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광주의 5월은 아픔의 달이다. 이제 그 날들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기록됐고 망월동 묘역에는 웅장한 추모탑이 들어섰다. 역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된다. 글, 그림 등의 다양한 메커니즘으로 역사는 남겨져 훗날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자료가 된다.
미술가들은 너나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그 사회 인식을 작품에 담기도 한다. 시대가 암울하고 폭압적인데 아름답고 장식적인 그림만 줄곧 그릴 순 없는 법이다. 특히 1980년대 일군의 작가들은 미술을 통해 억눌린 시대에 저항하며 ‘민중미술’이란 아름드리 나무를 키워냈다. 뜨거운 가슴과 투혼으로 암울했던 현실을 ‘현실과 발언’이란 이름으로 권력과 맞섰다.
시대에 뒤처진 미술 같지만, 세상이 어지럽다 싶으면 리얼리즘은 늘 미술의 전선 앞으로 다시 나온다. 이해하기 쉬운 미술이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서다. 특히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리얼리즘 미술은 이른바 민중미술과 연결되면서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리얼리즘 미술은 현실을 오롯이 담지 못하고 있다. 작년 폐막한 광주비엔날레에서 홍성담 화백의 「세월오월」은 끝내 걸리지 못했다.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풍자했다는 이유로 주최 측은 그림 전시를 허락하지 않았다. 전시 유보 결정은 현실을 미화하지 않은 민중미술의 정신에 저버리는 것이다.
‘현실과 발언’ 동인으로 참가한 신경호 화백은 리얼리즘을 현실주의로 이해한다. 단순히 보이는 것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리얼리즘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인의 심성 근원에 내재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을 함께 아파하고, 그걸 뛰어넘기 위해서 치열하게 사랑하는 삶이야말로 신 화백이 추구하는 리얼리즘이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펄럭이고 있다.
하이얀 만장 한 줄기
스산한 구름 가득한 하늘을 휘저으며 울리고 있다.
펄럭펄럭 몸을 비틀고서는
중천을 팽팽 치달으며
쥐어짜내는 목소리 다하도록 몸부림치고 있다.
비틀렸다가 치켜 오르고
휘어졌는가 하면 넘실대며
펄럭이고 있다.
부딪히고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슬픔과 분노의 욱신거림을
천공에 빛바래며 펄럭이고 있다.
(김시종, ‘흐트러져 펄럭이는’ 중에서, 《광주 시편》 18쪽)
신 화백은「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을 통해 광주 시민들의 넋을 소생함으로써 그들이 말하지 못한 슬픈 사연을 그림으로 대신 전한다. 광주항쟁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역사 속에서 나오지 않는 무명 희생자들의 넋은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고 억지로 도려낸 상흔이다. 광주의 핏빛 상흔은 그림 속 만장이 되어 펄럭이고 있다.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우렁찬 피의 절규이다.” (김시종, ‘바래지는 시간 속’ 중에서, 《광주 시편》 32쪽) 땅속에 매장된 희생자들의 억울한 목소리는 피의 절규가 되어 잊지 말라고 살아남은 자들 앞에서 몸부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