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8일, 하루 동안 그야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칙적인 야만적 폭력이 급조되었다. 광주항쟁.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980년의 기록들은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제목만 듣고도 무슨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활자를 통해 전이되는 광주의 역사에 익숙해질수록 사람들은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여전히 무자비하게 살해된 광주 시민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진 흑백사진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갖는 거리감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들이 힘겹게 싸우고 상처받는 투쟁의 길을 그저 눈으로만 바라보고 분노할 수 있어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잔인한 부조리에 대해 여린 가슴만 치는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될 우려가 있다. 역사를 책이 아닌 왜곡된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으로만 배우는 청소년이라면 광주항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거나 책을 읽었더라면 이렇게 쓸 것이다. ‘80년대의 암울한 독재 정권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감상하는 태도는 최악의 역사관을 형성하기도 한다. 광주항쟁을 북한이 개입된 날조된 사건이라든가 신군부의 위대한 업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들은 광주의 아픈 속살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광주라는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해선 광주 희생의 슬픈 바닥 얘기에서 재출발해야 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강제로 봉인된 억울한 호소를 역사로부터 외면된 채 잊힌 영혼의 목소리로 되살린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희생된 어린 영혼은 극한의 폭력에 유린당한 인간이 죽어서도 어떻게 짓밟히며 은폐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46~47쪽)
지금까지 알려진 광주의 이야기와 기록된 역사는 피해자의 진실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침묵의 합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반쪽짜리 명복이다. 소년 동호는 가슴 아픈 역설적인 상황을 포착한다. 추도식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유족들의 모습을 본 동호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잔인한 행동을 한 국가의 상징물이 개입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강압적인 권력 앞에 무너진 광주의 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통한 죽음이 가려져 있다면
대지는 이제 조국이 아니다.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광주 시민들의 원통한 죽음은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대지의 기(旗)에 가려지고 말았다. 학살에 가담한 자는 십 년 뒤에 기득권이 되어 희생자들을 태극기가 펄럭이는 망월동 묘역에 봉인했다. 이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진실로 영원히 규명하지 못했다. 죽은 자는 영원히 말이 없고, 가해자 집단은 상투를 든 기득권자가 되어 스스로 면죄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은
떠돌고 있어야 위협이 된다.
움푹 팬 눈구멍에 둥지를 튼 원한
원귀가 되어 나라를 넘치라.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
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
감을 수 없는 사자(死者)의 죽음이다.
땅에 묻지 마라.
사람들아,
명복을 빌지 마라.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군인들에 의해 버려진 광주 희생자들의 증언은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이다. 한강은 눈을 감지 못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무덤 밖으로 꺼낸다. 왜 하필 광주의 생존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이야기에 등장시킨 것일까. 이것은 억울하게 땅속에 묻힌 잊힌 광주의 기억을 복원하는 문학적 작업이다. 만약에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애초에 생존자들이 겪은 질곡의 시간을 기록하고 묘사했다면 독자는 실질적인 고통의 연대감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세월의 바람에 훅 날아가기 쉬운 공허한 문자로 된 명복의 문장만 읊조릴 뿐이다. 독자는 사진과 문자 그리고 생존자의 구술로 재구성된 광주의 역사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생존자들이 광주의 상황을 묘사하는 서사에 이제 독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교과서에 실리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소년이 온다》의 구성 방식은 이전에 나온 광주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뛰어넘는다. 이 소설은 단순히 광주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문장 덩어리가 아니다.
《소년이 온다》의 키워드는 ‘상처 입은 시간’이다. 열흘 동안 진행되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에 볼 수 없다.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섬뜩하게 증언한다. 차마 이 자리에 옮길 수 없는 그 참혹한 고문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파멸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도청을 지키던 동료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피비린내 감도는 폭압 속에 외부와 단절된 고립무원 광주의 시간은 그렇게 멈추고 말았다. 상흔으로 남은 기억은 원고지 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문장이 되어 한 편의 문학으로 변주한다. 한강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신의 상처, 혹은 살의까지 가 닿는 증오를 다독이기 위해 원고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기억의 창고에는 축적된 고통과 행복의 기억, 나이를 먹어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망각되지 않는 기억이 쌓여 있다. 감성이 차갑거나 슬퍼질 때 그 기억은 소리 소문 없이 일상에 파고들어 나지막이 속삭인다. 기억 저편에서 잠들기만 원했던 감정들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그 순간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잊을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아프다.
한강은 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감행했을까. 그녀가 광주의 상처 입은 시간을 다시 불러온 것은 단지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는 밀란 쿤데라의 잠언을 소설로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나아가 5월 광주를 ‘독자가 죽은 자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드는 봉합의 세계’로 확장한다. 독자는 폭력에 무너지는 광주의 정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년이 온다》앞에서 무자비한 폭력의 참상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독자가 소설에서 보는 것은 죽음에 에워싸인 인간의 실존적 공포다. 총과 칼로 정당한 외침을 짓이기는 군인 앞에 내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투쟁은 역사의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절박했던 인간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묘역에 말없이 잠들어 있는 그들 영혼의 슬프고도 생생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목소리를 귀기울이고 이승으로 소환한 사람은 바로 한강이다.
상처 입은 시간은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라고도 하지만 모두가 기억할 때 그 고통은 용서와 화해로 치유될 수 있다. 한(恨)과 외면으로는 안 된다. 그날을 기억하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상처는 들쑤셔서도 안 되겠지만 눈 돌린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연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명복을 빌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땅에 묻힌 광주의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땅에 묻히지 않은 광주의 기억은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광주를 잊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망각하는 것이 된다. 기억을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공허한 명복은 거부한다. 차라리 명복을 빌지 말라. 광주를 기억하는 것이 깨달음과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워도 일종의 성역처럼 된 광주의 상흔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국가 폭력 집단의 후예들이 얼마 남지 않은 광주의 기억을 깨부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