을 받았기에, 자연 변화에 순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문명화된 오늘날은 계절 변화에 대한 순응은 많이 퇴색됐다. 하지만 거대한 우주의 변화 속에 인간은 반드시 영향을 받게 돼 있어 이를 따라가지 않을 경우 현대적 계절병이 발생하게 된다.

 

황제내경에서는 ‘춘하양양, 추동양음(春夏養陽 秋冬養陰)’이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봄과 여름에 양기를 돕는다면 가을과 겨울에 음기를 돕는다는 뜻이라고 본다. 반대로 해석하는 입장은 봄과 여름에 양기를, 가을과 겨울에 음기를 억제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말은 자신의 체질에 맞는 양생법을 선택하여 계절의 변화에 순응해 살 것을 강조한다. 봄은 만물이 위로 솟아 자라나는 따뜻한 계절이고, 여름은 꽃을 피워 영화를 누리는 뜨거운 계절이다. 가을은 결실을 보고 식물의 진액이 뿌리로 내려가 모이는 계절이고, 겨울은 뿌리에 응집되어 봄날을 기약하는 추운 계절이다. 각 계절에 맞춘 것이 한의학 양생의 기본 이론이다.

 

올바른 양생을 위해서는 사계절의 기후와 주위 환경만 맞추는 것이 아니다. 정신수련, 음식과 기거의 조절도 중시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생체 리듬이다. 리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음악에서도 리듬이 중요하지만, 건강을 유지하려면 리듬을 타야 한다. 인체는 스위치를 누르면 언제나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여러 악기의 음이 조화를 이루듯 각 장기가 서로 협응하고, 리듬을 유지해야 건강이 확보될 수 있다. 자고 일어나는 시간이 급격하게 변하고, 식사 시간이 들쭉날쭉해지면 생체 리듬이 흔들린다.

 

병이 나지 않게 미리 막고 천수를 누리게 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자연의 변화에 맞춘 생활을 하는 것이다. 황제내경에 여름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며, 겨울엔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계절별로 잠자는 시간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해가 뜨면 양기가 충만해져 활동하는데 알맞고, 해가 떨어지면 음기가 강해져 몸의 움직임을 줄이고 휴식을 취하는 게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계절별 수면 리듬의 변화는 눈부신 조명 불빛과 스마트폰이란 문명의 혜택을 받기 전엔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해지고 두 세 시간 정도 있으면 자고, 먼동이 틀 때 즈음에 일어나는 것이 일상적인 생활 리듬이었다. 자연과 인간 또한 우주 삼라만상과의 원활하고 조화로운 심신 생활을 통해서 건강을 지키는 것이 황제내경의 양생법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한의학은 또 장부의 작동 원리인 물질의 속성을 목, 화, 토, 금, 수 등 5가지 오행으로 구분하고 서로 돕는 상생과 서로 대립하는 상극으로 나눠 질병의 발생을 이해한다. 또 칠정(七情)을 인간의 기본 감정으로 규정하고 정신 상태에 따른 질환의 발생을 설명한다. 모든 병은 막혀서 온다고도 했다. 무형의 생명력이 유형의 조직체에 잘 출입하면 정상, 출입이 잘 안 되면 병, 영 출입을 못할 정도로 막혀서 빠져 나가버리면 죽음이다. 막히는 원인을 찾아보면 다치는 것 말고는 기후, 음식, 기거, 마음뿐이다. 그래서 같은 병이라 해도 원인을 잘 살펴서 치료를 다르게 해야 한다. 따라서 한의학은 일관된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학문적 특성을 내재하고 있음에도 서양 의학이 해부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질환의 원인을 파악하고 진단 치료하는 데 여전히 유용한 이점을 안고 있다.

 

황제내경을 이해한다면 인간의 몸이 자연과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람이 자연과 하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을 둘러싼 여러 가지 조건을 우리는 환경이라고 표현하지만, 자연과 사람이 하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서로 어우러진 상태일 뿐이다.

 

오늘날에는 의식주의 수준은 높아졌지만 정신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마음으로 인한 병이 많다. 스트레스로 인해서 생기는 병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며 알아도 평소에 원인을 제거하거나 증상을 해소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천 년 전 한의학의 원전인 황제내경 소문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염담무욕, 합동어도(恬淡無欲, 合同於道).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다면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뜻이. 우주와 일체되는 궁극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몸을 해롭게 하는 것을 피하고 마음을 편안하고 담담하게 해서 잡념을 비우고 없애면 생명력이 온몸에 꽉 차서 지켜줄 것이니 병이 생길 수가 없다. 이렇게 몸을 보전하는 바른 생활을 강조하면 삶이 단조롭게 되고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건강을 잃은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건강을 잃으면 몸과 마음이 고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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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5-02-0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었는데, 밀린 책이 많아서 포기했더랬죠. 恬淡無欲, 合同於道... 이렇게 살 수 있다면야...^^

cyrus 2015-02-07 11:30   좋아요 0 | URL
표맥님이 읽어보신다면 만족하실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황제내경을 알게 되었는데 입문용으로 좋습니다. ^^

만병통치약 2015-02-06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 자연을 거슬러 살면서 과거에 비해 건강해진것도 사실이고 수명도 늘어난 것도 사실인데 왜 과거 단순했던 시절의 철학을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몸은 편해도 마음이 불편해서일까요?

cyrus 2015-02-07 11:34   좋아요 0 | URL
통치약님 말씀이 맞습니다. 황제내경 같은 한의학에서 볼 수 있는 철학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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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폭력은 기억까지 깨부수지는 못한다.
광주는 요구이고
거절이고
회생이다.
하나로 합쳐진 복합적인 의미를
그 어떤 힘이 으스러뜨린다는 것인가.

 

(김시종 「입 다문 말 - 박관현에게」 중에서, 《광주 시편》 42쪽)

 


1980년 5월 18일, 하루 동안 그야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칙적인 야만적 폭력이 급조되었다. 광주항쟁.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980년의 기록들은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제목만 듣고도 무슨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활자를 통해 전이되는 광주의 역사에 익숙해질수록 사람들은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여전히 무자비하게 살해된 광주 시민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진 흑백사진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갖는 거리감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들이 힘겹게 싸우고 상처받는 투쟁의 길을 그저 눈으로만 바라보고 분노할 수 있어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잔인한 부조리에 대해 여린 가슴만 치는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될 우려가 있다. 역사를 책이 아닌 왜곡된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으로만 배우는 청소년이라면 광주항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거나 책을 읽었더라면 이렇게 쓸 것이다. ‘80년대의 암울한 독재 정권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감상하는 태도는 최악의 역사관을 형성하기도 한다. 광주항쟁을 북한이 개입된 날조된 사건이라든가 신군부의 위대한 업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들은 광주의 아픈 속살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광주라는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해선 광주 희생의 슬픈 바닥 얘기에서 재출발해야 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강제로 봉인된 억울한 호소를 역사로부터 외면된 채 잊힌 영혼의 목소리로 되살린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희생된 어린 영혼은 극한의 폭력에 유린당한 인간이 죽어서도 어떻게 짓밟히며 은폐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46~47쪽)

 

지금까지 알려진 광주의 이야기와 기록된 역사는 피해자의 진실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침묵의 합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반쪽짜리 명복이다. 소년 동호는 가슴 아픈 역설적인 상황을 포착한다. 추도식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유족들의 모습을 본 동호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잔인한 행동을 한 국가의 상징물이 개입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강압적인 권력 앞에 무너진 광주의 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통한 죽음이 가려져 있다면
대지는 이제 조국이 아니다.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광주 시민들의 원통한 죽음은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대지의 기(旗)에 가려지고 말았다. 학살에 가담한 자는 십 년 뒤에 기득권이 되어 희생자들을 태극기가 펄럭이는 망월동 묘역에 봉인했다. 이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진실로 영원히 규명하지 못했다. 죽은 자는 영원히 말이 없고, 가해자 집단은 상투를 든 기득권자가 되어 스스로 면죄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은
떠돌고 있어야 위협이 된다.
움푹 팬 눈구멍에 둥지를 튼 원한
원귀가 되어 나라를 넘치라.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
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
감을 수 없는 사자(死者)의 죽음이다.
땅에 묻지 마라.
사람들아,
명복을 빌지 마라.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군인들에 의해 버려진 광주 희생자들의 증언은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이다. 한강은 눈을 감지 못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무덤 밖으로 꺼낸다. 왜 하필 광주의 생존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이야기에 등장시킨 것일까. 이것은 억울하게 땅속에 묻힌 잊힌 광주의 기억을 복원하는 문학적 작업이다. 만약에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애초에 생존자들이 겪은 질곡의 시간을 기록하고 묘사했다면 독자는 실질적인 고통의 연대감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세월의 바람에 훅 날아가기 쉬운 공허한 문자로 된 명복의 문장만 읊조릴 뿐이다. 독자는 사진과 문자 그리고 생존자의 구술로 재구성된 광주의 역사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생존자들이 광주의 상황을 묘사하는 서사에 이제 독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교과서에 실리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소년이 온다》의 구성 방식은 이전에 나온 광주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뛰어넘는다. 이 소설은 단순히 광주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문장 덩어리가 아니다.

 

《소년이 온다》의 키워드는 ‘상처 입은 시간’이다. 열흘 동안 진행되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에 볼 수 없다.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섬뜩하게 증언한다. 차마 이 자리에 옮길 수 없는 그 참혹한 고문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파멸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도청을 지키던 동료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피비린내 감도는 폭압 속에 외부와 단절된 고립무원 광주의 시간은 그렇게 멈추고 말았다. 상흔으로 남은 기억은 원고지 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문장이 되어 한 편의 문학으로 변주한다. 한강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신의 상처, 혹은 살의까지 가 닿는 증오를 다독이기 위해 원고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기억의 창고에는 축적된 고통과 행복의 기억, 나이를 먹어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망각되지 않는 기억이 쌓여 있다. 감성이 차갑거나 슬퍼질 때 그 기억은 소리 소문 없이 일상에 파고들어 나지막이 속삭인다. 기억 저편에서 잠들기만 원했던 감정들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그 순간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잊을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아프다.

 

한강은 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감행했을까. 그녀가 광주의 상처 입은 시간을 다시 불러온 것은 단지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는 밀란 쿤데라의 잠언을 소설로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나아가 5월 광주를 ‘독자가 죽은 자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드는 봉합의 세계’로 확장한다. 독자는 폭력에 무너지는 광주의 정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년이 온다》앞에서 무자비한 폭력의 참상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독자가 소설에서 보는 것은 죽음에 에워싸인 인간의 실존적 공포다. 총과 칼로 정당한 외침을 짓이기는 군인 앞에 내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투쟁은 역사의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절박했던 인간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묘역에 말없이 잠들어 있는 그들 영혼의 슬프고도 생생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목소리를 귀기울이고 이승으로 소환한 사람은 바로 한강이다.

 

상처 입은 시간은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라고도 하지만 모두가 기억할 때 그 고통은 용서와 화해로 치유될 수 있다. 한(恨)과 외면으로는 안 된다. 그날을 기억하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상처는 들쑤셔서도 안 되겠지만 눈 돌린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연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명복을 빌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땅에 묻힌 광주의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땅에 묻히지 않은 광주의 기억은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광주를 잊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망각하는 것이 된다. 기억을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공허한 명복은 거부한다. 차라리 명복을 빌지 말라. 광주를 기억하는 것이 깨달음과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워도 일종의 성역처럼 된 광주의 상흔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국가 폭력 집단의 후예들이 얼마 남지 않은 광주의 기억을 깨부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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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2-06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는 광주를 생각하면 윗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직접적인 이득을 챙긴 윗선의 악행도 그렇지만, 절대다수였던 군인들. 그러니까 진압군으로 들어간 그들은 왜 지금까지도 침묵하고 있는건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수인 그들이 역사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참회를 하든, 변명을 하든, 무엇인가 얘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숨어버리고, 뒷방에서 자조하면서 추억삼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cyrus 2015-02-06 14:33   좋아요 0 | URL
예전에 광주 항쟁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어요. 아마도 프로그램명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일 겁니다. 광주 항쟁에 나섰던 군인을 인터뷰한 장면이 있는데 힘없는 시민을 무참하게 폭력을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 그 때 그 참상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더군요. 폭력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환경 탓에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소수의 가해자들의 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2-07 05:09   좋아요 0 | URL
양심적인 소수는 나서지 못하고, 다수는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살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게 화가나요..

단발머리 2015-02-0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광주에 대한 이야기는 두렵고 무섭습니다. 영화로 몇 장면, 책으로 몇 장, 사진 몇 장을 보았는데도 너무 무서워요.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광주가 잊혀져서는 안 되기에,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용기를 낸 작가 한강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2-06 14:36   좋아요 0 | URL
소설 초반부에 죽은 광주 시민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장면부터 압권입니다. 한강 작가가 이 장면을 가까이서 보듯이 세밀하게 묘사했더라고요. 이 장면에 할애되는 분량만 해도 열 쪽은 넘을 겁니다.

맥거핀 2015-02-0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나서 한강의 이 작품은 소설 이상의 소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명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요즘에 역사 시간에 `운동`이라고 배우니 어떤 온건한 무엇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운동이라기보다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죠. 광주학살 혹은 광주항쟁이라는 말이 차라리 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소설을 읽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구요.

말씀하신 대로 어떻게든 기억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참..기억은 잊혀져가고 더 나아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까지 있고, 살인마도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잘 살고 있고..29만원이니 뭐니 하면서 조롱받으면서 끝날 사람이 아닌데..마음아픈 현실입니다.

cyrus 2015-02-06 14:39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말씀을 보면서 이제부터 ‘광주항쟁’이라는 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민주화’라는 단어도 일베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완전히 이상하게 변질되고 말았으니까요. 일베가 단어를 지들 마음대로 바꾸면서 광주 항쟁을 조롱하고, 전두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transient-guest 2015-02-07 05:10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광주항쟁이 더 정확하게 느껴지네요. xx운동이라는 건 순화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cyrus 2015-02-0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guest님 고맙습니다. 글에 광주항쟁으로 고쳤습니다. 역사를 교과서에 있는 그대로 배우다보니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1980년 광주의 5월은 아픔의 달이다. 이제 그 날들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됐고 망월동 묘역에는 웅장한 추모탑이 들어섰다. 역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된다. 글, 그림 등의 다양한 메커니즘으로 역사는 남겨져 훗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자료가 된다.

 

미술가들은 너나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회 인식을 작품에 담기도 한다. 시대가 암울하고 폭압적인데 아름답고 장식적인 그림만 줄곧 그릴 순 없는 법이다. 특히 1980년대 일군의 작가들은 미술을 통해 억눌린 시대에 저항하며 ‘민중미술’이란 아름드리 나무를 키워냈다. 뜨거운 가슴과 투혼으로 암울했던 현실을 ‘현실과 발언’이란 이름으로 권력과 맞섰다.

 

시대에 뒤처진 미술 같지만, 세상이 어지럽다 싶으면 리얼리즘은 늘 미술의 전선 앞으로 다시 나온다. 이해하기 쉬운 미술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다. 특히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리얼리즘 미술은 이른바 민중미술과 연결되면서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리얼리즘 미술은 현실을 오롯이 담지 못하고 있다. 작년 폐막한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은 끝내 걸리지 못했다.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풍자했다는 이유로 주최 측은 그림 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시 유보 결정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은 민중미술의 정신에 저버리는 것이다.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참가한 신경호 화백은 리얼리즘을 현실주의로 이해한다. 단순히 보이는 것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리얼리즘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인의 심성 근원에 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을 함께 아파하고,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신 화백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펄럭이고 있다.
하이얀 만장 한 줄기
스산한 구름 가득한 하늘을 휘저으며 울리고 있다.
펄럭펄럭 몸을 비틀고서는
중천을 팽팽 치달으며
쥐어짜내는 목소리 다하도록 몸부림치고 있다.
비틀렸다가 치켜 오르고
휘어졌는가 하면 넘실대며
펄럭이고 있다.
부딪히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슬픔과 분노의 욱신거림을
천공에 빛바래며 펄럭이고 있다.

 

 

(김시종, ‘흐트러져 펄럭이는’ 중에서, 《광주 시편》 18쪽)

 

 

신 화백은「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을 통해 광주 시민들의 넋을 소생함으로써 그들이 말하지 못한 슬픈 사연을 그림으로 대신 전한다. 광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역사 속에서 나오지 않는 무명 희생자들의 넋은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고 억지로 도려낸 상흔이다. 광주의 핏빛 상흔은 그림 속 만장이 되어 펄럭이고 있다.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우렁찬 피의 절규이다.” (김시종, ‘바래지는 시간 속’ 중에서, 《광주 시편》 32쪽) 땅속에 매장된 희생자들의 억울한 목소리는 피의 절규가 되어 잊지 말라고 살아남은 자들 앞에서 몸부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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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2-0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준가? 서경식의 이책 <TV 책을 보다>에서 다루더군.
재밌었는데 봤니?

나도 이 그림이 참 묘하게 끌리더군. 설명이 그래서 그런지
본질보다 비본질을 다루는 것 같기도 하고. 진짜 혼백이 올 것도 같고.ㅋ

cyrus 2015-02-05 20:33   좋아요 0 | URL
볼려고 했는데 깜박 잊어버려서 못봤어요. KBS 다시보기 되면 봐야겠어요.

저는 신경호 화백이 그린 허공에 대고 짖는 개 그림이 인상적이었어요. ^^

stella.K 2015-02-06 11:29   좋아요 0 | URL
그거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어.
당장 www.kbs.co,kr로 들어가서 봐.ㅋㅋ
서경식 교수 인터뷰도 볼 수 있어.^^

cyrus 2015-02-06 14:40   좋아요 0 | URL
무료로 볼 수 있는 거죠? ㅎㅎㅎ
 

 

 

페이스북을 접속하면 긴장할 때가 있다. 상대방의 생각이 담긴 글에 대해 소신 있게 비판적 의견을 댓글을 다는 순간이다. 댓글을 달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한다. 상대방이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을 표현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댓글에 달고 싶은 말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자체 검열을 한다. 내 의견이 논리적으로 타당한지 확인한다. 내 의견에 논리적 허점이 발견되면 상대방은 반론을 내세울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댓글 하나 다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적어도 5분이 걸린다. 오래 생각해서 댓글을 달면 10분을 넘기기도 한다. 댓글을 다는 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신중한 자세가 건전한 토론을 유연하게 펼칠 수 있는 방어적 자세인 동시에 상대방을 최대한 존중하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남의 입장을 무시한 채 내 의견을 일방적으로 드러내면 상대방으로서는 불쾌할 수 있고, 사소한 토론이 서로 감정을 험악하게 만드는 말싸움으로 변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겪은 일이다. 그때 일베의 인격 모독적 발언과 반사회적 행동으로 인해 일베를 폐쇄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지자 표현의 자유에 관한 논란이 있었다. 나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모 일간지의 대학생 칼럼 공모 페이스북 페이지에 멘토로 활동하고 있었다. 멘토의 역할은 이렇다. 대학생들이 올리는 글을 꼼꼼하게 읽어서 고쳐야 할 부분을 댓글로 알려준다. 또 잘 쓴 글이 있으면 대학생 칼럼으로 추천한다. 내가 추천한 글이 신문 오피니언에 실릴만한 칼럼인지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페이스북 페이지 관리자를 맡은 논설위원이 한다. 대학생 칼럼으로 선정되면 토요일에 나오는 신문 오피니언에 논설위원들의 칼럼 옆에 게재되는 영광을 누린다.

 

칼럼이라는 글 형식상 대중이 관심 가지는 사회 문제들을 주제로 한 내용이 많은 편이다. 당연히 일베 논란에 대한 글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베 문제는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는데다가 자칫하면 감정적 문제도 번질 수 있는 아주 민감한 주제다. 사실 이런 주제의 글이 나오면 일단 긴장한 상태에서 읽는다. 내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려고 글을 두 세 번 이상 읽기도 한다. 예상 반론도 미리 염두에 둔다. 칼럼을 응모하는 대학생 필자들이 무조건 멘토의 의견을 순응하는 것은 아니다. 간혹 자신이 쓴 글의 허점이 지적되면 반론으로 응수하는 필자도 있다.

 

필자의 공격을 각오하고 내 의견을 댓글로 밝혀야 한다. 한번은 일베 폐쇄 찬성론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글에 댓글을 단 적이 있었다. 나는 그 글이 일방적으로 일베 폐쇄 찬성론자들을 목표물로 삼아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입장으로 몰아붙이는 느낌이 나서 글을 쓴 필자에게 논점의 방향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좀 더 확대할 것을 요구했다. 예상했던 대로 반론 댓글이 나왔다. 필자가 아닌 필자의 지인이 먼저 총대를 메고 내 의견을 공격했다. 이제 여기서부터 댓글 싸움이 시작되었다. 필자의 지인과 일대일로 댓글과 답글을 주고받다가 드디어 필자가 댓글 싸움에 뒤늦게 참전했다. 토론 양상이 2대1이 되었다.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무턱대고 두 사람의 의견이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댓글 전쟁을 시작한 지 10분 정도 지나자 내 의견을 반대하는 댓글이 점점 많아졌다. 나는 혼자였다. 영화 ‘신세계’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칼부림에 맞서는 황정민과 같은 상황이었다. 드루와 드루와

 

토론에 정답은 없다. 정답을 도출하도록 강요하는 토론을 한다는 것은 이 토론을 끝낸다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시간과 힘만 낭비하고 서로 감정이 상하는 무의미한 말싸움이 이어진다. 그들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되 내 입장을 그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면 그만이다. 특정 문제를 바라보는 생각의 시선이 무조건 A만 있는 것이 아니라 A와 B 그 이상이 존재한다는 점을 알면 된다. 그런데 토론하면서 제일 피곤하고 맞서기 싫은 사람의 유형이 무조건 하나의 의견이 옳다고 우기거나 그 입장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끌어들여서 합심하기도 한다. 이들은 상대방의 의견이 불리하도록 끝까지 몰아붙인다. 사실 대학생 칼럼을 선정하는 멘토는 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멘토 활동을 하는 대학생이 두 명 더 있다. 그러나 나는 동료나 다름없는 다른 멘토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그들도 사람이다. 내 의견과 같으면 고맙고 든든하게 느껴지지만 항상 내 의견과 같을 수 않다. 정신적으로 피곤하고 불리한 상황에 처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토론한다. 더 이상 토론이 끝날 것 같지 않으면 상대방 의견을 인정하고, 수없이 내뱉었던 토론 내용을 정리하는 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 짓는다. 

 

그런데 토론을 좋게 끝내려는 상대방의 원만한 태도를 자신의 의견에 굴복하는 반응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토론의 승리자가 된 거 같은 착각에 빠진다. 상대방이 더 이상 토론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해서 진행을 거부하면 토론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토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끌어서 이기는 것이 장땡으로 본다. 일단 내 의견에 따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한다.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이발사’는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주장하고 싶은 자와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는 집단 세력이 만나서 생기는 양상을 일상적인 삶의 일부로 함축해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발소라는 협소한 공간 안에서도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언어적 집단 린치가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런 경험 한 번쯤은 있다.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지적해도 이를 무마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은폐, 입막음하거나 그를 선동가, 거짓말쟁이로 매도하는 패거리를 재수 없게 만난다. 패거리는 상대방을 목표물로 삼아 일방적으로 집단 린치를 가한다. 이런 상황이 익숙해지면 집단 사고의 오류를 범하기 쉽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만의 논리에 포획된 채 그들만의 잣대로 오도된 의사결정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해당 집단만의 공유된 가치와 판단 기준, 객관성을 상실한 무비판의 환상,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 모두 합리성을 파괴하는 집단주의의 적폐다. 아무리 논리적이 뛰어난 사람도 이러한 집단주의 성향으로 이끄는 토론에 휘말리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없다. 오히려 상대방은 궁지에 몰린 상대방을 무시하고 조롱한다. 고양이 여러 마리가 모여 쥐 한 마리를 장난감처럼 앞발로 눌러대고 굴리는 것처럼. 쥐를 한 번에 죽이지 않는다. 자신들이 만족할 때까지 쥐를 끝까지 괴롭히다가 서서히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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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약 2015-02-04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플도 사실 의견이 비슷한 블로거들만 끼리끼리 모이잖아요? 전 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도 보고싶어요^^

cyrus 2015-02-05 00:46   좋아요 0 | URL
저도 치열하게 진행하다가 마무리로 서로 인정하면서 좋게 끝내는 토론을 좋아합니다. 그것보다는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더 재밌긴 하죠... ㅎㅎㅎ

CREBBP 2015-02-04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발소>를 그렇게 읽으셨군요. 저도 읽었는데. 아 맞긴 맞는 말씀이신데, 살짝 제가 받은 느낌과 각도가 다른 듯해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15-02-05 01:00   좋아요 0 | URL
‘이발소’에서 이발사가 레이버의 정치적 견해를 비판하고 자신의 입장을 고집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대방을 잘못된 의견으로 몰아붙이는 사람이 생각났어요. 그런 경험을 겪은 레이버는 자신이 굴복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다시 한 번 이발소에 가기 전에 미리 자신이 할 말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토론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고 맙니다. 사실 레이버는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죠. 이발사는 애초에 레이버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고, 그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바라보죠. 아예 그를 구경거리로 만듭니다. 이발소에 있는 지인들을 불러 놓고 레이버의 연설을 구경하는 것이죠. 비록 지인들은 레이버의 연설에 대해 지적하거나 반론을 펼치지 않았지만, 이발사처럼 레이버의 연설을 무시하고 비웃습니다. 저는 여기서 같은 의견을 공유하는 패거리 토론의 잘못된 행태가 떠올렸습니다. 이런 행동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의 심리를 압박하고, 더 이상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위축하게 만듭니다. 이 소설을 읽다가 개인적 경험이 중첩되는 바람에 저만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해석했습니다. 혹시 의문이 드는 점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

yamoo 2015-02-04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론을 하다보면 별 사람을 다 봅니다.ㅎㅎ
토론이 아니라 결국 언성이 높아지고 인상이 험악해지지요.

공감하며 글 잘 읽었습니다!ㅎ

cyrus 2015-02-05 01:03   좋아요 0 | URL
야무님은 토론을 잘 하실 것 같아요. 사실 저는 토론을 하게 되면 처음부터 내가 이긴다는 생각을 포기합니다. 이래서 자신감이 위축되고 토론에서 이기지 못할 때가 많아요. ㅎㅎㅎ

수이 2015-02-05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주의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데 돌이켜보니 내가 그런 인생을 살아왔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 마네;

cyrus 2015-02-05 15:34   좋아요 0 | URL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사람은 살면서 자신과 비슷한 성향의 타인과 같이 어울리는 것을 편안하게 느껴요. 저도 그래요. 무리에 속하면 남과 다른 성향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심슨 핼러윈 특집 오프닝 영상, 잔인한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TV만화 <The Simpsons> 핼러윈 특집(Treehouse of Horror XXIV) 오프닝은 역대 심슨 시리즈 오프닝 중에서 가장 퀼리티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판의 미로’, ‘헬보이’ 등을 만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연출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고전 오컬트 및 공포물의 주인공, 관련 인물들을 만화로 만들어 패러디했다. 어지럽게 지나가는 영상을 잘 보면 감독 본인이 제작한 영화 캐릭터들도 나온다. 당신이 오컬트 마니아라면 영상에 나오는 장면들 속에 숨겨진 공포영화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 찾기에 자신이 없다면 유명 인사를 찾아보자. 영상에 나오는 사람이 누굴 패러디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바트 심슨이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돌연변이 낙지 같은 거대한 괴물을 만난다. 운동신경이 좋은 바트는 괴물의 길쭉한 촉수 사이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지나간다. 바트가 탄 보드가 빠르게 지나갈 때 카메라는 괴물 촉수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마른 체격의 남자와 그 옆에 수염 있는 남자를 비춘다. 수염 있는 남자의 팔 한쪽에 까마귀가 앉아 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모른다 치더라도 까마귀와 함께 있는 수염 있는 남자는 그 사람의 얼굴을 비슷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누군지 잘 알 것이다. ‘갈까마귀’라는 시를 쓴 에드거 앨런 포다. 포 왼쪽에 있는 사람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다. 바트가 만난 촉수 달린 거대한 괴물은 러브크래프트가 창조한 크툴루(Cthulu)라는 외계 생명체이다.

 

 

 

 

 

 

 

 

 

 

 

 

 

 

 

 

 

 

 

 

 

 

 

 

 

 

 

 

 

 

 

 

포와 러브크래프트, 공포 오컬트 문화를 논할 때 이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기원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미국 공포문학의 아버지, 그것도 두 명의 아버지는 공포 소설 작가들의 작품에 모체가 되었다. 시기상 작품 활동을 먼저 한 포가 첫 번째 아버지가 되어야 하지만, 포와 러브크래프트 둘 중에 과연 누가 공포소설의 창시자인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논쟁이다. 러브크래프트도 포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지만, 포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후대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러브크래프트의 업적을 간과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불후한 유년 시절,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 그리고 기존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공포문학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흡사한 면이 있다. 포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담배 상인의 양자가 되었다. 포는 의붓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다. 잠깐 화해한 적이 있었으나 포의 지독한 도박벽과 무절제한 생활을 참지 못한 의붓아버지는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들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러브크래프트의 가족사도 순탄치 않았다. 러브크래프트가 세 살 때 그의 아버지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어린 러브크래프트는 어머니와 외조부 밑에서 자랐는데 병약한 체질이라서 집에 있는 날이 많았다. 은둔 생활이 많아질수록 러프크래프트의 마음에 우울한 그늘이 넓어졌다. 포와 러브크래프트의 우울한 기질은 어린 시절 환경에서 비롯되었다.

 

포와 러브크래프트는 단편소설을 많이 남겼다. 포가 먼저 단편소설 형태를 구축했고, 러브크래프트가 포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단편소설은 공포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인상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다. 여기에 포와 러브크래프트는 공포의 근원을 인간의 심리적 변화에서 찾는다. 소설 전체를 가득히 채우는 작중 인물들의 불길한 감정과 공포는 독자에게 생생한 긴장감을 불어넣을 만하다. 흡인력이 강한 이야기는 독자를 무시무시하고 충격적인 절정으로 도달하게 한다. 포와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고, 우울하고, 내성적이며 매우 예민하다. 강렬한 공포를 경험하면 반쯤 미쳐버리고 파국의 운명을 맞는다. 포의 《어셔 가의 몰락》의 어셔는 음울하고 쇠잔해져 가는 어셔 집안 분위기에 압도당하며 러브크래프트의 《데이곤》(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에 수록)의 화자는 외계 생명체와의 조우로 인해 현실의 감각이 무너져 끔찍한 망상에 시달린다.

 

 

 

 

 

 

 

 

 

 

 

 

 

 

 

 

 

러브크래프트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었다. 아마도 그가 탐독했던 도서목록 중에 포의 작품도 포함되었으리라. 문학 작품에 나오는 공포를 비평하고, 결과물을 공포문학사로 정리한 《공포문학의 매혹》(북스피어, 2012)에서 포를 설명하는 데 꽤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러브크래트프는 포의 문학을 상당히 높게 평하고 있으며 당대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던 포 작품 속의 예술적 기교를 알아봤다. 보들레르가 포의 문학을 가장 먼저 지지하고 유럽에 소개하는 데 큰 공헌을 했지만, 포가 남긴 수많은 시의 문학적 평가에 가리는 바람에 외면받을 뻔했던 공포소설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러브크래프트다. 《공포문학의 매혹》에서 러브크래프트는 포의 이야기는 다른 작가들이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방식으로 여전히 살아있다고 썼다. 자신을 포함한 후대 작가들이 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는 공포문학의 조상을 부활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포의 소설 속에 남아있는 그로테스크 문학 DNA를 복원했다. 포의《검은 고양이》는 인간의 감정을 광기의 소용돌이로 빠뜨리게 하는 불길한 고양이를 통해 공포를 한껏 고취한다. 러브크래프트의 《울타르의 고양이》(러브크래프트 전집 3권에 수록)는 《검은 고양이》에 비해 공포를 조성하는 분위기가 많이 떨어지지만, 고양이 살육에 이르는 인간의 편집증이 초래하는 섬뜩한 파멸은 《검은 고양이》의 결말과 유사하다. 《벽 속의 쥐》( 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에 수록)는 평범하게 보이는 찢어진 벽지만으로 오싹한 장면으로 연출하는 이야기가 압권이다. 공포의 절정에 급속도로 향하도록 독자의 감정을 끌어들이는 이야기의 효과는 포의 소설에서도 볼 수 있다. 《벽 속의 쥐》의 주인공 이름은 델라포어(Delapore)다. 델라포어는 포(Poe)를 위한 러브크래프트의 오마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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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2-03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우울과 몽상>은 책꽂이에서 꽂힌 채 늘 저에게 음산한 눈길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끔 말도 합니다. ˝도대체 언제 날 읽을래?˝
러브크래프트가 누군지 몰랐는데 갑자기 관심이 생기네요.^^

cyrus 2015-02-04 18:31   좋아요 0 | URL
<우울과 몽상>이 소설 전집이라는 유일한 메리트를 제외하면 번역이 시원찮습니다. 문장 일부를 빼먹은 채 번역한 글도 있고요. 책이 나온 지 13년이나 지났는데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보물선 2015-02-04 0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궐님. 미투요^^

단발머리 2015-02-06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돌궐님과 같아요. 미쓰리요^^

2015-08-23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3 16: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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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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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16: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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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16: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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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1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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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16: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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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16: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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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23 2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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