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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것들 - 슬프도록 아름다운 독의 진화
정준호.박성웅 외 지음, EBS 미디어 기획 / Mid(엠아이디)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경쟁이 생겼고, 누군가는 패배의 불명예를 안아야만 했다. 하지만 패배자에게도 부활의 가능성만큼은 열려 있는 게 세상살이다. 험한 경쟁일수록 독해야 살아남는다. ‘어떻게든 끝을 보겠다’는 독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흔히 담배를 끊는 사람을 보고 독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강한 의지가 있어야 금연은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독하다’라는 표현은 다의어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맛, 냄새를 표현할 때 사용하며(“술이 독하다”) 마음이 성격이 모진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그의 성미가 독하다”).
똑같은 물을 마시더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牛飮之爲乳 蛇飮之爲毒)’는 말이 있다. 똑같은 재료라 할지라도 가공과정이나 사용 목적에 따라 그 효과가 천차만별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부정적인 면을 표현할 때 짐승에 비유하곤 한다. 표독스러운 사람은 “독사와 같다”고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직장으로 간 사이코패스》(RHK, 2007년)를 쓴 심리학자 폴 바비악은 사이코패스를 ‘양복 입은 독사(Snakes In Suits)’라고 비유했다. 지금까지 언급된 사례만 봐도 우리가 독성생물을 악독한 존재로 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가 마시면 우유가 되고, 독사가 마시면 독이 된다’라는 말을 과학적 관점으로 따져보면, 이 말은 독사에 관한 잘못된 선입견에서 비롯된 억견(Doxa)이다. 과학자들은 이미 강력하고 무서운 살무사의 독을 추출해 관절염이나 당뇨병 치료제로 만들려는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벌침의 독이 통증이나 염증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서 관절염 등의 치료에 쓰인 지는 오래되었다. 동물의 독이건 식물의 독이건 조물주가 만든 독 중에는 독으로만 끝나지 않고 약으로 쓰일 때가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독은 이렇게 독과 약의 양면성을 가진다.
TV에 방영한 EBS <다큐프라임> ‘진화의 신비-독’ 편을 책으로 옮긴 《독한 것들》(Mid출판사, 2015년)은 독성생물을 향한 인간의 억견을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되는 유용한 책이다. 인류가 자연의 독을 사용한 역사는 무척 길다. 오랜 옛날부터 인간은 독이 있는 동ㆍ식물을 알았으며 이 독으로 사람이나 짐승을 죽이기도, 병든 이를 고치기도 했다. 독 하면 개구리독도 뱀독에 못지않다. 남미에는 독화살개구리가 있는데,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화살촉을 이 개구리에 문지르면 살상용 독화살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독화살개구리와 같은 독성생물은 보통 다른 종들과는 다른 외양을 가지고 있다. 보통의 동물들은 배경 속으로 녹아들어 포식자나 사냥감의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는 의태와 보호색을 가지도록 진화했지만, 이들은 자신이 가진 독성을 강렬한 경고색으로 표현한다. 경고색은 두세 가지의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상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자신은 강한 독을 가지고 있으며, 건드리면 위험하다고 색으로 말하고 있다. 독화살 개구리의 경우 경고색의 패턴이 매우 다양하며 무척 화려하다.
독성생물의 생태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라는 그들의 강인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신을 공격하는 곤충들에게 화상을 입힐 정도의 독성물질을 분비하는 벌레가 있다. 이 벌레는 폭탄먼지벌레라 불린다. 폭탄먼지벌레는 위험이 닥치면 1,2초라는 아주 짧은 시간에 몸 안의 체액을 급속히 가열, 뿜어낸다. 이 체액의 정체는 히드로퀴논이라는 화학물질과 과산화수소가 섞인 것이다. 생쥐 같은 것이 폭탄먼지벌레에 다가오다 속수무책으로 화상을 입게 된다. 찰스 다윈은 이 폭탄먼지벌레를 관찰하려고 손으로 잡아 입안에 넣었다가 입천장을 온통 데기도 했다. 이처럼 일부 생물은 진화과정에서 독성물질을 발달시켜왔다.
하지만 이에 맞서 독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종들도 살아남는다. 더욱 강한 독을 가진 개체들이 유전자를 후대에 전승하고 있을 때, 그들과의 경쟁에 살아남으려고 더 강한 저항력을 이어받은 개체들이 태어난다. 영겁의 레이스가 계속되는 진화의 과정은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의 달리기와 같다. 붉은 여왕은 쉼 없이 뛰지만, 주변의 모든 것이 함께 움직이고 있어 늘 제자리이다. 같은 자리를 지키려고 해도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다른 곳에 가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가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환경도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진보가 둔화한다는 진화생물학 이론이 ‘붉은 여왕 효과’이다. 이 ‘붉은 여왕 효과’가 독성생물의 진화 과정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독은 개체 간에 벌어지는 쫓고 쫓기는 ‘독한’ 게임에 살아남기 위한 생물의 방어 전략이다. 러닝머신(자연)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계속 달려야 하듯 독성생물은 진화에 맞서 독성을 키워야 했다.
우리에게는 그저 해로운 독성생물들의 삶을 알고 보면 종족을 유지하고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전략일 때가 많다. 자연을 무대로 펼쳐지는 ‘독한’ 생존게임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사실 독성생물들은 자기방어나 생존을 위한 먹이를 잡을 때만 독을 쓰지 함부로 아무 때나 쓰진 않는다. 그러므로 독성생물을 지구상에 사라져야 할 해로운 존재로만 보는 시선을 거둘 필요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독은 사람이 만든 독이다. 주방용 세제와 플라스틱 식기류, 식품 포장용 랩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물건에 포함된 환경호르몬은 사람의 몸에 들어가 내분비계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한다. 환경호르몬이 생물체의 몸 안에 들어오면 아주 적은 양으로도 다음 세대의 발육과 성장 및 생식·면역기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앞으로도 인간은 점점 더 독해질 것이다. “인간만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는 레이첼 카슨의 경고가 지금도 귓전에 울린다.
※ 오탈자: 코모도왕도마뱀이 이렇게 몸집이 거대해진 이유는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에 살며 접차 몸집을 불리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7쪽) → '점차'로 바로잡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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