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년 전에 알렉스는 로맨틱 가이의 대명사였다.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파트너로 나온 신애의 발을 씻겨주고 노래를 불러준 장면에 젊은 여성들은 열광했고 알렉스는 인기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방송의 전파를 타게 되자 알렉스는 인기와 함께 냉소 어린 비난도 들어야 했다. 촉촉한 목소리로 세레나데를 불러주고, 제 여자의 발을 씻겨주는 알렉스 같은 남자 없느냐고 여자의 아우성이 많아졌고, 발 씻겨주면서 노래를 불러달라는 아내의 요구가 많다면서 남편들이 원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야말로 알렉스는 한때 남자들 공공의 적이 되었다. 알렉스는 방송에서 보여준 자신의 로맨틱한 행동들이 다 연출된 것이라는 대중의 반응에 다소 심란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출된 이벤트가 아님을 강조했다. 촬영 후에 신애가 다리를 삐고 말았는데 미안한 마음에 다친 발을 씻겨주었다고 밝혔다.  

 

로맨티스트는 천부적으로 타고나는 걸까. 알렉스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알렉스는 여자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상대의 마음 읽기는 물론이요, 의미 없이 던지는 무언의 대화까지 이해하려고 했다. 사람이 지닌 가장 강력한 욕구 본능 중 하나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인정 욕구’다. 가장 잘 이해해야 할 대상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할 때, 사람은 외로워진다. 만약에 이중섭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의 외로움을 몰라주는 괴벽스러운 화가였다면 우린 이중섭과 마사코의 애절한 사랑 편지를 읽지 못했을 것이다.

 

 

 

 

 

 

 

 

 

 

 

 

 

 

 

 

아내에 대한 이중섭의 사랑은 극진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처음 만났고, 1945년 원산에서 결혼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는 둘의 사랑에 비극성을 부여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그해 12월 가족과 함께 월남했던 이중섭은 부산, 제주도 서귀포 등지에서 생활했지만,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1953년에 어렵사리 일본으로 건너가 그렇게 그리던 마사코를 만났지만, 두 사람이 함께 보내는 데 주어진 시간은 단 일주일이었다. 훗날을 기약하고 이중섭은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는데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이중섭은 아내와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담은 편지를 쓰고 보냈다. 편지 속에는 아내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배어있다. 삶의 압박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그였지만 그림에는 다시 만난 가족이 원을 그리며 춤추거나 과일을 먹으며 즐기는 모습을 그려 보냈다.

 

편지글에 자주 등장하는 ‘발가락 군’, ‘아스파라거스 군’은 마사코의 애칭이다. 발가락이 못생겼다고 이중섭이 마사코에게 두 개의 애칭을 붙였다. 이 애칭들은 두 사람이 한창 연애하던 시절부터 생겼다. 부부가 되어서도 이중섭은 연애 시절의 애칭을 그대로 사용했다.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마사코의 발이 못생겼어도 이중섭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운 여인의 발이었다. 그 발에 몇 번이라도 뽀뽀하고 싶다는 말을 편지에 쓸 정도로 발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이중섭  발을 치료하는 남자」 (1941년)

 

 

그런데 이중섭은 왜 마사코의 발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중섭과 마사코가 둘이서 거리를 걷던 중,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쳤다. 상처가 난 마사코의 발가락에는 출혈이 일어났고, 이중섭은 마사코의 다친 발을 어루만지면서 지혈을 했다. 이때 당시 상황을 잊지 않았던 이중섭은 「발을 치료하는 남자」라는 그림을 엽서 뒷면에 그렸다.

 

이중섭은 마사코의 콤플렉스까지도 사랑한 로맨티스트다. 연애 시절부터 사용하던 애칭이 있어서 그런지 결혼한 부부가 쓰는 편지라기보다는 이제 갓 연애를 처음 시작한 연인 사이의 풋풋한 연애편지 같은 느낌도 난다. 고단하고 궁핍했지만, 그 처연하고 빈 곳을 사랑으로 채우던 가장 ‘따뜻한 시절’에 대한 기억의 모든 것은 오롯이 그림과 엽서에 남아 있다.

 

“사랑스러운 당신이 보고 싶소. 어서 당신의 모든 것을 껴안고 싶은 거요. 나는 몸 성히 잘 있소. 당신의 예쁜 발 사진을 빨리 보내주시오.”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1916-1956》 중에서, 51쪽)

 

오늘은 부부의 날. 정성스런 손길의 발 마사지는 아내의 피로를 단번에 해결하면서도 그동안의 고마움을 표현할 기회가 될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더불어 두 사람의 부부 애정지수도 높아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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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05-22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중섭의 그림 중에 저런 그림이 있었구나.
그 역시 자신과 맞딱트린 장면중에 떠오르는 영감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군.

알렉스가 남자들의 공공의 적이 된 적이 있었군.
우결은 내가 안 봐서 그런가 보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데
여전히 하는 걸 보면 인기 프론가 봐.ㅠ


cyrus 2015-05-23 23:20   좋아요 0 | URL
이중섭의 <발을 치료하는 남자>를 맨 처음 봤을 땐 그냥 발을 어루만지는 남자를 그린 그림인 줄 알았어요. 이 그림에 숨은 사연을 알게 되니까 그림이 좋아보였어요. 이중섭 같은 남자라면 멋지지 않습니까? ^^

우결이 지금도 방영하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해요. 출연진이 바꿀 때마다 우결 인기 다 떨어졌으니 폐지하라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방송하면 시청자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수이 2015-05-24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자네는 발 마사지 엄청 잘해줄듯_
참고로 자네 매형은 발 맛사지 대가다. ㅋ

이거 사고 싶다, 괜히 읽었다 킁킁

cyrus 2015-05-24 15:38   좋아요 1 | URL
귀차니즘만 없다면 매일 마시지 할 자신이 있습니다. ㅋㅋㅋ
 
독한 것들 - 슬프도록 아름다운 독의 진화
정준호.박성웅 외 지음, EBS 미디어 기획 / Mid(엠아이디)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경쟁이 생겼고, 누군가는 패배의 불명예를 안아야만 했다. 하지만 패배자에게도 부활의 가능성만큼은 열려 있는 게 세상살이다. 험한 경쟁일수록 독해야 살아남는다. ‘어떻게든 끝을 보겠다’는 독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흔히 담배를 끊는 사람을 보고 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강한 의지가 있어야 금연은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독하다’라는 표현은 다의어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맛, 냄새를 표현할 때 사용하며(“술이 독하다”) 마음이 성격이 모진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그의 성미가 독하다”).

 

똑같은 물을 마시더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牛飮之爲乳 蛇飮之爲毒)’는 말이 있다. 똑같은 재료라 할지라도 가공과정이나 사용 목적에 따라 그 효과가 천차만별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부정적인 면을 표현할 때 짐승에 비유하곤 한다. 표독스러운 사람은 “독사와 같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RHK, 2007년)를 쓴 심리학자 폴 바비악은 사이코패스를 ‘양복 입은 독사(Snakes In Suits)’라고 비유했다. 지금까지 언급된 사례만 봐도 우리가 독성생물을 악독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라는 말을 과학적 관점으로 따져보면, 이 말은 독사에 관한 잘못된 선입견에서 비롯된 억견(Doxa)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강력하고 무서운 살무사의 독을 추출해 관절염이나 당뇨병 치료제로 만들려는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벌침의 독이 통증이나 염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서 관절염 등의 치료에 쓰인 지는 오래되었다. 동물의 독이건 식물의 독이건 조물주가 만든 독 중에는 독으로만 끝나지 않고 약으로 쓰일 때가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독은 이렇게 독과 약의 양면성을 가진다.

 

TV에 방영한 EBS <다큐프라임> ‘진화의 신비-독’ 편을 책으로 옮긴 《독한 것들》(Mid출판사, 2015년)은 독성생물을 향한 인간의 억견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책이다. 인류가 자연의 독을 사용한 역사는 무척 길다.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독이 있는 동ㆍ식물을 알았으며 이 독으로 사람이나 짐승을 죽이기도, 병든 이를 고치기도 했다. 독 하면 개구리독도 뱀독에 못지않다. 남미에는 독화살개구리가 있는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화살촉을 이 개구리에 문지르면 살상용 독화살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화살개구리와 같은 독성생물은 보통 다른 종들과는 다른 외양을 가지고 있다. 보통의 동물들은 배경 속으로 녹아들어 포식자나 사냥감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는 의태와 보호색을 가지도록 진화했지만, 이들은 자신이 가진 독성을 강렬한 경고색으로 표현한다. 경고색은 두세 가지의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상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자신은 강한 독을 가지고 있으며, 건드리면 위험하다고 색으로 말하고 있다. 독화살 개구리의 경우 경고색의 패턴이 매우 다양하며 무척 화려하다.

 

독성생물의 생태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라는 그들의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을 공격하는 곤충들에게 화상을 입힐 정도의 독성물질을 분비하는 벌레가 있다. 이 벌레는 폭탄먼지벌레라 불린다. 폭탄먼지벌레는 위험이 닥치면 1,2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몸 안의 체액을 급속히 가열, 뿜어낸다. 이 체액의 정체는 히드로퀴논이라는 화학물질과 과산화수소가 섞인 것이다. 생쥐 같은 것이 폭탄먼지벌레에 다가오다 속수무책으로 화상을 입게 된다. 찰스 다윈은 이 폭탄먼지벌레를 관찰하려고 손으로 잡아 입안에 넣었다가 입천장을 온통 데기도 했다. 이처럼 일부 생물은 진화과정에서 독성물질을 발달시켜왔다.

 

하지만 이에 맞서 독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종들도 살아남는다. 더욱 강한 독을 가진 개체들이 유전자를 후대에 전승하고 있을 때, 그들과의 경쟁에 살아남으려고 더 강한 저항력을 이어받은 개체들이 태어난다. 영겁의 레이스가 계속되는 진화의 과정은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의 달리기와 같다. 붉은 여왕은 쉼 없이 뛰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이고 있어 늘 제자리이다. 같은 자리를 지키려고 해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 가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가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환경도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진보가 둔화한다는 진화생물학 이론이 ‘붉은 여왕 효과’이다. 이 ‘붉은 여왕 효과’가 독성생물의 진화 과정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독은 개체 간에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독한’ 게임에 살아남기 위한 생물의 방어 전략이다. 러닝머신(자연)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하듯 독성생물은 진화에 맞서 독성을 키워야 했다.

 

우리에게는 그저 해로운 독성생물들의 삶을 알고 보면 종족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전략일 때가 많다. 자연을 무대로 펼쳐지는 ‘독한’ 생존게임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사실 독성생물들은 자기방어나 생존을 위한 먹이를 잡을 때만 독을 쓰지 함부로 아무 때나 쓰진 않는다. 그러므로 독성생물을 지구상에 사라져야 할 해로운 존재로만 보는 시선을 거둘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은 사람이 만든 독이다. 주방용 세제와 플라스틱 식기류, 식품 포장용 랩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물건에 포함된 환경호르몬은 사람의 몸에 들어가 내분비계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한다. 환경호르몬이 생물체의 몸 안에 들어오면 아주 적은 양으로도 다음 세대의 발육과 성장 및 생식·면역기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앞으로도 인간은 점점 더 독해질 것이다. “인간만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레이첼 카슨의 경고가 지금도 귓전에 울린다.

 

 

 

 

※ 오탈자: 코모도왕도마뱀이 이렇게 몸집이 거대해진 이유는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에 살며 접차 몸집을 불리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7쪽) → '점차'로 바로잡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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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19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침을 쏘면 내장이 빠져 나가 죽는다는 벌처럼, 독을 공격성에 방점을 두기보다 생존과 보호 수단으로 더 이해해야겠죠.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 의 단순화를 잘 지적해 주셨네요.

말씀처럼 인간은 독을 광범위하고 무차별하게 퍼트리고 있지요. 오늘도 후쿠시마 원전으로 인한 아동 갑상선 환자 발생 소식을 들었는데, 체르노빌에서도 갑상선암으로 아이들이 제일 피해를 많이 봤던 걸 생각하면 착찹합니다.
우리나라는 고리원전 재가동 하니 마니, 아무 대책도 없이 저러고 있고....

cyrus 2015-05-21 16:46   좋아요 0 | URL
맞아요. 환경 재난사고도 인류가 만들어 낸 독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 <독한 것들>에서도 아갈마님이 지적하신 내용과 유사한 사례가 나옵니다. 미나마타병이 발생했을 때도 오염된 물을 마시고 사망하거나 불구가 된 아이들이 많았었죠.

지금행복하자 2015-05-20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그게 또 쉬운일이 아니더군요. 독하게 구는 사람들도 보호수단으로 그 독을 사용하는 걸까요? 그렇게 이해해야할까요? 어째든 그 독으로 다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죠~~

이렇게 멋진 리뷰를 쓰시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 생각들어요. 논리적인 글쓰기가 가장 어려워요~ ^^

cyrus 2015-05-21 16:51   좋아요 0 | URL
독한 사람들이 지나치게 독기를 가지게 되면 주변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다치게 됩니다. 저는 <독한 것들>을 읽으면서 ‘독하다’라는 표현을 되도록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가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강인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에게 좋은 의미에서 ‘독하다’라고 표현하고 싶어져요.

제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오늘 쓴 글을 다음 날에 읽어보면, 부족한 게 보이게 되더라고요. 특히 어법이 맞지 않은 문장을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새아의서재 2015-05-20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탈자 지적해주면 책한권 서비스로 주면 좋겠어요. 맨날 꽁책만 바라는... 곧 대머리아줌마 되겠어요.

cyrus 2015-05-21 16:5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오탈자 지적해주면 책 한 권을 받는 일이 흔했다던데 저는 아직까지 뜻밖의 혜택을 받지 못했어요. ㅎㅎㅎ

2015-05-20 0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1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5-20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5-21 16:55   좋아요 0 | URL
답변이 늦었습니다. 고맙습니다. pek님.

2015-05-20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21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5-21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독함 .. 갖고 싶어요.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문학의전당 시인선 28
문인수 지음 / 문학의전당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그리움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게 만드는 마음의 중력이다. 잠시나마 떨어져 있을 땐 기다림이 있고, 그것도 참을 수 없을 때는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다. 목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을 땐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전하면 되고, 속삭이는 감정을 편지에 담아 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고 싶어도 기다려도 볼 수 없는, 느낄 수도 없는 사람이 없다면 그리움이란 더욱 애절하다. 특히 어머니는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이다. 문인수 시인의 제2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는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의 대상들을 한자리에 모아 엮은 소중한 창고와 같다. 그것은 진솔하면서도 견고한 서정으로 드러난다.

 

 

먼 수풀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새들은 왜 건너건너 날아가고 있나요.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에 들여다 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숲 말이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겨울 강변에서」, 13쪽)

 

 

고단한 현실에 저항하는 힘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어머니는 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젖 먹여 인간 되게 키워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불멸의 힘을 가지고 있다. 여러 편의 시에서 어머니는 좌절과 절망 속에 빠진 시인의 자아를 끌어올려 주고 있다. 그녀의 구원으로 인해 시인의 삶은 살아볼 만하다. 삶의 아픔을 치유할 방법을 모성에서 찾는다.

 

 

  오랜만에 고향엘 다녀왔다.

 

  대구에 가면 이런 거 흔하고 흔합니다 헐하고 헐합니다 하고 말렸으나 어머니는, 나도 많이 늙었다 오래는 더 못 살겠다 하시면서, 무우말랭이며 머위나물 매운 풋고추 같은 걸 자꾸 챙겨 주셨다. 이만큼 전송 나오시다가 또 쫓아들어가 다른 거 한 보퉁이 들고 나오셨다.

  무릎 앞에다가 이것들을 끌려놓고 깊이 냄새를 맡는다 어느덧, 여름밤 천지에 가득하고 그윽한 먼 별 빛,

 

  긴 바람의 젖을 물고 나는...

 

 

(「젖」, 20쪽)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아무리 퍼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는 정의 샘물을 가지고 산다.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열정에 타오르기도 한다. 그런 탓에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힘을 잃은 의족이 필요한 자식도 생긴다. 그들은 자신을 지탱해줄 받침목을 잃고서야 넘쳐나는 사랑에 눈을 뜨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슴 속에 외로움의 잡초만 무수히 키우고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도 따뜻한 정감의 눈길 한 번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일을 바쁜 탓으로 돌려 핑계 대고 싶어 한다.

 

고향은 떠나왔기에 그리운 향수의 공간이요, 지금의 나를 만들었기에 풍요로운 서사의 공간이다. 동시에 언젠가는 죽어서 되돌아가야 할 영혼의 귀착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향은 ‘존재의 집’이다. 시인의 가슴 한구석에는 언제나 마음이 되돌아가 안기는 고향이 있고, 시를 통해 그리움으로 글썽이는 희미한 기억들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가을이 되었네.

담쟁이 이파리들이 뚝 뚝 뚝 듣네.

 

고향에게 미안하네.

 

그동안

사방 헤매었던 길들이 그루터기 쪽으로

내게로 다 흘러들면서

나도 이제 지하수처럼 한 줄기 깊이 흐르네

 

밤 어두울수록 이리 눈물 닿아 좋은 곳.

 

 

(「고향에게 미안하네」, 45쪽)

 

 

 

인류는 오랫동안 두 가지 상반된 꿈을 마음속에 품어 왔다.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꿈과 ‘미지의 세계’를 향해 훌쩍 떠나고자 하는 꿈이 있다. 전자가 없다면 방랑과 방황에 지쳐 길을 잃게 될 것이며, 후자가 없다면 현실에 안주한 채 무기력한 삶을 지속하게 될지도 모른다. 고향과 미지의 세계를 향한 갈망은 우리 삶에 팽팽한 긴장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긴장을 잃어버렸다. 삶이 지속하는 한 사유의 항해도 지속하여야 한다.

 

  길이 막히거든 노숙을 해봐라.

 

  달빛 아래

  나무의 낯선낯선 이파리들이 눈앞을 저어 가면서 가장 먼 별들이 귓전으로 가슴으로 스며 내리면서 풀벌레 소리들 번져 에워싸면서

  그대 겨드랑이에다가 하염없이 짜넣는

  그 달빛이 무엇이 되는지

 

  팔 벌리고 누우면 허수아비 같고

  돌아누우면 좀 춥고

  몸 웅크리면 섬같이 되어서

 

  날고 싶을 것이다.

 

  달빛 아래

  그 어디로 길이 열리는지

  먼 타관으로 가서 노숙을 해봐라.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 81쪽)

 

 

사유의 항해 끝에는 늘 집, 고향이 있고,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로 돌아간다. 그래서 노숙은 종국에는 회귀의 과정으로 귀결된다. 깊고 따뜻한 대상에의 시선과 쉽고 편한 언어로 맑고 순하게 써내려간 시들은 편편이 흘러내리며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고 정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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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17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즈넉한 일요일 저녁에 가만히 읽을수록 참 좋군요. 시도 님의 리뷰도. 담아갑니다. ^^

cyrus 2015-05-18 22:33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오늘 헌책방에서 우연히 만난 책이다. 책 제목을 본 순간, 프루스트의 소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이었다. ‘한국출판공사’에서 나온, 꽤 오래된 책이다. 출판 연도가 1984년이다. 모디아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책 제목이 생소할 것이다. 알라딘에 ‘모디아노’를 검색하면 모디아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이 나오지 않는다. 모디아노의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나도 이 소설의 정체가 궁금했다. 절판되어서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모디아노의 번역 작품일까, 아니면 현재 새 출판사에서 재출간된 작품일까? 책 앞표지와 뒷표지에 작품 원제를 알 수 있는 힌트가 있다. 앞표지에 있는 '프랑스 콩쿠르상 수상작'이라는 문구, 뒷표지에는 'Rue Des Boutiques Obscures'라는 작품 원제가 보인다.

 

이 작품은 9년 뒤에 새로운 제목으로 재출간되지만, 다시 한 번 절판의 운명을 맞는다. 다시 독자들 앞으로 나오는 데 걸린 시간은 무려 14년이나 되었다. 예전보다 높아진 작가의 인지도 덕분에 이 작품은 당당히 대형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었다. 프랑스어를 능통한 독자라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어떤 작품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작품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로 알고 있다. 이 소설로 모디아노는 1978년에 콩쿠르 상을 받았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국내에 첫 선을 보인 모디아노 작품의 번역본이 아니다. 1978년에 청산이라는 출판사가 ‘어두운 상점 거리’라는 제목으로 번역본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 때 당시만 해도 모디아노는 우리나라에 생소한 프랑스 작가였을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의 눈에 잘 띄려고 프루스트의 대표작 이름을 그대로 따와서 책 제목을 정했을 거라고 생각된다. 나처럼 이 책을 프루스트의 소설인 줄 알고 집었다가 낭패를 본 독자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그랬던 이 작품의 작가가 작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을 줄 누가 알았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살까 말까 고민했다. 모디아노의 절판본을 헌책방에서 만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다. 21년 전에 나온 책이라서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읽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든가 모디아노의 소설을 한 권이라도 읽었더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샀을 텐데. 일단 다음에 올 때 사기로 다짐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원래 책장에 꽂았다. 이 귀한 책을 모디아노를 좋아하는 독자의 손으로 갔으면 좋겠다. 

 

 

 

 

 

알라딘 중고샵에 ‘모디아노’를 검색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1978년에 나온 《어두운 상점 거리》가 판매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격은 무난하다. 《가족 수첩》이라는 제목의 모디아노의 소설의 중고 가격이 5만 원이다. 김화영 교수가 번역했는데 작품 원제가 ‘Livret de famille’다. 생소한 제목과 역자의 이름에 혹해서 배송비를 얹은 5만 2천 500원을 지불하면서까지 구입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책은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문학동네, 2015)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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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1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중고책 팔 때 알라딘에서 책정하는 가격으로 팔아야하는 줄 알고 그대로 올렸다가 상당히 고가였던 절판책들을 헐값에 넘겼던 일이 생각납니다ㅎ
골동품, 미술품 다 판매자 재량이란 걸 감안한다면 희귀본 책도 고가인 걸 마냥 나무랄 수도 없다고 봅니다. 구매를 하는 사람에게 선택권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요즘 알라딘 자체 중고판매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중고 판매자에게는 신간 10% 이하로 팔면 안된다고 법적 처벌 등 엄포를 놓으면서 자기들은 30~40% 이하로 팔더군요. 어제 받은 책은 심지어 <출판사 드림>책이던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인 제가 시시콜콜 따지기 벅찬 일이 너무 많아요...구매자들이야 어찌 되었든 싸면 좋은거니 굳이 따지지도 않을 것이고...

cyrus 2015-05-17 21:02   좋아요 0 | URL
알라딘 중고매장에 책을 팔 때 절판본이 고가에 매기는 귀한 책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알라딘 중고샵에 3만 원 이상 되는 절판본이 운 좋게 중고매장에서 만 원 이하로 매겨져서 파는 경우가 있어요. 헌책방에 책을 팔 때도 그렇고, 중고 가격을 책정할 때가 판매자나 매입자 사이에 얼굴을 붉힐 수 있는, 민감한 부분이에요.

AgalmA 2015-05-17 21:09   좋아요 0 | URL
네. 반대급부로 고가의 책인데, 알라딘 중고매장측에서 그걸 파악못하고 넘기는 예도 많죠.
도서정가제로 중고시장도 더욱 복잡한 양상입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5-18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어두운 상점의 거리. 좋아하는 소설인데~~

처음 십여년전에 출간된것이 처음이 아니었군요~ 제목이 달라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몰랐을것도 같아요.
그 제목과 내용이 전혀 상관없지는 않아 보여요~~ ㅎㅎ
뭔가 신기해요~~

cyrus 2015-05-18 22:35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을 처음 봤을 때 신기했어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5-05-18 0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가의 중고책`은 그냥 원하는 사람에게 줍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몇 번 그렇게 되었네요. 제가 가지고 있는 책 중 원가의10배가 훌쩍 넘는 책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 가격에 거래가 되고 말이죠. 누군가가 저에게 쪽지를 남겼더라고요. 그 가격에 팔라고.. 꼭 필요한 책이라고...

그 쪽지 보고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사람 한테 이 책은 진짜 귀한 책이겠구나. 나는 딱 한 번 읽고 읽지도 않는 책인데 말이야... 그래서 무료로 그냥 줬습니다. 제가 장사 체질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사를 하고 있으니.. 시바...

cyrus 2015-05-18 22:42   좋아요 0 | URL
저도 엄청 책을 좋아하는 성격인데도 원가의 10배 되는 가격의 책은 살 엄두가 나지 않아요. 아직까지는 거금을 낼 수준의 애서가가 아닌 것 같아요.. ^^;;

stella.K 2015-05-18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파트릭 모디아노가 생각 보다 더 오래 전에 울나라에 알려졌네.
난 한 90년대쯤이 아닌가 했는데 말야.

제목은 뭐 꼭 그 작가의 대표성을 지니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워낙에 프루스트가 유명한 작가라 그의 작품을 그대로 차용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텐데 파트릭은 그냥 썼나 보구만.
결국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됐으니 사람은 역시 원대한 포부를 가져야 크게
되는 법인가 봐.ㅋㅋ

cyrus 2015-05-18 22:4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90년대부터 나온 줄 알았어요. 가끔 헌책방에서 책을 구경하면 책의 역사를 추적하게 되요. ^^

에이바 2015-05-21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얼른 저 책을 읽고 모디아노가 던지는 진실의 돌멩이에 맞아야겠습니다. ^^; 원제는 어딜 봐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인데요. 기억상실증을 앓는 탐정이 주인공이라 저 멋진 제목을 함께 붙인 듯 하네요. 프루스트 작품 제목이 직관적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참 멋지군요.

cyrus 2015-05-21 20:52   좋아요 0 | URL
제가 불어를 몰라서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원제를 해석했어요. ㅎㅎㅎ
 

 

 

 

 

 

 

 

 

 

 

 

 

 

 

 

 

 

 

 

제임스 조이스는 소설을 발표하기 전에 서평을 쓴 적이 있다. 한 번은 ‘아카데미’라는 잡지의 편집장 루이스 하인드로부터 서평 청탁을 받았다. 하인드는 조이스에게 서평 도서 한 권을 주었고, 칭찬 일색의 서평을 기대했다. 그러나 하인드의 예상과는 달리 조이스는 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 내용의 서평을 작성했다. 조이스가 악평을 내놓자 하인드는 불평했다. 이런 식의 서평을 쓰면 앞으로도 잡지에 서평을 게재할 수 없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글쓰기로 밥벌이하는 조이스를 궁지에 몰아넣는 협박이었다. 그렇지만 조이스는 편집장의 협박 앞에서 기가 눌릴 사람이 아니다. 편집장에게 자신이 악평을 쓴 이유를 알려줬다. 그는 자신의 역할이 책 속에 발견한 미적 가치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워드가 건네준 책에는 미적 가치라고 할 수 없는 내용이 없어서 쓰레기통에 쳐 넣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조이스는 평생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진정한 ‘개썅마이웨이’였다. 자신이 쓰고 싶은 글에 대한 기준이 확고했다.

 

사실 조이스가 생각하는 서평 작성의 기준은 애매모호하다. 왜냐하면, 조이스가 생각하는 ‘미적 가치’가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적 가치’라는 단어 안에는 조이스 스스로 부여한 주관적인 가치가 내포되어 있어서 하인드처럼 조이스의 악평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조이스는 서평을 쓸 줄 아는 사람인 건 분명하다. 그는 서평을 읽는 독자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또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 독자가 서평을 읽음으로써 얻게 되는 지식은 문장에 난삽하게 버무려 놓은 서평가의 지식이 아니다.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책 속의 메시지야말로 진짜 책 속에 있는 지식이다. 서평은 독자 앞에 열려 있는 문이다. 독자가 이 문을 여는 순간, 책의 텍스트에 도달한다. 즉, 내가 생각하는 좋은 서평이란 독자가 이 책을 읽게 싶게끔 초대하는 친절한 문이 되어야 한다. 현학적 수사를 남발하면서 얄팍한 지식을 뽐내려는 서평은 독자가 열 수 없는 문이다. 독자가 아무리 열심히 힘(서평 내용을 이해하려는 생각)을 줘도 지식으로 완전 무장한 문장의 자물쇠를 손쉽게 풀지 못한다. 독자는 서평가의 현학적 탐구열과 지적 수준이 묻어난 서평을 긍정적으로 동의할 수도 있다. 한 편의 멋진 서평이라고 칭찬한다. 그렇지만 정작 서평에서 얻어야 할 진짜 지식은 발견하지 못한다. 그냥 잘 쓴 서평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내용을 거의 다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서평이 단순한 요약에 가까운 북 다이제스트와 동등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줄거리만 요약한 서평은 책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책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단점을 꼽자면, 독자가 북 다이제스트 같은 서평을 읽게 되면 서평 도서를 읽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책의 미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서평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다. 하늘에 있는 조이스가 어떻게 마음에 들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책의 미적 가치란 독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 냄새’ 나는 진솔한 내용이다. 독일의 소설가 마르틴 발저는 책이 독자의 인생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면 단지 종이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독자는 책 속에서 우리가 경험했던 인생의 체취를 맡고, 아픔과 불안을 느낀다. 발저는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책의 철자가 만들어 내는 고유한 색깔이라고 비유한다. 과장되지 않되 진솔한 인생의 감동을 고이 간직하는 책이 훌륭하며, 그 책의 장점을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서평 또한 훌륭하다. 독자는 책의 장점을 직접 느끼려면 그 책을 읽어봐야 한다. 그러면 독자도 책의 미적 가치를 공감할 수 있다. 내가 지금까지 쓴 서평이나 책에 관한 잡문은 책의 미적 가치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고, 현학적 자기도취에 빠진 딜레당트의 한계가 드러나 있다. 부족한 내용의 서평을 좋아하는 사람은 봤지만, 부족한 내용의 서평을 제대로 꼬집은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다. 후자는 서평을 제대로 읽는 사람이다. 서평가가 만든 문을 열고 책 속의 세계를 확인한다. 서평에 소개되는 미적 가치에 공감하여 그 책을 직접 읽어봤을 것이고, 더 나아가 책에 대한 서평가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

 

 

 

 

 

그러니 독자들이여, 서평가가 만든 문을 여시오. 여보세요, 지금 제 글에 ‘좋아요’를 누르신 분! 오늘 하루를 그냥 좋은 서평에 ‘좋아요’만 누르지 말고 서평도서를 읽어보시오. 책의 미적 가치를 느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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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05-15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 냄새가 나는 글.... 가장 쓰기 어려운 글 입니다.

cyrus 2015-05-16 21: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가장 쓰기 어렵고, 만나기 쉽지 않은 글이죠.

수이 2015-05-16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은 글도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지만 인간의 한계가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특히 북플을 시작하면서 말이죠 ㅋㅋ 푹 찔리고 돌아갑니다~~

cyrus 2015-05-16 21:5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ㅎㅎㅎ

fledgling 2015-05-16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 전집 사주세요! ^^

cyrus 2015-05-16 21:56   좋아요 0 | URL
너무 비싸요 ㅋㅋㅋ

sslmo 2015-05-16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그래 `좋아요`만 누르려다가 댓글 남겨요~ㅅ.
전 서평도서 종종 읽는데, 제겐 북플도 죽음이지만 이곳 알라디너들도 그렇고, 서평도서들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이 완전 지름신이걸랑요~^^
책으로 탑쌓기 대회 같은거 개최하면 전 분명 수상권 안에 들 자신 있습니다~!

cyrus 2015-05-16 21:58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좋은 서평을 만나면 그 서평도서를 안 읽어요. 그래도 제가 읽었던 책의 서평을 만나면 꼼꼼하게 읽습니다. 저는 알라딘 대구점 구매왕 이벤트를 하면 수상권 안에 들 자신이 있습니다. ^^

stella.K 2015-05-16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마지막 말이 참...!
요즘 서평집이 그 어느 때 보다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잖아.
그런데 그 책은 읽지 않으면서 서평책만 읽는 오류에 빠질까 봐
그것도 경계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긴 하더라구.
그런데 또 그런 서평을 읽으면 그 책을 읽는데 도움은 되더라구.

니가 너의 서평글에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하니? 나는 어쩌라구...ㅠ
나는 점점 서평을 못 쓰나 봐.
좋아요도 그렇게 많지도 않고 최근엔 당선작이 돼 본적이 없고
이젠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더라구.
어떤 땐 그놈의 좋아요가 은근 적극적으로 비교의식을 부추기고 있잖아.
늪이고 양날의 칼이란 생각이 든다.ㅠ

cyrus 2015-05-16 22:10   좋아요 0 | URL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읽은 서평집이 로쟈님 책뿐이에요, 최근에 나온 <정희진처럼 읽기>나 <집 나간 책>은 안 읽어봤어요. 북플에 접속하면 이웃들이 쓴 서평 수십 편 이상은 읽으니까 서평집 읽을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여기 알라딘에서도 서평을 잘 쓰시는 분들이 많으니까요. ‘좋아요’ 수, 댓글 달린 수, 블로그 조회수가 적다고해서 블로거가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 글에 ‘좋아요’ 수가 많은 것은 제가 다른 이웃 블로그에 남긴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아서 그래요. 저는 제 블로그에 댓글을 달거나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웃의 글에도 ‘좋아요’를 눌러줘요. 일종의 호혜성 이타주의적 관계예요. 거기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단발머리 2015-05-16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이 너무 좋은대요~~*^^* 좋은 서평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구요~ 저도 cyrus님 의견에 적극 공감해요.
좋은 서평이란 결국 그 책을 읽게끔, 사게끔 이끌어 줘야한다고 말이지요.
저같은 경우는 책이 궁금해서 서평을 읽는 경우도 많지만, 서평을 쓴 사람의 생각이 궁금해서 읽는 경우도 많거든요. 저도 `사람 냄새`를 중요시하는 사람인가봐요~~~ㅋㅎ

cyrus 2015-05-16 22:14   좋아요 0 | URL
책에 대한 서평가의 생각이나 느낌이 진솔하게 나타나면 책을 읽어보고 싶어져요. 단발머리님의 말씀처럼 서평가의 생각이 궁금하게 되고, 만약에 책을 읽어서 서평에 언급했던 서평가의 생각에 공감하면 책을 잘 읽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러면 좋은 책을 소개해준 서평가에게 고마운 생각이 들어요. 줄거리만 있는 서평은 영혼 없는 글 같습니다.

에이바 2015-05-2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저도 서평이라고 쓰곤 있지만 어떤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어떤 책은 느낌만, 어떤 책은 줄거리부터 구구절절 샅샅이 훑어가며 늘어놓게 되는데요. 정보제공이란 목적에 어긋나잖아요. 너무 길게 쓰면... 아무래도 애정의 차이인 듯 해요. 생각해보면 제가 쓰는 글은 다른 이들에게 좋은 책을 소개하려는 목적도 있지만 제 즐거움을 위한 거라 그런가봐요.

cyrus 2015-05-21 20:57   좋아요 0 | URL
줄거리만 쓰는 서평은 장단점이 뚜렷해요. 책의 핵심 내용을 원하는 독자가 읽으면 좋지만, 단점이 출판사 서평에 소개된 줄거리 위주로 썼다면 독자서평을 쓰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저도 배우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불특정 다수 독자에게 좋은 책을 알리고 싶은데 이 두 가지 장점을 균형 있게 맞추는 게 쉽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